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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울금바위에 올라 매창을 노래하다

               2011. 2. 12

능가산 개암사

 

 

매창의 혼이 서린듯한 '개암梅' 앞에서

 

 

절 마당을 높이는 바람에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땅 위로 뿌리를 솟구칠 수 밖에 없는 '개암매'의 처절한 몸부림.

마치 폐병으로 숨졌다는 매창의 원혼을 보는 듯. 

 

 

 

능가사에 와서 어찌 매창을  떠 올리리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당의 현종이 양귀비를 일컬어 '해어화'(解語花)라 했다던가?

기녀 매창은 그야말로 '해어화' 진, 선, 미 가운데 단연 맨 앞자리의 眞에 해당될 터.

 모두가 매창을 조선 여류 시조시인의 반열에 올리는데 주저함이 없기에. 

 

 

 이화우 흩날질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난 오락가락 하노라

 

 

 

37살의 나이로 남의 집 곁 방에서 죽음을 맞은 매창.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연모를 다 한 사내는 촌은이었다.

하지만 매창의 죽음에 가장 애통해 한 사내는 이른바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었다는 허균.

그는 절절함으로 매창의 부음에 '애계량'을 바친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펼친 듯 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했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 인간 무리를 떠났는가

부용화 수놓은 휘장엔 등불만 어둡고

비취빛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았네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엔

누가 다시 설도의 무덤을 찾으랴

 

 

 

 

 

平生恥學食東家    

평생에 기생된 몸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더라

 

 

 울금바위 아래 당도

 

 

 수 십길 벼랑에 자리한 원효굴

 

 

 절벽 사이로 난 한 뼘 정도의 아찔한 길,

반원을 그리며 약 10여 미터를 진행해야 원효굴에 이를 수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며 벌 벌 벌~~~

 

 

 두 개의 석굴로 이루어진 원효방.

그 중  작은 석굴 안에서 바라본 모습

 

 

 큰 석굴 안에서

 

 

 굴을 나서는 길에도 벌 벌 벌 ~~~

 

 나무아미타불 쪼깐이관세음보살~~~

 

 

갑자기 퍼붓기 시작하는 눈발

 

 

일반 석굴과는 달리, 음습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밝고 맑은 기운이 가득차 있다.

신라땅 원효가 이 머나먼 우금산에 까지 와 수도를 했다 ?

어디선가 신라의 원류는 백제땅이었다는 글을 읽은 것도 같은데

그렇다면 다소 수긍이 가는 측면도 없지 않은 듯.

이 석굴에 원효와 진표를 비롯한 여러 고승들이 거쳐갔다고.

 

 

 

굴을 내려와 올려다 보니... 

원효방은 입수룡, 청룡, 백호, 전순, 굴(혈)로 이루어진 명당이라고.

 

 

원효방을 내려와  주류성 족으로 조금 가다 보면 또 하나의 작은 석굴이 나온다.

이곳도 수도터 였음을 금방 알아볼 수 있겠다.

 

 

백제 부흥의 근거지였던 주류성 (周留城)

 

 660년 7월 백제는 패망한다. 알려진 대로라면 백제의 생명은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의문이 남는다. 당시 백제의 인구가 620만 명이었고 영토 안에 축조된 성이 200개였다.

 사비성은 다만 백제의 수도일 뿐이다. 수도가 함락됐기 때문에 백제가 멸망했다는 공식은 성립되기 어렵다.

중심이 무너져도 주변이 남는다. 백제는 왕과 귀족들만의 나라가 아니었다.

 

 

 

 의자왕 즉위 후 백제는 강했고, 신라는 무력했다. 싸울 때마다 졌고,

대야성을 비롯해 20개의 성을 백제에게 빼앗겼다. 왕권 강화를 위한 의자왕의 전쟁은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승리자는 싸움의 판에 당을 끌어들인 신라의 무열왕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은 누구나 비열하다.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무너졌다

 

 

 

 660년 7월 이후, 그러니까 의자왕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항복한 다음의 백제 역사가 부안에 있다.

