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산행·여행·풍경

황해의 길잡이 오서산 그리고 백야 김좌진 장군의 묘

                 ◆ 오서산(790.7m) 충남 홍성군, 보령시, 청양군 일대

                 ▲ 정암사 ~ 오서정 ~ 정상 ~ 정암사(원점회귀) 4 시간 소요

                 ▲ 2008. 11. 7 금요일

 

 충청권 일원을  항해하던 배들에게

마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는 오서산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며 마중을 나온

정암사의 삽살개

 

정암사의 만추 

 

 

가을 초입의 칸나   - 신세경 -

 

 

발광을 하던 바로 그 놈 !

 

 

기어이

 

그녀의 붉은 혀를

 

덥석, 배어 물었다.

 

 

- 제 2 회 정암사 시화전에서 발췌 -

 

 

 

아래쪽의 아차산(423.9)이 

운무속에 살짝 보일똥, 말똥. 

 

  오서산 정상 일원의 억새 능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어머니

 

- 오서산 억새밭에서 -       이 영 희

 

깊은 침묵의 배낭을 매고

풀뿌리 잡으며

산길을 휘저으셨던 당신

 

가지 많은 나무에 걸려있는

누더기 같은 소망들을 품고

등이 휘는 줄도 모르고

오르기만 하셨던 당신

 

바람 부는 언덕위에

은빛 꽃잎 제 길 가라

떠나보내는 억새밭에서

 

속으로만 웅웅거리는

억새의 울음소리에

허기짐과 목마름으로 갈라진

당신의 슬픈 소리를 듣습니다.

 

 

- 제 2 회 정암사 시화전에서 발췌 -

 

 

 

오서정에서 정상에 이르는 약 2km 능선에 펼쳐진 억새밭

 

오서정에서 조망한 정상에 이르는 능선

 

짝퉁 정상석

 

요걸 정상석으로 착각하는 수가 왕왕 있으나 

쬐끔 더 전진 해야 진짜 정상석을 만날 수 있다

 

내원사 하경

 

신풍리쪽 하경

 

 

오서산

 

리를 휘감는

억새능선을 헤쳐 나가다

문득 뒤돌아보면

유난히 아름다운 낙조로

온갖 시름에서 벗어나

황홀경을  맛볼 수 있다

아 ! 이곳 내 고향 ...

보령을 사랑합니다.

 

- 제 2 회 정암사 시화전에서 발췌 -

 

하산길

 계단이 설치되어 있던 오름길을 피해

정암사 뒷쪽 경내로 곧장 내려가는 코스를 선택

 

 눈에 들어오는 정암사

 

소박한 부도

 

 

절 아래로 반갑게 마중나왔던 삽사리 두 마리.

따스한 햇살 아래 깊게 깊게 단잠에 빠져 있었다

 

 정암사 뒷편으로 내려오는  산길이

오늘 산행의 백미가 아니었나 싶다

 

 

 해발 791m인 오서산은 ‘평지돌출형 산’으로서

금북정맥의 최고봉이며

위용과 기상이 빼어나고 신령스런 기운을 지닌

호서제일의 영산(靈山)이다.


『삼국사기』권32에 오서악(烏西岳)이라고 기록되어있고,

당시에는 명산대천을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나누어

국가차원의 천제를 올렸다고 한다.

 

백제 때는 오산(烏山)으로 불리며 대사 격에 해당되었고

통일신라에 와서는 중사의 위치에 있었으며,

이후 백제부흥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중국지리서인『한원』의 백제전에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오산(烏山:오서산)과 계람산(鷄藍山:계룡산)을 소개하고 있으며

 

정암사(淨巖寺) 중수기에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에 버금가는

호서지방 최고의 명산으로 수륙(水陸)의 기운이 크게 맞닿아

 중천(中天)에 우뚝 여유 있게 솟아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오산 또는 오서악으로 불리며 민족의 영산으로서

태양숭배사상과 산악신앙의 중심이 되어왔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오서산(烏栖[棲]山)으로 바뀌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까마귀산”으로 비하되면서

영산의 의미는 완전히 퇴색되었다.

