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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묵방도담

제 5회 묵방도담 (默芳道談) <4편>

 

제 5  묵방도담 (默芳道談)

   

  주제 : 東學과 天道

 

 

         일시 : 2013년 10월24일(목)-26일(토)

        장소 : 동학 * 천도의 발상지 용담수도원 (구미산 국립공원)

 

<4편>

 

 

마지막 날(26일)

천은당님의 청수봉전과 집례

 

 

 

 

 

 

 

 

 

제 4회 묵방도담 회고의 시간

 

 

 

동학천도교의 통일운동

 

임 형 진 (경희대 교수)

 

 북한의 '청우당'과의 교류 건으로 지금까지 북한을 30번 쯤 갔다 온 것 같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북한의 '청우당' 연구는 제가 유일한 듯 싶습니다. 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북한의 '청우당' 연구가 상당히 중요하고 앞으로도 또한 중요하리라 봅니다. 내년이 동학운동 120 주년이 되는 해 입니다. 헌데 120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분위기라는  사실이 저로 하여금 통일 문제에 대해 적극 나서게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내부적 혼란과 수많은 정치적 이슈가 난무하고 있고 갈등의 요소는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주변국과의 관계를 보면 더욱 암담합니다. 거대 4국 모두가 세계 4강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족의 정체성을, 주체성을 지키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저는 우리민족의 대단한 긍지요 자랑이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세가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우리는 살아 남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통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힘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자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통일운동을 하는데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동학 천도교가 갖고 있는 통일운동에 대한 '求同存(구동존)'은 같은 것은 공유하고 다른 것은 우선 제껴둔다 입니다.'구동존'은 1950년 대에 주은래가 한 말로 우선은 공통분모를 찾아가야지 다른 것을 얘기 해 봤자 틈만 벌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반도'라 하고 북한측은 '조선반도'라 칭 하는데 너희들 왜 자꾸 그렇게 나오느냐 하면 의만 벌어집니다. 그럴바엔 인정하자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 부터 공통분모를 찾아 조금씩 좋은 점을 찾아 확대시켜 보자는 것입니다.

 

 

 

 

 

 

3.1 운동은 명백히 천도교가 주도 했습니다. 천도교의 전국 세력과 의암성사가 돈을 내놓아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3.1운동 이후 천도교는 모든 재산을 다 뺏기고, 교육자들은 모두 체포되고, 심지어는 일요일 날, 시일식을 모실 어른들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천도교는 타 종교처럼 전문 교육자가 따로 없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나서 설교하고 교육해야 합니다. 당연히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때 나선 것이 바로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 청년 교리 강연부'라는 것이 만들어 집니다. 이것이 바로 천도교 '청우당'의 시초라 볼 수 있죠. 이 조직을 통해 천도교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이 조직이 '청년부' '청년당' '청우당'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 '靑友당'이 일제시대 문화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일제와의 타협이다라고 보는 측도 있습니다만, 당시 국내에 살면서 일제하 더  이상의 국민운동을 하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라는 측면을 보면 천도교의 운동 자체는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개벽'지를 만든다거나 의암 손병희 선생의 사위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운동'은 바로 천도교 정신이라 보면 틀림없습니다. 한국의 페미니즘의 기원을 서양에서 찾곤 하는데 사실 해월 신사님의 천도교 정신에서 찾아야 합니다. 물론 대신사님께서 부인에게 큰 절을 올렸다거나 종 두 명을 해방 시키는 과정에서  나이 많은 한 명은 며느리로 삼고, 어린 종은 수양딸을 삼은 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여성의 존귀함을 찾고 실천한게 바로 천도교요, 한국이라는  말씀입니다.농민운동도 마찬가지 입니다. 농민운동 하면 대표적인 게 윤봉길 의사의 '농민독본'인데 당시 청우당에서 만든 농민지에고스란히 그 내용이 그대로 실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윤봉길 의사도 천도교인이었다 라고 추측합니다. 천도교인의 명부가 없기에  추측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천도교인이었다는게 거의 명확한 입장입니다. 이처럼 일제의 눈에 청우당이 곱게 보일리 없었겠지요. 당연히 일제에 의해 청우당이 해산되게 됩니다.

