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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장성의 문화유산 돌아보기 <1>

 

 

 

진원리 5 층 석탑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

 

전남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 묘동마을 전방 500m 지점 농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5 층이었으나 현재는 4 층만 남아있는데, 고려시대 때의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애당초 마을뒷편 불대산록 탑생이골(탑동)의 절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 탑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현재의 자리에 서게되었다고 한다.

80여년 전 어떤 일본인이 山主로 부터 헐값에 인수하여 일본으로 옮기려 했는데, 官에서 이를 저지하여

외부 유출을 막았고 이 때, 탑 속에 들어 있던 순금불상(엄지손가락 크기였다고 전함)을 압수하여

진원면사무소 금고에 보관하여 왔으나, 해방직후 행정이 어수선한 틈에 없어졌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탑이 헐릴 때 불상이 당에 떨어져 있던것을 후일 나뭇꾼이 발견했다고도 한다)

헐려진 탑돌은 작동마을 앞까지  일부가 떠내려가는 등, 곳곳에 널려있던 것을 村契

(당시에는 삼짓날 촌계가 꼭 있었다고 한다.) 에서 탑을 복구하기로 결의, 기초석 몇 개를 보충하여

고산리 전체의 수구막이를 할 수 있는 묘동 앞 들판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1960년대에는 묘동부락에 우환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때 탑을 헐어버린 전력도 있다고.

 

(진원면史에서 발췌)

 

 

 

 

 

 

수산리 오층석탑

- 문화재자료 제103호 -

 

본디 장성군 진원면 탑생이골(탑동)에 있었던 것인데, 진원현이 석파되면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지금의 수산리 이종영씨 집 마당으로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한다.

높이는 약 5m, 기단부는 가로 세로 각각 약 140cm, 1층 옥신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74cm, 높이 78cm이고

1층 옥개석역시 기단부와 같은 140cm가량이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옥신석이 각각 단일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1 층에서 3 층까지의 옥개받침은 4단인데 비하여 2층부터 5층까지의 체감율이 급격히 줄어드는 형태다.

 

 

 

 

 

 

지금으로 부터 약 30여년 전.

점심 식사 후 대청에 누워 낮잠을  자게된 이종영씨. 

 꿈 속에서 탑이 시잡을 가겠다고 하는통에 이를 말리느라 발버둥을 치는데

갑자기 자신의 머리가 툭 떨어져 나가는게 아닌가?  '

내머리' '내머리' 하면서 떨어져나간 머리를 잡으려는데 도무지 잡히질 않더라고.

 몸부림을 치다가 낮잠에서 깨어난 이씨.

괴이하다는 생각을 하며 마당의 탑을 바라보니 탑의 상륜부가 안 보이더라고. 

  낮잠을 자는 사이에 누군가가 훔쳐가 버린 것.

나중, 사진을 근거로 원형에 가깝게 제작하여 올려놓았었다.

 

지금은....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새로 제작한 상륜부를  탑의 기단부에 다시 내려놓았다.

 

 

 

 

 

 

 

석탑 옆에 나란히 선 '오성진곤비'

 

1880년 9월에 세운 호패형 비석이다

진원을 떠나 이 곳 수산리로 오게된 내력에다 풍수가 합쳐진 내용.

성산터는 '와우형국'이라. 산세는 성하나 물은 곧게 달아나 수구(水口)가 무너진 때문.

이에 비보차원에서 곤방(坤方)에 탑을 세우고, 소가 먹이가 많은 광산군 쪽으로 내빼지 못 하게

조산을 쌓고 먹이를 넣어둔 '적초루'까지 세웠다는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내계리(천방사지) 5층 석탑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 천방 마을 소재

 

백제 말에 세워졌으리라 추정한다는데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다.

 

 

 

 

 

 

천 개이 방이 있어 천방사라 했다던가....

 

폐사지가 된 내력이 재미있다.

처녀 하나가 절 방에 들어가자 그 처녀를 잡기위해

스님이 쫓았으나 자그만치 천 개씩이나 되는 방을 옮겨다니며 도망을 쳤다고.

부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스님,

화를 삭이지 못하고  불을 질러버리는 통에 그만 폐사지로 변해 버렸다고...

