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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살롱 드 월봉

제 6회 살롱 드 월봉 salon de wolbong

 

               2011 문화재생생사업

           '월봉서원과 함께하는 즐거운 나날'

   

         -제 6회-

         고품격 문화살롱  salon de wolbong            주제 : 소쇄원과 호남 계산풍류

                    강사 : 전고필 : 광주문화재단문화관광진흥팀장

                              공연 : 나비연 : 노래하는 동화작가           

          - 장소 : 월봉서원 체험관

          - 일시 : 2011년 10월 14일 (금)

          _ 주최 :광주광역시 광산구  

          - 주관 : 교육문화공동체 '결'

          - 후원 : 문화재청, 광주광역시, (재)고봉학술원, 행주기씨문헌공종중, 광주향교여성유도회

 

 

 

-  무등산 원효사 -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조선 초기의 사찰을 얼마 정도 나열하고 있다.

무량사, 천복사, 개룡사, 원효사, 증심사, 규봉사, 금석사 등의 이름만 적혀 있다 선조 7 년인 1574 년의 기록인

고경명의 『유서석록 』에는 위의 사찰 말고도 훨씬 더 많은 사찰이 있음을 보여준다. 증각사, 불사의사, 염불암, 삼일암,

은적사,석문사, 문수암, 자월암, 입석암, 정불사, 상원동사, 금탑사 등이 실재했던 것으로 적혀 있다. 또한 불교의 전설까지 몇 개 기록

되어있으니, 3 일 동안 머무르면 도를 깨닫는다는 이유로 삼일암이라 하였고, 지공선사와 그 제자들이 수도하던 곳이어서 지공너덜

이라 한다 하고, 도선국사가 좌선했다는 곳을 지정하기도 하였다. 산의 정상은 세 봉우리인데, 동쪽은 천왕봉, 가운데가 비로봉,

서쪽은 반야봉이라 하여 산 이름이 불교적임을 보여준다. 원효대사의 창건으로 전하는 원사는 원효계곡의 이름까지를 전하며

그 시절 불교의 영광을 흔적만으로 전해준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그때만 해도 억불정책이 제 힘을 발휘하여 불교가 쇠퇴일로에 있을때인데, 하나의 산속에 20 여 개의 사찰이 있었다면,

그 이전 불교가 한창이던 때라면 어떤 정도였을까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염불암에 대한 기록으로는 조금 자세한

내용이 있는데, 암자는 본래 강월이라는 중이 창건하여 중간에 없어진 지 아래이다가 을해(1515)년에 일웅이 중창하고

임신(1572)년에 보은이 다시 수리하고 결하입정(結夏入定) 하는 작은 선방까지 만들었던 절이라고 하였다.

일웅을 위하여 눌재 박상이 중창기를 지어주었다는 내용은, 당시까지도 큰 스승들이 있어 불교문화가 그런대로

명맥이 이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세월은 역사를 삭이고 마는 묘법을 지녔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절은 단 두개.

원효대사의 창건으로 전하는 원사는 원효계곡의 이름까지를 전하며 그 시절 불교의 영광을 흔적만으로 전해준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 원효계곡의 문풍 -

 

하늘같이 높고 큰 것이 웅장하게 50여 지에 걸쳐 있는 무등산은, 세월과 역사에 따라 사방의 산발치마다에 마을을 열고,

한반도 남단의 광주, 나주, 장성, 창평,(이중에는 남평, 담양, 화순, 동복 등도 포함)의 문화적 중심을 이루며 문학과

의혼의 창조적 모체가 되어 높은 역사의식을 끌어오고 있다. 이 산의 주변에서는 16세기 사대부문화가 꽃을 피웠고,

16세기 말 부터는 정착하는 의병운동의 정신적 발단이 싹텄다.

 

무등산 상봉을 중심으로 물이 흐르는 큰 계곡은 넷을 들 수 있다.

동남쪽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영신계곡은 화순, 동복으로 빠져 '물염정' 경치와 적벽의 아름다운 풍광을 이룬다.

서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요추계곡을 따라 광주천의 상류에 접하며 폭포와 수목의 밀림을 낳아 뛰어난 등산로를만들었다.

서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증심사 계곡을 따라 광주천으로 들며 차밭과 의제의 남화풍을 낳았다.

마지막으로 원효사 위쪽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원효계곡을 따라 창평의 들판으로 들어가며 사림문화의 찬란한 문풍을 일으켰다. 다른 어떤 계곡과도 다르게 평야의 젖줄이 되었던 원효계곡으로 흐르던 물은 그처럼 많던

사찰의 존재를 짓누르고 새로운 사림정신의 유학사조를 일으켜 세워 무등산의 문화를 바꾸는 구실을 하였다.

 

계곡을 따라 넓은 평야를 낀 마을 마을마다에서 일어난 사대부층의 문화를 어떤 학자는 '계산풍류(溪山風流)라고 호칭하였다.

원효계곡에서 피었던 문학예술의 꽃을 호칭하기 위하여 '호남가단'(湖南歌壇)이란 말이 사용되었던 점은 시정되어야 할 것 같다.

향토적, 사림충돌의 시와 문을 통한 예술의 창조적 활동을 '가단'이라는 치우친 이름으로 규정짓기에는 너무 협소하고

포괄적인 개념인 '계산풍류'가 더 근접하리라는 이유 때문이다.

지명을 땄던 성산가단(星山歌壇) 또한 같은 의미에서 다시 고려해야 할 일이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 위 내용에서 "어떤 학자"는 '다산학'을 정착시킨 고 이을호 박사를 지칭한다는

고봉학술원 강기욱 선생님의 전언

 

 

 

 

흔히 조선 초기부터 분열했던 관학파와 사림파의 대립을 사회계층의 분열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호남지방 사림층의 형성도 그러한 전체 사회적 현상의 한 부면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상류층의 분열로 인한 정치적

비극들이 '사화'라는 이름으로 15 세기 말에서 부터 16 세기에 걸쳐 빈번히 일어났음을 기억하면, 향토적 사림층 형성도

대체로 15 세기 말에서 16 세기 동안에 있었던 시대적 현상이었다. 새로운 문화창조의 구심점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지방에 학사, 즉 서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였고, 다른 하나는 누정이 세워지고 있었음이다.

