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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축령산 - 경인년 4월 첫 날의 표정

            ● 축령산  경인년 4월 첫 날의 표정

                 

                         (전남 장성군 서삼면, 북일면 일대)

 

 

 

 

봄을 위한 소네트 한소절 

 

- 고 중 영 -

 

 

적작약 시늉뿐이던 젖몸살 도지는 날
아주까리 등잔에 비낀
빗살무늬 봉창으로 내리는 봄비는
허리,
허리 너무 가늘어
내리는 족족 쓰러져 눕는다고-

그 빗소리
옥색 아슴한 홑 가리개로 싸두면
화촉동방의 새 각시
어서 풀리고 싶은 옷고름소리로 풀리고
동문선 잘못 읽은 대목 고쳐 읽는 서방님
높낮이 문들해진 낮출목으로 풀리고

조금 남아선
단근질 뜨거운 청상의 속사정
알고도 은근히 몰라줘야 하는
황홀한 죄목으로도 풀리고 
한숨자락 치렁치렁 戀事戀에 물든

 

상사무늬로 풀리다가

마지막엔
마지막엔
행천리(行千里) 로 어지는
내 누님의 가슴닮은 수틀에
눈시울 같이 순하기만 하던 동양사 푼사
매듭풀어 노곤한 색색

그 수(繡)실로만 풀려라.

 

 

 

 

 

산은 산이요 

- 고 중 영 - 

 

 

이 솔바람 불어 어디까지 가겠는고.

산길 걷다가 물한모금 머금고 하늘 보니

영낙없는 솔바람 색이어.


중고개 허리께를 새끼손톱으로 할퀴며 흐르는
개여울 곁으로
다족중생(多足衆生) 발길에 밀린 마지막 더위가
훅-

성깔 한번 부리고는
허연 배를 뒤집은 채 산모롱이를 돌아갈 때
슬픈듯 요염한듯 물기 머금은 낮달아래
쩌걱- 쩌걱- 울음 꺾는 妙音鳥 한마리다.

무듦지 바람듦지 저 하늘 구름듦지
골밑창에 깔고 앉아 천만년을 독거해온 삼각산도
달아나는 세월은 어쩌지 못했음인가!
이 가을 버티고 앉은 허세야 그럴듯하건만
만장석 뽑아올린 頭象, 인수봉은 민대머리,

허어 하릴없는 납자가 밑벌린 개구멍바지로
무엄하게 내뻗는 오줌발 곁에서
반구비 외로 꼰 목줄기에 매달린 산수유들이
벌겋게 낯을 붉히고 있는

살바하,

 

 

 

산은 산이요.  

 

 

 

 

 

새벽 끌고 오기 

 

- 고 중 영 -

 

 

//

 

뜬눈으로 밤을 샌 여자가

질펀해진 피로의 얄팍한 자락을 깔고 눕는다

 

산아래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길의

우유빛 눈썹들이

자동차 불빛에 들켜 잠시 눈을 떴다 감는다.

 

시작은 끝으로부터 오고

끝은 시작에게 이끌려 사라지는데

시간은 시간끼리

공간은 공간끼리

시계 자판에 띄엄띄엄 남은

마침표를 가까스로 끌어당긴다.

 

날마다 죽고 사는 게 일상인 마침표들이

비밀스런 그녀의 연대기를 

목구멍 찢기며 집어 삼키자

그녀의 어느 부위에서 부터 

초목들이 한치는 더 자라고

세상은

벌겋게 물들기 시작한다.//

 

 

 

우수에는 비가 내려야 한다.

 

- 고 중 영 -

 

만년필 굵은 촉이
계절의 분계선을 긁는다. 

이른 세안을 하러나온 새벽이
긁힌 자국을 폴짝 뛰어 건너는 늪지에서는
/우리는 스스로 부활했는가?/
모처럼의 논지(論志)를 다투는
개구리들의 의견은 분분하고
잠행 깊어 튼튼하던 하늘의 잠투정이
초생달 빠져나간 틈새기 부터
서서히 실밥 터지기 시작한 때다.

