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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묵방도담

제 4회 묵방도담 (默芳道談) <2편>

제 4  묵방도담 (默芳道談)

 

  주제 : 신화(神話) <2편>

  

  

    일시 : 2013년 5월 24, 25, 26일

    장소 : 천봉산 대원사 (전남 보성군 문덕면)

 

둘째 날  전남 보성 일원의 답사에 나선 일행. 

 

 

보성 다원에서. 

 

 

 

 

 

 

 

 

 

 

 

 

 

 

 

 

 

 

 

 

독립운동가 흥암 나철선생 생가 방문

나철 선생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료의 길을 걸어갔으나 일제의 침략 야욕에 항의하여 사표를 던졌다. 경술국치 후에 민족 정기를 수호하기 위해 단군 신앙인 대종교를 창시하였다. 총본사를 백두산 아래 화룡현 청파호에 두고 애국 지사들을 길러냈다. 청산리전투를 주도한 서일 김좌진과 박은식 김규식 등 수많은 애국 열사들이 대종교의 토양 위에서 커나갔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일제의 내정 간섭에 분개하여 관직을 버려

나철(羅喆, 1863.12.2~1916.9.12 | 8.15(음력)) 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낙안군 남상면 금곡리(현 보성군 벌교읍 금곡리)에서 부친 나용집(羅龍集)과 모친 송씨(宋氏)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두영(斗永)이었으나, 인영(寅永)으로 개명하였다가 대종교 창교 후 철(喆)로 바꾸었다. 호는 홍암(弘巖).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워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 권지부정자직(權知副正字職) 등을 역임했다. 1905년 징세서장(徵稅署長)으로 재직하던 중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 이긴 일제의 침략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자, 그 해 5월 관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선생은 강진(江津) 출신 오기호(吳基鎬), 부안(扶安) 출신 이기(李沂)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그런데 그때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선에 의하여 러일전쟁이 종식되고 포츠머스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선생은 이 회의에서 우리나라 장래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지리라 믿고, 우리의 입장을 미국 조야에 호소하기 위해 도미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를 받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6월에 유람을 빙자하여 일본 동경에 가서 다시 미국으로 가고자 하였지만, 이것도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 독립 촉구하며 도쿄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항쟁, 매국 5적 처단 추진하다 10년 유형

선생은 동경에 체류하는 동안 이등박문과 일본 총리대신 대외중신(大隈重信) 등에게 서신을 보내 항의했다. 그 주요 내용은 조선주권을 보장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중․일(韓中日) 3국이 친선동맹을 맺어 선린우의로써 독립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일왕에게 정의대도(正義大道)와 동양평화를 실현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회신이 없자 선생은 궁성 앞에서 3일 동안 단식하며 항쟁하였다.

 

나철 선생 등에 대한 판결문(1907년 7월 3일, 평리원). 선생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유형 10년을 선고 받았다.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기호와 함께 “매국노를 모두 죽이면 국정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며 칼 2자루를 행낭에 감추어 11월 30일에 귀국하였다. 1906년 1월 선생과 오기호는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세칭 ‘5적 대신’을 일시에 처단할 것을 계획했다. 이에 선생은 김인식(金寅植) 등 동지들의 자금지원을 받아 이대하(李大夏)로 하여금 권총 8정을 구입하도록 하였다. 또 이기․윤주찬(尹柱瓚) 등은 자작회(自作會)를 조직하여 취지서를 작성하였고, 선생은 헌간장(軒奸狀)과 동맹서(同盟書)를 작성하였다. 또한 윤주찬 등에게는 우리 정부와 일본에 보내는 공문과 내외국민들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작성하게 하고, 김동필(金東弼)․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으로 하여금 결사대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첫 번째 거사일은 음력 정월 초하루(양력 2월 13일)로 정하였다. 5적이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처단하려 했으나, 결사대원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후 음력 2월 5ㆍ8ㆍ12일 총 3회에 걸쳐 다시 5개조로 나누어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동지 서창보(徐彰輔)가 피체되어 일제의 고문에 못 이겨 거사 전말을 실토하면서,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혀 가게 되었다. 선생은 자발적으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하여 1907년 7월 3일 유형 10년을 받아 지도(智島)로 유배(流配)되었다. 그러나 동년 12월 광무황제의 특사로 유배 4개월 만에 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석방되었다.

