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묵방도담

제 5회 묵방도담 (默芳道談) <2편>

 

제 5  묵방도담 (默芳道談)

   

  주제 : 東學과 天道

 

 

    일시 : 2013년 10월24일(목)-26일(토)

    장소 : 동학 * 천도의 발상지 용담수도원 (구미산 국립공원)

 

 

<2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경주 최부잣집 

 

 

 

 

 

 

 

 

 

 

 

 

 

 

 

경주나정 (慶州蘿井)

(사적 제245호 /  경주시 탑동 소재 박혁거세의 탄생전설이 깃든 우물)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날 진한(辰韓) 땅에 6촌이 있었다. 어느 날 고허촌(高虛村)의 장(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밑 나정 우물가 숲을 바라보니 이상한 빛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지고 그 빛 속에 흰 말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다가가보니 말은 간 데 없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이상히 여겨 알을 쪼개보니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 소벌공이 이를 데려다 길렀더니, 나이 열 셋에 벌써 뛰어나게 숙성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 알이 박같다 하여 성(姓)을 박(朴)이라 하고,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했다."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

(慶州 南澗寺址 幢竿支柱)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논을 경작하면서 지주의 아래부분이 약 50㎝정도 드러나 있으며, 바닥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부가 없어서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던 받침돌도 찾아볼 수 없다. 지주 안쪽 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세 군데에 뚫어 놓았는데, 특히 꼭대기에 있는 것은 십(十)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간단한 형태의 당간지주로, 보존된 상태도 양호한 통일신라 중기의 작품이다.

 

 

 

 

창림사지

 

 

 

 

 

 

 

 

기단 부조

 

 

 

 

 

 

 

 

 

창림사지에서 바라본 경주 시내 일원

 

 

 

 

 

 

 

 

 

 

 

 

포석정 (鮑石亭)

 

포석사에 관하여

먼저 <삼국사기>에 나오는 포석정과 관련된 기록이다.

(경애와 4년)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대를 쳤으므로 왕은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날랜 병사 1만을 내어가서 구원하게 했다. 견훤은 구원병이 이르기 전인 겨울 11월에 왕경으로 들어왔다.

 왕은 비빈 . 종척 . 외척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가서 잔치를 하며 몰다가 적병이 닥치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비첩 몇 사람이 후궁에 있었는데 군영에 잡아다 왕을 강제로 자살케 했고

왕비를 강간했다. 그리고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비첩들을 욕보였다.

그리고 왕의 족제를 세워 나라일을 맡기니, 이가 경순왕이다.

1999년 4~5월 국립 문화재 연구소에서는 포석정 동남쪽 70M지점 일대에 대한 발굴을 하였고,

그 과정에 포석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 몇 점과 지와무지를 확인했다. 이는 포석정이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라 포석사와 같은 사당이었을은 뜻한다. 포석사는 일정한 규모의 건물로 이루어진 사당이었음을

뜻한다. 포석사는 일정한 규모의 건물로 이우러진 사당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안에 문노를 비롯한

 나라의 중요 인물들의 화상이 있었고 길례를 행하거나 제사를 행하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199년 발견된 포석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왓장


 

 
 
 

포석정지 평면 및 단면도


 발췌 : http://blog.daum.net/kinhj4801/2500687

 

 

 

 

 

 

경주 배리 석불입상( )

 

