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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장곡사 그리고 칠갑산

                                      ◆  칠갑산(七甲山) 561m,  장곡사(長谷寺)  충남 청양

                                      ◆  장곡사 - 사찰로 - 칠갑산 정상 - 산장로 - 칠갑광장

                                      ◆  2008. 12. 16(화)

 

장곡사 오름길에 서서 산객을 맞아주는

 칠갑장승(?)의 표정

 

짙은 무서리에다 짙은 안개까지...

 

장곡사(長谷寺) 

 

마곡사의 말사.

사지(寺誌)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 850년

문성왕 12년에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고 한다

 

 

 폐사된 '운곡사'에서 옮겨 왔다는 "운학루"

원래는 천왕문이었으나  누각 아래로 오르는 계단을 없애고

현재는 길을 오른쪽으로 내서 통행을 하고있다

 

 설선당(왼편)과 하대웅전 

 

장곡사 상대웅전 아래에 위치한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181호.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맞배지붕의 건물로 높은 축단 위에 세워져 있다.

기둥은 민흘림이며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계(多包系)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건물의 좌우 옆면에도 창방과 평방을 마련하고 공포를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공포는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되어 있으며 앞면에는 가운데에 공간포를 2개씩

배치한 데 비해 옆면 기둥 사이에는 1개씩 두었다.

바깥 공포에는 밖을 향한 쇠서가 달려 있고,

 

안에는 들보를 받치고 있는 맨 위의 살미첨차가 보아지와 같은 형태이고

건물 앞면 가운데 칸에는 사분합(四分閤)의 정(井)자 살문을,

 양 옆 칸에는 이분합문(二分閤門)을 달았으며 서쪽 옆면에만 1개의 출입구가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그 위에 고려시대의 금동약사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문화재 해설에서 발췌)

 

 

 

   

장곡사의 가람배치 중 매우 특히한 점 한 가지는 

상, 하 두 개의 대웅전이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웅전은 동남향, 하대웅전은 서남향인데

상대웅전 구역은 응진전, 삼성각 등이 있고

하대웅전 구역엔 지장전, 봉향각, 심검당, 운학루

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웅전 내부

 

  대웅전이라면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약사여래불이...

 

 하대웅전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

고려시대 금동불좌상. 보물 제337호.

 

높이 88cm. 이 불상은 1955년 복장유물 조사에서 여러 경전과 함께

"至正六年丙戌六月十六日誌"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1346년(충목왕 2)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재 광배와 대좌는 없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데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처음부터 이 전각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머리와 조그만한 육계(肉髻)는 나발(螺髮)로 표현되었으며

그 사이에 둥근 계주(髻珠)가 장식되어 있다.

 

얼굴은 갸름한 편으로 눈·코·입이 단정하고 작게 표현되었다.

 어깨는 둥글게 처리되었으며,

 어깨에 비해 결가부좌한 다리의 폭이 넓어 안정된 비례를 보여준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두꺼워 신체의 곡선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많이 드러난 가슴 위로는 군의(裙衣)와 띠매듭,

꽃무늬가 장식된 마름모꼴의 금구(金具) 장식이 보이는데

이러한 착의 형식은 고려 후기의 불·보살상에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올려서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맞대었으며

 왼손은 가슴 앞에서 손가락을 약간 구부린 채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이 불상에 보이는 온화한 얼굴 표정, 균형잡힌 신체,

간략하고 부드러운 옷주름 표현 등은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문수사금동아미타불좌상(1346)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고려 후기 불상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고려조각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해설,문화재 자료에서 발췌)

 

 

 

 

하대웅전 후면

 

 


장곡사미륵불괘불탱(長谷寺彌勒佛掛佛幀)

국보 제 300호

 

용화수가지를 들고 있는 미륵불을 그린 괘불이다.


장곡사에 있는 이 그림은 가로 5.99m, 세로 8.69m로

미륵불을 화면 중심에 두고 6대 여래, 6대 보살 등

여러 인물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간세계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인 미륵불은

사각형의 얼굴에 머리에 4구의 작은 불상이 있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풍만하고 살찐 모습으로 유난히 긴 팔과 커다란 상체를 가지고 있다.

