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망굴
일정시대 우리나라 4대 개항장에 속했던 군산항.
축항공사와 더불어 시내와 내항을 가깝게 연결하려고
월명공원 아래를 뚫었던 터널(131m)이다.
군산 개항과 일제 침탈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해망굴 위 월명공원에 올라 조망한 금강의 끝자락 군산 내항
해망동 골목길과 물고기길
일제식민 시절 월명공원과 바닷가 선창사이 비탈에 들어선 해망동은
우리 근대화 시기 군산에 대한 기억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공간이다.
해방후, 피난민들이 하나 둘 집을 짓기 시작하고 필요에 따라
지붕들의 선이 하늘과 맏닿아 이어졌다.
지금은 낡고 쇠락한 공간으로 인식되는 이 곳이지만 골목을따라
산으로 오르거나 선창 쪽으로 내려가는 이 길은 지난 시간들에 대한
기억과 함께 시간의 곁을 따라 걷는 사유의 산책길이라 할 것이다.
(공원에 적혀있는 해설문에서 옮김)
저 건너는 한 때, 우리 경제의 상징물이었던 장항제련소 굴뚝이 우뚝한 모습이다.
공원위의 상징 조형물
공원 내의 조각 전시장애서
백릉 채만식선생 문학비
(월명공원 내 위치)
본관은 평강, 호는 백릉(白菱)으로 군산시 임피면 출생.
와세다 영문과 1학년 재학시절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둥아, 조선 등의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1924년 단편 "세 길로"가 춘원 이광수에게 추천되어 "조선문단"에 발표되면서 등단.
6.25 직전 나이 50을 넘기지 못하고 폐 질환으로 타계하기까지 약 30 여년 동안
소설에서부터, 수필 평론, 희곡 등 약 200여 편의 다채로운 글 들을 저술.
단편 "화물자동차" "부촌" 희곡 "사라지는 그림자" 등 초기 그의 작품속에선
동반자적 성격이 짙었으나 후기로 갈 수록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작품
예를 들어 "인텔리와 빈대떡" "레디 메이드 인생" 등을 내 놓는다.
그 뒤로는 단편 "예수나 믿었더라면" "소망" "치숙" "지배자의 무덤"등을
계속해서 발표했었다.
유작으로는 1973년 발표된 희곡"가죽버선" 과 중편 "과도기"가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탁류"와 "천하태평춘" "집" 등의 단편집을 비롯
"옥랑사" "여자의일생" "황금광시대" "잘난사람들" 등 명저를 남겼다.
군산 신흥동 구 히로쓰 가옥 국가등록문화재 제 183호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
일제 강점기 군산의 영화동에서 포목상을 하던 일본인 "히로스께 사보로"가 지은 전형적 일본식 가옥.
건물의 형태는 근세 일본 무사들의 고급 주택인 "야시키" 형식의 대규모 목조주택인데
2층 가옥의 본체를 비롯, 옆으론 금고 용도의 건물과 단층으로 되어있는 객실이 비스듬하게
붙어있으며 두 건물 사이에는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이 조성되어있다.
히로쓰 가옥은 비교적 규모가 큰 일본 주택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있는 건물이다.
보수중인 히로쓰 가옥의 내부
동국사 (東國寺) 국가등록문화재 제 64호 (근대문화유산지정) 군산시 금광동
1913년 일본인 승려 우치다 대사에 의해 금광사(錦光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탄의 단층 팔작 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의 용마루가 일직선인 점과 건물의 외벽에 창문이 많이 설치된 것은
고온다습한 섬나라 일본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져 현재까지 남아있는 일본식 건물의 사찰로는 이 곳이 유일하다고.
너무나도 생경한 모습의 종각
대웅전 앞마당 좌측엔 작은 종각이 있고 우리나라 범종과는 달리 종이 높다랗게 걸려있었다,
종의 명문엔 이렇게 적혀있다고.
"명치 42년 교토에서 이 종을 만들어 월명산 아래 금광사에 놓을 것이다".
일본풍이 물씬...
장기 십팔은행 건물 (나가사끼 (장기)은행 18 번째 지점)
모르긴해도 아마도 군산엔 일제 강점기 시절의 건물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아닐까...?
옛 군산세관 청사 (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 군산시 장미동 49 - 38
대한제국 광무3년(1899)에 설치된 군산해관 (1907년 해관을 세관으로 개칭) 이
1908년 부터 1993년까지 약 85년간 사용했던 건물이다.