   보물 제63호. 새로운 추상표현주의적 기법으로 조성된 7세기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넘어진 것을 1923년 지금과 같이 삼존상으로 복원한 것이다.
중앙의 본존은 큼직한 돌을 평평하게 다듬고, 앞면은 부조 형식으로 조각한 우람한 체구로, 커다란 자연석 위에 묵중하게 서 있다. 이 묵중함은 단순한 묵중함과는 달리 시혜자(施惠者)의 활력을 명쾌하게 풍겨 주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 불상의 모든 세부 특징에서 지적해 낼 수 있다.
머리카락은 나발(螺髮)인데, 상투는 3단으로 하였으며 머리카락 표현이 보이지 않아 매우 특징적인 모양이다. 얼굴은 사각형으로 뺨을 부풀리고 턱을 완강하게 처리하여 힘과 활력이 나타나고 있다.
눈은 눈두덩을 부풀리고 눈을 가늘게 처리함으로써 파격적인 눈웃음을 짓고 있으며, 양쪽 뺨을 한껏 부풀리고 입을 꾹 다물면서 양 끝을 깊게 파서 미소가 얼굴 가득히 흘러 넘치고 있다.
이러한 웃음은 경주서악리마애석불상(보물 제62호)이나 경주남산삼화령석조미륵삼존상 등과 직결되는 것이지만, 그들보다 훨씬 더 허심탄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코는 큼직한 삼각형이며 귀는 어깨에 닿고 있지만 끝이 깨어져 형태가 분명하지 못하다.
목은 짧은 편으로 삼도(三道)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상체는 우람한 면모를 과시하지만, 하체는 불분명한 다리의 윤곽 등으로 빈약하게 보여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어깨의 팽팽한 윤곽 외에 가슴 등은 평평하지만, 다리의 볼륨이 약간 표현되었다.
시무외·여원인을 취한 두 손은 적당한 크기이며, 두 발도 앞 시대의 다른 불상에 비하면 비교적 잘 처리한 편이지만, 아직도 너무 크고 발꿈치를 들고 서 있는 것처럼 불안정하게 처리하였다.
옷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는데, 오른쪽 어깨에 가사 자락을 약간 덮고, 팔에 걸친 옷자락은 짧고 묵중하게 내렸다. 그 밑으로는 광배에 해당하는 면 전체로 옷자락이 덮이며 내려갔다.
가슴에서 발목까지는 U자형의 옷주름 다섯 가닥이 표현되었는데, 굵은 凸형의 띠로서 매우 특징적인 것이다. 이것은 7세기 초기의 익산연동리석불좌상(益山蓮洞里石佛坐像, 보물 제45호)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수법임이 분명하다.
광배는 얼른 보면 없는 것 같지만 뒷면을 보면 주형 광배(舟形光背)인 것이 뚜렷하다. 앞에서 보면 얼굴 주위에서 어깨까지만 분명히 알 수 있으나, 두 다리 옆의 옷자락에 가린 면도 광배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광배를 불상의 신체에 거의 맞게끔 처리하여, 광배로서의 기능보다는 불상을 지탱해 주는 구실을 더욱 충실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대좌는 현재 자연석을 대신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 놓인 돌이 원래의 대좌였던 것으로 보이며, 오른쪽에 놓인 파편도 대좌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위에 연꽃대좌가 놓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발굴할 때 3조각으로 깨어진 부분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의 짧아진 체구, 두 무릎을 약간 굽힌 자세, 아기 같은 얼굴 등 투박하고 어린이 같은 특이한 형태는 중국의 북주(北周) 내지 수나라 불상과 유사한 추상표현주의적 양식을 보여 준다.
이러한 특징은 좌우 협시보살상의 형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왼쪽 보살은 약간 더 늘씬하고 세련된 듯하지만, 기본적으로 오른쪽 보살과 흡사하다.
오른쪽 보살상은 양감 있고 탄력적인 얼굴, 막 터져 나올 듯한 순진무구한 미소, 어린이 같은 짧은 체구, 묵중하고 장식적인 목걸이 등의 장신구, 5구의 화불(化佛)이 새겨진 원형의 두광배(頭光背), 앙련(仰蓮 :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 )과 복련(覆蓮 :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이 새겨진 묵중한 대좌 등 기본적으로 본존불과 동일한 형태이면서 그보다는 좀더 장식적이다.
이 삼존불상은 몇 가지 점에서 우리 나라 조각사상 중요한 의의가 있지 않나 한다. 본존불상의 경우에는 형식을 단순화하였는데, 보살은 장식적이며, 나발이라든가 묵중한 불의, 굵은 띠 같은 새로운 세부 형식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상의 양식적 특징으로 아기 같은 얼굴과 체구, 묵중하고 단순화된 선 등에서 새로운 추상표현주의적 특징을 보여 주는 7세기의 1/4 분기 작품으로, 삼국시대 신라 조각을 대표하는 대작이자 걸작품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 삼존상은 섭론종(攝論宗 : 중국 불교의 학문적 종파의 하나) 계통의 아미타불과 관음·세지보살의 아미타삼존불일 가능성이 있어서 삼국시대 불교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며, 600년에 중국에서 귀국한 원광(圓光) 등에 의하여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민족문화대백과 인용/

 

 

 

좌협시보살 2.35m,

 

 

 

 

좌협시보살 뒷면

 

 

 

 

 본존불 2.78m

 

 

 

 

본존불 뒷면

 

 

 

 

우협시보살 2.925m.

