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13 / 14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탕건을 쓰고 퉁방울 눈을 부라리는 해학에다 수염까지 조각되어 있다.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으로 할머니 석장승.
예전엔 돌솟대 등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부안을 대표하는 시인
석정(夕汀) 신석정((辛夕汀) 고택
신석정 (1907~1974)
※ 사진은 고택 내부에 걸린 선생의 사진을 카피한 것이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산림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마세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뜬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마세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해볕이 유달리 맑은 하늘의 푸른길을 밟고
아스라한 산넘어 그나라에 나를 담숙안고 가시겠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구름이 된다면.....
바람잔 밤하늘의 고요한 은하수를 저어서 저어서
별나라를 속속드리 구경시켜 주실수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초승달이 된다면.....
내가 만일 산새가 되어 보금자리에 잠이 든다면
어머니는 별이 되어 달도없는 고요한 밤에
그 푸른 눈동자로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고택 건너편에 들어서고 있는 석정시인의 기념관
사회 寫懷 - 매창
結約桃源洞裡仙
무릉도원의 신선과 언약을 맺을 제는
豈知今日事凄然
오늘처럼 처량케 될 줄 어찌 알았으랴.
幽懷暗恨五絃曲
남모르게 품은 그리운 정 거문고에 얹으니
萬意千思賦一篇
천만 갈래 생각이 한 곡조에 실려지네.
塵世是非多若海
티끌 같은 세상엔 시비가 바다같이 많고
深閨永夜苦如年
규방의 밤은 길기도 해서 일 년 같아라.
藍橋欲暮重回首
남교에 날 저물어 또다시 돌아다봐도
靑疊雲山隔眠前
푸른 산만 첩첩이 눈앞을 가리는구나.
자한 自恨 - 매창
春冷補寒衣
차가운 봄날 겨울옷 깁는
紗窓日照詩
비단 창가에 햇볕 비치는 시간
低頭信手處
고개 숙여 손 따라 가는 곳
珠淚滴針絲
구슬 눈물 바느질 실에 떨어진다
평생의 분신이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는 매창
애계랑(哀桂娘) - 허균
妙句堪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竊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요.
매창과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다는 '허균'
그가 '홍길동전을 집필했을 장소로 추정되는 정사암 (靜思庵) 가는 길
//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산 남쪽에 우반(愚磻)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곳 출신인 부사 김청(金淸)이 그 중 아름다운 곳을 골라 암자를 짓고는 정사암(靜思菴)이라고 이름지었다.
늘그막에 즐기며 쉴 곳을 마련해 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왕명을 받고 호남을 다니며 정사암의 아름다운 경치는 실컷 들었지만,
여지껏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평소부터 영화와 이욕을 즐기지 않았는지라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올해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정하고, 장차 우반이란 곳에 묻혀 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사에 급제한 김공의 아들이 나에게 말했다. "
저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정사암이 너무 외따로 있어, 제가 지키기 어렵습니다.
공께서 다시 수리하시고 지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뻤다. 즉시 고달부와 이재영 등을 데리고, 말고삐를 가즈런히 하여 그곳에 가보았다.
포구에서 비스듬히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가자
시냇물이 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풀덤불 속으로 쏟아졌다.
시내를 따라 몇 리 들어갔더니 산이 열리고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마치 학이 나는 것처럼 치솟았고,
동쪽 등성이론 수많은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었다.
--중략--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늙은 당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는데, 낭떠러지 바위 위에 지어졌다.
앞으로는 맑은 연못이 내려다 보였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바위벽 아래로 깊숙하게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뻗은 것 같았다.
--하략--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 중에서 발췌
//
선계폭포
"중수정 사암기"에 나오는 선계폭포
(위 두 장의 사진은 '구름바위'님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선계폭포 위에 올라 조망한 우반동저수지
이 대밭을 지나면 상당량의 물이 흐르는 제법 넓은 분지가 펼쳐진다.
