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20
/ 재가제자(在家弟子) 정찬주 작가가
법정스님의 수행처를 찾아 떠난 순례기행 /
불일암 가는 길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법정스님이 정찬주 작가에게 써 보낸 휘호/
무소유의 길
행복은 결코 맑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 하고 만족 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과 간소함에 있다.
/법정스님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또 한번 더 삼나무 숲길을 오르자 비로소 대숲이 나타난다.
허리를 바르게 세우고 사는 불일암 수행자들 같다
/ 작가의 저서 중에서 /
불일암 사립문
대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사립문 앞에는 섬돌이 놓여 있다.
사립문에 일렁이는 햇살처럼 시詩가 어려 있다. '눈 속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깨달음의 시다.
/ 작가의 저서 중에서 /
竹影掃階塵不動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
月輪穿海浪無痕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 하나 없네.
법정스님이 즐겨 읇조리신 남송시대의 선승 야보도천冶父道川의 시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이는 대나무 그림자처럼 무엇에 집착하지 말고
달빛처럼 자신의 발자국에 연연하지 말고 살라는 가르침이다.
/ 작가의 저서 중에서 /
불일암은 내게 한 권의 윤리 교과서다. 암자는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 고 한다.
집착과 욕심이 과해진 나에게 붉은 경고등을 켜준다.
그러니 불일암 가는 것은 집착과 욕심의 몸무게를 줄이러 가는 길이다.
불일암의 작고 맑은 모습들을 무심코 바라보는 동안 집착과 욕심의 몸무게가 부쩍 줄어 있음을 깨닫는다.
/ 작가의 저서 중에서 /
'산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게 마련이다.
찬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힘을 내는 자리가 있다.
어디 가파른 산길 끝만 그러하리. 모든 인생길이 그러하지 않을까.
삶의 길이 막혀 눈 앞이 캄캄해지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생의 기쁨이 사라졌을 때에도
절망스러운 바로 그 자리에 희망이 숨어 있는 법이다.
/ 작가의 저서 중에서 /
불일암에 법정스님은 안 계신다. 그래도 나그네는 스님을 뵈러 왔다.
스님의 흔적이란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싶어서이다.
/ 작가의 저서 중에서 /
'태풍의 대변인' 이란 이름의 풍경이 매달린 불일암 아래채
저 풍경이 '태풍의 대변인'으로 임명된 사연을 누가 알까.
다급한 풍경 소리는 계속해서 귀를 자극했다.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스님은 뒤꼍에 둔 사다리를 가지고 와 풍경을 떼어냈다. 잠시 후 산란한 마음을 겨우 가라앉혔다.
/ 작가의 저서 중에서 /
빠삐용 의자
작가 정찬주 선생이 위 의자에 얽힌 사연에 대해 내게 들려준 얘기.
법정스님이 서울에 올라오실 양이면 신문에 나오는 영화 프로를 일별 선택,
스님을 모시고 '조조할인' 영화를 보러 가곤 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삐삐용이었다고.
헌데 스님께서 영화 「빠삐용」을 보시면서 하염없이 우시더란다.
위 의자는 바로 '절해고도'에서 탈출하는 주인공을 모티브로 손수 제작, '빠삐용 의자' 라 명명.
가끔씩 저 의자에 앉아 저 멀리 조계산 라인에 시선을 던지시기도 했고, 또한 불임암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앉아 보길 권하곤 하셨다는데 그 속 마음인즉, 자유를 찾아 끊임없이 도전하는 대자유인 빠삐용에 대한
경의의 표현임과 동시에 스스로 인생을 낭비한 죄를 자문자답 해 보시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전의 법정스님께서 빠삐용 의자에 좌정하신 모습
/불일암 벽에 걸린 사진 카피/
/이 역시 벽에 걸린 사진 카피/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법정스님(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잠시 어디로 출타라도 하신듯...
스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는 불일암에 가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됐다.
스님이 남긴 말씀과 무소유한 흔적이 불일암 곳곳에 침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저서 중에서/
"후박나무 잎이 떨어지는 소리는 꼭 사람이 오는 소리 같다니까요."
