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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청계, 남계서원 일별

 

 

함양 청계서원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탁영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효성의 귀감으로 후세에 알려지는 김극일(金克一 1382~1456?)의 손자이며 집의를 지낸 김맹(金孟 1410~1483)의 아들이다. 어려서〈소학〉·〈통감강목〉·사서(四書) 등을 배웠다. 1478년 15세 단양 우씨와 혼인하고, 선산의 이맹전을 찾아 배알하였다.

생육신

의 한사람인 이맹전문하에서 수학하다가 함양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1483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정여해·강혼(姜渾)·남곤·정광필 등과 사귀었다. 이 중 남곤은 또다른 동문인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하기도 한다. 2년간 이맹전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맹전이 병사하자 김종직의 문하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며 그에게서 성리학과 글, 사물을 배웠다. 그 당시 사림의 대표적 으뜸이던 김종직의 문하생인 그는 오래 스승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486년(성종 1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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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 활동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또한 세조 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다. <조의제문>은 그의 스승 김종직항우(項羽)가 초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죽이고 찬탈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초 의제를 조상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은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었다. 이 조의제문과 기타 여러가지 사건이 빌미가 되어 후일 1498년 (연산군 4년)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그 결과로 김종직은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하게 된다.그의 언행 가운데 훈구파에서 문제로 삼았던 것은 덕종의 후궁인 소훈 윤씨(昭訓尹氏)에게이유 없이 지나치게 많은 전민(田民)과 가사(家舍)를 내렸다고 세조의 실정을 비판했고, 세조소훈 윤씨와

 소의 권씨 등 장남 덕종의 후궁을 범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기록<조의제문〉을 그대로 사초에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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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간통 승려 비판

 

학조

가 왕실의 위세를 업고 해인사 주지를 자신의 수하로 갈아치운 사실을 기록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또한 학조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영응대군의 땅과 백성들을 사취한 사실도 문제가 된 기록이었다. 승려 학조세조의 불사에 참여하여 총애를 받았고, 세조의 측근인 공신 김수온의 형제였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는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다. 그는 학조대방군부인 송씨의 간통 사실을 성종의 면전에서 직접 언급하며 이를 비판하였다.또한 무오사화 당시 이 사실도 사초에 들어 있었다

 

 

 

 

훈구파 비판

 

그는 세조의 꿈 때문에 어이없이 부관참시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였고,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하고, 숙의권씨(淑儀權氏)의 노비와 토지를 권람(權擥)이 가로챘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동료들로부터도 위험한 것으로 여겨져 정광필이나 남곤, 김굉필, 김전, 김안국 등은 그런 신랄한 지적을 한 그에게 되도록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충고하거나, 오히려 그를 나무라고 질책했다.그의 직언을 비판한 정광필김안국, 남곤, 김전, 김굉필 등은 살아남았지만, 그의 직언에 동조했거나 긍정적이었던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대부분 무오사화갑자사화로 희생된다.

세조

정희왕후 윤씨의 상중에 전라도관찰사 이극돈이 기생을 불러다가 술을 마신 것을 사초에 기록했다. 이것이 동료 사관을 통해 이극돈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사초에서 상중에 기생과 어울린 내용을 빼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일손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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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와 죽음

 

만년의 그는 풍병(風病)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 유자광 등을 통해 연산군에게 알려졌다. 그 내용인 즉, 세조를 비방하고, 노산군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던 것이다. 곧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대역죄로 음력 7월 광통방(廣通坊 : 조흥은행 본점이 있던 광교 네거리 근처)에서 능지처참되고, 권경유 · 권오복 · 허반 등 다른 많은 사류도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 일을 무오사화라 한다. 이를 계기로 세조 때 등장하여 성종 때에 날개를 펴며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신진 사림은 집권층인 훈구파에게 거세, 숙청되었다.

 

긍정적 평가

일찍이 스승인 김종직을 닮아 사장(詞章)에 능했으며, 당시 고관들의 불의와 부패를 규탄하였다.

패관잡기에는 그를 평하기를 "계운(季雲·김일손의 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다"고 애석해 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은 "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이하 중략)... 인물을 시비하고 국사를 논의함은 마치 청천백일 같았다. 애석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라고 연산군비판하고 있다. 지족당 남곤은 그의 문장력과 시 재주가 동문 수학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났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음을 당했다며 항상 애통해하였다.