1908년에 준공된 이 건물은 독일인이 설계한 것으로 벨기에에서
수입된 적벽돌을 사용 단층으로 지어졌으며 면적은 약 69 평.
서양 건축양식이 도입되던 근대 초기, 대한제국 정부의 순수 예산으로 건축된 이 건물은
현존하는 한국은행 본점 및 서울역사와 비슷한 양식의 건물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까지 주로 호남과 충청지역의 쌀과
곡식 등을 일제가 수탈하였던 창구 였음을 특별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안내 팜플렛에서 발췌)
청사 내부
현재 건물 내부에는 19세기 후반 이후의 군산항 및
주변 건물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있으며,
이런 사진들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당시의 사회, 문화 등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안내 팜플렛에서 발췌)
청사 내부의 전시물
이 창고 건물 역시 본관 건물과 동시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부듯길을 따라가다가 만난 일정시대 건물
굴뚝이 있는 것으로봐선 무슨 공장 용도로 쓰였을 것 같은데...
소설 탁류에도 등장하는 구 조선은행 건물 한국 경제 수탈의 본거지
(인터넷 자료에서 발췌 )
1천~3천여 정보의 논과 2천여 명의 조선인 소작인을 둔 일본인 대 농장주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농벌(農閥)이라고 불렀다니(財閥, 軍閥과 더불어 3閥)
그 위세를 짐작 할 수 있다.
1899년 군산 축항과 개항은 대한제국의 예산으로 이루어졌으나
세계로 향하여 우리의 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일제의 미곡 수탁의 전담 통로로 전락되었다.
일본 농장주들은 여성 정미공(精米工)들로 하여금 유리 위에 쌀알을 놓고 손으로 일일이 고르게 하여
최고의 쌀만을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배고픈 정미공 들이 쌀 한줌을 훔치면 가차 없이 해고하거나 주재소에 불려가서 곤욕을 치루기도 하고
일본인 남자 감독들이 여성 정미공들의 몸수색을 하는 등,
인권유린의 사례가 많아 정미공의 파업이 빈번했었다고 한다.
일본인 농장주가 농장에 도착하면
흰옷 입은 수 많은 조선인 소작인, 농민들이 도열하여 머리를 숙이고 영접했다고 한다.
(인터넷 자료에서 발췌)
수탈의 현장을 기억하고 지키자는 의미일까...?
부둣가에 조성된 테마공원
상륙함 LST 위봉함 676호
1945년 미국에서 건조, 각종 전투에 참여하였고 1959년 우리 해군이 인수하여
해군의 중추적 역할을 명예롭게 수행하고 2006년 퇴역,
군산시가 무상인수 이 곳에 전시하게 되었다고.
조립중인 팬텀기
군산, 금강 그리고 탁류....
경암동 철길마을
기차가 간신히 통과할 정도로 건물들이 철길에 다닥 다닥 붙어있어
유명세(?)를 치럿건만, 이젠 더 이상 기차를 볼 수 없게 되었다고한다.
원래는 일제때 수탈을 목적으로 김제에서 군산까지 이어놓았던 철길.
몇 년 전 까지만해도 하루 10회에서 20회까지 운행했었다고한다.
텔레비젼을 통해 보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찾아갔더니만,
아뿔사......
2008년 6월 30일자를 끝으로 운행을 중단 했단다.
선박 형태로 지어진 채만식 문학관 2 층에 올라 조망한 금강
탁류속에 나오는 '정주사'의 고향 충남 서천이 빤히 건너다 보인다.
그 시절엔 쌀을 실어 나르는 배 들이 금강을 가득 매우고 째보선창엔
이런 저런 사람들로 넘쳐났으리라.
1916년 개성에서 거주할 때의 채만식
1902년 전북 옥구군 임피면 취산리에서 부친 채규섭씨와 모친 조우섭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편이었던 지주였으며
막내아들인 그를 특히 사랑하였다고 한다.
채만식은 집안에 독서당을 앉힐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부모임의 지극한 사랑과 관심속에서
어린시절부터 집에서 차린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였다.
1918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22년 중앙고보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일본 와세대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축구팀에서 활약하는 등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던 채만식은
급속히 기울어진 집안의 가세 때문에 1923년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1920년 부모의 일방적인 의사에 의해 귀향하여 은씨와 조혼하였다.