 

 

“간사한 기회주의 때문에 민족의 기상이 꺾였다.” 단군 신앙인 대종교를 창시

선생은 1910년 8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의 체결로 나라의 국권을 일제에게 완전히 빼앗기자 새로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은 무엇보다 오랫동안 사대모화(事大慕華) 사상에서 비롯된 교육의 잘못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강대한 외세가 밀려오면 민족과 국가를 수호하는 일에 앞장서기보다는 힘센 외세에 붙어서 자신의 영화(榮華)와 출세만을 추구하게 되었고, 또 각각 친중(親中)ㆍ친일(親日)ㆍ친러(親露)로 처신하며 서로 자기네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데 급급하였고, 결국 간사하고 교활한 기회주의가 만연하게 되어 나라는 부패하고 민족의 기상이 꺾였다고 선생은 생각하였다.

 

선생은 흔들리는 민족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단군(檀君)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단군의 정신으로 민족고유의 종교역사를 완성하고, 민족정기를 새롭게 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인구세(濟人救世)’를 기해 보자는 의도였다. 1909년 1월 15일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오기호․이기․김윤식(金允植)․유근(柳瑾) 등 수십 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에서 제천(祭天)의식을 갖추고 단군교를 공식 종교로 공표하였다. 교주인 도사교(都司敎)로 추대된 선생은 1910년 7월 30일 칙령을 발표하여 그때까지 한얼교 또는 천신교로 불리던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하고 대종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백두산 아래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겨 수많은 애국열사를 배출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포교활동이 어렵게 되자, 단군이 남긴 손길과 발자취를 찾아 성지순례의 길을 나섰다. 결국 선생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겨레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려 한 것이다. 강화와 평양을 거쳐 백두산 아래의 중국 화룡현(和龍縣) 청파호에 이르렀다. 선생은 이곳에서 대종교의 확대 포교를 구상하게 된다. 이곳이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살던 곳이었고, 수많은 애국독립 지사가 정착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기어 대종교(大倧敎)를 크게 번창시켰다. 한편으로는 교인과 교조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교육시설을 마련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청산리전쟁’을 주도한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을 비롯하여 박은식(朴殷植)․김규식(金奎植) 등 수많은 애국열사를 배출시켰다.

 

선생의 이같은 행동은 일제의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국내에서는 탄압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선생은 총본사가 있던 화룡현 청파호에서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 당시 일제는 신포교규칙에 의한 종교등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종교에서도 등록서류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군소종교단체는 모두 등록을 받아주면서도 대종교의 등록서류는 신교(神敎)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송했다. 이러한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대종교는 창교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으며, 선생도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일제 탄압에 순교를 결심. 구월산 삼성사에서 절식 수도로 순절

선생은 순교와 수도의 길 중 한 가지를 선택하기 위해 매일 기원했다. 마침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참배계획을 공지하였다. 이는 선생이 단군 성적지를 찾아 순교하려고 내린 결단이었다. 1916년 음력 8월 4일 참배길을 떠나 이틀 뒤 삼성사에 도착했다. 8월 한가위에 동네 교인들과 제례를 올린 선생은 “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방문을 봉하게 하고는 순교의 길을 택했다. 다음날 제자들이 선생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선생은 국조(國祖) 단군을 만들어 민족정기(民族正氣)를 지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이러한 민족애(民族愛)와 애국심(愛國心)은 광복(光復)이 되는 1945년까지도 계속 이어져, 수많은 후진들이 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대종교에서는 나철 선생이 순교한 음력 8월 15일을 가경절(嘉慶節)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

 

  • 1   나철 선생 순도(殉道) 16주년 기념일(《동아일보》1931년 9월 26일자). 나철 선생 순국 16주년을 기념하여, 대종교의 유래와 선생의 이력 등을 보도하고 있다.
  • 2   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파호 인근에 모셔진 나철 선생 묘지 사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글 천부경

 

하늘은 시작됨이 없이 시작된 하늘이며

하늘과 땅과 사람이 삼태극으로 나누어져도

그 근본은 변함이 없도다.

 

하늘이 이루어지고 하늘을 바탕으로 땅이 이루어지고

하늘과 땅을 바탕으로 사람이 이루어졌노라.