좌우에 있는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은 머리에 둥근 두광이 있고

각각 두 손을 맞잡은 손모양과 어깨높이까지

두손을 들어 올려 설법하는 손모양을 하고 있다.

 

그밖의 다른 여래와 보살들은 각기 상징하는 물건들을 들고 있으며

10대 제자는 두손을 모아 합장한 자세로

방향이나 표현을 달리해 변화를 주고 있다.

 

그림 아래에는 부처를 수호하는 사천왕과 그 권속들이 자리잡고 있다.

전체적인 채색은 붉은 색을 주로 사용하고 녹색, 연록색, 주황 등의

중간 색조를 사용하여 밝은 화면을 보여 준다.

이 그림은 조선 현종 14년(1673) 철학(哲學)을 비롯한 5명의 승려화가가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사진과 해설 모두 문화재청 자료에서 발췌)

 

염화실(拈花室) 

 

하대웅전 구역

 

 850여년 쯤 되었다는  느티나무가

상대웅전 구역 마당 끄트머리에 걸려있다

 

상대웅전 

 

장곡사 경내의 언덕 위에 있는 고려시대 목조건물. 보물 제162호.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맞배지붕의 건물이나

근세에 들어와 개수했기 때문에 많이 변형된 것으로 짐작된다.

 

높은 돌기단 위에는 자연석의 원형 초석을 바탕으로

배흘림이 뚜렷한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얹고 포작(包作)을 짜올렸으며

기둥 사이에는 평방(平枋) 없이 창방(昌枋)만 설치하고

그 가운데에 공간포(空間包)를 하나씩 배치하여

주심포(柱心包)와 다포(多包)가 절충된 양식을 보여준다.

 

공포는 외일출목(外一出目)이며 특히 굽받침이 달린 주료(柱料)와

첨차(檐遮) 형식은 고려시대 주심포 계통의 건물에서 보이는 고식이지만

쇠서[牛舌] 위에 연꽃을 조각한 것과 보아지[樑奉] 형식은

조선 중기 이후의 목조건축에서 보이는 수법이다.

 

건물의 앞면에는 가운데 칸에 3짝의 살문을 달고,

양 옆 칸에는 2짝의 정(井)자 살문을 달았으며 다른 면은 회벽으로 막았다.

 

내부에는 고주(高柱)가 없고 다만 대들보 위에 동자주(童子柱)를 세워서

종보와 종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중앙 및 동북쪽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철조약사불좌상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천장은 판자로 짠 우물천장으로, 후대에 가설한 것으로 보인다.

바닥에는 방전(方塼)을 깔았는데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연화문전(蓮花紋塼)도 섞여 있다.

 

(해설 - 문화재 자료에서 발췌)

 

 

상대웅전 맨 왼편에 모셔진 부처님

탑의 부재인 옥개석을 거꾸로 놓은 좌대에 앉은 모습

 

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 보물 제174호 

 

장곡사 상대웅전에 철조약사불좌상부석조대좌와 함께 봉안되어 있는

통일신라말 또는 고려초의 철불좌상.  높이 불신 61cm, 대좌 165cm.

 

이 불상은 높은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하체에 비해

상체가 약간 긴 편이어서 다소 어색한 느낌을 주며,

전체적으로 짙은 호분(胡粉)이 칠해져 있어 세부표현이 명확하지 않다.

 

나발로 표현된 머리 위에는 낮은 육계가 얹어져 있고,

얼굴은 거의 3각형으로 눈이 작고 아래로 약간 처져 있어

순진한 인상을 주지만 생동감이 전혀 없다.

 

불신도 마찬가지로 각이 진 어깨와 밋밋하게 처리된 가슴과 허리,

 꼿꼿하게 앉아 있는 경직된 자세, 형식화된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주름 표현 등에서 위축되고 빈약한 느낌을 준다.

두 손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어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다.