부모님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결혼이기 때문에 불행한 결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불행한 결혼은 신식교육을 받은 채만식에게 더욱 심한 정신적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이혼까지 요구하였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본부인 은씨와 별거한 상태로 신식여성인 김시영씨와 임종 때 까지 살았다,
(인터넷 자료에서 발췌)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시 학생들과 함께
1921년, 뒷줄 중앙이 채만식
와세다 재학시
육필 원고
외골수인 성격 탓으로 교우관계가 그리 넓지 못했다는 채만식.
당연히 고집이 세고 현실과 차단된 귀족적 생활을 고집했다고.
그의 작품이 실렸던 책 들
문학관 내부
1층에는 전시실과 자료보관실이,
2층에는 영상세미나실과 휴게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잔디가 깔린 문학관 앞 광장에는 초봉의 아버지 정주사가 넘나들던
콩나물고개의 오솔길과 쌀을 실어 나르던
철도 등이 조성되어 있었다. .
탁류(濁流)
1937년 12월부터 1938년 5월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
모함과 사기 ·살인 등 부조리로 얽힌 1930년대의 사회상을 풍자와 냉소로 엮은 작자의 대표작.
군(郡)의 고용원을 지낸 정주사의 딸 초봉이는 정주사 가 미두(米豆)에 미쳐 가세가 기울어지자
약국 제중당 에서 일을 했다. 나이가 찬 데다 용모가 예쁜 초봉이를 탐내는 남자가 많았다.
초봉이를 서울로 유인하려던 약국 주인 박재호는 그의 아내의 훼방으로 실패한다.
매파에게 홀린 부모의 권고로 초봉이는 호색가인 은행 원 고태수와 결혼한다.
그러나 꼽추인 장형보의 흉계로 남편을 잃고 꼽추에게 몸을 버린다.
무작정 서울로 가던 초봉이는 박재호의 유혹으로 그의 첩이 된다.
얼마 후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딸을 낳는다.
장형보가 자기의 아이라면서 아이와 함께 초봉이를 빼앗아간다.
초봉이는 장형보를 극약을 먹여 죽이고 자수한다.
장항쪽에서 바라본 금강하구둑
일제 말기의 악랄 교활한 압박과 위협 앞에서 그도 결국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지만,
그는 해방 후 참회한 몇 안 되는 작가다.
채만식이 1943년 8월 3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강제 징용을 찬양하는 다음의 글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나라는 백성의 모체다. 나라 있고서의 백성이다. 세상엔 나라 없는 백성이 노상 없음은 아니나,
그런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국기(國旗)의 배경 없는 백성은 천하의 천민이다.
백성은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다....전쟁은 국난이다. 국난은 백성이 나서서 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 되어 최대의 의무요 아울러 최고의 영광은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즉 전쟁에 나아가 한 목숨이 죽을 수 있는 군인 될 자격을 가지는 것이다.
반대로 만일 그 백성이 나라가 방금 국운을 내어걸고 전쟁을 하는 날에 전쟁에 피를 흘림으로써
나라의 방패가 되지 못하는 자라고 한다면 그는 나라에 대하여 한낱 불구자적인 기생충적인
부끄러운 존재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충의의 극치는 거듭 말하거니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데 있다.
나라에 충(忠)하지 못하는 백성이야 무엇으로 백성 값에 갈 것인고.’
여기에서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 당연히 천황의 나라 일본 일 터이지만,
어쩌면 해학과 풍자의 달인인 그는 이 글을 항일 독립군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일본징용의 독려의 글로 위장하여 한 말은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사실 이 문장만 읽어보면 독립군, 의병에게 딱 부합되는 말이다.
특히 ‘나라가 있고서야 백성이 있다’. 라는 말은 우리민족의 처지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어찌되었든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채만식에게
안타까운 연민의 정을 느낀다.
탁류를 쓴 사람은 이런 친일 글을 쓸 수 없을 것만 같기에...
그의 친일은 식민지 지식인의 가련한 피해자 인지도 모른다.
채만식 문학관의 전시물에서 친일 행위를 감추는 일이 진정 그에 대한 바른 평가는 아니다
@ 채만식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다 위와 같은 글을 보게 되었는데
나름대로 의미있는 내용이라고 생각되어 옮겨보았다.
개정면 발산초등학교내 뒷편 모습
석등과 석탑을 포함 총 31기가 놓여있다
발산리 석등 (보물 제234호)
약 2.5m 크기로 통일신라 때의 작룸으로 본다고 하는데
석주에 새겨진 운용문은 우리라라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석등 구멍 옆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는 등,
기법이 아주 세련되었다는 평.
미치야라는 일인 지주가 완주군 고산면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일본으로 반출할 목적으로 여기로 옮겨다 놓았다고한다.