"저도 사람의 발자국 같다고 느꼈습니다."
/작가의 저서 중에서/
스님께서는 세 가지(三不足)가 적으면 도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데...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배 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적은 것이 있으면 신선도 될 수 있다."
/작가의 저서 중에서/
생전에 법정스님이 손수 심은 후박나무
후박나무가 30년 년 전 불일암으로 막 출가했을 때는 어른 키만 했는데
어느새 행자 티를 벗고 그늘을 드리운 나무보살이 돼 있다. 스님은 외출했다가 돌아와서는
꼭 후박나무를 한 번씩 두 팔로 껴안곤 했다. 지금은 스님의 진신 골편이 뿌리 부근에 묻혀
스님이 후박나무의 일부가 돼버린 듯하다.
/작가의 저서 중에서/
청아하게 피워낸 후박꽃이 무소유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듯.
"꽃이 피어나는 것은 생명의 신비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잠재력이 꽃으로 피어남으로써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이 둘레를 환하게 비춘다. 그 꽃은 자신이 지닌 특성대로 피어나야 한다.
만약 모란이 장미꽃을 닮으려고 하거나 매화가 벚꽃을 흉내 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모란과 매화의 비극일 뿐 아니라 둘레에 꼴불견이 되고 말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
/작가의 저서 중에서/
멀리 동글동글한 조계산 자락의 봉우리들이 운무에 가려 있다.
스님은 산자락을 바라보며 나이 드는 걸 절감하신다고 한다. 짐 같은 자잘한 욕심들은 나이 따라
저절로 정리가 되는데, 단 한가지만은 아직도 내치지 못했다고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 바로 그것은
어쩌지 못하겠다는 말씀이다. 스님이 우려주는 차를 마시면서 차와 어울리는 찻잔의 색깔과 모양,
혹은 차로 인한 내면의 충만에대해서 얘기하실 때면 스님의 심미안審美眼이 절로 느껴진다.
'최고의 차 맛은 홀로 마시면서 음미하는 적적한 맛이지.'
/작가의 저서 중에서/
푸른 잎이 뒷방 문짝만 한 파초는 내 눈에도 불일암을 이국적으로 보이게 연출했다.
그러니 채마밭은 스님만의 소박한 꽃밭이자 속뜰인 셈이었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서 늦은 오후에 차를 마시면서 달맞이 꽃이 피는 광경을 보는 것이
스님의 표현대로 영혼의 떨림이요 기쁨이었다.
/작가의 저서 중에서/
땅에 떨어진 굴거리나무 잎새
어느 작은 절에 살던 젊은 스님의 말이 떠오른다.
그 젊은 스님이 낙엽을 쓸어 한곳에 모으자, 노스님이 낙엽을 이리저리 흩트리며 말했다고 한다.
"제 갈 곳을 찾아 제자리에 떨어진 낙엽을 네 마음대로 옮기지 마라."
/작가의 저서 중에서/
스님께서 손수 지었다는 여름철 목욕간
"삶에 공식이 있지는 않아요. 사람마다 다 다른 거지요. 나의 경우 제일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 것인가' 예요 우리는 문명의 이로운 기계로 인해 혜택도 받지만
많은 것을 잃고 있어요. 편리하기 때문에 다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점점 해체되고 말아요. 물건의 노예가 되고, 조직의 노예가 되고, 관계의 노예가 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단순하고 간소해져야 돼요.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산다는 것은 본질적인 삶을 산다는 말이지요."
-법정스님의 말씀-
/작가의 저서 중에서/
덕현스님과 스님의 절판 유언에 대한 얘기를 나눈 게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님은 다음 생으로 말빛을 가져가고 싶지 않다며 스님의 저서로 명기된 모든 책을 절판하라고 유언하셨던 것이다.
내가 스님의 절판 유언은 "스님에게 있어 말빚이란 사람들이 스님의 저서 속에서 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좋은 말만 챙기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죽비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라고 동의를 구하자
덕현스님이 "정확하게 보신 겁니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흔히들 마음을 맑히라고, 비우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마음을 맑히는 법이라고 얘기하는 이는 없습니다.