 

 

 

 

 

 

관수정(觀水亭)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610

조선 중종 34년(1539)에 관수정 송흠(1459∼1547)이 지은 정자다

중종 33년(1538)에는 청백한 관리로 뽑히기도 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2칸은 마루를 깔고 왼쪽 1칸은 방을 두었는데,

3면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열개문으로 하여 개방적인 면이 보인다.

좌우 옆면에는 낮은 평난간을 돌리고 뒷면은 벽으로 처리하였다

 

 

지지당 송흠은 1459년 장성군 삼계면 단산리  출생.  성종 11년(1480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정6품)로 첫 관직을 받아 근무했다.  효심이 지극했던 지지당은 한사코 고관대작을 마다하고 고향인 장성 가까운 고을의 수령만 자청했다.
78세에 101세의 모친을 여의고 3년간 한 번도 집에 가지 않고 시묘살이를 하다가
1540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장성군 삼계면 용암천 옆에 관수정을 짓고 향우들과 시문을 주고 받으며 여생을 보낸다.

 

 

 

 

 

 

 

관수정에 내결린 편액

 

 

8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높은 관직에 있었으면서도 청백을 생활화 했다는 지지당,

 

양팽손, 양은정, 최경회, 백광훈, 최경창, 김경희, 정명세 등.제자들의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고산서원(高山書院)

 

시도기념물  제63호  전남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 257

 

 

노사 기정진을 중심으로 이최선·기우만·조의곤·김록휴·조성가·정재규 등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기정진(1798∼1879)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이다.

순조 31년(1831) 과거에 급제한 후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담대헌(澹對軒)이라 이름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인데

후손들이 1924년에 중건하여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고 편액을 건 곳이다.

기정진 선생은 조선(朝鮮) 말기(末期)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인바,

사당에 주향(主享)되었으며, 이최선(李最善), 기우만(奇宇萬), 조의곤(曺毅坤), 김록휴(金錄休),

조성가(趙性家), 정재규(鄭載圭) 선생 등 5위의 신위(神位)가 배향(配享)되어 있다.

 현재 경내에는 외삼문(外三門), 강당(講堂), 동재(東齋)인 거경재(居敬齋),

서재(西齋)인 집의재(集義齋)가 강학공간(講學空間)을 이루고, 내삼문(內三門),

사당(祠堂)인 고산사(高山祠)가 제향공간(祭享空間)을 이루고 있고,

선생의 문집(文集)·목판(木板) 등 이 장판각(藏板閣)에 보관되어 있다.

 

 

 

 

 

 

 

 

아래는 백여 고중영 선생의 장편소설 "동리房"에 나오는 내용중에서

노사선생에 관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순조임금 3년 중국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 조선에 인물이 있나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이

용단호장 오경루하석양홍(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이라는 글귀였다.

이 글에 댓귀(對句)를 맞추라는 것이었다. 글대로 해석을 한다면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깊은 밤중 누각에 석양빛이 붉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이글에 댓귀를 맞추라 하니 조선의 무식한 조정 대신들은 알 턱이 없다.

왕의 체면이 구겨지고 난감해질 지경에 이르자 조정 대신들은 회의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회의를 거듭한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이치에 얼토당토 않은 글에 댓귀를 맞추는 일은 글을 보낸 쪽의 진의를 알고서야 풀어낼 수 있는 문제다.

조정대신들이 회의를 거듭하며 고심을 하다가

전라도 장성에 신동이 났다하니 가서 물어보자는 의견으로 일단락이 지어졌다.

그 신동이 노사 기정진이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1798년(정조22년)에 태어났다.

노사의 조부 태량(泰良)이 황구훼목(黃鷗喙目)이라는 명당에 선영을 모셨는데

당시 지관이 말하기를

 

/한쪽 눈이 먼 손자를 얻으리라/고 한다.

 

이듬해 태량은 손자를 보게 되는데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태어난 아이는 두 눈이 멀쩡하지 않은가.

태량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태량은 도참설의 신봉자였으리라.

일이 이렇게 되고 보면 지관이 엉터리였다는 말이 된다.