 

- 정암사 앞에 내 걸린 해설문에서 옮김 -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 묘 (金佐鎭 將軍 墓)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소재 )

 

대한독립군총사령관(大韓獨立軍總司令官)

 백야(白冶) 김좌진장군(金佐鎭將軍)의 유해(遺骸)를 안장(安葬)한 묘성(墓城)이다.

 

장군은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부농가(富農家)의 둘째아들로 출생.

개화사상(開化思想)이 투철하여, 15세때,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전답(田畓)을 나누어주고 부리던 노비(奴婢)(가노(家奴))를 해방(解放)시켰다.

 

 

905년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設立) 문맹퇴치(文盲退治)에 앞장섰고,

1913년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하다 3년간 옥고(獄苦)를 치루기도한다.

 

그후 만주로 건너가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북로군정서(北路軍精書)

사령관(司令官)으로 독립군장교양성(獨立軍將校養成)에 힘쓰다가,

독립군(獨立軍) 총사령관(總司令官)으로 청산리전투(淸山里戰鬪)에서

3,300의 왜적(倭敵)을 물리치는 독립운동사상(獨立運動思想) 혁혁(赫赫)한 공(功)을 세워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해 큰 업적(業的)을 세웠다.

 

1930. 1. 26. 만주(滿洲) 산시(山市)에서 고려(高麗) 공산당원(共産黨員)의 흉탄(兇彈)에

41세(歲)로 조국(祖國) 광복(光復)을 보지 못하고 운명(運命)하신다.

 

군(將軍)의 유해(遺骸)는 만주땅에 임시암매장(臨時暗埋葬) 되었다가

부인(婦人) 오숙근(吳淑根) 여사(女史)에 의해 조국(祖國)에 묻힌다.

이때가 1940년 9월 밀감상자에 장군의 유해를 위장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安葬).

 

1957년 부인(婦人)이 타개(他介)하자,

장군(將軍)의 아들 김두한(金斗漢)은 현(現) 묘소(墓所)로 이장(移葬)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뒤편으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옆에는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마(馬)석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 자료에서 발췌 -

 

 

 

백야재

 

백야재에서 계단을 오르면

 

장군의 묘역이 펼쳐진다

 

 

 

"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나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만 하다니... 그게 한 스러워서.... "

 

 청산리,그 처절했던 현장에도 꿋꿋했던

백의민족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

 

다른이도 아닌,

같은 동포의 총탄에 쓰러지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이것이 과연 하늘의 뜻이었을까....?

비보를 접 한 국내외의 동포들,

대성통곡을 하며 하늘을 원망 했다고...

 

 

 

백야 못지 않은 담력의 소유자 부인 오씨.

 

1940년 9월, 삼엄한 경계와 감시의 눈길을 피해

남편의 유해를 몰래 파내 봇짐 장수로 위장하여

 

천신만고 끝에 고향 땅으로 옮긴 다음

평토분(平土墳)으로밀장 해버렸다고 한다.

 

이 때부터 조선총독부에선 묘를 찾기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이는오직 부인 오씨만이 간직한 비밀이었다고.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청산리전투(1920년 10월 21일 ~ 26일)

 

백포 서일(1981 ~1921)장군의 총 지휘아래

김좌진, 이범석, 나중소 등의 통솔로 일본군들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자그만치 3,300 여명의 적을 몰살시키는 쾌거를 거두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백포와 백야, 서일과 이범석 등을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 단체 소속원들과

임시정부 요인 다수가 대종교(大倧敎)인 이었다는 사실이다.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교조로 신봉하며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和世界)를 교리의 핵심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1909년 홍암 나철 대종사가 중광(重光 다시세움)을 선포하여

일제하 만주벌판을 누비던 우국지사들을 하나로 묶었던

민족 신앙의 결집체 역할을 했다고 한다.

 

동학을 비롯 독립운동과 여타 크고 작은 전투와 이해 다툼에는

어떤 형태로던간에 반드시 그네들이 신봉했던 종교와 교리와 사상이

당사자들의 근저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간과해선 곤란하기에

잘 알지도 못 하는 종교 얘기를 들먹거려 보았다.

 

 

 

 

 

 

 

 


 

 

 

 

 

 도대체 뭐가 보여야, 뭐를 해 먹던지 말던지...