 

 

 

 

우협시보살 뒷면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

()

높이 1.42m. 보물 제198호. 높이 3m, 너비 3.8m 정도의 커다란 바위 면에 0.6m 깊이의 감실을 파고 고부조(高浮彫 : 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낸 살이 매우 두껍게 드러나게 한 부조)로 여래좌상을 새긴 특이한 예로서, 주변에 흩어진 기와 조각과 가구(架構) 흔적으로 미루어 목조로 된 전실(前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무릎이 깨어진 것 외에는 완전한 불상으로서, 얼굴을 약간 숙이고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어 다소곳한 인상을 풍긴다. 머리에는 두건(頭巾)을 쓴 듯 소발(素髮)의 머리가 귀밑까지 덮여 있으며, 육계(肉髻)는 낮고 넓은 편이다. 얼굴은 둥글고 양감도 적당한데, 지그시 감은 눈과 오목하게 팬 입가의 표현으로 고졸(古拙)하면서도 은은한 미소가 가득하다.
체구는 부드러운 얼굴의 표정과는 달리 어깨가 넓어 강직한 인상을 풍기는데, 통견(通肩)의 법의는 몸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양어깨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모이는 쐐기형의 선으로 새긴 옷주름은 신체의 굴곡과 어울리게 유연하게 처리되었고, 가슴 양쪽의 굵직한 골 주름이 상체를 경계 짓고 있다.
상체에 비하여 하체는 무릎이 낮고 수평적이며 오른발이 유난히 크게 과장되었는데, 이러한 비사실적인 수법은 이 불상의 다소곳한 모습과 함께 고졸한 인상을 더해 준다. 무릎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은 대좌 밑으로 흘러내려 대좌의 앞부분이 보이지 않는 상현좌(裳懸座)를 이루었는데, 옷주름은 2단으로 Ω형 모양을 이루었지만 번잡하지 않다.
감실 내에 광배는 생략되었다. 다소곳한 상의 모습과 함께 몸의 굴곡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등 이 불상은 중국 수나라 때의 조상 양식을 가미한 고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마애불상이다.

 

 

 

 

 

 

 

 

 

 

 

 

 

 

 

 

 

 

 

금오산 옥룡암

 

 

 

 

탑골  마애조상군 (보물 제201호)

 

 

 

통일신라시대 신인사라는 사찰 터로 추정된다는 이곳은 높이 10m, 사방 둘레 30m 바위

전면부에 보기드문 불상 암각화가 34점이 조각되어 있는 독특한 마애불상군이다 

 

북면 바위의 중앙에는 여래상이 있고 양쪽으로 목탑이 늘어서 있으며, 그 위로 비천(飛天)하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목탑 앞에는 사자형상의 짐승 두 마리가 좌우로 지키고 있다. 이 목탑은 실물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신라시대의 목탑형식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전체 모습이 상징하는 뜻은 석가모니의 설법광경으로 추정된다. 서면 바위에는 여래좌상과 비천상이 있는데, 광배(光背) 부분에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이 배치되어 있다. 남면 바위에는 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마멸이 심하다.왼편으로 여래상이 있고, 그 불상 앞에 여래의 입상이 서 있다. 그 정면으로는 석등을 세웠던 자리와 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과 삼존불 앞에 큰 바위가 가로놓여 있는데, 승려가 합장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동면 바위는 크게 셋으로 갈라진 상태이다. 제일 끝면에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새겨져 있는데, 옛날에는 이 곳이 절의 입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동쪽 둘째면에는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첫째면에는 보리수 두 그루와 결가부좌한 수행상이 새겨져 있다.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단층 기단에 전체높이가 4.5m이다. 지붕돌이 짧고 둔한 느낌을 주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모습과 다른 점이 이채롭다. 최근까지 넘어져 있던 탑을 1977년에 재건하였다.

 

 

 

 

석조여래입상

 

남면 바위 앞에 2.2m 높이의 불상이 있다. 얼굴은 반 이상 파괴되었고, 목에는 삼도(三道)를 표현하였고, 옷주름을 복부 부근까지 늘어뜨렸다. 입체적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훌륭한 작품이다.

 

 

 

 

탑골 마애불상군 

 

 

 

 

 

 

 

 

 

 

 

 

 

 

 

 

 

 

 

 

 

 

 

 

 

 

 

 

우물

 

 

 

김유신 집터 발굴이 한창이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생가 복원 현장

 

 

 

 

 

 

 

 

 

 

 

 

수운 최제우 대신사 묘쇼

 

 

 

 

 

 

 

 

 

 

 

 

 

 

 

 

 

 

 

 

 

 

 

 

 

 

 

 

 

 

 

 

 

 

 

 

 

 

 

 

 

 

 

25일 오전,

남산 일원과 수운 생가 답사를 마치고 용담 수도원으로 돌아 오는 일행.

 

 

 

 

 

Ray Anthony - Merci Cher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