아니, 지관이 엉터리일 뿐만 아니라 선영을 모신 명당이 의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노사가 6세에 이른 봄날 아침 노사의 어머니가 시렁에서 뭔가를 찾고 있을 때

시렁에 얹어놓았던 가락(물레에 장치하여 실을 감는 쇠꼬챙이)이 떨어지면서

마침 아랫목에 잠들어 있는 노사의 한쪽 눈에 정확하게 꽂혀버리는 게 아닌가.

뜻밖의 참변에 기겁을 한 노사의 어머니가 어린 노사를 부여낭고 비명을 지르며 안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할 때 이를 본 태량은 오히려 무릎을 쳤다. 그의 조부는 무릎을 치며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즐거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노사 기정진은 그렇게 하여 외눈박이로 살아야할 제 몫의 운명을 찾았던 것이다.

중국의 사신이 제시하는 문제를 풀길이 없는 조정은 장성으로 칙사를 파견했다.

장성의 노사를 찾은 조정의 칙사는 일곱 살의 노사가 너무 어린 아이라는데 당황스러웠지만

그러나 왕명은 왕명이다. 어린아이에게 물어볼 수밖에-

헌데 용단호장 오경루하석양홍이라는 글을 본 어린 아이는 해를 가리키며

‘동해바다의 해’라고만 말하고 제 놀이를 계속한다. 노사의 말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칙사가 알 턱이 없다.

허나 그렇다 하여 눈치까지 없는 칙사는 아니었다.

조정의 문무백관이 5000여명에 이르건만 중국이 물어온 난제에 대해 누구 한사람 말문을 연 사람이 없었는데

신동이라고 소문난 노사가 그 난제에 드디어 토를 달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눈치 빠른 칙사는 어린 노사 앞에 단정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신동이시여! 지금 조정에서 위로는 임금을 비롯하여 문무백관들이 이 문제로 노심초사하고 있다오.

이 문제를 못 풀고 보면 나라의 체면은 말할 것도 없고 저 되놈들은 오히려 조선을 없이 여기고

조공을 올려 받치라고 트집을 잡을 것이 빤한 일이라오. 그러니-”

 

칙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놀이에 빠져있던 노사는 말없이 지필묵을 끌어당기더니

 

/東海有魚 無頭無尾無脊(동해유어무두두미무척)

畵圓書方 九月山中春草綠(화원서방 구월산중춘초록)/을 써 준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칙사는 할 일 없이 말채찍을 날려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노사가 써준 글은 중국의 사신이 내놓은 어처구니없는 문제와 오묘하게

어우러지며 하나의 미려한 운문(韻文)이 되었으니

 

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

畵圓書方 九月山中春草綠

 

龍短虎長은 해를 지칭 한 것으로 용을 뜻하는 辰방향에서 뜰 때는 겨울이라 해가 짧고

호랑이를 뜻하는 寅방향에서 뜰 때는 여름이라 해가 길다는 뜻으로 이 글에 노사가 내놓은 댓귀는

東海有魚 無頭無尾無脊畵圓書方 으로 이 말을 풀어보면 동해에 고기가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등뼈도 없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둥글고 글씨로 써보면 네모지다. 로 동해일출을 뜻하는 운문(韻文)이 된다.

다음 문장이 오경루하석양홍(五更樓下夕陽紅)인데 五更은 새벽 3시에서 5시를 말한다.

그 새벽에 석양이 붉다 했으니 이치에 틀리는 말 같지만

그 오경을 단순하게 중국에 있는 오경이라는 누각의 이름으로 풀면 그 누각의 석양을 칭송하는 말이 된다.

그래서 노사는 댓귀로 구월산중춘초록(九月山中春草綠) 즉 구월산에 봄풀은 푸르구나.

라는 문장으로 대거리를 했던 것이다. 어찌 기가 막힌 댓귀가 아니겠는가?

순조는 청나라 사신에게 어린아이가 써준 대로 답한다.

중국의 사신은

 

“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하며 깜짝 놀랐다.

 

가슴을 졸이며 일의 화해를 지켜보던 조정 대신들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

나라의 체면을 생각하여 허풍을 떨며 왈

 

“조정의 대신은 물론 삼척동자라도 다 알만한 문제요.” 했다한다.

 

그리하여 조선의 체면은 유지되었고 순조임금은 가로되

장안만목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이라 개탄했는데 이 말은 물론

“장안에 있는 만개의 눈이 장성고을 눈 하나 만 못하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이리하여 노사선생은 일목문장(一目文章)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노사선생 5세 되던 해에 맷돌 가는 것을 보고 지은 시 한 수 소개한다.

