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당 (道山書堂)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2호 /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주 건물인 만수당은 1907년에 건축되어 인근 학동들을 위한 강당으로 쓰였으며
이 곳에서 도산초등학교가 개교되는 등 서당교육과 근대교육의 연결고리를 담당하기도 했으며
'선뜸서당' 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자와 연못으로 조성된 후원이 볼만하다는 생각인데
보수공사 중인데다 문까지 굳게 잠겨있는 상황.
김정회 고가 (金正會古家)
시도민속자료 제29호 / 전북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151
일제시대의 대학자이자 서예가인 보정 김정회(1903∼1970)가 살던 옛 집이다.
철종 13년(1862)경에 지어 그의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집이라 한다.
현재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사랑채, 사당, 곳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의 앞쪽에 위치한 사랑채는 앞면 4칸·옆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안채와 사랑채에 비해 훨씬 뒤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행랑채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안채의 양쪽으로 곳간채가 1동씩 있으며, 안채 뒤로는 사당이 있다.
앞면 6칸·옆면 3칸의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후대에 양쪽에 각각 1칸씩 덧붙였다. 안마당보다 높이 자리잡고 있는 안채의 양식은 다른 집에 비하여 특이하다.
조선 후기에 지은 전형적인 상류계층의 가옥이다.
김정회 가옥 앞에 조성된 백련지
안채에 들어서자니 이 고택의 종손되시는 김경식 박사께서 사모님과 함께 맞아주신다.
인사를 나누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갈 때마다 늘 뭔가를 하고계시던 연세 높으신 노모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어째 어르신이 안 보이십니다.?'
한참 머뭇거리던 선생께서 무겁게 말문을 여신다.
"지난 유월에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어쩐지 고가의 분위기가 무겁다 생각했더니만.
부디, 호상이셨길.......
김기서강학당(金麒瑞講學堂)
시도유형문화재 제100호 / 전북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산9
김기서는 광산인으로 자는 시견 호는 돈목재이다.
강학당은 조선 명종(1548)에 세워진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김기서가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14년(517)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 신진사람들이 대거 숙청 당하자
이곳에서 두문불출하고 후진양성에 온갖 정열을 다하였다.
이 건물은 전면 길이 12.2m, 측면길이 4.7m, 기둥높이가 2.37m로서
대청의 중당 2칸과 좌협실 2칸, 우협실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의 소박한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한편으로 이 강학당은 전불사 불당지라고 전해져 오기도 한다.
김기서 강학당 앞 계류에 자리한 왕버들
족히 수 백년 수령은 넘어 보인다.
운선암 마애여래입상 (雲仙庵 磨崖如來像)
전북 유형문화재 제 182호 / 고창군 성송면 계당리
얼굴의 크기에 비해 작은 입은 꼭 다물고 있으며,
오른손은 길게 내려 밖을 향하고 왼손은 가슴에 가볍게 들어 올려져 있는데
각시바위라고도 불려지는 이 마애불의 젖가슴과 손바닥에는
슬픈 전설을 뒷받침하는양 붉은 피빛 흔적이 너무나도 선연한 모습이다.
운선암 보살께서 사진상 오른쪽의 바위에는 이름이 하나식 붙어있다고 일러준다.
복주머니바위, 거북바위, 또 하나는 00바위라고 했는데 생각이....?
소발(素髮)의 머리위에 커다란 육계를 하고,
이마에는 백호공(白毫孔)을 새겼으며 눈은 반쯤 뜨고있다.
불신에서 대좌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시기는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본다고.
운선암 하경
운선암 대웅보전에 모셔진 탱화
신장도
산신도
어두운 법당에 들어가 간신히 찍은것이라서 상태가 영 별로다.
위 석 점의 탱화는 요 근래에 그려진 것은 아닌것 같고,
보존 상태는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지만, 그림 솜씨는 썩 괜찮아 보였다.
뭔가 확실한 고증이나 문화재적 가치 여부를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마애여래좌상
운선암 왼쪽 자연암벽 한쪽 귀퉁이에 마애여래상이 위치해 있다.
바위에 균열이 있는데, 좌상을 새길 때부터 갈라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보며, 높이는 233cm, 몸길이 155cm, 머리길이 56cm, 광대폭은 195cm이다.
바위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연꽃 대좌 위에 커다란 신광과 두광을 지니고 결가부좌한 모습인데.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높게 솟아있으며 얼굴은 이마부분이 넓고 턱부분이 다소 갸름한 모습이지만
이목구비가 거의 마멸되어 형태를 알 수 없고 목은 짧은편으로 삼도가 새겨졌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모습이다.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선각 마애불의 형식으로
불신과 좌대, 그리고 광배(光背)는 모두 선으로만 처리하였지만,
불상의 발가락만큼은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마애불이 갖는 한계점을 극복하였다는 평.
/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앞에 섰으나 때마침 비가 내리는 바람에 카메라를 들이댈 수가....
할 수 없이 인터넷에서 구한 사진으로 대신 /
무송리 석불좌상 (茂松里石佛坐像)
시도유형문화재 제197호 / 고창군 성송면 무송리 산2 (1구(軀))
하나의 커다란 광배에 얕게 조각된 불상으로, 불상의 왼쪽 몸광배 부분에 약간 금이 간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좋은 편이다. 불상을 조각한 석판은 두께 약 20㎝ 정도 되는 편평한 돌로서, 앞에는 얕은 부조로 불상을 새기고
뒤에는 선각으로 또 한 구의 불상을 조각하였다.앞면은 거신광(擧身光)의 가장자리를 따라 안쪽에 얕게 2중의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조각하고 그 안에 불좌상 1구를 조각하였다. 머리는 주위를 약간 파내어 얼굴부분이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는데,
정수리에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고, 소라 모양의 머리칼인 나발이 표현되었던 흔적이 있으나 거의 마멸되었다.
