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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안의계류(安義溪流) 화림풍류(花林風流)

 

 

 

 

 

 

 동계(桐溪) 정온(鄭縕)선생 생가 (중요 민속 자료 제205호) 

 

 

 

금원산 자락이 뻗어 가다가 굳센 암봉으로 지기를 뭉쳐놓고 맥을 마무리한 현성산.

 

 그 산 아랫자락에 위치한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가면 

 

 조선시대 충절로 이름 높은 동계 정온(1569 ~ 1641) 선생의 종택을 만날 수 있다.

 

 

 

 

 

 

 

인조가 하사 했다는 정려문

 

 

 

주지하다시피, 인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광해군의 고난도 중립 정치를 버리고 친명, 반청 정책을 들고 나온다.

 

결국, 병자호란으로 이어지고 삼전도의 치욕을 맛 보게된다.

 

 

 

동계 선생은 척화론을 걍력히 주장했었고

 

또한 광해군의 영창대군 사사에대한 부당함을 상소한 사실도 있었다.

 

 

 

 

 

뒤집어 보자면 인조는 자신의 반정을 합리화 시켜준 정온이 너무도 고마웠으리라. 

 

이런 무게있는 공적들이 즐비한 선생에게 어찌 정려문을 내리지 않을 수 있단말인가?

 

 

 

조선조,

 

정려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가문 최대의 영광이었다.

 

 

 

 

 

 

 

사랑채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한 것으로 10년간 귀양을 가야만 했던 동계 정온.

 

 

 

척화론을 주장했으나 결국은 임금이 항복했다 하여 할복을 시도.

 

정온 선생의 아들이 급히 나서

 

쏟아진 창자를 집어 넣는 등의 조치로 목숨을 건진 후,

 

향리로 돌아와 일생을 자책하였다고 한다.

 

 

 

제주의 귤림서원과 함양의 남계서원에 배향되어 있고

 

이 곳 종택 사당에서는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1820년 (순조 20년)에 후손들이 중창 오늘에 이르는 이 종택은 북부 지방의 보편적 겹집 형태와

 

남부 지역의 특징이랄 수 있는 높은 툇마루를 두는 등, 양 지역의 특징을 잘 조합시킨 집 이라고.

 

 

 

 

 

 

 

            

 

  중문에서 바라본 안채

 

이 고택의 종부와, 멋스런 종가 음식은  너무나 유명하여 수 많은 매스컴에 소개된 바 있다.

 

"사방 백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마라"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완벽하게 실천 했다는 경주 최부잣집의 장녀로 ,동계 집안의 종부가 된

팔십 줄의 어른을 뵙고 싶었으나 집안이 분주한듯 하여 그만 돌아서고 말았다.

 

종부할머니의 동생 되시는 이는,  안동 하회마을 류성룡 가문의 종부이시고

당신의 시고모님은 해남의 윤선도 가문의 며느리가 되었다니

그 인맥의 화려함에는 그저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ㄱ 자 형의 사랑채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눈썹지붕' 이라 부르는 겹처마가 인상적이었다.

계자난간을 두르고 창문은 완자살과 세살문인데 여간 멋스러운 게 아니다.

 

금빛 원숭이의 정기가 뭉쳐 있다는 금원산 자락의 동계 고택은 풍수가들 사이에서

명당으로 소문이 자자하다고 들었다.

어찌나 지기가 센지 무림의 고수가 아니고선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는 형국이란다.

 

다음번에 방문시는 종부되시는 崔熙 어르신을 꼭 한 번 뵈었으면 좋겠다.

 

 

 

 

 

정온 선생 고택 바로 옆에 위치한 반구헌(反求軒)

 

조선 헌종과 철종 년간, 영양 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 선생이 기거했던 집이다

벼슬을 마치고 향리에 돌아왔으나 기거할 곳이 없을 정도로 청백리였던 모양.

해서 당시 안의 현감이 이 집을 지어주어 살게 했다고 한다.

 

"반구"는 스스로 자신을 되 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

 

 

 

 

 

 수승대 (搜勝臺) 거창 위천면 황산리

 

    위쪽으로 올라가면  유명한 거북바위있고 거기엔 퇴계를 비롯,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흔적이 어지러운 곳이다.

바글대는 유원지로 변해버린 풍광에 더 이상 접근하기 싫어

이 쯤에서 발길을 돌리고만다.

 

 

 

 

 

 

 용틀임松

 

 

 

 

 

  농월정 유허지...?

 

남덕유의 옥류가 장장 60리에 걸쳐 흐르는 화림동,

이른바 팔담팔정으로  안의계류의 크라이막스 지점에 서 있었던 농월정.

 

지난 2003년 어떤 정신나간 자의 방화로 전소 되어버려 이제는 볼 수 없게된 농월정,

아마도 저 농월정을 불지른 자가 함양의 정여창 고택에도 불을 지르지 않았을까....!