서원은 도학의 전당 구실을 하였고 누정은 문예의 산실 역할을 담당하였다. 16 세기 문예의 산실인 누정들이 원효계곡에

집중하여 창건되었음은 바로 게산풍류의 사림문화가 원효계곡에서 발달하였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누정 하나에도 몇 사람의 선비가 모이는데, 몇 개의 누정이 집중해서 세워졌던 그 곳에서

사림문화를 형성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호남 사림층의 문화창조는 서원에서보다 누정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누정이 서원보다 설립이 앞서고 있었으니,

대체로 호남에서의 서원 창건은 16 세기 후반에 시작되었으나 누정은 그보다 한 세대 이상,

 아니면 훨씬 이전에도 누정은많이 세워져 있었다. 원효계곡에 인연이 있던 인물들을 살펴 보자.

 

당시로서는 영광이지만 지금으로는 장성 삼계 출신인 지지당 송흠을 맨 먼저 꼽을 수 있다.

계산풍류의 문화창조에 그의 위치는 너무 크다. 계산풍류의 주인공들이 그의 문하생이기도 했지만 그와 종유했던

사람 중에는 계산풍류의 주인공들이 많았다. 학포 양팽손, 면양정 송순, 수찬 안처성 등이 그에게서 학문과 문학을 배웠다.

 

조선시대 사림파의 종장은 조광조였다. 그의 막역했던 친구가 바로 지지당의 제자 양팽손이었고, 조광조의 능주로의 귀양은

기묘사화라는 참극 속에 한양에 있던 호남인들이 낙향하거나 귀양오는 사태에 이르러, 사림들의 집중이 이루어졌다.

조광조의 또다른 친구 광양 출신 신재 최산두는 사인(舍人) 벼슬을 하다가 화순으로 귀양와서 은거하였다.

그 문하에서 하서 김인후가 나오는데 하서는 면앙정에게서 글을 배운 제자이기도 하다.

 

송천 양응정은 바로 양팽손의 아들이었다. 하서는 호남의 학문 종장이자 계산풍류의 주빈이었고, 송천도 시문으로 명망이

높은데다 대사성으로 큰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계산풍류의 주요 인맥인데다, 그 문하에서 송강 정철, 옥봉 백광훈,

고죽 최경창 등 뛰어난 시인들이 배출되어 계산풍류는제세다사들의 인물로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송강은 하서 문하에서도 글을 배웠다. 호나 시인의 최고의 자리는 눌재 박상이 차지하는데, 그의 아우 육봉 박우도

큰 이름이 있었다. 눌재와 육봉 형제의 문하에서 석천 임억령이 나오지만 면앙정도 또 그들의 문인이었다.

 

육봉의 아들 사암 박순은 영의정을 지낸 정치인이자 시인으로 계산풍류에 가담하여 원효계곡에 모아지는 사림층은

 더욱 두꺼워지기만 하였다. 눌재가 원효계곡에서 가까운 담양 부사를 오래 역임했던 일도 그 지역의 문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동문의 면앙정과 석천은 그들의 관력이나 문학적 업적으로 당대의 원효계곡 주인기기에

하등의 손색이 없었다. 원효계곡의 현장에서 태어나 그곳을 지키고 가꾸며 계산풍류를 성립시켰던 사람들이 또 있다.

 

사촌 김윤제와 서하당 김성원은 무등산 사람들인 김덕홍, 김덕령, 김덕보 등 3 형제들과 같은 집안 사람들로서

강을 마련한 장본인들이었다. 더구나 사촌은 송강을 길러 외손서로 삼았던, 나주 목사를 지낸 당대의 세력가였고

그의 당질인 서하당은 임억령의 제자이자 사위로 스승을 위하여 식영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계산풍류의 극치를 이루게 했던

사람이었다. 사촌의 재종질들이 김덕령 형제들인데, 이들은 계산풍류의 문학정신을 의병정신으로 바꾸어 의혼을 일으킨

장본인들이었다. 또 오래 전에 그곳에 터를 잡고 원효계곡의 이름을 빛내준 사람이 있으니, 소쇄원의 주인이던 양산보였다.

 

그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벼슬을 단념하고 문자 그대로의 계산풍류에 젖어 일생을 보낸 문인이자 시인이었다.

오늘날 전통적 정원의 모델격인 소쇄원이 그에 의해서 탄생되었던 점으로도 유명하나, 면앙정과는 인척간의 아우이고

하서 김인후와는 사돈간으로 하서가 원효계곡을 출입하던 발단을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로 현감을 지낸 고암 양자징이

 바로 하서의 사위. 이들 외에 광주와 나주의 명가 출신들 대부분이 모두 원효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니,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백호 임제 등이 그들이었으며, 그들은 학문과 시로 일세를 누볐다. 담양 부사를 지냈던 해남 출신의

미암 유희춘도 그곳을 찾았고, 강진에 우거했던 청련 이후백도 게산풍류에 가세하였던 명인이었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 아래는 17세 소년 정다산이 무등산에 올라 읊은 詩다 -

 

 

모두가 우러러보는 서석산

산의 정상에는 묵은 눈이 서렸구나.

 

태초의 형태를 바꾸지 않아

그냥 그대로 가파르고 헌걸차네.

 

모든 산들은 섬세한 모습 자랑하나

까까이고 닳아서 뼈마디만 보여주네.

 

오르려면 아득하여 길이 없더니

멀리 올라야 낮은 곳을 알리라.

 

표나는 행위야 뚜렷해서 쉬이 보여도

지극한 덕은 가려져 구별 어려운 거.

 

부피 큰 뭉텅이 모습이 다 좋아서

통째로 쌓아두고 한톨인들 날리기 아꼈네.

 

뇌성치는 비바람에도 까까이지 앟아

삼가 하늘이 준 모습을 보전하였네.

 

자연에는 구름과 안개 있는 거라

때로는 저 아래 땅의 열기 식히네.