 

부정적 평가

그러나 과격하다는 비판도 있다. 후대에 월정 윤근수가 지은 <월정만필>에 의하면 "김일손이 정광필과 양남어사(兩南御史)가 되어 용인의 객관에 같이 묵었을 때 ‘시사를 논하는데 강개하여 과격한 말을 많이 했다"고 전한다. 정광필 등은 그가 너무 과격하다며 이를 나무라고 했다고 한다.

 

학맥학통상으로는 정몽주의 학파였다. 학맥상으로는 백이정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일손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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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년(명종 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6년(명종 21)에 ‘남계(藍溪)’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에 나촌(羅村)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1634년(인조 12)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강익(姜翼)을 제향하고 1642년(인조 20) 유호인(兪好仁)과 정온(鄭蘊)을 병향하였다. 그 뒤 1677년(숙종 3)에

정온을, 1689년(숙종 15)에 강익을 본사(本祠) 올려 배향하고, 1820년(순조 20) 정홍서(鄭弘緖)를 별사에 모셨다.

이 후 1868년에 별사는 훼철(毁撤:헐어 내어 걷어 버림)되었다.이 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전사청(典祀廳)·명성당(明誠堂)·양정재(養正齋)·보인재(輔仁齋)·

애련헌(愛蓮軒)·영매헌(詠梅軒)·풍영루(風咏樓)·묘정비각(廟庭碑閣)·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사우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성당은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왼쪽 협실은 거경재(居敬齋), 오른쪽 협실은 집의재(集義齋)라 하며,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강론장소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동재(東齋)인 양정재와 서재(西齋)인 보인재에는 각각 연못과 애련헌·영매헌이 있다.

이 서원은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2월 중정(中丁)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소장 전적은 『

 어정오경백편(御定五經百編)』·『고려사』 등 59종 317책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1만 4,500여 평, 대지 6,000평,

임야 1.5정보 등이 있다.

 

- 민족문화대백과 -

 

 

정여창(鄭汝昌,

 

1450년

음력 5월 5일1504년)은 조선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작가이다.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나 그해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배소에서 사망한다. 그 뒤 갑자사화부관참시된다.사후 복권되고, 중종조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문묘에 종사되었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학역재 정인지, 하성위 정현조, 정숭조, 선조임금의 생모 하동부대부인은 그의 일족들이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이관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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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두 정여창은 1450년 음력 5월 5일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정복주(鄭復周)이고 아버지 함길도병마우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정육을(鄭六乙)과,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인 어머니 경주 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판종부시사 정지의(鄭之義)의 증손으로, 그의 고조부 정유는 병조판서 정익의 동생으로, 할아버지 정복주는 세조 때의 재상 정인지와 8촌으로 당내간이었다. 아버지 육을은 세조의 부마 정현조, 하남군 정숭조 등과 10촌간이었다.

고려

문하시중 정도정의 17대손으로 할아버지 복주(復周)는 조선 태종 때에 삼사(三司)를 지내고 효행이 뛰어나 효자정려문(孝子旌閭門)을 받았으며, 아버지 정육을이시애의 난 당시 병마우후(兵馬虞候)로 출전하여 이시애 군과 결사항전하던 중 전사하고, 사후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의 녹훈(錄勳)을 받고 한성부좌윤에 추증된다.

 

 

8세 때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부임한 아버지 정육을을 따라 수행하니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집안을 창성하게 할 인물이라 칭송하였다. 일찍이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그 시신을 찾아서 예장하자 세조가 정육을의 공을 가상히 여겨 정여창에게 아버지의 직책[1]을 제수하였으나 고사하였다.

 

 

22세 때부터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었다.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다가 1490년(성종 21) 학행으로 출사하여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다.그해 가을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합격, 예문관 검열(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設書)를 지냈다. 당시 세자사부의 한사람으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곧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그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연산군 1년(1495년)에 외직인 경상도 안음(지금의 안의면) 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유배와 최후

 

사림파

들의 평소 폐비 윤씨 복위 반대를 못마땅히 여긴 연산군무오사화로 사림파를 일망타진하려 한다.

1498년

(연산군 4년) 무오사화김일손 등의 사초가 문제되어, 국왕 연산군의 스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직 문인이라는 이유로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역의 청년들과 학동들을 데려다가 성리학을 가르치고, 지역의 유지들을 만나 한성부와 시국담론, 시문을 주고받으며 변방 지역에도 학문과 문물을 전파하였다.