과거 이 자리에 '선계사'라는 절이 있었던 모양이고
저 건너편 대숲 돌축대 부근이 허균이 머물렀던 '정사암'이라 말 하는 이도 있고...
"약초밭 출입금지" 팻말이 가로막은 임도를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간 대숲 부근 바위 아래
'정사암'이 있었을 것도 같던데 정확하면서도 확실한 고증이 있어야 할 터.
'약초재배지' 임도 끝자락 산막이 있는 공터까지 올라오며
이 곳, 저 곳을 살펴 보았으나 그 흔한 안내푯말 하나 보질 못했다.
바드재 임도 시작점으로 되돌아와 지나는 경찰 순찰차를 불러 세운다.
혹시, 정사암에 대해 아는바 있는가 라고.
/ 알고 있다는 대답 /
그렇다면 국문학사를 비롯, 문화와 역사를 아우를 수 있는 소중한 유적에 대해
어찌 그리 무관심 할 수 있느냐는 아쉬움을 말 하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오는 답사객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내문'정도는 당연히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다소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 자신도 아쉽게 여기는 대목이라는 말과 함께
관계 기관에 꼭 건의 해 보겠노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어 찾아간 곳은 실학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 서당'
유허지 일대의 산불로 인해 주변 풍광이 삭막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오래 전, 두어 번의 헛걸음 끝에 찾아올랐던 유허지 오르는 길엔
기막힌 향을 내뿜는 춘란이 지천이었는데...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라는 책이 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백과전서다.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 평생을 두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금사물에 대한
수백 종 수천 권의 책을 읽고 집대성해 편찬한 대저술서다.
항목마다 치밀한 고증을 거쳐 의심이나 잘못이 없게 하느라고 무진 애를 썼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게끔 각별히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모두 60책 60권으로,
그중에 우리나라의 역대 인물 중 제일가는 인재를 뽑아 기록한 대목이 있다.
‘이퇴계의 덕, 박읍취헌(朴挹翠軒 : 은)의시, 최간이(崔簡易 : 笠)의 문장, 유반계(柳磻溪 : 형원)의 경륜,
이충무공(李忠武公 : 순신)의 군략, 김청음(金淸陰 상헌)의 충절, 남이(南怡)의 용기, 서화담(徐花潭)의 천문,
박연(朴堧)의 음악, 황공도(黃公圖)의 총명, 흥령(興嶺)의 산수, 이원교(李圓嶠 : 광사)의 글씨,
김하서(金河西 인후)의풍채, 송규암(宋圭庵 : 미수)의 효도’
한 독실한 학자의 소견이 담긴 선정이지만, 수긍할 만한 점도 없지 않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숱한 정치가와 경세가가 있는데도
기라성처럼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다 제쳐 놓고
반계 유형원의 경륜을 으뜸으로 꼽은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반계는 벼슬한 적이 없고 일생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심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최고의 경륜가로 뽑은 것이다. 이규경뿐만이 아니다. 반계와 동시대 인물로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미수 허목은 반계와 만나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하고서 말했다.
“그는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할 수 있는 큰 재목이었다.
지금처럼 어지러운 세상에 그와 같은 인물이 있는 줄은 몰랐다.”
반계가 큰 인물이라는 말은 소설에도 나온다.
연암(燕巖)박지원(朴趾源)의 소설 중 뛰어난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허생전(許生傳)」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남산골샌님인 허생에게 선뜻 만금을 대준 장안의 갑부 변씨와 허생과의 대화).
변씨가 말하기를,
“지금 사대부들이 남한산성에서 여진족에게 당한 수치(병자호란)를 설욕하고 싶어 하니,
바로 슬기로운 사람이 팔을 걷고 지혜를 떨쳐내야 할 때거늘,
선생과 같은 재주로 어찌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면서 세상에 숨어 지낸단 말입니까?”
하자 허생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예부터 숨어 지낸 사람이 어찌 한둘에 그치겠소.
