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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묵방도담

제2회 묵방도담 (默芳道談) -3-

 

제2  묵방도담 (默芳道談)  -3-

 

  주제 : 풍류(風流)

 

답사 : 조계산 송광사 일원

도담 : <풍류란 무엇인가?>  <나의 풍류는?>

 

일시 : 2012년 2월 6, 7, 8 (연 3일간)

장소 : 전남 보성군 문덕면 천봉산 대원사(天鳳山 大原寺)

 

 

승보종찰 송광사

 

그것은 두 가지 사실에 연유한다.

첫제는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전 고려 때 보조 국사(普照國師 知訥)스님께서 정혜결사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는데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바로 송광사였다.

다른 하나는 지눌 스님의 뒤를 이어 송광사에서 열다섯명의 국사들이 출현하여 지눌과 함께

모두 열여섯명의 국사(十六國師)가 나와 한국 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송광사야말로 한국 불교 전통의 산실이요 또 그 전통을 잇고 있는 중요한 사찰이다.

 

/송광사 홈피에서 발췌한 내용/

 

 

능허교에 걸린 현판으로 해강 김규진의 서체이다.

 

현장 스님을 가이드로 모셨으니 도반 일행에겐 복이 터진 셈.

 

 

두 건물 모두 한 평이 채 안되는 면적으로 영가들이 목욕을 하는 공간이다.

오른편의 척주당(滌珠堂)은  남자 남자 영가가 구슬(珠)을 씻는(滌) 곳이고

왼편의 세월각(洗月閣)은 여자 영가가 달(月)을 씻는(洗) 곳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스몰사이즈의 맛배지붕과 공간 배치등에서 조상들이 남긴 해학의 美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보조국사의 고향수

보조국사 지눌이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해 지팡이를 꽂아 자라나게 했는데

당신이 세상을 떠나던 날 이 나무도 함께 생을 접고 말았다고.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찾을 때 이 나무도 다시 소생하리라는 예언을 남겼다는데...


 

냇물을 배개 삼은 침계루

 

 

 

 

 

인장과 인장함

 

석파 이하응의 난초도

 

자하 신위의 묵죽도

 

 

 

 

 

 

 

 

 

 

 

동안거 해제 이튿날 송광사 주지스님 방문

 

 

 

부도암을 오르며 부감한 송광사

 

부도암

 

부도암은 송광사 율원(律院)이기도 하다.

 

광원암 언덕을 넘는 도반의 그림자

 

광원암에 들어선 초호화(?) 갤러리 뒷간

 

불일암 삼나무 숲

 

불임암 대숲

 

 

 

 

 

 

 

  후박나무 아래 잠든 스승 법정선사의 내력을 들려주시는 현장스님. 

 

 

 

서암 방문

 

도담 : 풍류란 무엇인가

 

진행 - 봄날 송순현 (정신세계원 대표)

 

최근에 발행된 "한국지성사"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21세기 웰빙 풍류도의 새 바람이 분다. 풍류도는 하늘, 땅, 사람이 하나로 어울려 신명나는상생조화의

삶을 사는 것이다, 풍류도로서 이 시대의 병든 자연과 인간을 치유하며 인류평화의 새 시대를 연다.

풍류도를 구현하자.

 

 "풍류도의 삶" 은 어떤것인가? 

 

1. 하늘의 뜻,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삶.

2. 세상 만물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

3. 자기를 꽃피우며 더 큰 하나로 커나가는 삶.

4. 모두가 하나임을 깨닫고 상부상조 상생하는 삶.

5. 지성, 감성, 영성을 활짝 열어가는 자아완성의 삶.

6. 진선미의 본성으로 스스로 즐거워 하는 삶.

7. 창조의 정신으로 날로 새로워지는 삶.

8. 열림, 나눔, 어울림의 신명나는 삶.

9. 언제나 맑고 밝은 기운으로 빛나는 삶.

10. 모든것을 사랑하는 기쁨의 삶.

11. 대자연의 일원으로 우주와 합일하는 초월의 삶.