1504년

종성 유배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4세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자 문인들과 유림 동료 친지들은 함경도 종성에 가 두 달에 걸쳐 그의 시신을 고향 함양군까지 옮겨와 장사하였다. 장지는 남계서원뒤 승안산 기슭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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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정비각

 

 

 

 

 

 

 

 

 

 

 

학통상으로는 정몽주의 학파였다. 학맥상으로는 백이정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으로 이어진다

수리에 능했는데 '한훤(寒暄=김굉필(金宏弼))은 이(理)에 밝고, 일두(一蠹=정여창(鄭汝昌))는

수(數)에 밝다.'는 평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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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오르는 길

 

 

 

 

사당구역

 

 

 

 

 

 

 

 

 

 

 

 

 

 

 

 

사당을 지키고 선 흰색 배롱나무꽃이 그렇게 청아할 수 없었다.

 

 

 

 

 

 

 

 

 

 

 

 

 

 

 

 

 

 

날씨가 호랭이 물어가게 더운고로 끼니 해결하기도 만만찮은 여행.

식당 앞 정자에 지역민 몇 사람이 모여있기에 물었다.

 

"개평마을 말고 일두 정여창 선생에 관한 곳이 근방 어디에 또 있습니까?"

 

 

"즈~~쪽 옛날 길을 따라가면 '냉개서원'이라고 안 있씁니꺼?"

 

냉개서원...? 무슨 말인지 몰라도 찰 냉(冷)으로 해석하니 일단 반가웁고...

잠시 머릴 굴리자니, 아항~~ ! 남계서원을 말하는게로구나

 

함양 개평리 일두 정여창 고택을 찾은김에 고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청계, 남계 쌍둥이 서원을 찾는다.  두 서원이 나란히 붙어있다는 사실자체가 흥미롭다.

 

무오, 갑자, 기묘, 을사.

 

청계서원의 탁영 김일손이나 남계서원에 사액된 일두 정여창 할 것 없이 조선조

 4대 사화(士禍) 가운데 하나인 연산군조 1498년 무오년의 사화'를 피하지 못한 인물.날씨도 무덥고 자판 두드리기도 지겹고 이것 저것 퍼 나른김에 아예 훈구파 [勳舊派]에 대한

백과사전 내용까지 퍼날라 복습이나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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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양반관료층 내부에 형성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관학파라고도 한다.훈신(勳臣)·훈구대신·훈구공신 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조선 초기 세조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세조의 측근으로 등장하여 그 이후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는데, 이는
정치변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공신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즉 1453(단종 1)~71년(성종 2)의 약 20년 동안 정난
(靖難)·좌익(佐翼)·적개(敵愾)·익대(翊戴)·좌리(佐理)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그뒤에도 1506년 중종반정에 따른 정국공신
(靖國功臣)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공신으로 거듭 책봉됨으로써 중요한 정치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때로 군주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사림파(士淋波)와 정치적 갈등을 빚어 여러 사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은 여러 면에서 지적되고 있지만, 대체로 향촌통치의 방법을 둘러싸고 관권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하려는훈구파와 사족 중심의 지배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 사림파 사이에 나타났다. 흔히 훈구파는
사장(詞章)을, 사림파는 경술(經術)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양 세력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즉 훈구파나 사림파는 모두 동일하게
성리학배경으로 하는 지배계급으로 다만 성리학을 실천함에 있어서 서로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훈구파의 학문경향을 사장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초기 국가체제의 정비과정에서 경술보다는 현실적으로 사장을 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
 
훈구파는 사림파에 비해 이른 시기에 군현 이족(吏族)에서 사족화했으며, 정치적으로 사림파와 대립하여
훈구파라는 정치세력으로 이해되기 전부터 조선의 국가체제 정비에 깊숙이 참여했다.

한명회·권람·홍윤성·정인지·신숙주·조석문·정창손·최항·김국광·구치관 등이 이에 속한다. 이 계열에 주축이 된 관료들은

대부분 집현전을 거쳐 성장한 이들로, 그중에는 〈경국대전〉·〈동국통감〉·〈동문선〉·〈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왕조의 통치이념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한 인물도 많았다. 그러나 조선초의 집권인물들 모두가 훈구파는 아니고

대개 세조대 이래의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집권 정치세력이 훈구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즉 세조의 즉위를 도왔던 이들은

1453년(단종 1)에 정난공신, 1455년(세조 1)에는 좌익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세조의 즉위가 선양(禪讓)이라는 합법적인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이라는 기준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사육신 사건,

금성대군 역모사건 등이 일어났고 그결과 세조와 공신이 권력의 중심이 되는 정계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고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했으며 각종 특권을 독차지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토지를 강점하고 양인농민을 노비로 삼아 토지를 경작하게 하는 등 각종 경제적 이익을 독점했다.