 

 

 

 

 

아흔 살의 장수를 누렸던 면앙정 송순은 김인후, 기대승, 양응정, 고경명 등 20 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27 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높은 벼슬을 지내고 퇴관한 87 세 때에, 급제 60 주년인 회방(回榜)을 맞았다.

그 날 면앙정에서 회방연을 마치고 정자 아래로 내려올제 정철, 고경명, 기대승, 임제 네 사람이

 스승의 가마를 메었다는 전설같은 미담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많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바.

 

한말의 대문호 영재 이건창은 보성에서 귀양이 풀려 귀경하던 중, 면앙정에 올랐던 적이 있다.

흥에 겨워 시를 읊었는데,  수 많은 시인들의 수백 수의 시 중에서도 면양정 시의 압권이라는 평이다.

 

 

송공의 명덕(名德)을 생각케 하니

향국(鄕國)의 풍류가 한 시대에 풍성했네.

 

정자는 의연하게 강 위에 있구나

가마끈 그런 분들이야 세상에 우뚝했소.

 

산빛은 멀고멀어 물은 천 굽이로 꺾이고

들에 비친 그림자 질펀하여 사방으로 하늘 드리웠네.

 

쳐다보고 굽어보다가 부질없이 서글퍼짐은

오늘 누가 내 가마 메주고 나는 또 누굴 메줄꼬

 

 

 

 

- 풍암정(楓岩亭) -

 

원효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물줄기에 첫 번째로 들어선 정자로 김덕령의 아우 김덕보가 주인이었다.

풍암은 그의 호이기도 하지만 바위주변으로 무성한 단풍나무언덕에서 연유한 말이기도 하다.

무심한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님을 따라 현장학습에 나선 중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풍암정  원효계곡 바위틈에 자라난 덜꿩나무 열매.

처절하게 붉은 색감이 김덕령의 절명시를 떠올리게 한다.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川)없는 불 일어나니
끌물 없어 하노라.
 

 

 

 

-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촐한  풍암정. -

 

 

謾詠

풍암 김덕보

 

 

晩結楓崖屋數間 巖前脩竹溪重巒

단풍나무 언덕위에 두어 칸 집 지으니 바위 앞엔 대나무 푸르고 뒤로는 산봉우리 겹겹이 둘렀네

 

 

向陽簷牑三冬暖 臨水亭臺九夏寒

창문 남쪽을 향해 한겨울에도 따뜻하고 물가의 정자 한 더위에도 차겁네

 

靈藥每從仙侶斲 好書時借野人看

영약 구하려고 신선따라 땅을 파고 좋은 책은 야인들이 빌려다 본다.

 

 

捿身自有安閒地 何用蓬壺海外山

이 곳에 저절로 편안한 삶이 있는데 어찌 바다건너 봉오산을 찾을까 

 

 

 

 

  `풍암정사(楓巖亭舍)`라는 현판과 함께 정홍명의 `풍암기`를 비롯 임억령 고경명 안방준

그리고  풍암 자신 등의 시와 글이 판각되어 걸려 있다.

 

 

 

 

 

木益蒼蒼石益奇 洞天無地不幽姿나무는 창창 돌은 기기 동천이야말로 유수한저

 

偶來梅影橫斜處 閑看銀河倒掛時

매화꽃 그림자 빗긴 곳 찾아와 한가롭게 은하수같은 폭포를 보고있네

 

孤竹添君更自奇 玉妃傍侍有餘姿

그대에게 더 많은 외로운 대숲 절로 절로 기특한데, 곁에 모신 옥 같은 여인 자태가 남아있어

 

惜無林表千峰月 照見山盃瀲灔時

아쉬워라 숲 밖 일천봉우리 달 빛, 산 그림자 넘실거린 술잔에 비추일 때 볼 수 없어라.

  

- 제봉 고 경 명 -

 

 

 

贈金楓巖德普 

풍암 김덕보에게 주다 

 

安邦俊

 

故里親朋問幾人  

옛 마을 친구가 몇이나 남았는가

與君朝暮往來頻  

그대와 아침 저녁으로 자주 만났네

竹床暇日淸談會  

죽상에서 한가롭게 나누던 맑은 얘기

關洛秋風白髮新  

관중·낙양에 가을 바람 부니 백발이 새롭네

雲雨世情羞管鮑  

비·구름 같은 세상 인정은 관포에게 부끄럽고

漆膠心事笑雷陳  

칠·아교 같은 마음은 뇌진이 비웃는구나

寄語懶病楓巖子  

게으름이 병이라 하던 풍암 그대는

終始鞱光學養眞  

시종 빛을 감추고 참된 본성을 길렀구려

 

 

관포 ;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끈끈한 우정

뇌진 ; 후한(後漢)의 뇌의(雷義)와 진중(陳重) 같은 우정이 대단히 두터운 사이

 

 

 취가정(醉歌亭)

 

 

 1890년 김덕령 장군의 후손 난실 김만식과 친족들이 충장공의 성장지에 지었다. 6.25로 불타버린 것을 난실의 후손인 김희준과 친족들이 1955년에 중건하였다.

정자의 이름을 취가정이라 한 것은 권필의 꿈에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이 술에 취해 나타나 서로 시를 나누었는데

외로운 혼을 달래기 위한 "취시가"를 읊은 데서 유래된다.

 

 

 

 

호남 사림층의 문화창조는 서원에서보다 누정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원효계곡에 인연이 있던 인물들을 살펴보자. 당시로서는 영광이지만 지금으로는 장성 삼계 출신인 지지당 송흠을

맨 먼저 꼽을 수 있다. 계산풍류의 문화창조에 그의 위치는 너무 크다. 계산풍류의 주인공들이 그의 문하생이기도 했지만

그와 종유했던 사람 중에는 계산풍류의 주인공들이 많다. 학포 앵팽손과 면앙정 송순 및 수찬 안처성 등이

그에게서 학문과 문학을 배웠다. 조선시대 사림파의 종장은 조광조였다. 그의 막역했던 친구가 바로 지지당의 제자 양팽손이었고,

조광조의 능주로의 귀양은 기묘사화라는 참극 속에 한양 있던 호남인들이 낙향하거나 귀양오는 사태에 이르러, 사림들의 집중이

이루어졌다. 조광조의 또 다른 친구 광양 출신 신재 최산두는 사인 벼슬을 하다가 화순으로 귀양와서 은거하였다.