또 실제로 마음을 비우고 사는 이처럼 여겨지는 사람 만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란 결코 말로써, 관념으로써 맑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절적인 선행을 했을 때 마음은 맑아집니다.
/작가의 저서 중에서/
송광사 제7대 자정국사[順天松廣寺慈靜國師浮屠]부도
자정국사(慈靜國師) - ? ~1301년.
본래 자정암(慈靜庵)이었던
불일암 동쪽 언덕에 석축을 쌓아 대지를 마련하고,가로 5.9m·세로 4.15m의 탑구를 정하여 그 중심에 부도를 세웠다.
부도 높이는 2.23m로, 팔각원당형(기단과 탑신, 옥개석이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형태)이다.
팔각 탑신(塔身) 정면에는 별다른 장식 없이 ‘자정국사묘광지탑(慈靜國師妙光之塔)’라 새겨져 있다.
옥개석 역시 팔각이며, 상륜부에는 보륜과 보주 등이 갖추어져 있다.
기단부의 구성과 각 부분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일암에서 감로암 사이에 세워진 승탑과 비
원감국사비(圓鑑國師)
고종13년(1226) 전남 장흥生.
속명은 위원개(魏元凱), 법명은 밀암(宓庵), 법휘는 법환(法桓), 법호는 충지(沖止), 시호는 원감(圓鑑)이다.
9세에 취학(就學)하여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9세에 예부시(禮部試)에 장원으로 뽑혔다.
또한 국사는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가서 수려한 문체로 일본인을 놀라게 하였다.
국사는 승려가 된 후 41세가 될 때까지는 두타(頭陀)의 행각(行脚)을 하였으며, 삶도 죽음도 없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 정진을 거듭했다.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홀로 선정에 들매, 그 모습이 마치 허수아비 같았고,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새발자국이 무릎에 찍힐 정도였다.
국사는 41세에 정진을 중단하고 김해 감로사에 주석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덕(禪德)이 찾아왔다.
그 선덕이 국사에게 물었다.“무엇이 부처님입니까?” 이에 국사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천지를 꿰뚫는 무애(無碍)의 소리를 토했다.
원감국사 오도송 '무애(無碍), 청천(聽泉), 천지일향(天地一香)
봄날 꽃은 계원(桂苑)중에 피었는데,
암향(暗香)은 소림의 바람에 움직이질 않는구나.
오늘 아침 익은 과일은 감로에 젖었고,
한없는 인천(人天)은 한 가지 맛이구나
45세 되는 봄에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서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계족산 봉우리 앞 옛 도량,
이제와 보니 푸른 산 빛 유별나네.
부처님 소리 바로 맑은 시냇물 소리인데,
무엇 때문에 귀찮게 다시 부처님 소리 세우리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선정에 들어있던 어느 날 천지각(天地覺)을 하였다.
티끌과 정토(淨土)가 모두 한 암자,
방장실을 떠나지 않고도 남방을 두루 순방했네.
선재동자(善財童子)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심한 고생을 자처하여,
백십성(百十城:수를 셀 수 없는 여러 곳)을 순력(巡歷:돌아다닌다)했는가
/부다피아에서 발췌한 내용/
송광사 부도암(浮屠庵) 부도군
석조부도들의 양식은 크게 전각형殿閣型, 석종형石鐘型, 원구형圓球型으로 분류된다.
전각형 양식은 송광사 출신 16국사들의 석조부도 양식을 모방 계승하면서 부분적으로 새로운 기법이 적용되고 있으며,
석종형과 원구형 양식은 송광사 부도암 부도군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되면서 선행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런데 송광사의 조선후기 석조부도들은 17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전각형 양식이 주류를 이루다가
17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전각형, 원구형, 석종형 양식이 혼용된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전각형은 서서히 사라지고
원구형과 석종형 양식이 병립되고, 18세기 후반경부터는 석종형 양식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원구형 양식이 주로 채용된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서면 석종형 양식은 간헐적으로 세워지고, 원구형 양식이 주류를 이루는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DBPIA에서 옮겨온 내용/
송광사보조국사비松廣寺普照國師碑
(
시도유형문화재 91)
귀두는 용두화되었으나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여의주도 함유하지 않고 있다. 또 귀두 뒷면에 귀가 솟아 있는바 이러한 양식은 매우 특이한 예라 하겠다.
