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숭산(수덕산) 496.2m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 광천리
@ 수덕사 - 소림초당 - 정혜사 - 정상(원점회귀) 약 3 시간 소요
@ 2008. 9. 26 (금요일)
고암 이응로 화백의 문자추상화
한글의 자모들이 풀어져 엉키면서도 또한 조화롭게 풀려 나가는 느낌인데
고암의 동도서기식 문자추상화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꼽는다는 평.
수덕사 문지방에 자리하던 '수덕여관'
그 옛날 수학여행왔던 학생들로 떠들썩하던 시절의 기억은 이젠 추억 속으로....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고암은 이 곳 수덕여관에 둥지를 틀고 작품활동을 했었다.
이 나라 숱한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인연과 추억이 서린 수덕여관.
애기를 듣자하니, 우여곡절을 거친 작년(2007년 10월 5일) 수덕사 '禪 미술관'과
'수덕여관' 이라는 당호를 내 걸게 되었는데 아마도 절 측에서 건물을 인수하여
대대적으로 보수한 다음, 미술관으로 꾸미지 않았나 싶다.
파리에서 활동하다가 초청에 의해 귀국한 고암.
박정희 치하,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죄목으로 잡혀 들어가
경을 치고 풀려 나와 이 곳에 잠시 머물던 시절 저 암각화에 몰두 했다는데....
다 아는 애기지만,
잠시 수덕여관과 고암의 인생 역정 그리고 주변의 얽힌 애기들을 복기해 보자.
한국을 대표하는 신 여성이요, 조선의 이혼녀 제 1 호라고 일컬어지는 여류화가 정월 나혜석.
1937년에서 1943년 말년까지를 이 곳에서 작품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비록 머리는 깍지 못했지만승복을 걸치고 무소유, 무애행을 실천하며
거의 절간의 수행자처럼 살았다고 한다.
서예가이자 문인화가로 이름 높았던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수학하던 청년 이응로에게는
예술의 도시 파리에 유학하고 귀국한 신여성 나혜석은 하늘같은 선배요 스승이었으리라.
당연히 빠리의 환상은 정월에서 고암에게로 전염 되었을 듯.
수덕여관의 정취가 몸에 배어 버린 고암은 1944년 정월이 여길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다.
박귀희와 결혼한 고암은 6 년간 이 곳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에 매진하다가 교수생활 때의 제자였던
21세 연하의 박인경과 1958년 빠리행에 오르게 된다.
당연히 본부인 박귀희는 청상과부요 소박맞은 아낙이 되고만다.
이후 굳세게 수덕여관을 지키던 그에게 1969년 동백림 사건은 고암을 잠시나마 곁에 붙잡아 둘 수
있었다고, 감옥에 갇힌 전 남편을 정성으로 뒷바라지 했건만 얼마 후 고암은 미련없이 빠리로 떠나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의 땅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만다.
어찌됐던, 수덕사와 수덕여관에는 '세 여자와 세 남자'관한 얘기가 전설처럼 전한다.
세 여자로는, "청춘을 불사르고"의 김일엽과 여류화가 나혜석
그리고 이응로의 본처 박귀희.
세 남자는, 만공선사, 화가 이응로 그리고 일당스님 김태신.
(김태신은 김일엽과 일본인 사이의 사생아)
이들에 관해 널려있는 애기들만 주워 모아도 아마도 덕숭산 높이에 이르지 않을까?
모름지기 德은 德으로 감싸야 하는 법.
덕숭산 자락에 흩어진 이런 저런 얘기들 모두 다
잘난 사람들의 행적이라 여기고 아미타불이나 한번 외어보자.
딱, 딱 떼그르르 ~~~~~~~~~
으리으리한 일주문을 지나 수덕사에 들어서면서 미리 예감하고 짐작은 했지만
38년 전 처음으로 산문에 들어서면서 느꼈던 정취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수덕사 대웅전 (국보 제49호)
배흘림기둥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목조 건축물의 정수
맞배지붕의 단아함은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일제시대 일인들이 보수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상당부분 잃어 버렸다고 한다.
문살도 변형되어 버렸고, 대웅전 천정의 닫집도 사라져 버렸으며 기타 여러가지가 훼손되어 버린 모양.
목조건축물 그 중에서도 맞배지붕 건물의 묘미는 측면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정면은 세 칸이요 측면은 네 칸이라.... 다소 언밸런스 한 듯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
고도의 시각적 배려가 숨어 있다고 들었다.
아무리 보수를 해 왔다고는 하지만 목조건물이 육백년 칠백년 씩이나....
보고 보고 또 봐도 측면의 면 분할과 나무의 친근함에 눈을 뗄 수가 없다.
默言이라...!
가슴에서 나오는 말은 말씀이요,
머리에서나오는 말은 소음이요,
주딩이에서 나오는 말은 쓰레기라는 야그.
소림초당
만공선사가 저 자리에 수행처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제자들이 나서서 지었다는 초당
조선 말엽, 만공은 의친왕과 단 한번 만나 사제의 연을 맺게 된 일이 있었다.
의친왕은 시종을 통해 몰래 거문고를 스승 만공에게 보냈다는데,
그는 한적할 때마다 의친왕이 보내준 거문고로 법곡을 타곤 했다고.
덕숭산을 통틀어 가장 멋진 집을 꼽으라면 단연 이 小林草堂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
낙엽이 흩어진 갱진교(更進橋)
소림초당으로 건너는 계곡에 걸린 다리
달 밝은 밤이면 만공은 이 다리에 나와 앉아 거문고를 뜯으며 삼매에 들곤 했다고.