 

사람은 하늘의 정기가 겹겹이 싸고돌아 탄생한 것이며

하늘은 땅과 사람의 본성을 품어 있고

땅은 하늘과 사람의 본성을 지녔고

사람도 하늘과 땅의 본성을 품고 있노라.

 

하늘과 땅과 사람이 크게 조화를 이루면서

만물을 생기게 하고 움직이게 하노라.

 

사람은 생로병사의 자연의 법칙에 매였으며

정신과 물질은 하나이로다.

 

오묘하게도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그 쓰임은 변하고 변해도 그 근본은 변하지 않도다.

 

본래의 마음 본래의 큰 빛은 밝고도 밝아

사람 가운데 하늘과 땅이 함께 어우러져 있고

하늘은 끝남이 없이 끝나는 하늘이로다.

 

  나철 선생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를 살피는 도담 일행.

 

 

 

나철 선생 선양추진위원회 관계자와 함께한 도담 일행.

 

 

 

벌교 채동선 기념관 방문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1901. 6. 11~ 1953. 2. 2

 

부호 채중현의 아들로 순천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졸업 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에 입학해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공부했으며 대학을 마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 슈테르헨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했다. 1933년 정지용의 시 〈그리워〉에 곡을 붙였는데 그의 동생인 소프라노 선엽(善葉)의 독창회에서 처음

발표되어 도쿄[東京] 유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1937년 작곡발표회를 갖고 작곡집도 펴냈다.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을 했고,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창작곡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로 발표했다.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육자배기〉·〈춘향가〉 등 민요나 판소리를 채보했고 〈진도아리랑〉·〈새야새야〉·〈뱃노래〉 등을

편곡하기도 했다. 8·15해방 직후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여 협회장에 취임했고 문필가협회 부사장, 국립국악원 이사장,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으며, 고려합창협회를 조직하여 합창 지휘도 했다. 52세에 부산 피난중 급성복막염으로 죽었다. 1983년 '채동선 기념사업회'가

그의 부인 이소란과 평론가 박용구 등의 주도로 조직되었고 1984년 '채동선 음악상'을 제정했다. 대표작으로 가곡 〈망향〉·

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밖에 현악4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모음곡, 교성곡 〈한강〉, 진혼곡 〈조선〉·〈조국〉 등이 있다.

 

 

 

 

 

 부용산 오리길

 

 

 

 

 

 부용산 오름길에서 조망한 벌교읍내

 

 

 

박기동 시인의 '부용산 시비' 앞에서 

첫 날의 도담에 참여했던 김용성 목사 일행을 만났다.

 


부용산 오리길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시의 주인공 박영애는 벌교 선근교 부근에서 여산한약방을 운영한 부친 박준태씨의 3남 3녀중 2녀로

 18세(1941)때 벌교 세망동으로 시집을 갔으나 자식 없이 24세 때 폐결핵으로 순천도립병원에서 죽었다.
박기동시인은 누이동생의 짧은생이 안쓰러워 부용산 자락에 누이를 묻고 돌아서 이 시를 쓰게 되었다고.

시인이 1948년 목포 항도여중 국어교사로 재직시 동료 음악교사였던 안성현 선생이 곡을 쓰게 된 것.

"엄마야 누나야" 를 작곡하기도 한 안성현이 온 가족을 이끌고 월북한 후 공교롭게도 빨치산들이

'부용산'을 즐겨 부르는 바람에 금지곡으로 오랫동안 묶여 있었다.

 

 

 부용산 용연사

 

 

태백산맥 문학관 

 

 

조정래의 태백산맥 친필 원고 

 

소설 「태백산맥」의 호남 지역 사투리를 모아보면서, 나는 잠깐 소련의 작게 솔제니친을 떠올렸다.

소련에서 추방된 솔제니친이 미국에 머물러 있을때, 한 방송국 기자가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소련이 체제 개혁을 위해 개방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방송국 기자가 근황을 묻자, 솔제니침은 자기

서재로그 기자를 데리고 들어가서는 책상위에 즐비하게 늘어 놓은 카드들을 가르켰다. 러시아어로

작성된 어휘 카드였다. 솔제니친은 자신의 모국어인 러시아어 사진을 혼자서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어를 잊지 않기 위해 어휘 카드를 만들면서 그것을 모아 사전을 꾸며보겠다는 명명 작가의

마지막 말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수 있는 일은 나의 모국어인 러시아어에 대한

사랑이다. 작가 조정래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라도 사투리의 사용을 화제에 올렸을 때,

그는 작가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말했다.