 

 그문하에서 하서 김인후가 나오는데 하서는 면앙정에게서 글을 배운 제자이기도 하다.

송천 양응정은 바로 양팽손의 아들이었다. 하서는 호남의 학문 종장이자 계산풍류의 주빈이었고, 송천도 뛰언난 시문으로

명성이 높은데다 대사성으로 큰 문명(文名)이었으며, 계산풍류의 주요 인맥인데다, 그 문하에서 송강 정철, 옥봉 백광훈,

고죽 최경창  등 뛰어난 시인들이 배출되어 게산풍류는 제제다사들의 인물로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송강은 하서 문하에서도

글을 배웠다. 호남 시인의 최고의 자리는 눌재 박상이 차지하는데, 그의 아우 육봉 박우도 큰 이름이 있었다.

 

눌재와 육봉 형제의 문하에서 석천 임억령이 나오지만 면앙정도 또 그들의 문인이었다. 육봉의 아들 사암 박순은 영의정을 지낸 정치인지자 시인으로 계산풍류에 가담하여 원효계곡에 모아지는 사림층은 더욱 두꺼워직만 하였다. 눌재가 원효계곡에서 가까운

담양 부사를 오래 역임했던 일도 그 지역의 문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동문의 면앙정과 석천은

그들의 관력이나 문학적 업적으로 당대의 원효계곡 주인기기에 하등의 손색이 없었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환벽당(環碧堂)

 

나주목사 김윤제가 고향으로 돌아와 건물을 세우고, 교육에 힘쓰던 곳이다. 전에는 ‘벽간당’이라고도 불렀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볼 때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다시 세우면서 가운데 2칸은 방으로 하고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가 걸려 있으며,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가현판으로 걸려있다.

환벽당 아래로는 자미탄이 흐르고 조대(釣臺)와 용소(龍沼)가 자리한다.

 

 

 

 

원효계곡의 현장에서 태어나 그곳을 지키고 가꾸며 계산풍류를 성립시켰던 사람들이 또 있다.

사촌 김윤제와 서하당 김성원은 무등산 사람들인 김덕홍, 김덕령, 김덕보 등 3 형제들과 같은 집안 사람들로서

강을 마련한 장본인들이었다. 더구나 사촌은 송강을 길러 외손서로 삼았던, 나주 목사를 지낸 당대의 세력가였고

그의 당질인 서하당은 임억령의 제자이자 사위로 스승을위하여 식영정이라는 정자를지어 계산풍류의 극치를 이루게 했던

사람이었다. 사촌의 재종질들이 김덕령 형제들인데, 이들은 계산풍류의 문학정신을 의병정신으로 바꾸어 의혼을 일으킨

장본인들이었다. 또 오래 전에 그곳에 터를 잡고 원효계곡의 이름을 빛내준 사람이 있으니, 소쇄원의 주인이던 양산보였다.

그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벼슬을 단념하고 문자 그대로의 계산풍류에 젖어 일생을 보낸 문인지자 시인이었다.

 

오늘날 전통적 정원의 모델격인 소쇄원이 그에 의해서 탄생되었던 점으로도 유명하나, 면앙정과는 인척간의 아우이고

하서 김인후와는 사돈간으로 하서가 원효계곡을 출입하던 단초를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로 현감을 지낸

고암 양자징이 바로 하서의 사위였다. 아들 이외 광주와 나주의 명가 출신들 대부분이 모두 원효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니,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백호 임제 등이 그들이었으며, 그들은 학문과 시로 일세를 누볐다. 담양 부사를 지낸

 해남 출신의 미암 유희춘도 그곳을 찾았고, 강진에 우거했던 청련 이후백도 계산풍류에 가세하였던 명인이었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 환벽당 앞을 흐르는 자미탄과 용소 -

 

 독수정, 소쇄원을 비롯, 풍암정 식영정, 환벽당,  면앙정, 서하당 등 누정문화의 정수가 모여  흐르는 자미탄.

물가에 자미목(목백일홍)이 줄지어 섰대서 자미탄이라 한다던가...

이곳에서 지난 1590년에 있었던 "성산계류 탁열도" 행사가 재현된다고.

 

 

 

- 초대의 글 -

 

오곡이 풍성한 가을 광주문화재단에서

계산풍류 문화의 중심 환벽당 앞 용소에서 1590년 선비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자리해주셔서 선조들의 향기를 함께 느껴주시기 바라옵니다.

 

2011. 10. 12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 노 성 대

  

일시 : 2010년 10월18일(화)  13;00 ~ 16:00

장소 : 광주광역시 충효동 환벽당 일원, 전남 담양군 식영정 일원

 

내용 : 조선선비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모습 재현

 

 

 

 

- 호남 계산풍류의 진원지 소쇄원 청죽길 -

 

기묘사화 10 여 년 뒤인 1530년에 양산보가 세운 소쇄원은 계산풍류를 일으킨 맨 첫번째의 정자였다.

 소쇄원의 '소쇄'는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 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깨끗하고 시원함을 뜻한다.

 자연계류를 중심으로 자연적인 비탈면의 일부를 계단 처리해 건축물과 첨경물을 배치하고있다.  기능과 공간의 특색에 따라

4곳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애양단(愛陽壇) 구역은 원림(園林)의 입구이면서 계곡 쪽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오곡문(五曲門) 구역은 오곡문 옆의 담밑 구멍으로 흘러드는 계류와 그 주변에 암반이 있는 공간인데,

오곡이란 암반 위에 계류가 '之'자 모양으로 5번을 돌아흐른다는 뜻이다. 제월당(霽月堂) 구역은 오곡문에서 남서방향으로 있는

직선도로의 위쪽으로 주인을 위한 사적 공간이다. 광풍각(光風閣) 구역은 사랑방 기능을 가지고 있다. 소쇄원은 입지선정,

공간구성, 첨경의 적절한 도입, 풍류적인 분위기 조성 등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  신묘년 제월당의 가을 -

 

 

 

지봉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근래의 시인들은 대부분 호남에서 나왔다고 하며, 대표적인 시인들을 열거한다.