아직은 할 일이 남은 울타리
서숙대 덜 삭은 관절에
낡은 빨래처럼 매달렸던
포리프로필름 빈 씨앗봉지가
하루의 배아(胚芽) 한 톨을 잽싸게 삼키고
멀겋도록 배불러 출산을 기다리는데

"꼬끼오"

사람들이 가두려다 놓친 장닭울음이
게으름 꼼지락대는
씨알의 배꼽을 콕 쪼아
칼칼해진 양수를 터뜨리는 오늘은 우수

 

 

겨우네 옆드려 지내느라

 

뻐근해진 봄의 척추라면

내리는 빗방울이 

잔주먹 자근자근 풀어줘야 한다.

 

 

 

고중영의 <자서전 節>

 

슬픔 하나만이라도 조용히 갖고 싶다.

 

 

소란한 세상 시끄러운 소음속에 살던

고단한 한살이 접어 책갈피에 찌르고

머리에 소복히 쌓인 세월에 눌려 

잠시 고개를 숙이노라니

미워할 것 하나 갖지 못했음이 못내 아쉽다.

 

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는 어리석음조차

한 때의 위안이던 이 인생에서

가버린 사람들의 발뒤꿈치나

헛헛해진 손바닥으로 쓸며

망연히 바라보는 하늘 저쪽

마디마디 끊긴 것들을 가까스로 이어

비틀비틀 흘림 체로 쓴 낙서 한 줄

/인생이라는 게 그렇지 뭐/ 

 

이제 소중한 듯 품고 있던 넋두리 조차

힘에 겨워 내려놓고

따끈하게 덥혀진 술이나 한잔 마시면

허세처럼 자꾸만 부풀어 오르려는 슬픔

지긋이 눌러 품고 싶다. 

 

 

 

 

 

- 고 중 영 -

 

용마루에서 졸던 오후가 성큼 성큼
지상으로 내려선다.
길을 떠날 모양이다.
낮잠 깬 바람의 바튼 하품에
팔랑
조심성 없이 옮겨 앉던 낙엽의
치마 속이 얼핏 드러나 버린다.

호시절 누워 보내던 그늘이 실눈 흘기며
츳츳- 츳츳츳

외벽과 내벽사이
단열공사를 끝낸 은사시나무가
몸에 붙은 검불을 털어내는 시간
有, 無 사이에
/와/라는
文字의 분비물을 끼워 넣으려다가
실패한 내가 돌아앉으며
“씨팔”
잡혀가지 않을 만큼의 죄를 지어본다.

어떤 행위가 규정을 유보받는
죄와 벌의 틈새기 속에서 우리는
지닌 형량만큼만  자유로울 수 있다.

 

 

 

 

길에서. 7 

 

- 고 중 영 -

 

 

며칠 째 벼르고 있었을까.

 

 

축령산 들독재를 구부정하게 오르다가 만나는

 

그 소리개 한마리-

 

날렵한 몸맵씨에 수려한 날개를 펴고

상승기류 속을 은은히 활강하는

내 젊은 날의 꿈도 같고

내 젊은 날의 사랑도 같은 그 비상을

 

곁눈으로 훔쳐보며

그래! 나도 한 때 너처럼 날았었지.

 

그말 해주고 싶은 심사를

딸꾹질 참듯 꾹꾹 참으며

 

훠-이

손 한차례 흔들어주며 배웅하고는

꺼칠한 입술에 침 한번 바르며

발뿌리에 시선을 떨구면

어느 결에 키보다 훨씬 웃자란 그림자 하나 

 

멀뚝하니 날 올려다 보는 정황을 

못생긴 詩 한편에 정성껏 담으려다

그만 놓치고

헛헛한 가슴 허둥대기 어제던가보네. 

 

세상 일 훌훌 털고 날아가다가 돌아보며

 

순장바다 속울음같이 꾸-우-억-

 

저도 나만큼은 외롭단 뜻인가?. 

 

 

 

 

내 이름은 사람 

 

- 고 중 영 -

 

 

내가 사람이므로

 

가진 것이 마음뿐입니다.

마음을 밟고 오십시요.

밟고 오신 소중한 흔적

깊이깊이 묻었다가

좋은 인연 잎 피고 꽃피는 날

향기로 천길 만리를 날아

당신의 꿈이겠습니다.