조성기(趙聖期, 1638~1689년) 같은 분은 적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외교 능력이 있는데도
벼슬을 못 하고 늙어죽었고, 유형원은 전쟁에 대군의 군량을 댈 만한 경륜이 있으면서도
바닷가에 숨어 세월을 보냈으니,
지금 국정을 맡고 있는 이의 능력을 알 만하지요.”
이 정도로 그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는 유형원은 누구인가.
그는 문화유씨로 자는 덕부(德夫)이고 반계(磻溪)는 호다.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태어나 현종 14년인 1673년에 돌아갔으니 52년 동안 살다 갔다.
그는 서울 토박이로 서부(西部 小貞陵洞) 외가에서 출생했고,
선조는 태종과 세종 때의 명재상이며 청백리로 유명한 유관(柳寬)으로서,
대대로 벼슬자리를 지킨 사대부 집안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외롭게 자랐으니, 2세 때 아버지를 여의어 할아버지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그런 중에도 매우 총명하여 4세 때 이미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6세 때에는 「서경」
8세 때에는「주역」을 읽을 정도로 숙성했다. 천재라 할 만했는데,
일찌감치 유교경전을 다 읽어 9세 때부터는 제자백가의 책들을 익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14세가 되던 해인 인조14년(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원주로 피난을 갔는데,
이후로 양평(花谷里)과 여주(白羊洞)등으로 이사를 다녔고, 죽산이나 과천등지에 선영이 있어 자주 왕래했다.
거기에다 의지하던 어머니가 27세 되던 해에 돌아가시자 자유로운 몸이 된 그는
멀리 전라도 부안현 우반동으로 이사를 하여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반계는 12세 때 이미 과거를 보아 입신출세하는 것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기도 했다.
학문이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는 것이지,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는 방편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잘못된 세상 풍조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러나 29세와 30세 무렵에 두세 번 과거를 보긴 했으나 모조리 실패했다.
할아버지의 재촉과 기대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안 우반동으로 이사한 이듬해에 다시 과거를 봐 급제했지만
더는 과거장에 나가지 않았다.
사대부 계층으로서 최소한 진사 대우는 필요했는지 모른다.
부안 우반동은 아늑하고 호젓한 마을로, 뒤로는 병풍처럼 푸른 산이 둘러 있고 바다도 가까웠다.
기후도 온화해서 겨울 추위도 심하지 않았고, 따뜻한 햇볕 속에 동백꽃이 빨갛게 꽃망울을 터트리곤 했다.
연보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반동은 변산에 있는데 바닷가로 숲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삼간초옥을 솔과 대가 우거진 속에 지어 세상을 등지고 저술을 업으로 삼았다.
선생은 학문에 전념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때론 영감이 떠오르면 밤중에라도 일어나 글을 썼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노력이 부족하다고 하여 날마다 해가 저물면 “오늘은 또 헛되이 보냈구나.
진리는 무궁무진하고 세월은 한도가 있는데 옛사람은 무슨 정력으로 저 같은 업적을 성취 하였는고” 하고 탄식했다.
서재에는 서가를 수없이 올려 책을 무수히 쌓아놓았고, 대나무 사립문은 항상 닫혀 있었다.
사슴이 낮에도 울안으로 찾아들면 선생은 이것을 낙으로 삼았다. 달밤이면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었다.
그 금도(襟度)와 풍류는 참으로 천하의 고상한 선비라 할만 했다.
반계는 우반동에서 학문은 무한한데 세월은 한도가 있음을 한탄하면서 많은 저술을 했다.
그는 성리학에서 정치, 경제, 역사, 지리, 군사, 언어, 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일가를 이루고 저술을 남겼다.
대표적인 저술은 「반계수록(磻溪隨錄)」인데, 오늘날까지 남은 유일한 전적이다.
20여종 수백 권의 책은 오직 목록만 남아 있을 뿐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반계수록」은 26권 13책으로, 정치제도의 개혁안을 주요 골자로 삼고 있다.