박상, 임억령, 임형수, 김인후, 양응정, 박순, 최경창, 백광훈, 임제, 고경명 등 그야말로 한 시대의 시인묵객 들이

원효계곡에 총 집결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광풍각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오곡문 돌담 아래를 지나는 계류가 암반을 타고 흘러와 폭포를 이룬다.

우측 초가 정자는 대봉대로서 소쇄원을 찾는 이들이 전경을 감상하며 마음을 여미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사진 속 전경이야말로 소쇄원 원림의 핵심을 이루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호남의 사정에 밝던 허균은 중종시대에는 호남 출신의 인재가 무척 많았다고 하면서 대표적인 사람들을 열거한다.

박상 * 박우 형제, 유성춘 * 유희춘 형제, 최산두, 양팽손, 나세찬, 임형수, 김인후, 임억령, 송순, 오겸, 박순, 이항, 양응정,

기대승 등 기라성 같은 인물 들이 계산풍류의 한 시대를 풍미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건재 김천일이 이항의 문인으로 학통을 이었던 점이나, 향촌의 양산보, 김윤제, 김성원 등도

시와 문으로 대단한 명성이 있던 것 까지를 합하면 더 넉넉한 정도였고, 거기에 호남과 인연이 있던 정철이나 이후백 등이

가세하여, 최고 수준의 사림문화를 형성할 여건이 갖추어졌다. 소쇄원, 면앙정, 식영정에는 호남의 사림들의 대부분이

출입하였고, 그들이 지닌 개인적인 명성이나 관인으로서의 지위 및 시문의 우수성으로 한 시대를 대표할 문학과 문학정신을

이룩하였다. 사화라는 지식인 탄압에 분개하던 호남의 지식인들이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하여, 세력을 이루고 경치좋은

강산이나 산수를 찾아 정자나 초당을 짓고, 문우들과 어울려 사림정신, 즉 선비정신을 다졌던 것이 원효계곡

계산풍류의 본래적 면모였다고 파악된다.

 

이러한 사림정신, 즉 선비정신은 집단성을 통하여 확고하게 굳어졌고 지식인이라는

동일 계층성과 동료 및 사우, 같은 관인계층이라는 요소가 결합하여 집단의지의 표출도 가능하게 되었다.

시대적 갈등이 심화되고 나라에 국난이 다가오자, 고양된 선비정신은 의병으로 결집하는 집단성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들이 닦은 선비정신은 의분을 촉발하여 의병의 선봉장이 되었던 사람들이 계산풍류에 참여했던 부류에서 많이 나왔음은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고경명, 김선일, 김덕령 등이 그중의 대표자들이었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 제월당 구역으로 들어서는 문 -

 

누정이 건립되던 때로부터 비슷한 시기에 호남에도 서원의 설립이 시작되었다.1564 년에 순천에 도학자 김굉필을 모시는 옥천서원이 세워지고, 1570 년에는 능주에 조광조를 모시는 죽수서원이 세워졌다. 이 무렵 조선왕조는 중기에 접어들면서 사화가 그쳐

계산풍류의 여건은 상쇄되었으나, 사회적 모순의 노정으로 다른 양상, 즉 사림파 내부 반목과 대립이 치열해지는

동 * 서 분당이라는 세력대결이 1575 년에 일어났다. 식영정 4 선이라던 임억령 * 김성원 * 고경명 * 정철 그중의

좌장이자 스승이던 임억령이 세상을 뜬지 10 여 년째였다. 그리고 그곳의 학문적 종장격이던

김인후와 기대승도 타계한지 오래이고, 양산보, 김윤제 등도 세상을 떠났다.

 

원효계곡의 계산풍류는 80이 넘은 송순의 면앙정에서 고경명, 정철, 임제 등이 모이고, 박순, 이후백 등이 종종 찾아오는 도에

그쳤다. 시와 학문이 함께 있던 계산풍류는 노장파 학자들의 죽음으로, 학문보다는 문예쪽으로 치우치게 되었고, 러한 후세의

역반응으로 이곳 저곳에 서원의 창설이 잦아지고 있었다. 1577 년에는 태인에 이항을 모시는 남고서원이 워지고, 1578 년에

는 이언적 * 송인수를 모시는 화산서원, 광주에는 기대승을 모시는 월봉서원, 1579 년에는 남원에 진을  모시는 창주서원이

세워졌다. 이 서원들은 대체로 동 * 서 분당에서 서인쪽에 가담한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세워졌는데 인쪽에 가담한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1584 년 나주에 경현서원이 세워지면서 호남지방에서의 사림파의 분열과 대결이  첨예화되기 시작하였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 제월당 -

 

1582 년에 원효계곡의 원로 송순이 타계하자, 스승이 없는 원효계곡에는 고경명의 발길도 끊기고, 당쟁에 분이 치민

임제도 세상을 등지고 유람길에 나섰다가 얼마 후 타계하고 말았다. 이제 원효계곡 계산풍류의 좌장은 정철이 차지하게 되었다.

낙향한 정철의 위세는 대단했다. 직제학, 승지, 강원, 전라, 함경 감사를 지냈고, 예조팜판,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뒤,

막강한 권력의 대사헌에 있다가, 서인의 대표라는 이유로 동인들에게 탄핵을 받고 돌아온 것이 1585 년의 일이었다.

 

양산보의 손자들, 양응정의 아들들이 그를 찾으며 제 2 세대로 바뀐 계산풍류는 예전과는 달라지고 말았다.

객으로 찾던 식영정 * 면앙정 * 환벽당을 버리고 자신의 정자  송강정을 돌아온  그해에 새로 짓고, 본격적인 자신의 문객들을

모아들여 질탕한 세속의 풍류가 거나하였다. 과격하고 호탕했던 그가 권력을 읽고 재기의 그날을 기다리던 동안의 세월인

울분의 4 년간은 시문으로 보내는 시간에 주색을 가까이 하던 시간까지 끼이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 "처사양공지려"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

 

박순이 한창 원효계곡의 계산풍류에 가담하던 때에, 그와 친교가 두텁던 한 학자는 계산풍류에 가담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다름 아닌 조행과 학덕으로 나주 일대의 학문적 종장이던 곤재 정개청이었다.