육각부도 (전북문화재자료 제186호)
각종 부재가 짬뽕이 되어 어떻게 해석을 해야될지....
기단부 쪽의 석부재는 비교적 정확한 모습이다.
고려때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부도는
이 자리에다 농장을 개설한 시마따이 야소야라는 자가 이름을
알 수없는 절터에서 일본으로의 반출을 목적으로 가져다 놓았다고.
원부도의 형태가 상당히 이채로운 모습인데 명문이 보이질 않는다.
발산리 5층 석탑 (보물 제 276호)
고려때의 석탑으로 원래는 5층이었으나 지금은 4층까지만 남아있다.
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탑의 간결한 맛을 보여준다.
이 역시 일본으로 반출한 목적으로 농장주가 완주 봉림사터에서
가져다 놓았다고한다.
그런데 뭔가 명칭이 좀 이상하다
발산리 5층 석탑이 아니라 봉림사지 5층석탑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도열한 석인상
어드메서 여기까지 오셨는지....?
발산리 금고 (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4호)
일제시대 군산 지역 대표적 농장주였던 시마따니 야스야 라는 자에 의해
1930년대에 지어진 금고, 즉 보물창고 용도의 건물이다.
시마따니라는 자는 우리민족의 문화재와 수 많은 예술품들을 불법 수집했던 인물.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입구의 문은 미국에서 수입한 철제 금고문을 달았다.
창문은 쇠창살과 철판, 2중으로 잠금장치가 되어있다.
일제시대 일인들에의한 우리 문화재 약탈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료가치가 매우 큰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가 패망하자 시마따니는 미 군정청에 한국으로의 귀화를
신청하리만치 이 곳의 문화재를 차지하기위해 집착했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한국전쟁 통에는 인민군들이 감옥으로 쓰기도 했단다.
보물창고 출입구
얼핏 보아하니 지하층도 보이던데
도대채 얼마나 많은 우리의 문화재를 약탈하여
일본으로 밀반출 했을까에 생각이 미치니
뭔가 치밀어 오르기도하고
우리것의 가치에 무지해서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도 들고......
임피향교 (전북문화재자료 제 95호)
조선 태종 3년(1,403)에 세워졌으며
숙종 36년(1710)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담장 밖에서 바라본 명륜당
요즘은 전국 어딜가나 문이 열려있는 향교를 만나기가 쉽지않다.
이 곳도 예외는 아닌듯....
향교 앞에 자리한 정자
정자 앞 석물 중에서 제일 눈에 들어오길래....
내 생전 이런 형태의 철비는 첨 보는 것 같다
노성당 (老星堂)
임피 향교 입구 연못 맞은편에 자리한 이 지역 선비들의 집합처.
역대 고을 수령들의 위패를 모시고 일년에 한번씩 제사를 지낸다고.
철종 6년에 건립했고 전임 관리들의 명단과
군수 방명록등의 도서를 보관하고있다 한다.
백릉 채만식의 모교 임피초등학교
개교 백주년 기념탑이 서 있었는데....
어딜 둘러봐도 채만식에대한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채만식 선생 묘소 (임피면 축산리 계남마을)
세상을 뜨면서 그는 이렇게 유언했다고한다.
"상여는 쓰지말고 리어커에다 관은 산국화, 들국화로 덮어달라...."
*
*
*
언제부턴가 까닭모르게 군산과 채만식이 머리를 맴돌며 화두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그래 만사 제치고 달려가는거야....."
군산에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나 안내인의 조력도 없이 무작정 월명공원을 찾아간다.
차라리 무식이, 어설픈 선입견을 갖는 유식보담 나으리라는 기대 속에.
다짜고짜 월명공원에 뚫려있는 해망굴 앞에 당도, 그때서야 생각을 정리한다.
군산에 널려있다는 일제치하의 근세 문화유산을 비롯한 식민지 치하의 수탈 현장과
도도하게 흐르는 금강의 탁류속에 이 고장의 인물 백릉 채만식을 투영해 보겠노라고....
계단을 올라 먼저 채만식의 문학비부터 물어 물어 찾아간다.
추모비의 위치를 현지 사람들도 생소해 하는 모습이다.
백날의 끝자락을 붙잡고 마지막 정열을 토하는 문학비 앞, 붉은 배롱꽃에서
마치 폐병으로 각혈을 해 대며 스러져갔다는 작가의 마지막을 떠올려본다.
공원을 내려와 찾아간 "구 히로쓰 가옥"
문화재청에서 지정했다는 "근대문화유산"이라는 팻말이 박혀있는 대문앞에 선다.