곧, 오랜 제도를 그냥 지키기만 하고 개혁을 도외시한 결과 사회 각층
국가 기관의 마디마디에 녹이 슬고 부패가 만연되어 더는 지탱하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개혁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토지 제도의 개혁이다.
‘경계(구획. 토지 소유의 한계)가 바르면 만사가 다 잘된다. 만일 토지 제도가 바르지 못하면,
그에 따라 민중의 경제생활이 정상적으로 되지 못할 것이고 부역이 고르지 못할 것이며, 호구가 밝혀지지 않을 것이고
병역이 정비되지 않을 것이며, 재판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형벌이 간소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뇌물을 막을 수 없을 것이고 풍속이 도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고도 정치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토지는 천하의 대본이기 때문이다.’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시절이라
그는 당연히 토지 제도의 일대 개혁을 주장했다.
둘째는 조세 제도의 혁신이다. 권력자의 수탈을 막고 잔약한 백성의 주름살을 펴줄 개혁안을 그는 대담하게 제시했다.
셋째는 군대 조련법에 일대 변혁을 가하고 전략 전술을 개발해 강병책을 강구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대담한 개혁안과 구상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은
훗날 실학으로 꽃피게 되어 반계는 실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 웹문서 歷 史 돋 보 기 -
" 반계 유형원이 편 실학의 돛대" 중에서 발췌.
다산 정약용은 반계의 학문과 업적을 이렇게 칭송하고 있다.
세상 다스리는 뜻이 진지하기로는
반계 유형원을 보았을 뿐이네
세상을 구할 큰 목표는 균전법(均田法)에 있었고
천만개의 그물 눈이 서로 통하였네.
정확하고 세밀한 생각으로 틈새를 기워가면서
뼈를 깎아 고치고 다듬고 가늠하려 애를 섰네.
임금을 보좌할만한 재목이었지만
산림(山林)에 묻힌 채 늙어가니
남긴 글 세상에 가득하지만
백성에게 혜택을 끼친 공적 이루지 못 해
비명에다 그 사적 새길 만한데
말년에 모진 비난 한 몸에 받고
자손까지 아울러 고난을 겪네 .....
곰소만에서...
수성당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58호
전설에 의하면 개양할미는 아득한 옛날에 수성당 옆 ‘여울골’에서 나와 서해바다를 열었다.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지나는 선박의 안전을 도모하고,
어부들로 하여금 풍어의 깃발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개양할미를 물의 성인으로 여겨 수성(水聖)이라 부르고,
여울골 위 절벽 위에 수성당을 짓고 모셔왔다.
개양할미와 개양할미의 딸 여덟을 모신 곳이라 하여 구랑사(九娘祠)라 부르기도 한다.
개양할미는 딸만 여덟을 낳아 각 도에 바다 지킴이로 보내고,
자신은 막내딸과 함께 이곳에 머물며 서해바다를 총괄했다고 한다.
혹은, 딸 일곱을 낳았는데 그들이 수성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칠산바다 일곱 섬의 지킴이가 되었다고도 한다.
개양할미는 어찌나 키가 크던지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곰소 앞바다에 있는 ‘계란여’라는 둠벙에 빠져 버선목이 좀 젖자
개양할미는 치마에 돌을 담아다 이 둠벙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거녀(巨女)였으면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았을까.
여해신의 거대 막강한 신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예부터 바다에 국가적 제사를 지내왔던 곳
그렇다면 수성당은 언제부터 이곳에 있어 온 것일까.
‘道光 三拾年 庚戊 四月二十八日 午時 二次上樑’ 상량문으로 미뤄 1804년,
그러니까 적어도 200여 년 전에 이 신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992년 전주박물관에서 이러한 개양할미 전설이 서려있는 수성당 주변을 발굴하여
삼국시대 초기 이래로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시대를 달리한 제사 유물들이 풍어와 무사귀환을 기원한 뱃사람들의 바람이 담긴 채로 거기 묻혀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항아리와 잔, 병과 토기류, 청동과 철제 유물,
석제 모조품 등 발굴된 제사 유물은 종류도 다양했다.