 

 

 

 

 

해방 후, 친일의 색채를 떼어내고 45년 10월 '천도교 청우당'이 복당이 됩니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에 복당이 됩니다. 그러나 분단이 되면서 서로의 소통이 어렵게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이승만이 정권을 잡았고 그는 개인적으로 천도교에 대해 굉장한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임정의 수반 이승만을 탄핵하는과정에서 그가 친미주의자여서 안된다며 탄핵을 주도한 사람들이 바로 천도교에서 임정에 파견한 사람들이었기에 때문이죠. 그래서 이승만이 정권을 잡자마자 제 1호로 청우당 해산을 명령했던 것입니다. 명분은 북조선 청우당과 교류한 빨갱이 간첩정당이란 명목이었죠.후로 지금까지 남쪽엔 청우당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북쪽엔 지금까지 청우당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쪽을 일당 독재 국가로 알고 있으나 절대 그렇치 않습니다. 북한엔 3개 정당이 있습니다. 여하튼 북한도 형식은 민주주의 다당제 국가입니다. 물론 여당은 노동당이죠. 나머지 두 개의 야당 중에 바로 제 1 야당으로 '천도교 청우당'이 있습니다. 제 2 야당은 '사회민주당'입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20명 중 북한의 발표에 의하면 천도교 청우당 대의원이 23명입니다. 북한에서 청우당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봅니다.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천도교가 민족종교라는 것입니다.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없는 것은 거의 틀림없지만 그래도 비교적 천도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절이나 교회의 성직자는 출퇴근을 하는 직업인이라 볼 수 있지만 내가 본 천도교는 비교적 종교 역할을 좀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또 북한에서 발표한 종교인의 숫자를 보면 천도교인의 숫자가 가장 많습니다. 그건 해방 직후에도 북한에선 천도교인의 수가 가장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 현재 천도교인의 숫자를 만 오천 명으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불교  등은 모두 만 명 이하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교당도 천도교가 가장 많다라고 발표 합니다. 북한의 천도교인들을 만나보면 '천덕송'을 저보다 훨씬 더 잘 합니다. 오히려 저를 타박하기 까지 합니다. 회의를 할 때도 주문과  심고를 확실히 합니다. 그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외람된 말씀이지만 동학 천도만이 민족 종교라 하고 나머지는 모두 외래 종교로 인식하고 있습니다.동학 천도는 우리땅에서 생겨났기에 우리 종교로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런 얘기를 북한의 천도교 사람들로 부터 여러차례 들었기에  견강부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들의 우리의 것에대한 강한 자부심만은 확실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해방 후 어떻게 천도교가 살아 남고 지금까지 청우당이 존재 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죠. 그것은 김일성과 천도교의 인연 때문이라는 겁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독립투사였다는 겁니다.독립운동을 하다 죽었는데 당시 큰 아들이었던 김일성의 나이가 당시 15살이었습니다. 사후 아버지 친구들이 모여 김일성의 교육을 논의 했는데 당시 최동호 선생이 숙장(지금의 교장)으로 있던 만주 유아현 화전의  '화성의숙'으로  보내기로 합의를 보게 됩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수장은 이승만이었지만 미국에만 머물 뿐, 수장 역할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안창호 선생 등 독립지사들의 간청에 의해 상해로 왔지만 도망가다시피 다시 미국으로 가버립니다. 이에 격분한 독립지사들이 이승만의 탄핵을 결의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임정을 다시 만들자는 '창조파'와 개조해서 쓰자는 '개조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천도교 측에서파견한 사람들은 바로 '창조파'였습니다. 그러나 세력에서 '개조파'가 앞서고 그들은 백암 박은식 선생을중심으로 꾸려나가게 됩니다. 분열 와중에 단재 신채효 선생 등 창조파와 천도교 사람들은 떨어져 나갑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최동호 선생은 의주 출신으로 천도교 총부 측에서 상해 임정의 대표로 임명한 인물로 북경의 천도교 교당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 무렵 자기 친구들이 만주 지역에서 무장단체인'정의부'를 결성하고 학교를 세우면서 최동호 선생을 숙장으로 초빙하게 되었고,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김일성의 아버지였던 김형직과 최동호선생의 교분에 따라 김일성이 바로 이 '화전의숙'에 입학을 하게 되었던 모양입니다.워낙 빈한한 시절인지라 숙장으로 부임한 최동호 선생마저도 그의 아들이었던 최덕신을 북경의 고아원에 맡겨 두었을 정도이니까요. 김일성을 돌보던 최동호 선생은 민족정신 교육과 더불어 '동학 천도'에 관해서도 분명 교육 시켰을 것으로 봅니다.  