신분도 높지 않고 벼슬도 보잘것 없던 곤재는, 구름처럼 모여들던 제자들과 학문을 연마하고 전수하느라 계산풍류에는

발을 끊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 김성일과 서원을 세웠던 나덕명, 나덕준, 나덕윤 등의 형제들이다.

경현서원을 중심으로 나주일대의 문풍이 성대해지면서 곤재의 지위는 높이높이 부상되고 오래지 않아

햑행으로 천거받아 곡성 현감까지 지내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계산풍류를 즐기던 시대에 비해, 당파싸움으로 탄핵받아 고관대작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타의에 의해 계산풍류를 즐겨야 했던, 그래서 세속풍류로 변했던 정철 일파를 마땅치 못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곤재 쪽의 기록에, "정철은 주색에 창광하며 예법을 능멸하고 있으니, 화남 사람으로 구애받거나 검소한 행위를 싫어하면서 풀어놓고 지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떼로 몰리며 그를 따랐다. 그들이 청담(淸談)을 주되는 사상으로 여기자 습속까지 크게 파괴되었다" 라는 대목이 있다. 1585 년의 저작으로 명기된

곤재의 "동한절의진송청담설"은 그러한 세태를 경계한 글이었다.

 

계산풍류의 사림문화가 변질되던 과정에서 나타나는 병폐를 경고한 짤다란 글 한편은 혹독한 필화사건을 만나, 끝내는 호남에

학맥이 단절되는 처절한 위기에 봉착케 하고 말았다. 누구를 지칭하지도 않고 시속의 한 풍조를 비판한 정당한 내용의 글을,

자신을 비방한 내용으로 받아들인 정철은 적대감에 휩싸여 송강정을 찾는 문객들의 집단상소를 통해, 반대입장에 있던

동인일파를 포함하여 경현서원 주변의 학자들을 처참하게 짓밟는 기축사화를 일으키게 된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 오곡문(五曲門) 구역 -

 

곤재의 글은 한 개인을 비방한 글이라기에는 수준 높은 논리의 전개로 세속을 경계한 내용이었다.

"성리의 학문과 예법에 따르지 않는절의란 중화(中和)가 아니다" 라고 하고,

"편파적인 절의나 청담은 나라를 망칠 우려가 있다." 라는 내용은 정당하고 올바른 논설이었는데, 배절의설(背節義設),

즉 절의를 배척한 내용으로 왜곡하여, 절의를 배척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죽음을 당하게 했던 것이다.

고산 윤선도가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학자라고 한 곤재가 그렇게 당하였고, 박순이 문무를 겸비하여 나라를

건질 학자라고 칭찬했던 정개청도 글 한 편을 짓고 호남을 초토로 만드는 불행을 당하였다.

 

정철이 송강정에 있던 4 년째인 1589 년에 정여립의 사건이 터졌다.

홍문관 수찬이라는 요직을 지내며, 명성을 크게 얻은 전주 출신 정여립은 호남 사람들과 교유가 넓었다.

학자나 벼슬아치로서 그와 교유가 없는 사람은 별로 없었는데, 서인들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만들어 동인들 타도에 분주하였다.

정여립이 동인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터지자 송강정에 에 있던 정철은 일약 우의정에 발탁되어그 사건의 위관,

즉 재판장이 되어 4 년 동안 벼르던 칼을 마음껏 휘두를 기회를 맞았다. 동인쪽에 자잘한 사감이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결속하여 무고한 상소를 올렸으니, 호남에는 일대 지식인 탄압의 회오리가 소용돌이쳤다.

 

무고한 상소를 올린 호남 사람들은 대체로 정철의 문객들이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고,

계산풍류는 유종의미를 거두지 못하고 비극의 종말로 이어지고 말았다. 양산보의 손자들이 양천경 * 양천회, 양응정의

아들인 양산숙 * 양산룡 등과 문객 정암수 및 곤재에게 사감이 있던 나주의 홍천경 등이 상소를 올렸다.

역적과 내통이 있었느니, 역적의 집터를 보아주었느니 하고 고발했으나 끝내 사실이 아니어서 감옥엔 넣고 혹독한 고문을

 했지만 처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을 동원했던 것이 바로, '절의설'을 '배절의설'이라 주장하여

절의를 배척한 죄명으로 함경도로 귀양을 보냈고, 오래지 않아 곤재는 죽었으니 그들의 죄악은 하늘도 용서치 못할 것이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정송강이 휘두른 처참한 칼날의 여파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게 정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그 때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정송강 문중과는 혼인까지 불허한다는 얘기도 들릴 정도이니

기축옥사의 그림자는 세기를 뛰어 넘고 있는 것이다.

 

 

 박석무는그의 저서 "다산기행"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탄압은 당대에만 그치지 않고 그 후손과 문인들의 후손에까지 이어졌다.

탄압했던 쪽과 탄압받았던 쪽과의 대결은 반목과 질시를 계속해, 나라가 망할 때까지 두 계파에서는

학자다운 학자나학문다운 학문이 나오지 못했던 비운으로 끝나고 말았다.

시비가 가려짐 없이, 역사적 평가 없이 지금까지도 말썽인 채로 그대로 남아 있는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날 가사문학의 대업이라는 정철의 문학은 본디 스승이던 송순과 임억령의 시 내용을 거의 모방하였다는 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온갖 칭찬으로 시비까지 세워진 정철의 '성산별곡'은 임억령의 '성산동제영(星山洞題詠)이라는

시와 유사한 내용이 많은 것도 드러나 있다. 다만 비슷한 내용을 한글(국문)로 기록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그 의의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최고 최상으로 칭송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한문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내용의 진보성이나 역사성이

뚜렷한 것은, 송강가사말고도 우리 문학사에 얼마든지 있다.