 

이것이 '풍류도'다 주장해서 문제는 없을 것으로 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이 종교, 종파, 신념을 초월한 '풍류 공동체 마을' 세우는데 있어

 위와 같은 사항 정도는 전제되어야  동체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풍류공동체 마을' 을 세우기 위한 보다 더 중심적이고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조옥경 //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도 맹점이 있다.

 

 

전택원 // 수영장에서 수영 선수가 빠져 죽을 수 있다. 수영장인 줄 알았는데 바다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넓은 의미의 공동체인 것이다.

 

이우원 // 우리민족이 뭉치면 엄청나게 강하다 그래서 주변국이 깨려고 한다. 한 번 해 보자는

정신이면 되리라 본다. 하늘의 보물을 빼 오는 영성을 기르면 된다.

 

김영숙 // 노후 대비 차원에서 짝을 만난다면 공동체를 고려해 보겠다.

 

정혜자 // 공동체가 인생의 목표이다.

 

양진숙 // 내가 수련하는 국선도 자체가 풍류도이다. 도담의 공동체라면 흥미가 있다.

 

김영숙 //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면 고려해 보겠다.

 

현장 // 지구상에서 이천오백년을 지속되어온 유일한 공동체가 불교다.

 

서정록 // 경제적 자립이 첫째다.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는 지금의 우리보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다.

 영성이 전제된 공동체라면 반드시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리라 본다.

인디언들 처럼 자기 정화 없이는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송순현 // 세계일화라는 21세기 풍류도 공동체를 만들어 보자.

 

김귀옥 // 풍류공동체가 존재한다면 한마디로 신명나는 삶일거라 본다.

 

최종수 // 단순 소박한 삶에 공동체 의미를 두어야하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만 잘 사는게 아니라 타인에게 빛을 주는 공동체여야 한다.

 

박도광 // 풍류로 세상을 건지리라.

 

육관웅 // 어항을 깨뜨려라. 그래야 삶이 자유로울 수 있다.

 

정만웅 // 헌 것을 버려야 창조되고 원형질이 보존될거라 본다.

 

전택원 // 국적인 공동체의 본질은 一心에 있다. 풍류 공동체는 결코 담론으로만

끝나선 안된다. 여러분들이 쏘아대는 화살을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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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번 특강의 주인공 검은호수 서정록님께서 발표하신 풍류에 관한 글이 있기에

참고 자료로 올려 봅니다.(웹 상에서 옮겨온 내용입니다.)

 


일찍이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이땅에 현묘지도가 있으니 곧 풍류라 한다.

가르침의 내력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포함삼교하고 접화군생하니....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선사(仙史)란 화랑의 역사를 말합니다.
(신라에서는 나중에 화랑을 국선(國仙)이라 불렀습니다.)
최근에 공개된 김대문의 <화랑세기>와 같은 책들이 여기에 든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진설명: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그동안 학계에서는 위의 최치원 선생의 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왔습니다. 즉 유불선이 들어온 후

 그들의 장점을 취합해 ‘풍류’를 만들어 어리석은 민중을 교화했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중국으로부터 유불선이라는 학문다운 학문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정신이 깨어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동안 역사 교과서에서 유불선 이외의 사상이나 정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으니 유불선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이러한 해석은

얼핏 매우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중국에서 유불선이 전래되기 전에는 이땅에 문화랄 만한 것이 없었고, 유불선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개화되었다는 시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벽화를 보면 당시 샤마니즘이 문화적으로

 중심적 위치에 있었음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즉 샤마니즘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천상계와 지상계가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공간에는 그에 상응하는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불선은

오히려 주변적이거나 부수적인 위치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샤마니즘적 세계관이 확고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현상은 백제, 신라,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땅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식의 해석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존의 해석에 의하면 유불선의 장점을 취해 이땅의 현묘지도인 ‘풍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불선의 위치는 퇴락을 거듭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문화든지

최번성기를 맞았을 때 그것을 배우고, 거기서 무엇인가를 취하는 것이지 이미 사양길로 들어섰을

때는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따라서 퇴락한 유불선의 장점을 취해 이땅의 새로운