귀갑문은 유각문으로 전대의 양식을 답습하고 있으나 형식화 및 약화되었고,
그 중앙으로는 방형의 비좌를 안치하여 비신을 받치고 있다.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발견하여 생동감을 주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기법은 서툴다. .
비신 상단에는 「보조국사비명」이라 전액하고
비제는 「해도조 선국호남순천부 조계산송광사증익불일보조국사비명병서」라 해서 체로 쓰고
후미에는 「숭복기원무진오십일년무오시월일중건사문 설명」이라 하여 건립년대는 숙종 4년(1678)임을 알 수 있다.
위 내용에 의하면 원래의 비석이 아니고 이 시기에 다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김군수가 찬하고 유신이 썼다.
보조국사(1158~1210)의 호는 목우자이며 속성은 정씨로 서흥(지금의 황해도) 출생이다.
의종 19년91165)에 출가하여 종휘에게서 삭발하고 명종 12년(1182)에 승선에 뽑혔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에서 열린 담선법회에 참가하여 선배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서 창평 청원사에서 단경을 읽고 대각하였으며 결국 이곳에서 최초로 정혜결사를 결의 하였다.
신종 3년(1200) 길상사에 옮겨 10여년간 불도를 닦아 정혜쌍수를 주장할 즈음,
희종이 즉위하여 그해 (1205)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길상사를 수선사로 고치게 되었다.
조계총림의 율원(律院) 부도암 앞에 선 커다란 사철나무
부도암 경내 뒷편 언덕에 피어난 작약꽃밭
옳거니 그르거니 내 몰라라
산이든 물이든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 '선종고련'구름 걷히면 -
침묵이란 입만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시비하고 분별하려는 한 생각까지 쉬는 것이어야 진정한 침묵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비분별하려는 한 생각,
그것이 바로 찰나생사刹那生死이고 갈등과 번뇌를 반고하게 하는 업력이 아닐가.
/작가의 저서 중에서/
고온 다습한 무더운 여름철에는 차맛이 제데로 안 난다.
여름이 가고 맑은 바람이 불어와 만물이 생기를 되찾을 때 차 향기 또한 새롭다.
/작가의 저서 중에서/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 법정스님이 작가 무염거사에게 써 보내주신 휘호 -
송광사
송광사 조계문曺溪門 앞 석조물
사자인지, 원숭이인지 형태가 모호하여 실체를 알기 어렵다.
절에 이르는 길에 피어난 쪽동백의 자태
여원치마애불상女院峙磨崖佛像
- 유형문화재 제162호 -
운봉으로 가는 여원치 거의 정상부분 도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며 자연바위면에 조각되어 있다
높이는 2.5m, 어깨 폭은 1.09m이다. 불상의 앞면에 건물을 구성한 것으로 보이는 시설이 있으며,
주위에 기와조각도 흩어져 있어서 불상을 모시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불상의 이마부분이 마손되었고, 기록에 의하면 불각을 지어 풍우를 가렸다고 하나 쌍 석주만 있을뿐 보호시설은 현재 없다.
머리에는 두광을 음각하였고 두상은 소발로써 육계가 넓으며 두 귀는 크게 처져 어깨에 닿았고 턱의 윤곽이 뚜렷하며 그 밑에 삼도가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텁게 표현하였는데 두팔에도 옷의 무늬를 새겼다. 오른팔은 안으로 굽혀 가슴에 대고 내장하였는데
몸에 비해 작은편이고 왼팔은 팔꿈치 아래에서 절단되어 분명치 않다
. 전하는바에 의하면 불상은 여상이며
이성계가 황산벌싸움에 임하여 이곳에서 길을 가는 노파의 계시를 받고 대첩하자
산신이 나타났다하여 불각을 짓고 봉신하였다는 글이 담겨 있으며
말미에 「광무 5년 7월통정대부전 행 나주진 우영장 운봉현감 박귀진 기」라고 새겨있다.