 

 왜 농월정을 복원하지 않고 있을까 궁금해서 알아봤더니만,

당국에선 설계를 비롯, 예산까지 모두 준비 했으나

여남은 名 되는 박씨 문중의 농월정 관계자 중에서 단 한 사람만이 반대하여

복원을 하지 못 하고 있단다,

 

세상에 이런 기막힐 노릇이....!

 

 


 

 

 흔히 담양과 이 곳 함양을 일러 정자 문화의 보고라 일컫는다.

남덕유의 육십령을 타고 흘러내리는 안의계류 곳곳에 음풍농월의 산실 정자가 줄을 잇고

이른바 '팔담팔정'과 '화림풍류'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곳, 

허지만 이젠 정자라곤 단3개 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 정자는 1637년 9월 지족당 박명부가 지었다고한다.

박명부는 앞서 다녀온 정온 고택의 동계 정온 선생의 아버지인 정유명을 사사하였고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으고 학봉 김성일,  의병장 곽재우 등과 함께

왜적을 무찌르고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봉된 인물이다.

 

임란 후, 사헌부 지평을 거쳐 합천 군수를 지낼때는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구휼에

힘을 다 하는 한편, 절친한 친구 동계선생이 영창대군 옥사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를때는

그를 적극 변호해 주기도 하였다 한다.

 

자신의 본분을 되새김 하는 의미로 자신의 집에 지족당(知足堂)이라는

편액을 내 걸고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달(月)을 가슴속에 초대하여 교감하는 경지, 농월(弄月).....

이런 풍류가 세상천지 여기 말고 또 어디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휘영청 달밝은 밤

유현한 달빛이 반석위에 부서지는 모습 속에 맛보는

취월(醉月)의 세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오지 않을 수 없구나.

 

논어 '선진'편에 나온다던가?

 공자의 제자 증점이 "기수에서 목욕을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쐰 다음,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겠다고 했다는 '음풍(吟風)'.

'농월'에는 반드시 그 '음풍'이 짝을 이뤄야 하는 법.

 

 

내 오늘,  

굽이굽이 60리 길을 거슬러 오르며  선인 들이 즐겼던

'음풍농월'의 의미와 이른바 '화림풍류'의 세계에 침잠 해 보리라.

 

 

 

 

 

지족당 장구지소

 

67세(1663년)로 낙향한 지족당은 농월정을 짓고 2년 후에 세상을 뜬다.

밀양박씨 후손들이 정자 옆 너럭바위에 새겨놓은 문구로

지족당이 지팡이를 짚고 거닐던 곳 이라는 뜻.

 

 

 

 

 

 

농월정 다리 아래의 계류

 

 

 

 

 

화림동 계곡을 거슬러 오르다 만난

 비교적 근자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정자

 

 

 

 

 

동호정(東湖亭)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규모의 아담한 정자다.

구불구불한 원목으로 누마루 기둥을 세운 2층 누각 형태인데

 추녀 네 귀에 세운 활주가 시원해 규모보다 훨씬 장대한 느낌을 준다.

 

 

성리학자였던 동호 장만리(章萬里)를 추모해 1890년경 후손들이 세웠다고 하는데

'동호'는 임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 길에 임금을 업고 수 십리를 달렸다는 충의지사다.

 

정자 앞 계곡에 아주 커다란 너럭바위, 차일암(遮日岩)이 펼쳐져 있는데

누각에서 바라보는 맛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이런 절경에 정자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허전했을꼬...!

 

 

                                                                     

 

 

 

 군자정 (君子亭)

 

일체의 단청이 배제되어서일까?

아담하고 수수한 맛이 일품이었다라고 해야겠다.

조선 성종 때의 인물 정여창 선생을 추모하고 공부하기 위해 1802년 건립.

 

바로 앞을 음식점이 점령하여 마치 음식점에 딸린

구경거리로 보여지는 게 흠 이라면 흠이었다라고나 할까!

 

 성리학자였던 일두 정여창 선생의 처가가 인근에 있어서

래왕이 잦았을 터. 시인묵객들이 북적였을 것은 당연지사. 

 

 

 

 

 

군자정 내부에 걸린 편액 

여기 저기 탁본의 흔적이 어지럽다.

 

 

 

 

 활주로 떠받친 팔작지붕의 선이 날아갈 듯 경쾌하다.

 

 

 

 

 

정자에서 내려다본 계류

 

 

 

 

 

 거연정 (居然亭)

 

이 정자는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서(全時敍)가 1613년(광해군 5)에 처음 지었으나

 퇴락해 없어졌다가 1881년(고종 18) 후손들이 재건했다.

정자의 이름은 주자의 시구 가운데 '한가히 내 자연을 즐기다[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따왔다고.

 

지어질 당시는 기와 지붕이 아닌 억새 지붕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곧, 무이계곡에 억새집을 짓고 자연과 '물아일체 '의 경지를 즐겼다는

주자의 은일자적 삶을 흠모해서 그리 지었으리라.

 

기막힌 선경이라 모두들 칭송해마지 않는다는 거연정.

기기묘묘한 바위섬에 얹혀있는 형국의 정자라고나 할까?

