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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고창의 들녘과 바다를 아우른 하루

2007-09-10 22:17

 

 

무장현 관아와 읍성(茂長縣 官衙와 邑城)

사적 제346호
전북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49-1외 일원

이 무장읍성(茂長邑城)은 단순히 옛 무장현(茂長縣)의 읍성(邑城)만을 가리키는 바 아니고, 성(城)과 아울러 그 안에 있던 당시의 무장고을, 즉 읍내(邑內)(읍치(邑治), 군현(郡縣)들 각급 (各級) 수령(守令)의 치소(治所) 마을) 전체를 가리킨다. 각칭(各稱)을 무장읍지(茂長邑址)(혹은 무장성읍(茂長城邑))라 해야 정확 명료할 것 같다. 다시 말해 사적(史蹟) 제 346호는 원(元) 무장읍지(茂長邑址) 전역(全域)을 이 안에 현존하는 객사(客舍)(전남지방 유형문화재 제34호), 동헌(東軒)(동상(同上) 제35호 ), 남문(南門) 및 토성(土城)(전남지방기념물 제11호)과 성외(城外)의 해자(垓字) 그리고 성밖에 상당거리 떨어져 있는 사직단지(社稷壇址) 여단지(여壇址)까지 포괄해 가리키는데, 이는 조선시대 읍치(邑治)(고을)의 한 유례로써 심히 희귀한 존재이다.

 

 

무장현(茂長縣) 경역(境域)은 원래 장사현(長沙縣)과 무송현(茂松縣)이었는데 여말(麗末)에는 왜구(倭寇)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조선 태종 17년(1417)에 양현(兩縣)을 합쳐 무장현을 새로이 개설(開設)하고 왜구침습(倭寇侵襲)에 대비하여 진(鎭)을 두어 그

 병마사(兵馬使)로써 현사(縣事)(수령(守令))를 겸임(兼任)케 하였다. 후일 이를 파(罷)하고 일반예(一般例)와 같이 현감(縣監)을

두었고, 왜정(倭政) 초(初) 1913년의 부군폐합(府郡廢合)으로 고창군(高敞郡)에 편입(編入)되었다. 태종 17년 처음 이곳에 읍치를

개설할 때 무장진병마사(茂長鎭兵馬使) 김시(金蓍)가 전라도 각 군현의 승려(僧侶)와 백성 2만 수천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2월부터 5월에 걸쳐 읍성을 축조(築造)하고 여러 공공건물(公共建物)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남북(南北)으로 뻗은

사두봉(蛇頭峰)을 가운데로 하여 ㅁ자형으로 읍치(읍내)가 형성되어 있는데, 읍성등 중요 유적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1. 읍성(邑城) 축조연대(築造年代)는 태종 17년이고, ○원(原)은 "석축 주이천육백삼십구척 고칠척 내유이천(石築 周二千六百三十九尺 高七尺 內有二泉): 동국여지승람(與地勝覽)」 및여지도서(輿地圖書)」 "(이보다 앞서는 「문종실록(文宗實錄)」 1년 8월 병술조(丙戌條)에는 읍성 주회일천사백칠십척 고칠척……해(해)자 주회이천일백이십칠척……(邑城 周回一千四百七十尺 高七尺…海(垓)字 周回二千一百二十七尺……)이라한 바와 같이 석성(石城)이었으나지금은 토성(土城)인데 (토성으로 개축(改築)한 까닭과 시기를 전하는 기록은 없음), 길이 약 1.2㎞, 높이 약 1∼2m, 폭(幅) 상부(上部) 약 1∼2m,하부(下部)약 3∼5m의 장방형(長方形) 평지성(平地城)이다. ○ 거의 완형(完形)에 가까운 남문(진무루(鎭茂樓))과 동문지(東門址)(옹성지(甕城址))를 포함하여 대부분이 남아있는데 오직 남문 좌우측의 일부(약 230m)만이 훼손되어 없어졌다(도로개설 및 민가밀집지역(民家密集地域)). ○남문 주위에 석축이 남아 있고, 또 동문지의 토성단면(土城斷面)내부에 열석(列石)이 보이는데 이는 토성으로 개축하기(덮기) 이전의 석성(石城)의 구조로 짐작된다.

2. 해자 (垓字) ○흔히 성지(城池) 혹은 성호(城濠)라 하는 바와 같이 해자(호)는 방어목적(防禦目的)의 성곽(城郭)에 필히 병설(倂設)되었던 것인데도 현재 성과 함께 해자가 남아있는 예(경우)가 심히 드물다. ○무장해자(茂長垓字)는 남문의 동서 약 150m만 없어졌을 뿐, 폭(幅) 약4m로 , 길이 약574m에 이르는 흔적이 성 둘레에 완연(宛然)하다.



 

3. 객사(客舍) ○사두봉(蛇頭峰)남록(南麓)의 거의 읍내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11칸, 측면 3칸, 건평(建坪)80평, 기단석축(基壇石築)고(高) 80㎝이다.  ○관명(館名)은 송사관(松沙館)(무송(茂松) 장사(長沙)의 약(略))이고 조선후기에 지어졌음은 확실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수년 전까지 면사무소로 사용된 까닭에 특히 내부구조의 변형이 심하였는데, 1990년에 원형에 가깝도록 일대수리(一大修理)를 가하였다.