훗날 김일성이 저술한 "세기와 더불어"에 화성의숙에 있을 때 너무 민족교육 일색인지라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뭔가 새로운 사조를 기대했다는 내용이죠.  그래서 화성의숙 6개월 만에 길림의 용문중학교로 떠나게 되었고, 떠나려는 김일성에게 최동호 선생은 여러가지 삶의 지침이 될 말을 들려 줍니다. 그 말을 들려준 장소가 눈이 쏟아지는 교정이었고, 한참을 가다 돌아 본 김일성의 눈에 최동호 선생의 머리와 어께에 하얀 눈이 덮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숙장 선생님의 눈을 털어드리지 못하고 떠나온 것에 대한 회한을 말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훗날 빨치산 활동을 하던 김일성은 '조국광복회'에 가담 백두산을 중심으로 보천보 전투도 하게 됩니다. 김일성이 이끈 '조국광복회'의 대다수 멤버는 함경도 출신의 천도교인들이었습니다. 이유는 북한지역의 지역의 대접주가 박인진 도정이었는데, 젊은 김일성이 그의 밀영으로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를 좀 도와달라 부탁하며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말하는 과정에서 민족운동과 동학에 대한 이해가 깊음을 알고 김일성을 돕기로 하고 돈을 모아 주어 식량과 무기를 구매하게 했고 부대원의 보충을 적극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던 천도교 대접주 박인진 도정이 체포되었고, 김일성의 모든 것을 밝혀내려는 일본군의 고문에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박인진 도정은 순국하게 됩니다. 이런 박인진 도정이 김일성으로선 고맙기 한이 없었을 겁니다. 해방 후 김일성이 평양에 들어와 제일 먼저 찾은게  박인진 도정의 가족과 후손들이었다고 합니다. 도정의 손자를 김일성 대학에 입학시키고 졸업 후 '천도교 청우당' 서기장에 임명하고 활동케 할 정도로 동학 천도교와 김일성과의 인연은 남다르게 깊고 현재 북한의 천도교가 유지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외무부 장관과 독일대사, 천도교 교령을 지냈던 최덕신 씨를 기억하실 겁니다. 최동호 선생의 아들의 외아들이 바로 최덕신입니다.  6.25 와중의 납북자 문제에 관해 우리는 납북자라는 표현을 쓰지만 북한은 이른바 '모시기 작전'이라고 합니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분 중에서 남쪽에서 푸대접 받고 있는 분들을 모셔 간다는 뜻이죠.  정부 수립 당시 이승만은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배제하다 못해, 많은 애국지사들을 빨갱로 몰고, 자기 자신과 이시형 부통령에게만 훈장을 수여했을 정도이니까요. 2공화국 들어서야 비로소 독립운동가들에게 훈장이 수여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산 김원봉 같은이는 일제하 대표적 친일 악질 순사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고, 이런 수모를 받고선 더 이상 이 땅에 살 수 없다며 월북할 정도였으니까요. 아무튼 이른바 북한의 '모시기 작전' 제1호가 바로 최동호 선생이었다는 겁니다.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기 스승부터 모시겠다는 의도였겠죠.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 많은 이가 끌려갔습니다. 우리 쪽에서 끌려갔다지만 북측에서는 모셔간거죠.  중앙정보부의 모략에 걸려 천도교 교령자리에서 쫓겨난 최덕신은 76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광복군 참모총장 유동렬 장군의 따님인 유미영 여사(두 분 다 천도교인)와 지내게 됩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중국에서 독립운동가 끼리사돈을 맺은 커플이죠. 아무튼 미국에서 생활 중, 먼저 망명하여 북한을 드나들며 태권도를 보급하던 최홍희 장군의 권유로 북한을 방문하여 두 살 연상의 김일성으로 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게 됩니다. 86년 병이 깊어진 최덕신은 평양으로 완전 이주하게 되었고 청우당 위원장의 자리를 맡게되나 건강 상 특별한 역할은 못하고 89년 돌아가시게 됩니다. 북한은 우리와 달리 혈통을 아주 중요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동호의 아들이었던 최덕신이 '천도교 청우당'을 이끌었으니 피를 이은 최덕신의 아들이 청우당을 이끌기 바랐으나 그의 두 아들 중 장남은 독일에 차남은 서울에 있습니다.  그 중 서울에 사는 차남 최인국은 어떤 의미에선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핍박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외할아버지 모두가 독립지사였건만 번듯한 직장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아버지가 미국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직장에서 쫒겨나 지금까지도 삭월세 신세입니다. 아무튼 최덕신 사후, 92세인 그의 부인 유미영 여사가 현재까지 청우당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부위원장은 화성의숙의 숙감(교감)이자  일제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순국하신 천도교인었던 강제하라는 분의 손자 강철운이었는데 금년 3월 73세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강제하는 남쪽에서도 독립지사로 인정 받으신 분입이다. 