주류성이다. 엄밀히 말해 백제는 그때 멸망한 게 아니었다.

이후로도 삼 년 동안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고, 거의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 싸움의 중심 거점이 바로 주류성이다. ‘일본서기’에는 주유성으로 표기돼 있다.

 

 

 

 “백제의 멸망을 660년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백제부흥군은 소규모 부대가 아니었다.

나라의 운명을 걸었으며 그들이 곧 백제였다. 부흥군의 중심 거점이 주류성이다.

망한 나라 백제를 다시 회생시키려는 재건의 꿈이 부안 땅 주류성에서 시작된 것이다.

” 부안생태문화활력소 허철희 대표의 말이다.

 

 

 

 ‘흑치상지 평전’의 저자 이도학은 “부실한 기록들 속에서 제대로 주류성의 위치를 가려내려면

주변 정황을 살펴야 한다. 주류성이 어디인가에 대한 여러 설들은 모두 나름의 설득력을 갖지만

완벽하게 정황이 들어맞는 곳은 부안밖에 없다.

기록들이 증명한다. 논쟁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가장 정통성을 갖는 곳은 위금암산성이다”고 말했다.

 

 

 

 

 663년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고 1344년이 흘렀다. 바람 같은 시간이었다.

 결코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

이것이 전쟁의 논리다.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역사는 비정하다. 살아남은 자만 기억한다.

 

 

 

위 주류성에 관한 내용은 "광주 드림"의 기사를 요악한 것이다

 

 

 

 

 

 

 

 

 

 


 

 

 

 

 

 

 

 

 

 

 

울금바위에서 내려다본 개암사 

 

 

 

 

 

 

 

 

 주류성 복신굴

 

 

 

 

 

 

  登月明庵 


                                                                                      築蘭若倚半空  

하늘에 기대어 절간을 지었기에
一聲淸磬徹蒼穹 

  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
客心 若登도率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
讀罷黃庭禮赤松

  「황정경」을 읽고나서 적송자를 뵈오리다.

 

 

 

자상(自傷)

夢罷愁風雨

   꿈 깨니 비바람 근심스럽고
沈吟行路難

   세상 길 어려움 음을 조용히 읊어보네
慇懃樑上燕

   처마 위의 은근한 제비는
何日喚人還

   어느 날에야 임 불러 돌아오려나.

 

 

 

自傷 3 
  

一片彩雲夢

   한 조각 꽃구름 이는 꿈
覺來萬念差

  깨어나면 허망하여라
陽臺何處是

  임과 만나는 따뜻한 누대는 그 어느 곳인가
日暮暗愁多

  날은 저물어 어둑한데 수심만 짙어지네.


 

 

春思 

東風三月時

 봄바람 불어오는 삼월 졸은 시절에
處處落花飛

  곳곳에 꽃잎 떨어 저 흩날리는데
綠綺相思曲

  비단치마 입고서 거문고로 상사곡을 타보나
江南人未歸 강

 강남 간 내 님은 오지를 않네.

 

 

 

登御水臺 
 
王在千年寺

왕이 머문 천년 옛절에 임은 간데 없고 

御水臺

 쓸쓸히 어수대만 남았구나
往事憑誰問

 지난 일을 누구에게 물으랴
臨風喚鶴來

  바람결에 학이나 불러 볼꺼나 

 

 

 

閨怨 1 
          


離恨消消掩中門

   혹독한 이별이 한스러워 사립문 닫고서
羅袖無香滴淚痕

   비단 소매엔 님의 향기 없고 눈물 얼룩 뿐이로다
獨處深閨人寂寂

   혼자 있는 깊은 방엔 다른 사람 아무도 없고
一庭微雨鎖黃昏

   마당 가득 내리는 보슬비는 황혼조차 가리운다

                                      

 

          

 

閨怨 2 
      

相思都在不言裡  

     애끊는 정 말로는 할길 없어
一夜心懷?半絲  

밤 세워 머리카락 반 넘어 세였고나
欲知是妾相思苦  

  첩의 이 사상곡 아시려거든
須試金環減舊圓  

  손가락에 헐거워진 금가락지 보시구려

 