 

마음으로 주고받아

몸으로 엮는 것이

당신이 꿈꾸는 사랑이어니-

 

 

 

 

 

제비꽃

 

- 절대영감(絶對靈感)을 위하여- 

 

 

- 고 중 영 -

  

 

자욱한 아침 안개 속을

홀로 걸어온 오솔길의

땀 베인 이마를 닦아주려고

보라색 손수건을 꺼내 든

누이가 서있다.

 

수줍음이 많아서

서툰 순정만큼만 웃던

열여섯 누이가

제 가슴을 바늘로 찔러

홀로 된사랑을 수(繡)놓던 누이가

뒷꼭지 어설프게

비녀 지른 청상이 되어

오라비 일어나기만 기다렸을까보다.

고개 숙인 채 기다렸을까보다.

 

 

 

 

 

 

대춘 潔

 

 

- 고 중 영 - 

 

역시 세월의 한 이랑일 터-

 

 

저렇게 찰랑대는 바람 푸른 산협의

아직도 서툰 개화지만

툭 터진 홍매,

초경 낭자하다.

 

아스름해져서 내려다보는 낮달의

버선코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구름 한 점

누군가 쓰다가 미뤄놓은 詩일까,

 

눈을 닦고 보면

밀려오는 계절의 등짝

뿔 옹두라진 지게에는

뱃살 뒤집힌 일광(日光)이 한 짐

 

이 한 낮에 분명

누군가 소식 한 줄 쯤 띄웠을 텐데

과적(過積)이 무거운 봄의

느릿한 걸음걸이고 보면

아하!

사나흘은 더 기둘러야 할까부다.

 

 

 

 

 

 

한국춘란 <산반소심>

 

- 고 중 영 - 

 

                                                         비 개인 아침 일찌기 산에 올라

                                                                춘란을 만났는데

                                                               어찌나 수려하던지

                                                           날 따라가자 손을 내밀다가 

 

                                                                          쯧쯧-

 

                                                               개화를 앞둔 대궁에 뜬

                                                           사슴만큼이나 서늘한 눈가에 

                                                           눈물이 조록조록 맺히는지라 

                                                                   까닭을 물었더니

                                                        정든 땅 떠나기 싫어서라고 하데요.

 

                                                                      기특도 하지

                                                                      사람들 조차도 

                                                       고향이라는 말을 버린지 오랜 세상에서

 

                                                                           항차- 

 

 

 

 

마음아 

 

- 고 중 영 -

  

 

내 심장을 심포(心包)로
겹겹이 포장한 이유는
심장 뛰는 꼴이
고삐 풀린 망아지 꼴이라서-

그 심장을 겹겹으로 싸서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서는
가끔씩 들여다 보는데

사행심이 와서 찔러도 보고
소유욕이 와서 건드려 보고
애욕이 침략하여 장난질도 해보고
항구불변 영생(永生) 욕이
툭툭- 쳐 보는데
심장의 방어벽이 오죽이나 질긴가.

왠만해서는 끄떡도 안하는데
깊은 밤 세상이 교교할 때
심장을 꺼내들고 요리 조리 살펴보건데
그놈, 고생이 작심이라.

언제 하루 쯤
심포를 벗겨주고
심근(心筋)도 끊어주고
더운피 끓는 욕심 잠잠히 달래놓고
마음아 가자!
아그야 어서 가자!

추한 몸 육체라는 수레에 싣고
천둥벌거숭이 심장도 달래가며
한 생을 끌어가느라 너 고생 많이 했다.

청산에 나비 날 듯
잠룡(潛龍)이 물을 만난 듯
털고 일또서서

가자!
가자!

마음 벗어두고 훨훨 가자.

 

  

 


 

봄, 그 잔혹사.

 

- 고 중 영 -

 

  

 

꽃이 지고 있다.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지고 있다.
피는 일이 늘 그러하듯
그렇게 꽃들이 지고 있다.

지는 꽃잎들 애간장이 다 녹아
노을로 번지고 나면
꽃지는 세상을 배경으로
사람의 마을도 저토록 저물고 있다.

사람의 마을이 저물고 있으므로
하염없어진 그대도
고개를 숙인 채 눈물겹겠구나.

오늘도 꽃이 지고 있다.
꽃이 지고 있으므로
늘 보내던 일로만 가슴을 다치던 사람들은


또 한 번
생의 모서리를 모질게 베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