 

문학은 문학정신이 살아 있지 않고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정치적 권력의 유지와 자신의 명망 유지를 위해 무참한 필화사건으로 지식인을 탄압한 문학정신이 정당한 것일 수는

절대로 없다. 계산풍류를 세속풍류로 전락시켜, 선비정신이나 문확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정철의 문학이 송순과 임억령의

문학정신을 게승했다고 여길 수는 없다. 문학정신과 선비정신을 제대로 계승한 사람들은 고경명이나 임제 및 김덕령

등이었다고 여겨진다 임제의 자주적 문학정신이 아직도 살아 있고, 임란의 국난에 분연히 의병장으로 일어선 고경명,

김덕령의 의혼은, 무등산 원효계곡의 계산풍류가 낳았던 긍정적 역사의식이었다.

 

한 지역의 학맥을 끊었던 죄과가 아직까지 치러지지 못함은 어떤 이유일까.

정철 일파가 역사적 죄를 면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정여립사건 바로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철은 배소에서

 풀려 왕을 호종하고 3 도의 체찰사까지 지내며, 왕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정암수, 홍천경, 양천회, 양산숙 등은

임진왜란때 의병에 참여함으로써 충신으로 변하여, 역사적 죄과를 책임져야 할 기회를 말살해 버렸다.

군왕시절에 임금에 대한 충성은 다른 죄를 용서받는 특혜였기에 그들의 죄도 모두 묻히고 말았다.

 

정철의 문학정신이나 역사의식은 아직도 제대로 평가되어 있지 않다. 해방 후 국문 위주의 문화가 주를 이루자,

국문가사를 창작했다는 공로만 하늘처럼 펑가받아 시비곡직이 가려지지 않은 채, 원효계곡 계산풍류의 주인공으로

자리잡아 식영정까지를 정철의 유적지로만 표시하고, 그에 대한 현양만 하는 우를 범하기에 이르렀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 김성원의 거처였던 부용당과 서하당 -

 

1545 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는 양심적 지식인을 혹독하게 탄압했던 사건인데, 벼슬을 버리는 지식이니 날로 늘어나면서

사림파들의 하향과 자연에의 은둔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1560 년에 세워지는 임억령의 식영정이나 김성원의 서하당도

 다 그러한 여건에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사회 상층부류들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양심적 지식인들이 낙향하자 누정에

모이는 사림층이 급격히 불어나고, 그로 인한 향토 사림층의 형성에 따라 계산풍류의 생성 여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대체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낸 그들이 세속에 합류하지 않으며, 선비로서의 품위와 위세를 지키는 일이야,

정자를 짓고 계산풍류를 즐기며 자기를 지키는 일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계산풍류가

제 자리를 잡았고, 경치 좋은 강산에 평야가 넓었던 원효계곡에 그 일군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 식영정(息影亭) -

 

조선 명종 때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는 정자이다 자미탄, 오늘날의 광주호를

조망하는 자리에 지어진 식영정(息影亭)은  노송, 배롱나무 등이 어우러진 경승지이다.

 

 

 

- 식영정에서 조망한 광주호 -

 

면앙정처럼 90 세가 넘어도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고매한 인격의 무등산 사람들이 지금도 있어야만 할 때다.

그때의 고결한 선비의 시혼이 압제를 통해 의혼으로 바뀌고, 반목과 질시가 탄압으로 변한 쇠사슬의 얽매임 속에서

무서운 저항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러한 저항심의 축적으로 무등산 원효계곡을 흐르던 물은 동학농민혁명의 불길로 피어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으로도 변했다. 4.19와 6.3 때의금남로를 누비던 함성과 투혼으로도 흘렀고,

5.18의 뜨거운 민중의지로도 발산되었다. 선비의 혼과 의혼을 담은 물은 흐르고 흐를수록 더 크고 덩실한 아들을 낳았기에

세계사적 의미와 사회과학의 용어로 주목받는 곳이 오늘의 광주다.

 

(박석무 저 "다산기행"에서 발췌한 내용)

 

 

 

제 6회 살롱 드 월봉을 주관하는 교육문화공동체 "결"  대표님의 인사.

 

 

 

오늘의 강사로 초대되신 광주문화재단문화관광진흥팀장  전 고 필님

 

"오마이뉴스"  "전라도 닷컴" 등에 맛깔나는 글을 쓰는 등,

수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이끌어내는 이 시대의 논객이자, 관광전문가요 보헤미안이라 불리우는 전고필님.

대인시장 프로젝트를 비롯, 광주비엔날레 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바 있다.

실제 소쇄원에서 기거한 전력의 소유자인 그가 말하는 "소쇄원과 호남 계산풍류"를  들어보기로 하자.

 

 

 

 

- 무등산은 불복의 산이다 -

 

지자체가 실시되면서 고전의 주해쯤은 표가 안나온다는 이유로 늘 뒷전으로 밀린 아쉬움 부터 토로 하는 선생.

 

"일련의 사업 중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는 중요한 사안들이 특정 문중찬양사업이라는 오해의 소지 때문에

단체장이나 의회의 협조를 얻어내기가 어렵다."

 

"일례로 장흥의 실학자 존재 위백규 선생을 조명하는 사업에 관련 지자체는 손을 놓고

오히려 타 지역인 전주대학팀이 학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장흥에 내려간 것은 어찌 보면 슬픈 현실인 것이다."

 

오늘날 영남학이 득세하고 호남학은 뒷전으로 밀리는 내력의 저변에는

영남 실세들의 지지기반을 바탕으로한 활발한 후원금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현실에도 한숨을 토해 놓는다.

 

"박석무 선생 저 "다산기행"을 읽으면서 슬픈 생각이 들었다."

"왜 호남사람들이 죽아야만 되는가? 내가 알고 있는 정송강에 대한 존경심은 분노로 바뀌었다."

 

"이성계가 무등산 산신에게 대업을 빌었으나 무등산은 결코 허락치 않은 불복의 산인 것이다."

"정도전의 권위로 담양 삼인산을 찾아가 겨우 허락을 얻어냈을 뿐, 지리산 역시 불복의 의미를 가진다"

 

 능주 귀향에 이은 40일만에 사약을 받고 스러져간 스승의 죽음앞에 

19세의 양산보가 받았을 충격이 소쇄원을 일군 바탕에 짙게 깔려있다는 말씀.

 

소쇄의 의미와 광풍과 제월의 어원과 유래에 이어 마침내 대봉대에 이른다.

