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동헌 / 천주교 순교지 / 여산향교
- 전북 익산시 여산면 -
2011. 7. 18
여산 동헌
건축 년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시대 후기의 건조물로 추정된다.
건축양식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앞부분의 주춧돌의 높이가 뒷면의 주춧돌보다 높게 되었는데,
특히 좌측 전면의 3개의 주춧돌의 높이가 90㎝ 정도 되는 높은 것이어서
여기에 방이 한칸 마련되어 마루 밑으로 사람이 드나들며 불을 땔 수 있게 하였다.
여산 동헌 느티나무 전라북도 기념물 제116호
이 느티나무의 유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여산동헌과 주변에 7주의 대형 느티나무가 집중 분포되어 있음에 따라 동헌의 설치와 어느 정도 연간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여산은 전주에 속해 있다가 공양왕 3년(1391) 감무를 두고 낭산과 공촌, 파제 두 부곡의 권농사까지 겸임하였고,
조선 태종 2년(1402)에 여산현이라 하고, 세종 18년(1436)에는 원경왕후의 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함으로
조선 태종대에서 세종대에 동헌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식재되었을 것으로 보여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나무의 휴고 둘레는 4.5m, 높이는 22m이다.
저 앞에 보이는 동헌 담장 너머에 천주교 순교지가 자리한다.
동헌 옆으로는 여산에 부임하여 온 여러 관리의 선정비(善政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그리고 길 건너 여산 초등학교 주변에서 옮겨온 척화비(斥和碑) 등 9기의 비가 나열되어 있다.
전주 교구의 '제2 성지'라 불리는 여산 성지
호남 최대의 신앙 산맥을 이루는 것은 대둔산과 천호산을 기점으로 한다.
일찍이 복음은 이 두 산의 줄기인 금산(錦山), 진산(珍山), 고산(高山)에 전해져 수많은 교우촌들이 산골짜기마다 형성됐다.
병인박해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다.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다.
순교자만도 22명에 이르는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유명하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 사형(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했다.
"백지 사형이란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 시키는 처형 방법이었다.
여산 향교
주춧돌을 보아 하니 중수 이전의 건물은 꽤 컷던 것으로 보인다.
명륜당 건물 뒷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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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잠긴 여산 동헌 대문에 적혀있는 전화번호.
'때르릉 ~~~ 동헌 내부 좀 볼 수 있을까요?.'
"몇 분이시죠?"
'두 사람인데요'
" ..... "
좀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것인가 !
이 무더위 속에 여기까지 찾아와서 그저 담너머로 기웃거리고 말 순 없지 않은가?
천호산과 여산 일대를 돌아 보면 곳곳에서 천주교 순교지를 만날 수 있다.
팔순의 내 어머니께서 평생을 의지해 온 믿음의 무게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곳.
그런 동네이다 보니 상념이 남다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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