 

 

 

 

  49년 해단된 남쪽의 청우당은 이승만 정권하에 거의 빨갱이 수준으로 몰리게 되어 스스로 극우적 선택을 하게됩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교세가 줄어들고 오늘의 현실에 이른겁니다. 4.19 때 '동학당결성위원회'가 결성되고 급진적인 통일안을 내놓기도 하는 등 다소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곧바로 이어진 5.16 때 '동학당'이 해산되고 또 다시 천도교는 반공 종교의 흐름으로 가게 됩니다. 70년데 들어 최덕신이 교령으로 있던 시절 잠시 빛을 보긴 했지만 그가 망명을 하고나자 다시 반공 종교를 내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민족종교로서의 천도교가 일제 때의 친일 행각도 부끄럽지만, 또 하나는  오륙십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변명같긴 하지만 개신교, 불교, 천주교에 비해 천도교는 그럴 여력이 사실 없었습니다. 오직 살아 남는 것에 대해 골몰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는 겁니다. 다만 78년 춘천의 이도천 선도사가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평화통일'을 외치며 분신 자살 한 것이 유일한 예라 할겁니다.  그나마 80 년 대 오익제, 임운길 교령의 등장으로 '민족통일연구회' 가 결성되게 됩니다. 이어 90 년 대 '동학민족통일회'가 만들어 집니다. '청우당'을 복원시키기 위한 과정으로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동학민족통일회'는 언젠가 남쪽의 '청우당'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아직은 천도교가 정당을 결성할 여력이 미흡하기에 현재는 사단법인으로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천도교는 다른 종교에서 내세우는 이른바 '내세'라는 게 없습니다. 천도교의 이상은 지금 이 시대의 염원은 현실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원리이자 '교정쌍전(敎政雙全)' 즉 교와 정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이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도교는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겁니다. 근대사를 돌아보면 동학천도교인으로 순도(순교)하신 분 들이 백만 명이 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순교자의 종교 하면 가톨릭을 떠올립니다. 천주교의 순교자는 아무리 늘려 잡아도 일 만명을 넘지않습니다. 또 하나의 질적 차이는 가톨릭의 순교자는 '종교의 자유'를 외치다 돌아가신 분 들입니다. 그런데 동학 천도의 이름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종교의 자유' 플러스 '사회 변혁'을 외치시다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이 모두가 현재의 동학 천도교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왜곡된 시각을 교정치 못하는 현실입니다. 천도교의 교리 상 반드시 교정쌍전(敎政雙全) 즉 교와 정치가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지만, 여기에서 말 하는 정치는 사회운동 차원의 정치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권 욕심을 내는 그런 정치를 말 하는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우당'을 이해하면 되리라 생각 합니다. 여하튼 1991년 5월에 결성된 '동학민족통일회' 를 바라보는 북한의 입장에선 대단히 반가울 겁니다.  교(敎)만 존재하던 남쪽의 천도교가 정(政)의 파트너가 생겼기 때문이지요. 드디어 2005년 천도교 남북 교류가 시작됩니다. 그동안의 만남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는 가장 지름길은 그들과 자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북한의 고려호텔 매대(매점)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물건을 포장하는 접대원에게 넌즈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 물건을 산 손님에게 고맙다는 한 마디쯤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접대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는 말.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이 필요한 물건을 내가 파는거니 오히려 선생님이 내게 고마워 해야지요."  