 

鐵柱地洛陽(철주지락양) : 아래 맷돌 가운데 있는 쇠꼬치는 땅위의 서울이고

木柄天北斗(목병천북두) : 맷돌위의 손잡이는 하늘의 북두칠성같이 도는구나.

吾看磨石間(오간마석간) : 내가 맷돌 가는 모습을 보니

天動地靜理(천동지정리) : 하늘은 움직이고 땅은 고요한 이치로다.

 

물론 이 글은 지동설이 도입되지 않았던 시절의 동양적 사고를 바탕에 둔 것이겠지만

5세의 나이에 이만큼 뛰어난 통찰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노사는 사마시에 장원급제하고 무려 40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출사하지 않고

오로지 고학으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납량사의 정자설 우기 이통설 외필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이다.

서경덕 이퇴계 이율곡 이진상 임성주와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힌다.

지금의 전남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에 있는 고산서원(高山書院)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죽어서 이 서원에 배향되었다. 노사 기정진이 외눈박이로 살아야할 운명이었던 것은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 바른 일만 보고 그른 일은 보지도 말라는 하늘의 계시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성 남문 창의비(長城 南門 倡義碑)

 

유형문화재 제120호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 714번지 )

 

 

이 비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1592)와 이듬해(1593)5월, 그리고 정유년(1597)8월등 3차에 걸쳐 장성 남문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단의 전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순조2년(1802)에 건립한 것이다. 1차 남문창의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8월 24일, 김경수 선생을 맹주로 하여 일어났다.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고 격문을 보내니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의병이 모여 들어, 그해 11월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삼고 1,651명의 의병이 496석의 군량미를 가지고 북상하여 직산과 용인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시켰다. 그 후 고향에 돌아온 의병들은 일본과 조정의 협상을 관망하였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김경수 선생은 1593년 5월 29일, 다시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열어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였으며, 장성 현감 이귀는 관군 가운데 강한 군사 40명을 선발하고 읍병(邑兵) 300명을 조련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였다. 이것이 바로 2차 남문창의인데, 김경수 선생의 두 아들 극후(克厚)와 극순(克純)이 의병 836명을 이끌고 동년 6월 진주성 혈전에 참전하여 진주성 함락과 함께 모두 순절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백양사 의승 70명과 1천여명의 의병이 3차 남문창의를 일으켰다. 이들은 안성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도 커서 화군하였다. 남문창의에 참여한 의병장 72위를 오산창의사에 모시고 매년 향화를 올리고 있다.

 

 

 

 

 

 

 

 비의 형태는 108-56cm크기의 사각형 비좌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옥개석을 올렸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을 만들었은데

비각의 지붕형태는 팔작으로 공포는 익공식이다. 비문은 4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전면 중앙에 "호남오산남문창의비"라 비제를 새기고 제현위차, 자제종사, 동창, 의승장,

사노등의 의병단의 중요인물 77명의 직과 성명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새겨진 오산은 장성의 별호이다.

리고 좌하단에 "만력임진이백십일임술"이라는 건립연대를 명기하였다.

이해는 1802년이다. 좌ㆍ우면화 후면은 비문인데, 상단에 "유명조선호남오산창의비"라 하여

3면에 새겨져 있다. 이처럼 이 비는 1기의 비이면서도

전면과 좌우면ㆍ후면 명제가 서로 달리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리고 비문상에는 비 건립이후 추가로 시기거나 의도적으로 지운 흔적들이 보인다

 

 

 

 

 

 

 

칠현유적지(七賢遺蹟址)

 

문화재자료  제119호 (장성군) 전남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223

 

 

이곳에는 장성 출신으로 효행이 탁월하여 사림의 모범이 되었던

 정운오(1542∼1593), 추담 김우급(1574∼1643), 조영규(1535∼1592), 처사 조정로(1559∼1612)와

그의 아들, 최학령(1512∼?), 아곡 박수량(1491∼1554)을 추모하여 모신 7기의 비(碑)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원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 효자로 소문난 절효공 서릉(徐稜)이

학문을 가르치던 모암정사가 있었다.