애기똥풀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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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조계산의 신록이 눈 앞에 자꾸 어른거리고 있었다.
지난 4월 '이불재'를 방문했을 때 무염거사 정찬주 선생으로 부터 당신의 저서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를 선물 받고 더더욱 조계산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어른거리면 확인 해야하고, 눈에 밟히면 답사에 나서는게 이내 철칙이자 준칙.
언제 퍼질러질지 알 수 없는 애마를 어르고 달래 조계산에 당도 불일암을 오른다.
때마침 길을 내려 오는 스님 한 분. 합장으로 예를 표하며 괜한 흰소리를 해 본다.
"스님, 이 길이 불일암 오름길 맞죠?"
암자로 오르는 삼나무 숲길이 훤 해졌다.
'불일암' 오름길을 이토록 만들었을리는 없고 아마도 '광원암'을 중창하기 위해 길을 낸 모양.
아니나 다를까? 갈림길에 이르니 새로 낸 큰길은 광원암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불일암 길은 큰 탈 없이 유지되고 있어 저으기 안심이다.
사립문을 지나 시누대 터널을 통과 암자에 들어서는데 느닷없이 수상 해 오는 뱃속.
채마밭 아래쪽의 해우소를 노리는데 일자로 가로지른 대나무 빗장이라.
낭패로고.!
돌아 나와 어그적 거리는 걸음으로 숲을 향해 달려 간다.
맑고 향기로움을 강조하신 법정스님의 신성한 영역에 당도 하자마자
스님께서 강조하신 무소유의 의지(?)부터 해결해야 하다니 이런 불경不敬 스러울데가....
근심을 풀고 계곡수에다 정성껏 손을 씻은 다음 다시 암자에 들어 선다.
숨소리라도 행여 들릴 세라 한참을 입구에 서서 선사의 영역을 조심스레 살핀다.
스님 한 분이 불일암에 올라 이곳 저곳을 살핀 다음 다시 처소를 향하는 모습.
"법정스님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이 문득 나를 행복하게 했던 것이다."
무염거사 정찬주 선생의 말을 떠올리며 그제서야 서서히 암자 순례에 나선다.
'불일암' 유리문 앞에 정갈하게 놓인 흰 고무신 한 켤례가 시선을 붙잡는다.
아마도 '텅빈 충만'을 누렸을 것으로 짐작되는 스님 법정의 또 다른 분신이리라.
예전 "서있는 사람들"과 "무소유"가 발간되었을 때, 연거푸 몇 번이고 다시 읽었던 기억.
"나도 없는데 하물며 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진정 "귀 속의 귀'가 열려야만 들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자 화두일 터.
당신이 손수 심으신 후박나무 밑, 대나무로 구획된 작은 영역에 한 줌 재로 뿌려진 선사.
한동안 스님을 추억하는 발길들로 불일암의 북적임이 어지간 했었다는데.
스님의 환영을 그리며 후박나무를 찾아온 그들은 과연 무슨 가르침과 화두를 안고 돌아갔을까?
후박나무를 올려다 보니 때마침 피어난 후박꽃의 자태가 이를데 없이 청아한 모습이다.
언덕에 피어난 정향에다, 채마밭 한 켠엔 작약까지도 흐드러 졌다.
꽃을 사랑 하셨다던 선사의 '심미안'이 온통 암자를 휘젓고 있는 듯.
디시 무염거사 정찬주 선생의 말씀.
"스님께서 꽃을 얘기 할 때 나는 사람 얘기로 환치해서 듣곤 했다.
나는 나일 뿐 남을 닮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자기 개성을 활짝 꽃피우는 사람이 돼야지 남을 닮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스님 말씀의 요점이었다."
지당하고 또 지당하옵신 말씀.
행行과 필筆 그리고 침묵의 소중함까지를 갈파하고 우리 곁을 떠난 법정스님.
당신의 사자후에 우리 모두는 자비의 소중함과 자기다운 영혼의 본질에 보다 더 천착 할 것입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어 우리 모두의 스승으로 다시 오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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