잔뜩 어수선한 모습인데 아마도 보수공사가 진행되고있는 모양.
불문곡직 뚫고 들어가 여기 저기를 살펴보는데,....
어릴적부터 이런 저런 일본식 가옥에서 살아본 나로서는 그리 어색한 동선이 아니다.
허지만, 처음으로 일본식 건물에 들어선 사람들은 상당히 어색해 한다.
정원의 식물 배치나 석등의 위치 등 1층 내부만 대충 들러보고 나오는데
2층 건물이어서인지 일본식 건물치곤 꽤 크다는 느낌이었다.
이어 찾아간 동국사도 역시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단 하나 남은 일본건물의 사찰이라는데 문패에 붙은 조계종이라는
표기가 웬지 어색하고 불편해 보인다.
시내 여기저기를 가다가 무조건 일본식 건물만 보이면 차를 세우고 다가가본다.
그 중, 구 군산세관 청사에는 해설사도 배치되어 있었고 이런 저런 자료들도 전시되어
탐방객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있었는데 꽤 괜찮고 성의있는 모습이었다.
텔레비젼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경암동 철길마을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는데
불과 두 달 전 열차운행이 막을 내렸다고한다. 알고 찾아온건지, 아니면
나처럼 모르고 찾아온건진 몰라도 아직도 이런저런 카메라 꾼 들이 설쳐대는
모습이었는데 아마도 아쉬움 속에 옛날을 추억하는 모양.
이어 달려간 곳은 탁류의 작가 채만식 문학관.
2층에 올라 금강을 바라보며 그가 소설속에서 버무려놓은 애기들을 떠올리며
냐름대로의 각색을 거쳐보자니 종래는 "청류"라는 황당한 제목에까지 생각이 미치고만다.
의옥적으로 출범했던 "채만식문학상"은 이런 저런 그의 친일 행각 때문에 고초를 겪는 모양.
그래도 그는 여타의 지식인들관 달리 참회하는 모습이라도 보였다.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어디서부터가 친일이요, 어디까지가 반일이었는지에 대하여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고 또한 자세히 알지 못한다.
허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리라.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친일 여부를 재단 해 버리는 식의 결론은 매우 적절치 못하고
또 절대 그리 해서도 아니된다는 사실.
일정치하 생존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는 우리네 부모님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선각자들에 비해 다소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 할 지라도 결정적 흠이 아니라면
모두 너그럽게 품어주는 지혜가 오히려 진정한 일제 잔제의 청산은 아닐까...?
뭐든지 딱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리 쉽지 않은 게 인간 삶의 궤적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문학만을 취하고
작가의 행로는 따로 떼어 조명하는 너그러움도 사안에 따라 보여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건 어떨가...!
백릉의 문학관을 나와 찾아간 곳은 "금강철새조망대"
여러가지 취미 중에서도 상급으로 인정받는 것이 탐조(探鳥)라고 들었다.
허나, 흐린 날씨에다 만만치 않은 입장료를 보고 그만 돌아서기로 한다.
개정면 소재 발산초등학교로 들어가 뒤로 돌아가니 그곳은 보물 천지였다.
수탈의 역사,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 끝에서 결국은 자책하지 않을 수 없는 현장.
군산 전체를 통들어 보물급 물건이라곤 이 학교 자리에 농장을 일구고 유물을 끌어 모은
일본인 시마따니의 콜렉션(?)밖에 없다고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떠한 물건에 대한 소중함을 알기위해선
안목을 기르지 않고서는 어림없는 일.
다시 말해 보고 또 보고, 알려고 노력해야 뭔가가 보이는 법 이라는 사실을
발산초교 뒷편 시마따니 야스야의 보불창고가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오늘 기행의 마지막은, 묻고 또 물어 찾아간 백릉 채만식 선생의 묘소.
추석이 낼 모렌데 아직도 무성한 잡풀 속 썰렁한 모습.
여기 천하무식쟁이 茶泉이란 자가 선생의 체취를 좇다 이곳까지 찾아왔소이다.
찾아주는 이 없다고 너무 설워 마시오.
아마 모르긴해도 나 같은 감동파들이 세세년년 선생을 찾고 또 찾을것이외다.
이제 선생의 누운 자리를 알았으니 언제고 내 지나는 길에는반드시 선생을 기억,
국화 그리고 소주 한 병 들고 찾아오리다.
그럼, 이만 편히 쉬시길....
2008, 9, 5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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