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묵방도담

계사송년 묵방도담 1편

계사송년 묵방도담

癸巳送年 默芳道談 

 

<1편>

 

 

2013. 12. 18~19

 

 청학서당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이평리

 www.chunghakseodang.co.kr

 

 

 

 

 

 

 

 

 도

 

일정 협의 후 곧장 펼쳐진 도담의 장.

일성의 주인공은 순우당 전택원 박사님.

 

 

 

만찬장에서...

 

 

 

 

 

언제나 처럼 ,

 우렁한 목소리로 환영송을 불러 주시는 전택원 박사님.

 

 

 

 

계사송년 묵방道興의 현장 

 

 

 

 

 

 

 

 

 

 

 

이튿 날 아침 풍경

 

 

 

 

 

 

 

 

 

 

 

 

 

 

 

 

 

 

 

 

 

 

 

일포 선생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ㅎ

 

 

 

 

 

기연 선생님의 축하 쏭~~ ♬

 

 

 

 

 

여주 신륵사 답사에 나선 도담일행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 주신 해설사님의 인사

 

 

 

 

 

해설사님의 고마운 마음씨에 감격하야, 얻을 得에 통할 達

 득달(得達)님 이라는 아호를 선물 할까 하는데 어찌꼼 생각 허시는지... ? ㅎ

 

 

 

 

신륵사 은행나무 유래에 대하여...

 

 

 

 

일주문을 지나 신륵사로 들어가는 도중 다층전탑 아래에 있다.

고려 말의 고승 혜근(惠勤, 1320 ~ 1376)이 입적하기 전 꽂아 놓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신륵사와 역사를 같이한 희귀 수목으로 1982년 10월 15일 신륵사 향나무와 함께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600년으로 은행이 열리지 않는 숫木이다.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226호)

 

 

 

 

전탑의 당초 문양

 

 

 

 

 

 

 

 

 

신륵사 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

 

높이 1.33m. 보물 제230호. 신륵사에는 원래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말의 이색(李穡)과 승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경률론(經律論)』을 인출(印出), 수장하던 집이었고,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여러 가지를 기록한 석비이다. 동국여지승람』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신륵사의 딴 이름은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甓寺)라는 것과 나옹이 일진당(日眞堂)을 세우고 대장각이 있었음이 나타나 있다. 즉, 이색은 선왕 현릉(玄陵)의 자복(資福)과 아버지 이곡(李穀) 및 어머니의 추복(追福)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 이숭인(李崇仁)에게 명하여 1380년(우왕 6) 2월부터 만들게 하였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장방형 복련대석(覆蓮臺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생략되어 있고, 비신(碑身)의 보전을 위하여 신부(身部) 양쪽을 돌기둥으로 단단히 지탱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각형식은 조선시대 석비조형의 한 형식이 되었다. 비문은 자경 2㎝의 해서로서, 직제학 권주(權鑄)의 글씨이다. 권주의 글씨에 대하여『서청(書鯖)』에는 ‘太古庵碑字 類虞永興(태고암비자 유우영흥)’이라 하였다. 현재 신부 문면(文面)은 크게 파손되어 있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으나, 비음(碑陰 : 비의 뒷면)에는 대장단월(大藏檀越) 사부중(四部衆)으로서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를 구분하여 그 성명을 열거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륵사의 랜드마크 전탑과 강월헌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는 '여강(驪江)'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운다.

여주군 접동면 삼합리부터 금사면 전북리까지 총 40여 킬로미터의 백리 물길을 말한다.

 

 

 

신륵사 하면 떠오르는 최고의 감상 포인트.

유장한 남한강을 굽어보는 곳에 자리한 '강월헌(江月軒)'과 '삼층석탑'

 

 

 

신륵사에서 입적한 고려 말의 고승 혜근(惠勤, 1320~1376) 나옹선사의
다비  장소에 세웠다는 아담한 형태의 삼층석탑.

 

 

 

 

삼층 석탑과 나란히 선 강월헌(江月軒)

'강월' 은 혜근 생전의 당호인데 지난 72년 홍수에 휩쓸려가 74년 다시 복원. 

 

 

 

 

 

 

 

 

 

 

일출도 좋고, 

강물에 비친 달 감상이야 더 말 할 나위도 없는 기막힌 포인트.

 

 

 

 

 

 

 

 

 

 

 

 

 

 

 

 

 

 

 

 

 

여주 신륵사(神勒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大殿)·조당(祖堂)·승당(僧堂)·선당(禪堂)·종루(鐘樓)·동익당(東翼堂)·서익당(西翼堂)·남행랑(南行廊)·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또,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는 각운(覺雲)·신조(神照)·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극락보전

(경기도 유형문화재 128호)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96년(정조 20) 영돈녕 김이소(金履素)와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중각(泛中閣)·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년(철종 9)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하여 불전(佛殿)·선료(禪寮)·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는 주지 성인(性仁)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2편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