(문화재청 해설 인용)
얼굴은 갸름한 편으로 눈 부분은 마멸되어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으나 아래로 내려뜬 눈,
아담한 코와 꼭 다문 입 등이 균형있게 표현되었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가늘게 표현되었으며 귀는 아주 작게 표현되었다.
둥근 형태에 균형잡힌 이목구비와 양감있는 얼굴 등으로 인하여 원만상을 이루고 있는 얼굴은
통일신라 말∼고려초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지만,
어깨 높이로 들어올린 오른팔이 너무 비대하게 표현된 점이라든지
상체에 비하여 왜소하게 표현된 하체표현, 거의 판과 같이 얕게 부조된 신체표현 등에서
고려시대 중, 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해설 인용)
뒷면에는 가는 선각으로 석불좌상이 새겨져 있는데,
거신광의 가장자리를 따라 얕은 양각으로 광배를 표현하고 그 안에 불상을 새겼다.
얼굴은 마모되어 알 수 없으나 육계가 크고 분명하게 표현되었으며 신체 아랫부분 역시 묻혀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들어서 가슴 안쪽으로 당겨 들고 있고, 왼쪽 어깨에만 걸친 옷의 유려한 옷주름이
선각으로 조밀하게 새겨져 있다. 아랫부분이 손상되어 정확하지는 않으나 좌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약간 도드라지게 새기고 신체는 굴곡이 거의 없이 조각한 것으로,
이러한 수법은 고려시대의 불상 및 마애불에 즐겨 사용되던 수법 중의 하나이다.
(문화재청 해설 인용)
(고창관광 사이트에서 옮겨온 사진)
석불좌상에서 앞을보니 영산기맥이 줄달음치는 모습인데
평평하게 보이는 왼편은 구황산(九皇山)이요,
오른편 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부분은 고산(高山) 정수리다.
왕버들 군락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43
삼태마을 이 시작되는 상류지점에서부터 마을이 끝나는 지점까지의 하천제방에
왕버들나무를 비롯한 여러종류의 노거수 9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의 지형은 배처럼 생겼는데 암치마을에서 발원한 대산천이 마을 앞으로 흘러 가고 있어
거센 물결에 배가 떠 내려가지 않도록 배를 메어둘 나무를 심었는데 ,
수백년이 지나는 동안 지금의 노거수로 생장하였으며 ,
이 나무들로 인하여 삼태마을은 별다른 재앙없이 잘 살수 있었다고 전해 온다.
왕버들 숲 앞에 선 비석
노포당 (老圃堂)
옛시절 고을 원님이 살았다는 집으로 왕버들 숲을 바라보고 선 고가다.
고가 안 쪽의 모습
노포당 뒷 집에 들어서면 볼 수 있는 재실 .
커다란 금목서와 감나무를 비롯, 괜찮은 나무가 여러 개체 자라고 있는 집이다.
석달 동안이나 병원신세를 지고 나왔다는 이 댁의 할머니.
묵을대로 묵은 잡초를 뽑아내느라, 휜 허리가 아예 부러질 지경으로 씨름하고 계셨는지라
너무도 안쓰러워 길게 말을 이어가기가....!
보 호 수
고창군 성송면 산수리 43
수령 약 300년. 수고 6m, 둘레 2.7m.
고창에서 영광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서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수세를 자랑하는 와송(臥松)이다.
용화사(龍華寺)
고창군 대산면 연등리
용화사 석조미륵불상 (龍華寺 石造彌勒佛像)
전북문화재자료 제183호
미륵전에 본존으로 안치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무릎 이하 아래부분이 땅 속에 묻혀있어 전체높이는 알 수 없지만 현 높이는 약 185㎝ 정도이다.
두툼한 돌을 이용하여 뒷부분은 원형 그대로 다듬지 않고 두었으며
앞 부분에 조각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측면에서 보면 상당한 중량감이 느껴지는 불상이다.
머리에는 지붕돌 모양의 커다란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윗부분을 구슬 모양으로 처리하였다.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는 분명치 않지만 그 부분이 높게 솟아 보관을 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길쭉한 얼굴에 유난히 큰 귀가 눈에 띠며 얼굴은 마모가 심하여 잘 알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눈 부분은 움푹 들어가게 하여 상대적으로 눈동자가 튀어나와 보이며,
약간 벌어진 입은 아주 작으면서도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가슴 부근에는 두 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기 위하여 팔 안 부분을 의도적으로 갈아낸 흔적이 있으나
후대에 보수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현재 불신은 허리 아래부분에서 두 동강이가 나 시멘트로 붙여놓은 상태이지만
그 아래로 무릎과 발 부분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신체표현이 빈약한 거불(巨佛)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하부가 매몰되어 알 수는 없지만 괴체적인 신체표현과 생략화된 세부표현, 지붕돌 모양의 보관 등에서
고려시대 이후 거불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후기의 석불로 생각된다.
친근감이 있고 해학적인 독특한 석불의 표현은 민간신앙이나
무속신앙과 불교신앙과의 습합(習合)을 이루어 가는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해설 인용)
2010. 9. 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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