왜 국가적인 큰 제사터가 수성당에 있었을까.
지정학적으로 수성당은 선사시대 이래로 중국이나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던
해로상의 중요 지점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삼국시대가 되면 초기백제의 근거지인 한강 하류유역으로 통하는 길목이 되고,
5세기 후반 백제가 남천한 후에는 웅진과 사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으리라.
또한 이곳의 해양환경을 살펴보면 연안반류(沿岸反流)가 흐르고, 주변에 섬들이 많아
물의 흐름이 복잡하며 바람도 강해서 예로부터 조난의 위험이 컸던 곳이다. 그
러기에 이곳에 신당을 짓고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올렸을 것이다.
/전라도 닷컴에서 발췌/
수성당 옆 단애
적벽강,
대문호 동파 선생도 떠올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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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땅, 이매창과 관련있다는 곳은 진즉에 한 번씩은 가본 것 같으나
아직 미답으로 남아있던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매창의 남자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교산(蛟山) 허균이 낙향하여 둥지를 틀었던'정사암'이라.
적서차별의 부당함과 부패관료를 규탄하는 글을 여러 편 남겨
사회비판적인 의식을 보여주었던 허균.
그는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한 인물.
시대의 이단아요, 지성이요, 개혁사상가로까지 지칭되는 허균과
호남의 명기이자, 조선 3대 여류 문인으로까지 칭송되는 이매창.
이른바'플라토닉 러브'로 세간에 잘 알려진 매창과 허균이 나눈 교우(?)의 실체는 과연...?
나 같은 무지렁이꽈 들은 머리를 앞 세우기 보담, 눈치와 감으로 현장에 접근해야 한다.
우동마을에서 청림을 잇는 고개 '바드재'에 접근하면
오른쪽으로 시퍼런 호수가 펼쳐지고, 산 자락 바위덩어리 사이에 '선계폭포'가 걸려있다.
변산반도 대부분의 폭포가 그러하듯, 이 폭포 역시 비가 올 때만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웅장함의 정도가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의 규모다.
이곳이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에 나오는 바로 그 폭포인 것이다.
시대의 지성이라는 허균이 이 곳에 이르러 어찌 시 한 수를 읇지 않을 수 있으며
부안의 여류 매창 역시 어찌 거문고를 타지 않을 수 있었으리요...!
때로는, 상상해 보는 즐거움이 기록물 한 줄 읽는 것 보다 훨 나은 법이다.
바드재를 감아오르다 보면 선계폭포 윗쪽으로 통하는 임도가 보인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약 오리쯤 걸어 오르면 분지가 펼쳐지는데
그 분위기가 자못 전설의 이상향 '청학동'을 연상시킨다.
이런 멋진 터가 선계폭포 윗 쪽에 자리하고 있을 줄 내 감히 상상이나...
분지를 흐르는 물의 양도 녹록치 않을 뿐더러,
자급자족이 가능할 만큼의 밭뙈기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을뿐 아니라
지세조차 양양하고 훈풍이 머무는 느낌.
지관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해서일까? 폐사지 인근 이 곳 저곳에
번듯한 석물을 두른 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기다란 석축 너머로 울창한 대밭이 들어서 있는데
이 곳에 '정사암'이 있었다고도 하고,더 거슬러 올라간 곳,
바위 절벽과 역시 대밭이 울창한 지점이 맞다고도 하는데...
이럴땐, 그냥 내 구미에 맞는 곳으로 시선을 주면서 허균과 매창을 떠 올리면 만사형통.
매창의 오지랖과 열두폭 치마자락에 붓을 들어 풍류를 담아냈던 인물들.
그들이 남긴 기록물을 통해 시대의 흐름과 사상,
문학과 러브스토리의 질펀함에까지 접근해 볼 수 있는 즐거움.
좁은 땅덩어리 골골과 처처에 산재한 방대한 양의 짜릿함에
오늘도 난 온 몸을 떨며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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