조선 선조 20년(1587)에 장성현감 이계와 하곡 정원오 등 지방 사림들이

절효공의 효행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과 강당을 건립하고 모암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서원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모두 불타 없어졌으며,

1649년에 지방사림들이 다시 지었다.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없어진 뒤에는,

서원의 옛터에 단(壇)을 설립하여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으며,

1933년부터는 모암서원에 모셔졌던 7명의 위패를 한 곳에 모아 제사를 드리고 있다

 

 

 

 

 

 

 

절효공 서능 정려비각(節孝公 徐稜 旌閭碑閣)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62호

장성군 북일면 박산리 작동 마을


 

서능선생은 몽고가 우리나라를 침범하던 국난기에 입암산성 전투에서 적극 협력한 것으로 추측된다.
서능의 효행은 이 지방의 사람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기리기 위해 절효정려비가 1578년(선조11) 북일면 박산리 124번지에 건립되었다.

 

 

 

 작동마을 태생인 선생은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선생이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선생의 모친이 병이들자 

 

벼슬을 버리고 집에와모친을 간호했으나 청개구리가 있어야 병이 나을 것이라는

 

의원의 말을 듣고 한 겨울에 구할 길이 없어 고심하던 중

 

난데없이 청개구리가 나타나 약탕관 안으로 뛰어들어

 

 약과 함께 짜서 올리니 모친의 병이 완치 되었다고 한다.

 

 

 

 

 

 

 

 

 

 

이 비는 당시 호남의 종유(宗儒)로서 명성이 높던 사암 박 순(1523-1589)이 비문을 짓고

옥봉 백광훈이(1537-1582)이 글씨를 썼다.
그 뒤 1669년 (현종 10) 변휴 등 12人이 주동이 되어 비각 건립을 시작하여

1694년 (숙종20)에 완결시켰으며 이때 동춘 송준길(1606-1672)이 편액을 썼다.
이 비는 1824년(순조 24)에 김장환 등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13년 서택환 등의 주도로 중건된 것인데 지방문화재 162호로 지정되었다.

- 비명 : 高麗侍中 節孝先生 徐公碑銘 (고려시중 절효선생 서공비명)

- 건립년 : 1578년 (선조 11)
- 규 모 : 총 고 266cm (고 136cm) 폭 62cm, 후 53cm
연화태석 : 고 60cm, 폭 178cm, 두께 150cm
 

 

손톱으로 긁기만 해도 버석거리며 떨어지는 비석의 석질....

이렇게 형편없는 석질의 비석은 난생 첨 보는 것 같다.

 

다행히도 원문이 남아있었던지

비각 앞쪽에 네모난 오석을 세우고, 원래 비문의 내용을 옮겨놓았다.

 

 


 

 

 

구름문양에다 개구리 문양까지 새겨져 있다는데

알아보기가 영.....

 

 

 

 

 

 

 

'서능정려비각' 너머로 지는 해

 

 

 

 

 

 

 

절효공 서능 선생은 이 고장 장성땅에 학문의 기풍을 세웠으며

 

 유교적 덕목과 생활관습을 규정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훈인

 

「거가십훈」을 남기기도 했다

 

 

 

 

 

 

 

 

 

거가십훈(居家十訓)

 

 

 

 

 

 

1. 扶稙三綱(부직삼강) : 삼강을 바로 세울 것

 

 

.

2. 惇敍五倫(돈서오륜) : 오륜을 돈독하게 하여 질서를 세울 것

 

 

.

3. 寬以御下(관이어하) :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대할 것

 

 

.

4. 禮以事上(예이사상) : 예로써 윗사람을 섬길 것

 

 

.

5. 臨喪致哀(임상치애) : 초상(喪)을 당하여서는 슬픔을 다할 것

 

 

.

6. 當祭致敬(당제치경) : 제사 때는 공경을 다할 것

 

 

 

 

7. 持心以公(지심이공) : 마음가짐을 공정하게 할 것

 

 

.

8. 處事以義(처사이의) : 일을 처리할때는 올바르게 할 것

 

 

.

9. 敎子以正(교자이정) : 자식은 바르게 교육시킬 것

 

 

 

10. 待人以恕(대인이서) : 남을 대할 때는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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