만공이 세웠다는 관음보살입상
관음보살입상 옆의 향운각
향운각 하경
덕숭산 송림
최후설(最後說)
내가 이 산중에 와서 납자(衲子)를 가르치고 있는지 사십여년인데,
그간에 선지식을 찾아왔다 하고 나를 찾는 이가 적지 않았지만,
찾아와서는 다만 내가 사는 집인 이 육체의 모양만 보고 갔을 뿐이요,
정말 나의 진면목(眞面目)은 보지 못하였으니,
나를 보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를 못 보는 것이 곧 자기를 못 본 것이다.
자기를 못 보므로 자기의 부모, 형제, 처자와 일체 사람을 다 보지 못하고
헛되게 돌아다니는 정신병자들일 뿐이니,
이 세계를 어찌 암흑세계라 아니할 것이냐?
도는 둘이 아니지만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각각 다르니,
내 법문을 들은 나의 문인(門人)들은
도절(道節)을 지켜 내가 가르치던 모든 방식까지 잊지 말고 지켜 갈지니,
도절을 지켜 가는 것이 법은(法恩)을 갚는 것도 되고,
정신적, 시간적으로 공부의 손실이 없게 되나니라.
도량?도사?도반의 삼대 요건이 갖추어진 곳을 떠나지 말 것이니,
석가불 삼천운(三千運)에 덕숭산에서 삼성(三聖) 칠현(七賢)이 나고,
그 외에 수없는 도인이 출현할 것이니라.
나는 육체에 의존하지 아니한 영원한 존재임을 알라.
내 법문이 들리지 않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 내 면목(面目)을 볼 수 있어야 하나니라.
큰 절에서 자그만치 천이백개의 계단을 올라야 모습을 보인다는 정혜사
정혜사 마당 바위위에 올려진 쌍탑
능인선원이 있는 정혜사는 시대의 불을 밝힌 선지식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혜사 하경 감상
정혜사 후문
배추밭 옆 물봉선 군락
덕숭산 정상
덕숭산 정상에서 건너다 본 가야산
정혜사 석문
수덕사 범종의 비천상
하산하여 바라 본 수덕사 경내
"청춘을 불사르고"의 주인공 김일엽이 만공을 찾아와 머리를 깎고
25년간 두문불출한 장소로 원래의 견성암 자리다.
조선의 개화(?)를 주도했던 여성 예술인 세 사람.
詩에는 김일엽, 樂 부문엔 윤심덕, 畵엔 나혜석이 있었다.
그 들 세사람을 유명하게 만든 건, 정작 각자의 주 전공이 아니라
희대의 남성 편력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던 터.
세 사람의 인생 행로를 잠시 추적하자면
나혜석은 무연고자 행려병동에서 영양실조라는 비참하고 어이없는 사인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사의찬미"의 윤심덕은 정부였던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의 찬가를 부른 셈이다.
마지막 인물 김일엽은 늦깍이 불제자가 되어 붓다의 가피를 입었음일까...?
셋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원통보전 앞 마당의 굴뚝에서
그 시절의 얘기가 연기가 되어 솔솔 피어 오르지나 않을까?
환희대 마당의 굴참나무 틈새로 자라난 '노루궁뎅이' 버섯
덕산, 수덕사, 수덕산
큰 덕(德)이 무려 세 개 씩이나 겹쳐있는 덕숭산을 오르는 중이다.
건너편의 가야산을 오르고 내려와 수덕사로 이동하여
줄기차게 계단으로 이어진 덕숭산을 오르려다보니 다리가 뻐근하다.
내포문화권을 돌아 보려면 최소 3박4일 정도는 잡아야 될 것을
단 하루에 말아 먹으려다 보니 쬐끔 바쁠 수 밖에...
하도 오랫만에 찾아와서인지 산에 대한 기억이 가물 가물이다.
덕숭산 전체가 거대한 불사로 으리으리 한데도 산 윗쪽 능인선원의
정혜사엔 아직도 미진 한건지 불사가 한창, 현재 진행형이었다.
경허와 만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덕숭총림의 무게감은 근대 한국 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인지라 그들의 발자취를 건성으로나마 살피기에도 턱없는 일정.
그 가운데서도 산 정상의 오름을 빼 먹을 수는 없는 노릇.
무슨 각개전투 훈련장도 아닐텐데 능선상의 철조망은 영 눈을 거슬리게 한다.
정상에 올라 방금 전에 다녀왔던 가야산과 내포 일원의 이곳 저곳을 조망한 후
정혜사로 내려 오는 길, 잘 가꾸어진 탐스런 배추가 눈에 들어 온다.
뱃속도 허전한 김에 고소한 배추속 한 줌을 뜯어 입으로 가져가 본다.
설마 절집에서 농약이야 쳤을라구....
일천이백개의 돌계단에 무릎이 비명을 지를새라 능선을 택해 큰 절로 하산하여
행여 일엽스님의 체취라로 맡아볼까하여 환희대 마당에 들어 섰는데
새하얀 '노루궁뎅이버섯'의 탐스런 자태가 이 속인의 시선을 끌어 당긴다.
이게 무슨 횡재란 말인가? 불전함에 배추이파리 한장 올리지도 않고
되려 불제자의 식량인 정혜사 배춧잎을 몰래 뜯어 먹은 형편인데
이런 귀한 선물을 주시다니, 수덕사 부처님은 자비롭기도 하셔라.!
덕숭산 노루궁뎅이의 향기가 이리도 예술일 줄이야... !
나무관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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