 

오서산을 찾아가는 길의 안개는 그야말로 죽음이었다.

말 그대로 한 치 앞을 분간키 어려울 만큼 지독했다.

 

지독한 안개를 뚫고 정암사에 당도하니

느닷없는 시커먼 털북숭이 삽살개가 달려나와

반갑다고 덥석 품으로 달려든다.

 

물을 끓여 라면 한 개로 아침을 해결한 후

모처럼 적막한 오서산을 오르게 된다.

 

정상 일원의 능선에 올라보니

무신넘의 바람이 그리도 세게도 불어댔는지 몰라도

 

기대했던 억새의 포근함은 온데 간데 없고

간신히 쭉정이만 남은 형편이었다.

 

맑은 조망을 기대 했건만

가까운 천수만은 커녕

 

발 아래 아차산 라인 정도만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

 

정상을 찍고 한참을 오다가 뒤돌아보니

까마귀 두어 마리가 상공을 맴돌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금북정맥에서 약간 비켜나 있지만

대개들 그냥 금북정맥의 최고봉으로 쳐 주는 오서산.

 

그저 까마귀가 설쳐대는 산이라는 정도의 단순함이 아니라

신령스런 기운과 정기가 빵빵함은 말 할것도 없고

 

'태양 안에는 세발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가 살고

신의 사자로서 천상과 인간 세계를 이어주는 고리 역할' 을 한다는

 

이른바 우리민족의 태양숭배 사상까지를 담기에

부족함이 없다하여 영산(靈山)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산을 일찍 올랐기에 다행(?)이었고

오름길을 피해 정암사 뒤로 곧장 떨어지는 코스는

 

더더욱, 오늘 산행의 백미라 할 수 있겠다.

소음도, 계단도 없고 가을 산행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기에 말이다.

 

 정암사에 거진 다다를 즈음

그제서야 경향 각지의 이런저런 짝퉁 산꾼들이

시끌시끌 떠들어대면서  산을 점령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절에 내려서니 무슨 보약(?) 달이는 냄새가 경내에 가득이다.

정체가 뭘까 궁금했는데

 

세상에나.....!

 

 큰 솥을 걸어 놓고  '십전대보탕'인가 뭔가를 끊여대면서

한 잔에 이천냥이라고 써놓고

 

신도들과 등산객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는 광경이다.

거기다 컵라면까지 수북하게 쌓아놓고 라면 장사까지.

 

배고픈 중생들의 주머니와 뱃속에다

부처의 자비를 채워주진 못 할 망정

 

이 무슨 해괴한 처사요,

기막힌 행태란 말인가....? !

 

불전함에 그 흔한 배추이파리 한 장 못 넣은 주제에

이런 애길 할 자격이나 있는지...

 

쬐끔은 뒤가 구리긴 허지만서두

그냥 넘어가기엔

 

어쩐지 '껄적지근하고 쬐께 거시기 하다는 생각에서

객적은 소리를 몇 마디 늘어 놓았다.

 

산을 내려와 이동한 곳은 

백의민족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묘.

 

어릴적, "임시정부"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총 네 다섯권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밤을 세워가며 모조리 읽어 제끼고서도

감동을 주체치 못 해

 

후로도, 몇 번 인가를 더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의 감동은 지금도 내 가슴에 절절하게 남아있다.

 

일제시대 만주에 거주하면서 학교에 다니시고

만주군에 징집되어 이른바. 대동아전쟁에 끌려가던 중 탈출을 감행,

 

곧장 독립군에 가담키위해 이런 저런 접선을 시도 하던중

해방을 맞으셨다는 내 선친으로 부터도

 

혹독했던 그 시절 애기를 너무도 많이 들어왔던 터라

우국지사는 언제나 내 마음 속 

 

맨 앞에 자리한

존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장군의 묘 앞.

 

발복과는 전혀 상관 없는

마음속 존경의 뜻을 담아 '동기감응'을 신청 해 본다.

 

"할 일이. 할 일이 너무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만 하다니..."

얼마나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으면,

 

죽어가는 순간에도 아쉬움의 회한을 토로했을까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 1월 24일

만주 중동철도선 산시역 앞 정미소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한 백야.

 

그때,

장군의 나이 불과 마흔 한 살 이었다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