귀하디 귀한 사람, 명징한 손님이 대봉대에 이르러 소쇄원 전경을 감상하며 쥔장의 심성을 살피게 한다고.

 

광풍각의 굴뚝이 아궁이 보다 낮은데다 굳이 계곡 쪽으로 위치시킨 양산보의 진의를 이렇게 풀이한다.

광풍각에 불을 지피면 연기가 계곡으로 깔리면서 마치 구름 위에 광풍각이 떠 있는 상태가 된다.

 

소쇄원의 바위와 돌은 인간의 뼈에 해당하는 것이요. 흙은 살점에 해당이라.

나무와 수목은 인간의 코요, 피에 해당하는 것. 숨을 쉬려면 안개와 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소쇄원은 계곡이 짧아 안개가 끼지 않는다. 그래서 광풍각의 굴뚝을 부러 계류 쪽으로 위치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계를 구현하기 위한 고도의 배려라는 말씀.

 

또 한 가지는, 굴뚝이 높으면 불이 잘 들어가 방이 너무 뜨겁게 된다. 그러면 다리를 뻗거나 눕고 싶어진다.

나태해 지는 자신을 경계하고 공부에 매진하라는 의미도 담겨있다는 설명.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예전엔 광풍각 앞 건너편에 물레방아와 디딜방아가 있어 일정 간격으로 '쿵 '소리가

나게 했는데 이 역시 졸음을 방지하여 공부에 매진하라는 특별한 의미로 해석하신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이르길, 나무와 꽃을 키우는 것도 사람을 키우는 것과 같다.

소쇄원 원림에 심어진 20여 종의 수종과 꽃 하나 하나에도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으며

적절한 배치를 통해 고도의 운치를 구현한다는 사실.

 

 연못으로 물이 흐르도록 이어지는 홈통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아 물이 아래로 떨어지게 한 것도

바위에 이끼가 자라도록 하기 위한 고도의 배려이자 사물을 키우는 심미안이라는 말씀.

 

오곡문의 외나무 다리는 급한 걸음을 경게하고 숨을 고르라는 뜻이자. 

피안의 세계에 당도함을 의미하는 이를테면 도가적 의미의 표출인 것이라고.

 

김덕령의 죽음은 무등산 일대에 백여개의 전설을 낳았다. 반대로 고경명의 죽음엔 아무런 전설이 없다.

그 까닭은 고경명의 죽음은 당대에 이미 의로움으로 추앙되었기에 전설의 여지가 없었지만,

김덕령은 역적으로 몰려 억울한 죽임을 당했기에 전설을 낳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80년 오월은 무등산 정신의 맥락 선상에 있다.

이런 바탕에 바로 계산풍류와 누정문화의 정신이 있는 것이다.

 

오늘의 살롱 드 월봉, 마지막으로 전고필 선생이 내린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소쇄원의 모든 것은 한 마디로 '처사정신'의 발로라는 것.

이 시대의 선비들이 소쇄원의 가치를 상세히 밝혀냈는 바,

 현재 소쇄원의 외형만 보고 소쇄원의모두를 진단하는 어리석음을 결코 범하지 마시라.

 

 

 

 

진지한 경청

 

 

노래하는 동화작가 '나비연'님의 공연

 

 

 

프로그램 안내문에 따르면 '나비연'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었다.

 

절제된 연주, 솔직한 목소리로 깊은 편안함을 선사하는 Bossanova  musician  Bossanova,

브라질의 삼바와 재즈가 어우러진 설레는 리듬의 아름다운 음악,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보사노바는 듣는이에게는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하게 들리지만 사실 상당히 지적인 짜임을 가지고 있으며, 기존의 '틀'에 대한 도전정신이 강하게 깃들어 있다.

 

 

 

1, 바람이 분다.  2, 나는 나비  3, 사랑밖에 난 몰라.  4, 갯바위

 

마이크도 사양한 채, 일체의 배경음을 깔지 않고 자신의 기타 연주에다 목소리를 싣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도 낭랑한 톤에다 속칭 뽕필(?)도 가미된 묘한 음색이었다.

노래에 피아노의 보사노바 리듬을 가미한다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나비연, 그녀의 노래는 많은 박수를 이끌어 냈다.

 

 

 

부디,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며 빠이띵 하는 나비연님이 되시길....

 

 

 

살롱문화의 진수 '자유토론' 시간

 

 

 

진지한 질문과 의견제시는 밤 늦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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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살롱 드 월봉의 주제는 "소쇄원과 호남 계산풍류"

 

살롱에 참석하기 전에 먼저 정갈한 마음으로 무등산 원효사부터 오른다.

 '계산풍류'를 논하는 자리에 참석하려면 먼저 주인공들이 살고 간 현장 학습부터 해야되지 않을까?.

 '무등의 정신'을 더 핍진하게 느껴보겠다는 생각에서다.

 

원효사 회암루에 올라 무등산을 바라 보지만 자욱한 운무로 인해 시쳇말로 아무것도 뵈는게 없다.

풍암정을 거쳐 산을 내려와 자미탄 언저리에 늘어선 계산풍류의 현장을 돌아 보면서

격동의 시대와 삶을 살았던 선현들의 체취를 유추해 보고서 살롱 현장인 월봉서원 생활관으로...

 

 

회를 거듭할 수록  알찬 내용으로 전개되어 가는 '살롱 드 월봉'

 

오늘의 초대 강사는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 전고필님,

처음엔 누구인지 전혀 몰랐으나 , 알고 보니 이런 저런 지면을 통해 진즉부터 친숙했던 인물.

 

굉장히 다이나믹한 사고의 소유자 임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자신감과 정열이 넘치는 모습.

 

좌충우돌이야말로 젊음에 대한 전매특허요 최대 매력 아니던가?

문화와 관광, 학술과 사진에 이르기까지 여러 다양한 부문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들었다.

 

살롱에 참석한 좌중에게 정중한 초대장을 드린다,

 "성산계류탁열도재현" 행사를 오는 10월 18일 환벽당 일원에서 연다는 내용.

당신이 재직하는 '광주문화재단'에서 행사를 주관하는 모양.

 

불문곡직,

'자미탄 용소'로 달려가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