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산 (667.6m) 충남 예산군, 서산시 경계에 위치
@ 가야봉 - 석문봉(653.0m) - 옥양봉(593.0m) 5 시간 소요
@ 2008. 9. 26 (금요일)
남연군(南延君)의 묘에 이르는 길
? ~ 1822 (순조 22년)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7대 손으로
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이자 고종황제의 조부.
나라고 왕의 애비가 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더란 말이냐....
풍수지리를 굳게 믿으며 나름대로 풍수에 관한 책들을 독파해 왔다는 이하응.
젊은 풍수쟁이 정만인을 구워 삶아 명당자리를 재촉하니 그가 두 군데를 천거하였는 바.
충청도 덕산 땅에 가면 왕이 두 사람 나올 자리가 있고,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오서산에 가면
만대에 걸쳐 부귀 영화를 누릴만한 자리가 있다 했겄다.
흥선은 군말없이 전자를 택했다고,
그런데, 문제는풍수가 정만인이 가르키는 자리는 천사백년 고찰인
가야사 라는 절이 있는 곳이고 더군다나 절의 금탑이 서 있는 자리라.
집을 팔아 충청 관찰사에게 뇌물을 듬뿍 안겨 주고 눈을 감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마곡사 승려를 위협하여 가야사를 소각시켰는데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가야사를 방화한 승려가 사동리 고개를 채 넘지 못하고
불길이 충천하는 가야사를 쳐다보다가 돌연 허공을 향해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불이야! 불이야! 소리를 지르다가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여 사망했다 전하는데
이는 1950년 당시 90여세 노인들의 증언이라고.
여기서 소위 "Oppert 굴총사건 "을 잠시 되짚어 보면.
1868년 1월 흥선대원군이 다블위, 베르니 등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사형 집행한다.
대원군에게 원한을 품은 천주교 신자들은 덕산의 남연군묘를 파내어서 보복하기로 결의를 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독일인 Oppert가 미국인 Jenkins을 자본주로 삼고
프랑스 선교사 Ferron을 통역인으로 삼아 1868년 4월 680t급 기선 Chinese호에 작은 배 60t급
Greta호까지 붙여 백인 8명, 말레이지아인 20명, 조선인 천주교도 약간명, 청국인 100명을
승무원으로 싣고 상해를 출발, 4월 18일 홍주목 행담도(현재서해대교밑 행담도 휴게소자리)에
배를 정착 시킨 후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 11시경 구만포에 상륙하여 러시아군병이라 소리치며
덕산 관아를 습격한 다음 덕산군 현내면 가야동 남연군묘소에 이르러 도굴을 시작하였다.
Oppert라는 인물은 중국 상해에 근거를 두고 동양 각국에 무역을 하던 사람으로서
1866년 2월 영국상선 Rona호를 타고 해미현 조금진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돌아갔으며 7월 기선 Emferru호를 타고 같은 목적으로 다시 해미현에 나타났다가
역시 거절당하고 돌아갔던 인물이다.
덕산군수 이종인과 묘지기를 비롯하여 동민들이 제지하였으나 총, 칼로 무장한 서양인들의
위협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도굴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간단치를 않았다.
묘소를 이장할 당시 흥선군이 무쇠로 크게 주물을 부어 솥뚜껑처럼 제작하여 관곽을 꽉 눌러 덮고
그 위에 회콘크리트를 엄청나게 두텁게도 쳐놓았기 때문에 관곽은 무척이나 단단하여 좀처럼
깨어지지가 않았다 (기록에의 하면 300포대나 되는 석회가 동원되었다 함).
Oppert일행은 5시간만에 겨우 분묘의 한 구석을 파 헤쳐 관곽을 노출시켰으나 동민들의
숫자가 불어나고 해미영의 군사가 도착할 시간대임과 구만포의 물이 퇴조 시간대임을 염려해
유해는 건드리지도 못한 채 물러나면서 하리후포(고덕면 상궁리-양촌 하리-시거리)에 도착,
하루를 머물면서 민가에 침입하여 갖은 약탈을 자행하고
20일에야 행담도로 돌아가 Chinese호를 타고 공해상으로 도주했다.
그들의 명분은 Sherman호 방화사건과 조선왕조에서 선교사를 살해한데 대한
보복이라 주장하지만 Oppert의 교역 요청을 조선 정부에서 거절했던 바,
이에 대한 보복으로서 부장품 도굴을 비롯하여 남연군의 유해를 볼모로 한 협상과
금품요구 등이 목적이었으니 구미의 상인이나 탐험가들의
전형적인 수법과 같은 공통된 소행이다.
이 같은 Oppert 일행의 파렴치한 비행은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상해에 주둔하는 외국인들로부터 크나큰 비난을 받았다.
미국인 Jenkins은 마침내 불법 파렴치 행동의 피고인으로 체포 기소되어 본국으로 압송되고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기는 하였지만,
배석판사 A.A.Hayes는 강도나 해적떼의 무모한 소행과 다름없다고 논고하였다.
이 도굴사건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서양인들에대한 조선인들의 배척은 더 해만 가고
이를 빌미로 대원군은 나라의 문을 더욱 굳게 걸어 잠그는 쇄국의 길로 가게 되었으니
결국 500년 조선왕조는 말로를 걷고야 마는 것이다.
(인터넷 자료 일부 인용)
조선왕조 최후의 발복처...?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온다는 명당의 덕이런가...
이하응은 이 자리에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 정확히 7년만에
둘째 아들 재황을 얻었고, 그로부터 11년 후인 1863년에
또 하나의 아들을 얻었으니 그가 바로 고종으로 왕위에 등극했으며
손주인 순종까지 2대에 걸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남연군 묘는 이른바 "오페르트사건"으로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게되고. 두 임금을 마지막으로 500년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른바 동기감응에다 발복을 기대한다는 풍수.