정자에서 계류를 감상하는 맛도 일품이지만, 건너편에서 정자를 관망하는 재미가 최고라 할 수있다.

 

이 모든게 모두다 삼삼하기 그지없는데, 단 한가지.

정자로 건너가는 철다리가 영 눈을 거슬리게한다.

 

철제 다리를 대신할 그 무슨 묘책이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연정은 여전히 아름다워 보는이를 끌어 당기는 마력이 철철 넘친다.

 

화림풍류의 세계가 이토록 멋지고 황홀한 감동을 선사할  줄이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재촉 서상면을 향한다.

 

 

 

 

 

                                                        

 

극락사지 석조여래 입상 (경남유형문화재 제44호)

경남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부근 밭에서 발견되어 옛 극락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옮겨 모시고 있다.

극락사에 관해서는『동국여지승람』에 ‘극락암은 백운산에 있었는데

이제는 없다’는 기록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신과 대좌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얼굴과 손의 손상을 제외하면

불상의 상태는 좋은 편이다.

신체에 비해 큰 얼굴, 좁은 어깨, 유난히 잘록한 허리,

몸에 달라붙은 양 팔 등에서 마치 돌기둥 같은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가슴에서부터 다리부분까지

U자형의 주름을 촘촘하게 새기고 있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신체의 표현, 형식화된 옷주름 등을 볼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상으로 추정된다.

 

- 문화재청 해설에서 옮김 -


 

 

 

 

거연정을 끝으로 화림퓽류 순례를 마치고 찾아든 곳은 서상면의

"극락사지 석조 여래입상" 

 

시멘트로 떨어져나간 코를 성형해 놓은 솜씨(?)가 그럴싸 했다고나 할까?

손을 따로 만들어 끼울 수 있는 형태가 재미있었다.

전체적으론 아주 늠름하고 준수한 모습이라는 느낌이었다.

 

 

 

 

 

 

여래입상을 돌보고 계신다는 저 집의 주인장께서 안내해 주셨다.

저 집은 경남도에서 농촌에 보급할 모델로 선정되기도 했노라고  말씀하신다.

오랜 공직 생활과 코오롱 사장직 등을 거쳐 지금도 열정적으로 사업을 하고 계신다는 어른.

도저히 팔순으로는 보이지 않을만큼 건장하신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귀로의 풍경 들.

 

 

 

 

 

 

 

 

 

 

 

 

 

 

 

독활 

 

 

 

 

강아지풀 

 

 

 

 

 

 물봉선

 

 

 

 

 

이질풀 

 

 

 

 

 

남개연 

 

 

 

 

 

 

 

 

 

논어(論語) 옹아편(翁也篇)에 공자께서 가라사대  

"智者樂水  仁者樂山"라 했것다.

 

흐흠~~~

무식이 탄로나기 전에,  백과 사전의 내용을 들춰 대충  여기 옮겨보자면...

 

 

공자께서 이르되,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智者樂水),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

 

지혜로운 자는 움직이고(智者動), 어진 자는 고요하다(仁者靜). 

지혜로운 자는 즐기고(智者樂), 어진 자는 오래산다(仁者壽).

 

공자님의 말씀인 즉,

지혜로운 사람의 부류에 속하는 이들과 어진 사람의 부류에 속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성격과 행동 경향을 설명한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식별력이 높다.

자신과 맺어지는 인간 관계에 관심이 많아 항상 겸허한 자세를 가지려 노력한다.

두루 흘러 맺힘이 없는 것이 물과 같기 때문에 물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항상 돌아다니며 관찰하고 즐기기를 좋아한다.

반면에 어진 사람은 의리를 편안히 하고 중후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산과 같다.

그래서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늘 자신과 하늘의 관계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모든 가치를 위에다 두고 있다.

그리고 호기심이 적어 한 곳에 가만 있기를 좋아하여 고요한 성격이 많다.

또한 마음을 가다듬고 물질적 욕구에 집착하지 않으니 오래 산다.

 

즉, 지혜있는 사람의 마음은 밝고 깨끗하기 때문에 이해심이 깊고 넓다.

그래서 흐르는 물처럼 시대와 환경에 따라 항상 새롭게 산다는 뜻이다.

 

반면에 어진 사람이 산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고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는 지혜있는 사람은 물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산처럼 조용하기 때문에 장수한다고 하였다.

 

.

.

.

  

구구 절절 지당하신 말씀.  

 

허나, 여기서  우리는 결코, 

문자의 "휘황한 설레발(?)"에 속아 넘어가는 우를 범 해선 아니된다. 

지혜로운 자와 어진 자의 경계를 어찌 가위로 싹둑 자를 수 있단 말인가? 

 

  

계류 흐르는 곳엔  풍류가 어김없이 따라 흐르고 있었고

정자 세워진 처처엔  선인들의 싯구가 수미산을 이루고 있었다.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안의계류(安義溪流)  화림풍류(花林風流) 

 

 양 쪽 모두 다,  진정 뗄레야 뗄 수 없는  불이(不二)의 세계인 것을...!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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