풍류문화를 만들었다는 시각은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유교를 봅시다. 한나라 때 유교가 국교로까지 신봉되었지만, 곧 위진남북조 시대(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로 넘어가면서 한족(漢族)들은 북방민족들의 지배를 받아 강남(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내려가게 됩니다. 그와 함께 유교의 가르침은 땅에 떨어지고 지식인들은 노장풍의 은둔생활과

술과 시문으로 세상을 한탄하며 지내는 이른바 ‘청담(淸談)’, ‘현담(玄談)’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이 시대는 유교사에서 볼 때 가장 암흑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교는 애당초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이땅에 전래되었고, 그 후에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말까지 계속되었지요. 때문에 당시 일반백성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당나라의 불교는 엄청난 사원전답을 소유하게 되면서

타락할 대로 타락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므로 불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새롭게 백성을 교화한다는 생각 또한 맞지 않는 것입니다.
훗날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주자는 “불교 가지고는 새로운 문화를 일으킬 수 없다”
하여 대신 신유학, 즉 주자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도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중국의 신선사상이란 고대 동북아의 샤마니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초기 신선사상의 경전이었던 <태평경>에 고구려의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탔던 오룡거(五龍車)가 나온다든지, 부여의 샤만 등에 대한 언급 등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중국에도 샤마니즘이 있었습니다. 고대 동이족인 은나라가 샤마니즘 국가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漢)나라 때 유교가 국교로 되면서 샤마니즘은 사실상 잠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유교는 영혼의 세계와 내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자연히 샤만의 활동도 끊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중국의 민중신앙은 개인의 불로장생을 비는 기복의 형태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들의 이상이었던 ‘신선’이란 호흡법이나 연단술(鍊丹術) 등을 통해 불로장생의 도를 깨우친 사람을 말합니다.
결국 신선이 이상화되면서 일상의 행위 속에서 신성함을 찾는 고대의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지혜는 사라지고,
다분히 magic화한 기복적 도교 형태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유불선에서 장점을 취해 이땅의 현묘지도인 풍류를 만들어 민중을 교화했다는 기존의 해석은
당시의 상황을 무시한 채 억지로 갖다붙인 해석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퇴락해가는

유불선을 취합해 새로운 풍류도를 만든다는 것은 한마디로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있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치원 선생이 “포함삼교(包含三敎)”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이땅에는 현묘지도의 아름다운 풍류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국가가 생기고 계급이 생기고 물질의 욕망이 생기면서, 그리고 여기에 중국의 유불선이

덮어씌워지면서 그 아름다운 도가 점점 잊혀지고 말았다고 말이지요.
최치원 선생이 난랑비기에서 풍류에 대한 언급한 것은 바로 그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현묘지도가 유불선의 가르침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최치원 선생의 다음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니 이것은

자의 가르침과 같고 자연의 법을 어기지 않고 무위적인 삶을 살며,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나를 낮추고 침묵을 사랑하니 이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고 악행을 멀리하고 선함을 위해 힘쓰니

이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같도다.”

여기서 우리는 최치원 선생이 말하는 풍류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으니 바로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자연의 법을 어기지 않고

무위적인 삶을 살며,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나를 낮추고 침묵을 사랑하고
악행을 멀리하고 선함을 위해 힘썼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현묘지도의 아름다운 문화는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삶과 문화를 들고 있는

시베리아의 일부 소수민족이나 북미 인디언들의 삶의 내용과 거의 똑같습니다.
북미 인디언 역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며, 자연의

법을 거스르지 않고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나를 낮추고 모든 생명을 공경하며 침묵을 사랑하는 삶을 살며

늘 선함을 위해 노력하는데, 이것은 위의 최치원 선생의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치원 선생이 살았던 9세기 중엽만 해도 이땅의 아름다운 현묘지도,

즉 풍류의 문화가 민중들 속에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최치원 선생이

현묘지도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19세기 중엽에 태동된 동학은 바로 이런 풍류의 아름다운 도(현묘지도)가

 민중적 지혜의 형태로 오랫동안 보존되어 오다가 구한말에 꽃을 피운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생명문화자료정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