 

 <권영민 교수의 太白山脈 다시읽기 중 >

 

 

이름에도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의 분위기가 다릅니다. 우스운 이름도 있고 우습지 않은 이름도 있어요.

못사는 사람일수록 천금 만금 식으로 이름을 지어요. 얼마나 촌스러워요. 부모의 염원이 거기에 담겨있는 거에요.

양반들은 항렬을 따집니다. 이름이 절대로 겹치면 안되지요. 태백산맥을 쓸 때는 그나마 편했어요. 아리랑에는

태백산맥에 나온 이름은 쓸 수 없게 됐지요. 태백산맥 에는 독자들에게 명확하게 인상이 찍혀버린 성씨, 하대치

염상진 등은 이름뿐만 아니라 성도 못 쓰게 돼요.유심히 보면 태백산맥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사람들의 성은

아리랑에 안나옵니다. 아리랑에 나온 주인공 성은 한강에 안나오고...,

또 조가는 안 씁니다. 쓰더라도 잠깐 지나가는 것으로 쓰지요. 왜냐면 내가 조가이기 때문에 나쁜사람으로 쓰자니

기분이 나쁘고,좋은 사람으로 쓰자니 흉볼 것 같아서요. 소설을 쓰기 전에 이름을 미리 준비하지요.

무식한 이름, 지적인 이름, 촌스러운 이름을 지어 분류를 해놓고 하나하나 사용합니다.소설 세편에 등장인물이

1200명 정도 되지만 겹치는 이름이 하나도 없다고 장담을 했어요. 그런데 어떤 여성 독자가 '허진'이라는 이름이

아리랑에도 나오고 한강에도 나오는 것을 찾아냈어요. 그걸로 끝난줄 알았더니 두 사람이 또 한사람씩 지적했습니다.

세 사람이 겹칩니다. 물론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지만, 무의식이라는 게 무서워요. 깨끗이 씻어내고 새로

시작하려고 하는데도 그게 잘 안되는가 봐요. 그래서 이 사람들한테 사과하는 의미로 책에다가 사인을 해서 한 권씩

보내줄까 생각하고 있어요.

 

< 신동아 2002년 7월호 작가 인터뷰 중에서>

 

 조정래의 아들과 며느리가 필사한 태백산맥 원고.

 

언젠가 조정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내 사후  인세를 받게 될 아들과 며느리에게 필사를 요구한 것은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인도음악 南友 박양희님과 함께

 

나무南友박양희는 196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1990년 전남대학교를 졸업했고 80년대 중반부터

 노래패 친구,   우리소리연구회 꼬두메등에서 활동하며 많은 음반의 기획 및 연주를 하였다.

95년 2월 인도에 가서  샨티니케탄 - 평화의 배움터에 머물며 인도 전통악기 시타르와 따블라, 벵갈어를

배우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춤과 노래가 수행인 바울(바람)이 되었다. 2002년 한국에 돌아와

'시하나 노래하나'동인으로 여러 시노래음반에 참여하며 인도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춤과 노래로

함께하는 인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80년대 광주 노래패<친구>등을 통해 문화운동을 시작한 이후,

8년여 동안 인도의 샨티니케탄(평화의 배움터)에서 시성(詩聖) 타고르의 시노래를 배우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춤과 노래가 수행인 ‘바울-바람으로 떠도는 자’에 입문했다. 한국과 인도를 오가며

문화예술을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 

 
‘개망초’ ‘반도의 별’ 등 시노래 음반 참여. 2003~ ‘포엠 콘서트’ 기획 및 진행. 2006 '나무의 Venares' 출반

 

 

 

 

 

 

 

 

 오일 맛사지 시연

 

 

 

 

 

 

 

 

 

 

 

 

 

 

 천봉산에 떠오르는사월보름 이튿 날의 달

 

 

 어제에 이은 풍등 올리기

 

 

 

 

 

 

 

 

 

 

 

 

 

 

 

3 편으로...

 

 

 

  

박양희 : 하레크리슈나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