 

이러한 훈구파의 지위는 세조대 후반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1467년에 세조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한명회·신숙주·김국광·노사신 등 일부 훈구대신들이 연루되었고, 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남이 등의 신진세력이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책록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남이는 태조의

외손이라는 강력한 배경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오위도총부총관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왕권강화책을 둘러싸고 남이 등의 세력과 종전의 훈구파 사이에 본격적인 갈등이 재연되어

남이옥사가 일어나게 됨으로써 정치세력의 변동이 일어났다. 남이의 옥은 남이가 한명회·노사신·김국광 등의 훈구대신을

제거하려고 모의를 했다는 유자광의 고발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옥사로, 이 사건으로 인해 남이 등의 새로운 세력은

제거되고 종전의 훈구파가 정치의 전면에 재등장했다. 더욱이 이들은 이 사건 직후에 익대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정치적 위치가 크게 강화되었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죽고 어린 성종이 즉위하자 훈구대신들은 더욱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1471년(성종 2)의 좌리공신 책봉 때 종전의 공신으로 책봉 받았던 자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들의 친인척이 다수 포함됨으로써 훈구파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아울러 훈구파는 1467년(세조 13) 이래 원상(院相 : 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무를 다스리는 직책)이 되어 특정한 직사를 갖지 않고도 정치에 깊이 관여할 수있는 기반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가문 상호간에 통혼관계를 맺음으로써 세습적으로 지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외척으로서의 지위도 확보했다.

 

독점적인 정치세력의 등장은 15세기 후반 이후에 왕권의약화를 가져오고 관료적 지배체제라는 조선 본래의 권력구조를

운용하기 어렵게 했다. 조선은 고려와 비교하여 지배층이 광범위하게 정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정치체제였다.

그런데 대단위 농장을 경제기반으로 한 훈구파가 권력을 독점하자, 이에 대해 이 시기 성장하고 있던 중소지주층인 사림파가

비판을 제기했다. 이러한 권력독점과 관료들의 사리사욕 추구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논리로 나온 것이 성리학적인 공도론

(公道論)을 제시했다. 이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치운영을 주장하면서,훈구파의 권귀적(權貴的) 성향에

대해 비판을 한 정치공세 논리였다.1476년(성종 7) 성종이 세조비의 수렴청정을 철회하고 원상을 폐지하여 친정체제를 구축

하면서 훈구대신들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강화되는 한편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림파계열은 새로운정치질서의 확립을 추구하고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정착시킴으로써 향촌민의 안정과 향촌지주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훈구파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사림파는 이전에 혁파되었던

유향소(留鄕所)를 복립하고자 했으며 훈구파는 맹렬하게 반대했다. 이러한 대립은 1483년부터 계속되다가 1488년에

유향소가 다시 생겼으나 이때의 유향소는 중앙집권체제의 보조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 복립된 유향소는 결국 이전과

같이 사림파의 세력기반이 될 수 없었다. 이에 사림파는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훈구파를 더욱더 비판해갔다. 이러한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은 결국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사화를 초래했다. 무오사화에서사림파가, 1504년

갑자사화에서는 훈구파가 각각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다가 1506년의 중종반정은 훈구파가 재기하는계기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배출된 정국공신은 이후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1515년(중종 10)을 전후하여 서서히 사림파가 언관 진출등을 통해 등장하여, 정국은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되었다.

그리하여 1519년(중종 14)에 훈구파가 주도한 기묘사화 가 일어났고 이후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하다가

외척인 김안로가 잠시 전횡했으며 김안로를 제지한 이후 다시 훈구파가 장악했다. 그런데 김안로일파의 제거에 외척들도

가세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훈구파는 사림파뿐만 아니라 외척세력과도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갈등하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로 인해 책봉된 위사공신 역시 외척에 의존한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명종 연간을 거쳐 이기와 같은 인물이 잠시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하더라도 점차 종전의 공신세력은 퇴조했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중요한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는 척신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사림파와 대립했던 정치세력으로서의 의미도 퇴색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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