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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토요산책

 

 

춘분

 

                        - 고중영 -

 

봄이 왔으므로

대지는 근육을 불끈거리며

피돌림을 시작하고

 

건너다 보이는 거기

관목 한 그루 선 채 겨울을 지낸 개활지

그 아래 몸풀린 땅 속에서

씨알들의 각질이 터지는 소리

 

産苦를 이겨내는 풀빛

 

 

 

 

이곳은

 

                       - 고중영 -

 

하얗게 내리는 눈이 아니다.

파랗게 움돋는 대지가 아니다.

 

지금 내가 앉은 이곳은

적막과 그리움이 쌓인

고독의 허파 속이다.

 

뜨거운 숨소리를 딛고 달은 뜨는데

나르던 새 한마리 가고 없는데

달이 토해내는 붉은 울음만

내 귓가에 낭자하다.

 

우주 미아의 절대 고독이

시퍼런 표정을 일그러뜨린 산 속

장렬해져서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내가 있을 뿐.

 

하얗게 쏟아지는 눈이 아니다.

파랗게 움돋는 대지가 아니다.

외로움을 여며내는 달의

피붉은 울음이 낭자한

이곳은 다만 산 속일뿐이다.

 

 

 

 

 

                - 고중영 -

 

- 눈

 

툇마루에 서서 바라보는

내리막 길에

하얀 꽃으로 피어나는 당신입니다.

 

가슴에 품었던 외로움을

입김 호호 불어

지상에 뿌리며 글썽이는 당신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끝내 하지못한 말씀에 목이 잠겨

침묵으로 안겨오는 당신은

이내 떠나야 하는 고별입니다.

 

눈썹만 적셔놓는 눈물입니다.


 

 

 

 새벽에 관한 詩

 

                                         - 고중영 -

 

새벽은 날마다 제 가슴에 길을 낸다.

 

엊저녁 어스름을 허용햇던 잘못을

밤사이 성찰(省察)하여

너무 맑아진 탓으로 영혼까지 드러나는

회개를 마쳤는지

저토록 알뜰하고 청결한 길을 낸다.

 

청량산 외딴 집 겨울은 깊었어도

햇살 지펴 따뜻한 하루를 준비하려는 새벽이 있어

떠오르는 태양은 늘 웃음이 환하고

소복이 쌓인 눈, 안개, 바람을 헤치고

켜로 쌓인 고요 속

애써 남의 눈을 피해 찾아들었던 그대가 오늘도

제 가슴을 밟고 돌아가는 모습.

 

뒷 모습.

 

 

 

 

춤 

 

                     - 고중영 -

 

가령 저 한 꽃잎

달빛 꿈같이 엮어내는 하늘에 올랐다가

혼곤히 돌아오는 길이면

소문에도 얼비친 그대로의 향기이네.

 

가령 저 한 꽃잎

수수만 개의 별자리 다 쓰다듬어

환해질대로 환해진 표정이면

속심 가득히 훔친 천상의 기밀조차

출렁임에 농익어 향기로 뿜어지는 몸짓이네.

 

내 차마 바랏기 전에 눈이 부셔

다소곳이 고개숙일 따름으로

일약 공들여 숙연해지면

오! 천길을 차오르는 꽃의 등등함이여!

 

보일듯 말듯

그래서 시작과 끝이 꼬리를 물고

무한공간을 힘차게 펄럭이는 한 꽃잎을

엉겹결에 두 손으로 받쳐들고는

세상에 다시 못 볼 변고를 보듯 황홀해하다가

모름지기 다라서 환해질 밖에 없는 연유나 

허겁지겁 챙겨볼진대

 

허나 어쩌겠는가! 어쩌겠는가!

나 선 채로 그만 후꾼해지며 몽정일세.

 

 

 

 

 

                     - 고중영 -

 

그 작은 맘 하나 열기까지

많은 수고로움이었니라.

뭉글뭉글 몽상(夢想)키우느라

가슴은 가슴대로 하냥 핏물이고

타는 기다림에

목은 목대로 여위어

그리도 가냘폈니라.

버슬어 색색 물든 입술 다물고

꾹꾹 참아 장히도 익힌

황금의 결제(潔齊)-

 

아침저녁으로 뛰어와

눈치를 살피던 바람이

자물쇠 견고한 해법(解法)으로

네 밀실을 열던 날까지

쇳물 펄펄 끓이던 네 빛

짱짱한 유혹이다가

붉은 것은 붉은 것대로

푸른 것은 푸른 것대로,

토할 것 다 토하고

네 이름마저 내려놓고서야

늦가을 고춧대 끝

시나리 같이 쫄아붙인 핏물 한 점

씨앗으로 야적(野積)시킨

지극한 모성으로 하여

네 몸  그토록저려오던 것이구나.


 

 

 

 

                                               

 

육자배기

 

                            - 고중영 -

 

잔광 무너져내린 천공 모서리

잔허리 흐드러지던 꿈도 지고

사연도 얽힌 사연의 이승 못 믿어워

가슴 배어준 달은 반쪽인데

 

여인아,

 

담 넘어 능소화같이 달뜬 살 소문

부랴부랴 서둘러 감춘 치마 속

네 수줍음도 부풀만큼 부풀면

내려앉는 가슴 쓸어 내리는 너는

살결이 뽀오얀 박꽃이겠고

사나이 못거둔 情 한자락

우격다짐으로만은 가눌길 없어

뚝배기 채 쏟아붓는 육자배기는

한고비 꺾어 넘는 목울음이다.

 

전라도 막걸리에 흥건해질 때

여섯박 소리씨앗 칼칼히 씻어

구비구비 우려내는 고빗목이다.

 

 

 

 

토요일...!

 

 무덤덤하게 빚은 식혜 한 병을  들고,

들독재 너머 칠성마을 수랑골 서옥에 칩거중인

백여 고중영 시인의 시심(詩心)을 훔치러 간다.

 

질척대는 길을 따라 오르니

 지킴이가  짖어대며 객이 왔음을 알리고,  

동시에 시인께서 문을열고 나오시며 반갑게 맞아주신다.

 

얼음장 구둘방...!

 전기스토브만으로 겨울을 나고 계신 노 시인의 옹골찬 기개는 

가히 빙산을 녹이고도 남을  기세.

 

향기로운 차와 함께 이어지는 다담.

 삶의 역정과 본질에 대하여 담담하게 풀어가시는데

 행간마다에는 알토란 같은 지혜를 빼곡하게 채워주고 계셨다.

 

다만, 문을 꼭꼭 닫은채.

거의  단 한 순간의 여백도 허락치 않고, 

연달아  내뿜는 시인의 담배 연기는 곤혹을 넘어 가히 고문 수준이라.

 

 시인의 고문서옥(?)을 빠져나와 

담배 연기에 쩔어버린 폐부를 씻어내려  찾아간 청량산.

 

두어시간의 산책으로 간신히 어지러움증은 해소했지만,

터지는 기침을 잠재우고 청량한 가슴으로 되돌려 놓으려면

청량산 잔설들이 모두다 녹아내릴 때 쯤이나...

 

 

 

2009. 2. 21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