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 사상가 정여립의 한이 서린 천반산(天盤山)
▶ 전북 진안읍 가막리, 동향면 성산리, 장수군 천천면 연평리 경계
▶ 당집 - 농가 - 서릉 - 할미굴 - 한림대터 - 성터 - 뜀바위 - 575.8m봉 - 말바위
- 천반산 깃대봉 정상(646.7m) - 동릉 - 안부 - 먹개골 - 당집 (5시간)
▶ 2010. 3. 13 (토)
당집
들머리
힐끔 ~~~
가막골 앞을 휘돌아 가는 금강의 상류 연평천(장수천)
서릉 당도
덕유에서 발원한 구량천과
천반산 서남쪽을 돌아 내려온 연평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죽도(竹島)
나도 한 컷 ~~~
- 할미굴 -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의 낙향, 이 곳 천반산에 들어 수양을 했다는 송보산.
이 굴은 그의 부인이 기거했던 곳 이라고.
들머리 일대
당겨본 당집 인근
저 멀리 마이산의 두 귀가 쫑끗
한림대 터
성터 일대
575.8m 봉
천반산을 휘감아 도는 구량천
'송판서 굴' 가는 길
정여립이 말을 달려 건넜다는 "뜀바위"
뜀바위에서 내려다본 구량천
뜀바위에서 조망한 마이산
재미있는 문양의 인삼포
뜀바위를 보고나서 575.8m 봉을 향해 되돌아 가는 길
정여립이 바둑을 두었다고 전해오는 '말바위'
天盤落桃 ... ?
누구라도 이 소나무에 걸터 앉는 순간 곧장
~ 송하신선도 (松下神仙圖) ~
천반산 정상 '깃대봉'
동릉을 타고 내려온 안부
좌측은 먹개골로 이어지고, 우측은 섬티교(산장)에 이르게 된다
먹개골 임도
들머리와 날머리가 합쳐지는 농가 앞, 사료 작물의 푸르름
단란한 농가 가족의 나물캐기
산행 들머리 연평천 부근의 냇가에 선 준수한 바위
절벽 왼쪽으로 몇 개의 글귀가 새겨져 있고, 오른편에는 바위를 파 내어 시멘트를 채우고 글을 새긴 것,
또 다른 돌에 여러 성씨의 이름을 새긴 후, 바위에다 끼워 넣은 것 등이 보였다.
천반산에 전해져 오는 전설 중에 '천반낙도'(天盤落桃), '장독바위' 등의 애기를 들을 수 있는데
혹, 이 바위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을 내려와 찾아간 '죽도' 절개지
1970년대 중반, '벼슬바위',혹은 '병풍바위'라고 부르던 절벽 부분을 폭파하여 생긴 단애.
죽도를 휘감아 흐르던 물줄기를 곧장 바위 뒷편 논으로 끌어 대기 위해 바위를 끊었다는 얘긴데
지금에 와서는 괜한 짓을 했다라고 많이 들 아쉬워 하는 모양.
진안 용담댐 아래 "신용담교"를 건너면 만날 수 있는 '선바위'
와룡암(臥龍庵)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8호 -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냇가에 선 와룡암.
효종 원년(1650)에 김중정이 지은 것으로 높은 기둥을 둔 누각식 마루집이다.
정자 내부의 편액
와룡암 냇가 건녀편에 자리한 주천 서원(朱川書院)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42호 -
주희, 여대림, 주잠, 이황, 이이, 김충립, 김중정을 배향.
꿈틀대는 용이 누운 형국이라서 와룡암이라 한다는데
원래는 지금 바라 보고 있는 위치에 서 있었으나 건너편으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천반낙도(天盤落桃)의 땅이라 일컫는 천반산(天盤山) 초입.
바위 투성이의 작은 동산 하나.
어지럽게 머리를 풀어 해친 형상의 느티나무 군락이 시선을 끈다.
신령들의 영역임을 주장하는 듯.
커다란 당산목 아랫 둥치엔 오색 천이 휘감겨 있고
동산과 귀목을 배경으로, 한 눈에 봐도 당집 임이 분명한 낡은 집 한 채.
그 모습이 마치,
만고의 한을 품고 스러져간 풍운아 죽도(竹島) 정여립(鄭女立) 선생과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스러져간 일천여 명의 원혼을 달래는 퍼포먼스 처럼 다가온다.