순간 이 판매원이 바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바보가 아닌바에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사고와 전형적인 사회주의적 시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남쪽 사람이 물건을 이렇게 많이 사가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쯤 해주면 얼마나 좋겠냐, 내가 이렇게 물건을 사감으로써 네가 사랑하는 공화국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않겠느냐?." 그래도 그 접대원은 끝까지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몇 달 뒤  다시 고려호텔에 들렀을때 그 접대원에게 내가 부탁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느냐 물었더니, 그렇다는 말과 함께 남쪽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느꼈습니다. '이게 바로 변화다'. 남쪽 사람들이 북한에 많이 간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 준다는 얘깁니다. 우선 남쪽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사고 자체를 그들은 이해 못 합니다. 일례로 임수경의 방북시 그가 보여준 모습들에 북한당국이 적잖게 당황했다고 합니다. 민간교류가 하루 빨리 활성화 되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천도교 내에서도 북한과의 교류를 탐탁치 않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통일운동을 할 수 밖에 없고, 또한 해야될 수 밖에 없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다만 여러 여건상 천도교의 통일운동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선 천도교는 타 종교와 달리 교육을 위한 학교 등을 갖고있지 않습니다. '교육은 모든 사람이 다 공평하게 하는 것이다.라는 취지하에 천도교는 기존의 학교에 지원하는 것에 치중했지, 자신들이 직접 학교를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고려대를 민족교육기관이라고들 합니다. 대표적 친일파인 인촌 김성수가 고려대를 설립했다면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 그 이전에 고려대는 이용익이라는 분이 만들고 곧바로 망명길에 오르는 과정에서 이용익의 친구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 학교운영을 맏기게 됩니다. 나중엔 아예 고려대를 맡아 달라 간청하여 1910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천도교가 인수하게 됩니다. 그 후 3.1운동 때 체포된 학생 들 중 보성전문 학생들의 수가 가장 많았다는 이유로 일제가 보성전문을 뺐게되고. 후로 김성수가 인수하여 오늘날의 고려대가 된겁니다. 고려대를 민족대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손병희 선생이 15년 간 학교를 운영하며 3.1운동의 주역들을 많이 배출 했기 때문에 민족대학으로 자리매김 한 것이지 인촌 김성수가 민족대학을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얘깁니다. 아무튼 천도교가 그 때 학교를 따로 세우지 않고 다른 교육기관을 지원하는 것에 그친 것을 지금에 와선 여러면에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수운이 주장했던 '지상천국'을 놓고 볼 때 통일운동이야말로 가장 지름길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서 저는 천도교의 정(政)에 대해 더욱 진력 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질의 응답

 

 

 

 

제 5회 묵방도담 참여자 명단

 

 

특강

혁암 김혁태 / 천도교 상주 선도사

윤석산 / 천도교 상주 선도사, 한양대 교수

임형진 / 경희대 교수

 

단디(눌암)  정정철 / 경남 영산교구

수암 김희수 / 경남 진주 진양 반성

장희숙 / 포항 신광(경주교구)

이종형 / 포항 신광(경주교구)

변명숙 / 충남 공주

천은당 정미라 / 경주

고운당 임우남 / 부산 남부교구

정화당 이점자 / 마산시 교구

신원스님 / 경남 거창

현산 박흥덕 / 경기도

육관응 교무 / 원불교 신문사 편집국장

일포 이우원 / 전북 부안

정심당 변주원 /  전북 부안

동연 백규서 / 서울

일여 양진숙 / 서울

기연 윤영철/ 서울

자암 박남성 / 용담수도원장

수인당 장희숙 /  용담수도원

다천 김환기 / 장성 

 

 

 

I Will Always Love You  /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