본문 바로가기

영성/묵방도담

계사송년 묵방도담 2편

계사송년 묵방도담

 

送年 默芳道談

 

<2편>

 

 

2013. 12. 18~19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225호)

 

형태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사당

 

정면 1칸, 측면 2칸의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180호. 처마는 부연(浮椽: 처마 끝에 덧 얹어진 짤막한 서까래)이 있는 겹처마이고,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한벌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주좌(柱坐)를 쇠시리(두 골이 나게 함)한 고격(古格)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평방(平枋)을 놓았으며,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는 물론 기둥 사이 평방 위에도 놓아 다포식을 이루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외2출목(外二出目)·내2출목(內二出目)으로 살미첨차[山彌檐遮]는 초제공(初諸貢)이나 2제공(二諸貢) 모두에서 그 끝이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교두형(翹頭形: 圓弧形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되어 있어, 조선 초기의 다포식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정면에는 여섯짝의 띠살창호를 달고, 양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체로 마감하였는데, 측면의 한칸만은 외짝의 정자살문을 달아 따로 출입구를 만들어놓았다. 건물의 평면에서는 소규모의 건축물인만큼 앞뒷면을 각각 1칸식으로 처리하여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대들보를 볼 수 없는 것이 이 건물의 특색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수령 약 500년 향나무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1379년(우왕 5)에 건립. 전체높이 212㎝, 비신높이 121㎝, 너비 61㎝. 보물 제229호. 지대석과 3단의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는데 상단의 대석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양옆에 화강암기둥을 세워 보강하고, 그 위에 목조건물의 공포와 기왓골을 조각한 옥개석을 얹었다. 신라시대 이래로 귀부와 이수를 갖춘 일반화된 석비형식이 고려 말기에는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비가 고려 말기의 석비형식을 잘 보여준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교양종의 통합운동을 통해 불교재건에 힘쓰던 명승으로, 1376년 새로운 유교세력과의 미묘한 정세로 양주 회암사(檜巖寺) 주지로 있다가 왕명에 따라 밀양 영원사(塋原寺)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그의 문도들이 그의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종비를 세웠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목은 이색(李穡)이 짓고 명서가인 한수(韓脩)가 썼다. 글씨는 자경(字徑) 2㎝ 정도의 해서로 넉넉한 짜임새와 부드러운 필획이면서 흐트러짐이 없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보물 228호)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 : 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

 

 

 

 

 

 

 

 

 

 

 

 비석, 석등, 승탑이 한 평면에 세워진 것은 나옹선사의 예가 처음이라고.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

 

높이 1.94m. 보물 제231호. 고려시대 석등 중 우아한 형태와 장식성이 돋보이는 우수한 작품이다. 석조부도(石造浮屠)의 형식을 모방한 석등으로서, 상대(上臺)·하대(下臺)의 명확한 구별이 없이 한 돌로 구성된 점은 석등이 형식화되는 시대적 추이를 짐작하게 한다.

8각의 지대석 위로 8각의 하대와 복엽복판(複葉覆瓣)의 연꽃을 매우 두껍고 도식적으로 장식하였다. 간주석(竿柱石)은 짧아져 마치 석조부도의 중대(中臺)와 유사하며, 모서리마다 난간형(欄干形)을 장식하였다. 또한, 그 사이 면에는 안상(眼象)과 중앙 화문(花文)을 낮게 부조(浮彫)하였다. 상대는 하대의 연판과 동일한 복엽앙련(複葉仰蓮)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 한단의 낮은 층급과 다시 턱이 높은 층급을 만들어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을 받쳤다. 이러한 기단 형식은 보림사서부도(寶林寺西浮屠, 보물 제156호)의 기단과 매우 흡사하여 주목된다. 상대 위에는 화사석 받침의 표현이 전혀 없이 바로 화사석을 얹어놓았다. 이 화사석은 기타의 부재와 달리 그 재질이 화강암이 아니고, 납석제(蠟石製)인 점이 특이하다. 8면의 면마다 상부를 꽃모양으로 장식한 화창(火窓)을 뚫었고, 각 면의 모서리에는 돌출된 원형기둥과 율동적 형태의 용을 고부조(高浮彫)하였다. 화사석 상부면에도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조각하고 그 아래 기둥 사이 면마다 하강하는 듯한 비천상(飛天像)을 고부조로 장식하였다.

 

 

 

이와 같이 화사석을 납석제로 만들었기 때문에, 섬세한 고부조 장식을 표현하기가 더욱 용이하였다고 생각된다. 화사석 위로는 전각(轉角)이 두꺼운 옥개(屋蓋)가 올려져 있는데, 기왓골의 표현이 없이 각 면의 합각에 우동(隅棟: 옥개석의 귀마루)만을 둥글게 돌출시켰다.

옥개와 한 돌로 이루어진 상부면 중앙에는 복발형(覆鉢形) 장식을 표현하였으며, 그 위로는 2단의 층급을 이룬 뒤 연봉형의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다. 전체적으로 크기가 작으면서도 각 부의 구성이 안정감 있고, 특히 화사석의 화려한 장식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서 고려 말기의 석등형식을 대변하여 주는 귀중한 예이다. 조성연대는 보제존자가 신륵사에서 입적한 뒤 부도를 세웠던 1397년에 함께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보제존자 석종 비문 내용

 

오호라!