알토란 같은 조선의 선비 일천여 명이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한 1589년 기축년의 피바람.
처자식은 물론, 사촌과 처가 삼족까지 모조리 도륙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그를 가까이 했던 사람 모두가 죽임을 당했던 기축년의 옥사.
420 여년 전
진보 사상가 정여립(1546~1589)은 이렇게 외쳤다.
"천하의 주인이 어찌 군주이겠는가, 이 나라 이 땅의 주인은 만백성이 아니겠는가"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랴 !"
"백성과 땅이 이미 조조와 사마씨에게 돌아갔는데,
한 구석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유현덕의 정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거야 말로 벼락 천둥치는 발설.
봉건계급을 타파하고 조선 왕조의 절대 이데올로기를 정면 부정하면서
새로운 세상, 이를테면 공화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닌가.!
낙향한 정여립은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더불어 사는 평등을 꿈꾼다.
신분을 불문,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상향을 꿈꾸며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죽도에 서실(書室)을 마련,공부와 더불어 바로옆 천반산을 무술 수련의 장으로 삼았다고.
1587년엔 관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직한 대동계를 이끌고 나아가
남해안에 출몰한 왜선 18척을 물리치기 까지 했다.
허나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민중의 세상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던 모양.
반란을 꾀했다는 이축, 박충간 등의 고변(告變)으로 그만 쫓기는 신세로 전락.
거기에다 서인으로 대표되는 정송강 등의 주도로 대대적인 동인 제거 바람이 불면서
물경 일천여 명의 목숨이 숙청되고 말았다는 사실...
신갈나무 잎새가 푹신하게 쌓인 등로를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
능선에 당도하니 초록빛 시냇물이 휘감아 도는 죽도가 내려다 보인다.
관군에 쫓기던 정여립이 숨어들었다는 곳, 죽도.
'토역일기'에 나오는 진안현감 민인백의 증언.
"정여립은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자신의 목을 칼날에 질러 자결했다."
"그 때 정여립의 목에선 마치 소가 우는 듯한 소리가 났다."
허지만 '정여립의 사상과 기축옥사'를 파고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 한다.
"정여립은 자결한 게 아니고 암살당한 것이 분명하다."
모든것은 동인세력들이 꾸며내고 또한 유포시켰을 것이라고...
전망바위에 서니 저 멀리 두 귀를 쫑끗 세운 마이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치, 죽도와 천반산을 할퀴었던 기축년 그 날의 함성을 증언하는 듯.
"대동계는 결코 역모가 아니었다오, 닥쳐올 임란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였을 뿐..."
정여립이 말을 타고 건너 뛰었다는 뜀바위를 다녀와서
대동(大同)의 깃발을 내 걸었다는 산정을 따라 깃대봉에 오른 다음
동릉과 먹개골을 따라 내려와 원점회귀를 완성하고 근처의 시냇가를 찾는다.
깨끗한 물이 재잘대며 일제히 몰려드는 형국의 준수한 바위 하나.
하늘에서 천반산에 떨어졌다는 복숭아가 바로 이 바위를 두고 하는 말...?
계류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축옥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이다."
"삼백년 오백년 후 그의 이름이 알려질 뿐이다."
두 발로 걸으면서 역사를 발굴해내는 신정일 선생의 단언.
"16세기 말 개혁적 선비의 떼죽음은 결국 임란때 인재부족을 겪을 수 밖에 없었으며
나아가 조선왕조 몰락의 결정타가 됐다 라고...."
죽도 정여립이 외쳤던 진보적 사상의 뼈대와 핵심은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한 마디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을 터.
'불사이군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지론은 민초들에게 있어 너무나 위대한 것이었다.
시대를 앞서간 올곧은 사상가의 외침을 듣기위해 찾아온 천반산.
바위를 휘감아 흐르는 깨끗한 계류에
기축옥사로 스러져간 수 많은 이의 영혼을 달래는 간절한 염원을 실어 본다.
엊그제 우리 곁을 떠난 스님 법정의 말씀이 떠오른다.
죽음은 무엇인가...?
.
.
.
" 죽음은 우뢰와 같은 침묵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Concierto De Aranjuez / Danielle Lic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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