 

 

閑居 
          

石田茅屋掩柴扉

  바위 사이 초가집 사립문 닫고 사니
花落花開辨四時

 꽃 지고 꽃 피니 사계절을 알려주네
峽裡無人晴盡永

 골짝엔 사람 없고 맑은 날은 길기도 한데
雲山炯水遠帆歸

 구름 낀 산, 번쩍이는 물에 멀리 돛단배 돌아오네
                                      

         

청림리 석불좌상(靑林里石佛坐像)

 

청림리석불좌상은 일명 청림사(靑林寺) 절터로 불리는 곳에 있었던 불상으로 지금은 개암사 경내로 옮겨져 있다.

이 석불좌상은 원래 목과 몸체 부분이 떨어져 있었는데 근래에 복원하였다.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은 어깨와 등부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손은 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갠 뒤 양 손의 엄지 손가락을 곧게 펴 맞대고 있다.

모아진 손바닥으로 구슬을 감싸 쥐고 있어서 지장보살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연석을 받침대로 하고 그 위에 아래로 향한 연꽃잎을 조각한 8각형의 대좌(臺座)를 올려 놓았다.

그 위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낮은 장구모양의 돌을 올려 놓았으며,

맨 위에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대좌를 올려 놓았는데 현재는 뒤집어져 있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自恨 
             

夢罷愁風雨

 꿈에서 깨니 비바람이 근심스럽고
沈吟行路難

고요히 행로난 을 읊노라
慇懃梁上燕

  무심하구나, 들보 위의 제비여
何日喚人還

  어느 날에야 임을 불러 돌아오게 하려나

 

 

 

夜坐 

 

西窓竹月影婆娑

 서창 대숲 달 그림자 어른거리고
風動桃園舞落花

  복숭아꽃 바람 부니 낙화가 춤을 추네

猶倚小欄無夢寐
  여전히 작은 난간에 기대니 잠은 오지 않고
遙聞江渚菜菱歌

 강가의 마름 캐는 노래 소리 아득히 들려오네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비단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비단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임이 주신 은정 까지 끊어질까 그게 두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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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우금산 개암사는  매창의 해방구였는지도 모를일.

그만큼 매창과 개암사는 연관이 많다는 뜻.

 

변산반도 일대는 물론,

개암사엔 특별히 매창과 연관된 얘기들이 수북히 쌓여있거니와

  사후, 그녀의 편린을 쓸어담아 엮어낸 장소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절 마당에 선 '개암매(開巖梅)'부터 찾는다.

누가 뭐래도 난 이 매화에 매창의 원혼이 담겨있다고 보는 터.

 

남녘 '구조라 동짓매'는 진즉에 향기를 날리고 있건만.

어지간히 추운 날씨 탓인지 개암매 꽃망울은 미동조차 없었다.

 

느릿느릿 '울금바위'를 향해 산을 오른다.

제일 먼저 당도한 곳은 '원효방'

 

어쩜 저리도 기막힌 곳에 자연 석굴이 뚫려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암튼 한 소식이랄지 뭔가를 얻어내기엔 스폐셜한 장소요, 절묘한 위치다.

 

봄 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양양한 날에 이 곳에 '원효방'에 좌정하노라면,

사백여년 전의 매창이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기막힌 주효에다 거문고를 들고오는 환영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착각 속에 눈을 흐리고 있던차 갑자기 눈이 내린다.

 매창의 채 풀지못한 정한들이 함박눈이 되어 우금산 일대를 덮어가는 듯.

 

우금산성을 지나고 우금암(울금바위)를 돌아

로프를 당겨 바위 꼭대기에 오른다.

 

발 아래 희미한 모습의 개암사 위로 마구마구 쏟아져내리는 눈.

 

 조선 3대 여류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칭송되는 매창의 환영을 떠올리며,

한 사내가 거기 눈보라치는 바위 정수리에 내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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