눈병이 나면 허공에서 꽃이 보이지만 그것은 본래 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병 때문인 것이다.

(...)

(인간에게는 생生, 노老, 병病, 사死의 사상四相이 있듯이) 이 세계에는 성(成,이루어짐).

주(住, 머무름), 괴(壞,무너짐). 공(空, 사라짐)의 변천이 있지만 우리들의 인성(人性)은 영원히 불변한 것이다.

보제존자의 사리가 장차 세계와 더불어 성(性). 주(住). 괴(壞). 공(空)의 변천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인성과 같이 불변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는 비록 우부(愚夫)와 우부(愚婦)일지라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세에 이 사리에 존경을 보내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보제존자의 고상한 도풍을 흠모하고 귀의하여 그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보제존자가 세상에 끼친 큰 은혜에 보답함이 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보제의 도덕은 보제에게만 필요한 것이지 결코 우리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솔숲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조사당

 

 

 

 

여주 신륵사 원구형 석조승탑 

 (경기도 문화재 자료)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서편 언덕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부도(石造浮屠) 중 원구형 부도이다. 이 원구형 탑신(塔身)의 부도는 간략하고 폭이 좁은 기단, 도식적인 연화문 등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연주문 받침 위에 보주를 두른 삼단형으로 구성된 상륜부가 있다. 상륜부 아래 지붕에는 연잎을 얹어 표현하였다. 기와골은 선명하게 나타내고 4개는 번갈아가며 용머리를 표현하였다.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을 마련한 기단부는 조각이 둔중하다. 편평한 상대석 위에는 형식적인 연꽃을 모각하였다. 팔각의 중대석에는 2단으로 나누어 연주문형 기둥을 마련하였다.

 

팔각 원당형 석조승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본래는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 있었다고 하는데, 1966년 11월 17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평면 팔각의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차례로 중첩하였다. 지대석의 하대석은 일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대석에는 8판 복엽의 복련(覆蓮)을 조식했다. 중대석은 낮은 원통형으로 조성되었는데, 표면에는 아무 조식이 없다. 상대석에는 8판의 앙련을 조식했다. 탑신부 역시 평면 8각의 형태로 문비형을 새기고 범자(梵字)를 양각했다. 옥개석의 하면은 편평하게 처리하였고, 두툼하게 조성한 기와골의 끝에는 큼직한 귀꽃을 배치했다. 상면에는 복발, 보륜, 보주가 차례로 놓여있어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중 보주는 앞서 살펴 본 보제존자석종의 그것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석종의 상륜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도에서는 이전 시 사리합이 수습되어 있다.

사리합은 뚜껑과 몸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측면에서 상·하에 이르는 면은 둥글게 처리하고 뚜껑의 상면에 이르는 부분은 약간의 경사를 두어 상면이 약간 불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앙에는 큼직한 국화문을 백상감(白象嵌)하고 이를 중심으로 2중 원문으로 전체 면을 3등분 한 후 연주(蓮珠), 연화(蓮花), 우점(雨點), 중권문(重圈紋) 등을 흑상감(黑象嵌)하였다. 측면은 음각선으로 2등분 한 후 상면에는 거치형(鋸齒形)의 국화문을 하면에는 완자문을 새겼다. 합의 하면에는 죽절(竹節)굽을 두었는데, 구연부로부터 완자문, 국화문, 연화문대를 흑백상감(黑白象嵌) 기법으로 새겼다. 이 같은 문양 중 상·하면의 연화문 내에는 2∼3점의 백색상감을 찍었다. 전체적으로 연회색을 머금은 청자유를 시유(施釉)했는데, 미세한 빙열이 있다. 뚜껑과 합의 일부에서는 시유상태가 불량함을 볼 수 있다. 이 사리합은 부도의 하부와 상대석의 중간에서 수습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형상은 알 수 없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1392년을 전후 십 수 년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

 

 

 

 

 

 

 

 

 

 

 

 

 

  명부전

 

 

 

 

봉송각(奉送閣)

 

 

 

 

 

 

 

 

 

 

 

 

 

 

적묵당 굴뚝의 해학

 

 

 

 

산신도

 

 

 

 

 

 

 

 

 

 

 

 

 

 

 

 

 

 

 

*******************************************************************************************

 

 

 

 

금번 '계사송년 묵방도담'은 평소와 달리 주제를 생략한,

말 그대로 회원님들의 안부와 용안을 살피기 위한 '송구영신'의 자리였습니다.

 

여러 회원님 제위의 다사다난 가운데 그 무엇보다  큰 기쁨은,

 전택원 박사님의 강건하심을 두 눈으로 직접 뵙고 확인 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려운 병환을 단호히 물리치시고, 예의 우렁한 음성을 거침없이 토해내시는 모습.

감동을 넘어 도담 회원 모두에게 큰 교훈과 용기를 선물 해 주셨습니다.

 

도인 여러분,  며칠 남지 않은 계사년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 하시고

갑오년엔 더욱 더 건강한 모습으로 도담의 장에서 뵈올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참석자

 (무순, 존칭생략)

 

순우 전택원 / 현산 박흥덕 / 봄날 송순현 / 동연 백규서 / 일포 이우원

정심 변주원 / 신원 스님 /  청학서당 훈장 서재옥 / 석전 신영철

조옥경 교수 / 법린 석갑주 / 일여 양진숙 / 무경 최재일 / 다천 김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