 

 대좌는 가늘고 긴 간주석(竿柱石)이 있는 석조대좌로

원래는 석등대석(石燈臺石)이었던 것을 후대에 대좌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목조광배는 철조약사불좌상부석조대좌와 마찬가지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주형거신광배로

후대에 만들어졌으며 색채가 아름답게 남아 있다.

 

(해설 - 문화재 자료에서 발췌)

 

 


 

 

 

 

국보 58호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鐵造藥師如來坐像附石造臺座)

 

장곡사 상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는 철불좌상으로,

나무로 된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거대한 사각형의 돌로 만든 대좌(臺座) 위에 높직하게 앉아 있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모습이다.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편이지만 양감이 풍부하지 않고

 탄력적인 부피감도 줄어 들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무릎 위에 놓인 왼손에는 약항아리가 얹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싼 옷은 느슨하게 처리되었고,

옷주름 또한 드문드문 표현되었다.

 

4각형의 대좌는 불상보다 훨씬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중·하 3단 형태의 이 대좌는 하대가 넓고 높은 반면에

중대와 상대는 상대적으로 낮고 작은 편이다.

 

바닥돌은 매우 넓은 편인데, 사방 모서리에 기둥을 세운 흔적이 있어

불상을 모시던 공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대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새기고

각 모서리에는 귀꽃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다.

 

중대의 각면에는 큼직한 눈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상대에는 활짝 핀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광배는 원래 돌로 되었을 것이나 파손되어

조선시대에 나무광배로 대체한 것 같다.

 

광배 중심부에는 꽃무늬를, 테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어

신라말과 고려초에 유행하던 광배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은 특이한 탑 모양의 대좌와 감실형의 구조,

그리고 단아한 철불양식을 보여주는

 9세기 말 양식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뛰어난 불상으로 평가된다

 

(사진과 해설 - 문화재 자료에서 발췌)


 

 

 

응진전

 

삼성각

 

마곡사, 안곡사, 운곡사와 함께

四谷寺로 불리운다는 장곡사

 

안개가 자욱한 장곡사를 뒤로하고

칠갑산을 오르기 시작

 

 

소나무가 도열한 순한 능선길

 

한 시간이면 나타나는 정상

 

 칠갑산

 

만물생성의 근원이 되는 이른바 칠원성군(七元星君)의 '칠(七)'과

천체운행의 원리가 되는 육십갑자의 첫 째 '갑(甲)'을 써서

칠갑산으로 부른다고.

 

 올라온 능선

 

정상의 헬리포트

 

범종 형태의 주봉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일곱 방향으로 뻗었는데

각각 일곱개의 명당이 자리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자리를 차지한 곳이

바로 장곡사라 들었다.

 

 천장호로 이어지는 능선

 

 예산 쪽

 

삼형제봉

 

 산장로 쪽으로 하산 시작

 

 

 

임도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

 

터널을 지나 칠갑광장으로 하산

 

귀로,  차창에 비친 해넘이

 

 

*  *  *

 

 

 

행선지도 정하지 않고,

무서리가 짙게 내린 새벽길을 나섰다.

짙은 안개를 뚫고 도착한 곳은 충남 청양의 칠갑산.

 

오전 열두시가 거진 가까워진 시간임에도

짙게 내린 서리와 안개는 여전한 가운데

장곡사를 들어선다.

 

대충,전각 사이를 훑고나서 산길로 접어드는데

평일치곤 꽤나 많은 산객들이 내려오는 모습이다.

 

이윽고 울창한 송림사이를 느릿느릿 걸으며

소위 칠갑산표 사색을 시작하는데...

 

영국의 등산가이자 저술가인 프랭크 스마이드.

 

'산을 걷는 명상가'를 자처 한다는 그가

 < 산의 영혼 >에서 설파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산오름을 운동 이나 도전 등으로 생각치 않고

 명상을 위한 산책으로 여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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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얼치기 사색 전문 산꾼 하나가

칠갑산  능선을 가고 있었다.

 

 

정상을 지나 하산 지점까지는 산객들 틈에 섞이지 않고

다소 빠른 걸음으로 내내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