경기도 연천 땅에서 이 곳까지 타의에 의해서 옮겨진 뼈다귀 몇 점.
2대에 걸쳐 곤룡포를 입혔을 망정
500년 왕조의 맥이 스러져가는 모습을 지켜봤을 남연군.
지하의 그를 끌어내어 풍수쟁이 정만인과 그의 아들 대원군
그리고 고종과 순종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감회와 소회를 한 번 물었으면 좋으련만...!
남은들 상여
경기도 연천에서 이 곳까지 릴레이 식으로 현지 주민들을 동원하여
상여를 운반한 다음 이 동네에 상여를 주게 되었다고 한다,
- 진품은 따로 보호각에 넣어 두었고 위의 상여는 한국고건축박물관장인
전종수 대목장이 실측 제작하여 이 곳에 기증했다고 -
갸야봉 정상에서
가야봉에서 바라본 석문봉(중앙)과 옥양봉(오른쪽)
왼쪽 산자락의 건물은 한서대학교이고
들판 너머 저 멀리론 간월호가 보인다.
가야산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중계탑
능선에서 바라본 서쪽 하늘
'송하한담' 중인 미녀 두 분 사이에 끼어들어
이런저런 얘기에다 귀한 백련차까지 얻어 마시는 영광을...
덕산 일대
가야봉에서 석문봉에 이르는 중간 지점에 솟은 암봉
석문봉 조망
석문봉 정상
석문봉 뒷쪽 멀리는 옥양봉
석문봉에서 지나온 능선 조망
산부추
지독히도 엉덩이가 무거웠던 더위가 이제서야 꼬리를 내리고 청명한 가을에게 자리를 인계한 듯.
소위 '내포문화권' 이라 일컫는 충남 서북부 지역.
서산, 예산, 홍성, 태안, 당진 전 지역과 아산, 보령의 일부지역을 말함인데
그 모두가 가야산을 기둥으로 삼고 문화와 의식을 공유한 지역이라는 얘기.
불쑥 충청의 가야산이 궁금해져서 먼 길을 나선 것.
산길 초입엔 우리네 눈과 귀에 너무나도 익숙한 소위 " 남연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근래들어 묘역을 새롭게 정비한 듯, 깔끔한 모습이다.
어떤 풍수들은 가야산의 지기가 너무 세서 결코 명당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반면
긍정파 풍수들은 과연 천하길지요, 군왕 2대와 군신봉조 형상을 완벽하게 갖췄노라
입에 침이 마를 지경이라고.
일단, 묘를 오르는 길이 예술이요. 묘를 머리에 얹고 있는 잘 생기고 둥그스럼한 지형이
일말의 기대감을 갖게함과 동시에 ,뭔가 괜찮은 쪽으로 분위기를 몰고 간다고나 해야할까...?
묘지 위의 하늘 색감과 구름의 문양까지도 수승한 형세다.
석문봉에서 내려오는 지맥으로 봐야 할 듯.
전혀 문외한인 내 눈에도 분명 평범한 자리는 아닌, 범상찮은 뭔가의 느낌이 온다.
한 바퀴 천천히 돌면서 동기감응(?)을 신청 해 본다.
" ........... "
"애고 ~~~~,
배운 것은 없고 밑천도 딸리는 주제에 저 너머(?) 세계로의 접선은 애시당초 어불성설.
나무사이비풍수타부울~~~~ @@@
'남연군의 묘'를 내려와 산을 오른다.
어디건, 잘 생긴 산의 정수리엔 어김없이 불화로 형상의 안테나들이 점령하고 있는데
이 곳 가야산도 예외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오늘의 주제는, 푸른 가을 하늘과 기막힌 솜씨로 풀어 놓은 구름 감상이 포인트.
제법 수준급인 암릉이 줄지어 선 능선을 따라 가면서 내포평야에 펼쳐진 황금 들판과
저 멀리 푸른 하늘과 맞닿은 서해를 조망하는 맛은 한 마디로, 딱 끝.
남연군의 묘 위쪽 석문봉 자락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풍수쟁이 육관도사 손석우의 묘가 있다.
모악산에있는 김일성 선조의 묘자리를 보고 김일성의 사망시기를 예언했다하여 유명해진 인물.
당대 유명 정치인들에게 기막힌 묏자리를 잡아주었다는 것으로 세간의 주목을 끈 육관도사.
그 자신이 직접 터를 잡아 묻혔다는 자리, 경향각지에서 버스를 동원 단체로 견학을 오는 모양.
도립공원에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버젓이 묻혀있는 손석우, 또 그것을 방치하고 되려 안내판에
버젓이 묘의 위치까지 표기해놓는 당국의 행태, 모두 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다.
그래도 어찌됐던 나름대로 일세를 풍미했다는 육관.
세속적 호기심이 발동, 온김에 그의 묘나 한번 둘러 봐야겠다고 찾아 갔는데 엉뚱한 곳이라.
시간도 촉박하고 하여 다음으로 미루고 산을 내려 오며 중얼거린다.
"단박에 찾지 못 한걸 보면 나도 선대 묏자리에 신경 좀 써야 할려나....."
하산길에 만난 어떤이가 묻는다.
"뭐 좀 보셨습니까?"
" 뭘 ........? "
자그마한 이 가야산 일원에 좋은 산삼이 많다는 애길 들려주는 아마추어 심마니.
좋은 터가 많은 산엔 산삼도 많이 나는 모양.
애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더니 이 썩은 동태 눈깔엔 도무지 뵈는게 있어야.....
갑자기 얼굴이 기다란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생각난다.
"언젠간 내 앞에 나타날 거라고 난 믿어 의심치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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