4. 동헌(東軒) 당호(堂號)는 취백당(翠白堂)이고 성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정면 6칸, 측면 4칸, 건평 45평, 석축기단 고(高) 45㎝이다. ○ 인조(仁祖) 13년 (1635)에 창건되어 수차(數次)의 개건(改建)을 거쳤다 하고, 1983년에 크게 중건(重建)되었다. ○일정(日政) 초(初) 모든 고을에서 거의 종전(從前)의 동헌(여러 아사(衙舍)의 중심건물 )은 군청 또는 면소(面所)로, 객사(客舍)는 학교로 개조 사용되었는데 무장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5. 진무루(鎭茂樓) ○읍성의 남문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층누문(二層樓門)으로 건평 4평이다. ○광해군 4년(1612)에 개건(改建)되어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쳤다 하고, 1984년에 크게 중창되었다.

6. 성황당지(城隍堂址) 및 사직단지(社稷壇址)여단지(여壇址) 상기(上記) 뚜렷한 유적외 , 모든 읍치(邑治)의 성내(城內)에 반드시 있었던 성황당지가 확인되고, 성밖에 필히 있었던 사직단지(22,730㎡)가 서북 약 1.5㎞ 지점인 무장면 월림리(月林里)에 , 여단지(23,206㎡)가 동북 약 2㎞ 지점인 무장면 도곡리(道谷里)에 확실히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각 고을에서 필수요건의 하나이던 향교(鄕校)가 타지방과 같이 성밖에 현존하고 있다.

1988년이래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해 무장읍지에는 현재까지 옛 고을(읍치)에서 2대 핵심 건물이던 객사와 동헌이 공존하고 있고, 또 읍성(토성)이 남문 및 동문(옹성)지와 함께 그 외주(外周)의 해자와 나란히 병존하고 있어서 다시 말해 객사와 동헌, 성곽과 해자가 같이 남아 있어서 심히 드물게 보는 중요한 유적지임이 분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향청(鄕廳)· 연청(椽廳)· 내아(內衙)와 성황당· 사직단· 여단 등 여러 공존시설의 원위치도 옛 지도나 고노(古老)들의 증언을 통해 거의 확인할 수 있어서 1991년 2월에 사적 제 346호로 지정하였다. 더욱이 무장읍지는 신문물 전래이후 다른 고을의 경우와는 달리 성밖의 고창 ∼ 영광 간 대로변으로 신시가지가 형성 개발되고, 성내에 상기(上記) 여러 아사(衙舍)와 객사를 개조한 국민학교· 면사무소· 경찰지서 등 공존건물과 20호의 민가가 있을 뿐 현재 거의가 국공유(國公有)의 야산 (野山) ·농지(農地)· 운동장 등으로 남아있다. 위와 같이 여러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무장읍지는 오늘날 전국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옛우리 읍치(고을)의 전형을 조사 복원하는데 가장 알맞은 적지(適地)이다
- 문화재청 자료에서 -

 

 

각종 송덕비 열전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저 잔디밭 자리에 있었던 �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더군요

 

 

고창 공음면 학원농장의 메밀밭을 찾아갔습니다.

 

 

아직은 때가 좀 이릅니다

 

 봄날의 청보리, 가을날의 메밀밭이라......

 

 이름하야, 무등산 닷컴표 오작교 해후


 

 

 

 

 

 

철이른 메밀밭 풍경이런만 경향 각지에서 대포꾼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구시포 해수욕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갈매기의 집단 사색...?

 

 

 

 

 

 

 

 

 

바다에서 산을 낚고 계시는 불태산님

 

 

사람이나 배나, 기대어야만 외롭지 않다고 했던가......

 

*  2007, 9, 9 일요일


메밀밭에 대한 단상이랄까......?
메밀꽃 하면 일단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을 떠 올리는 건 내 남 없이 비슷한 모양이다.
이건 순전히 교과서에 실려있고 점수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실,  이효석이 남긴
여러 작품들 중 '메밀꽃'을 빼곤 이렇다 할 내용의 작품이 없기에 더 돋보이는지도 모른다.

소싯적.
이효석의 펜 끝에 놀아나서 정선에서 부터 오대천을 따라 진부에 이르는 험하디 험한 비포장길과
달빛에 소금을 흗뿌려 놓은 느낌을 맛 본 답시고 대화, 봉평 등지를 헤메었던 기억........

세월과 함께 비록 내 �은날의 감성은 한없이 무디어져 가 버렸지만 그래도 추억을 곱씹을 만 한 꺼리가
고창땅 공음면에 펼쳐져 있음에 행복했고 들판의 정자 하나를 전세내어 라면과 웃음을 끓여내어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었음은  너무나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옛날 해당화로 유명했던 구시포를 찾아 바다 내음과 갈매기의 비행을 감상했던 시간은 오늘 일정의
백미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해 주신  여러 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 합니다.

 

 

 

한병인
고창지역을 섭렵하셨네요
동동 가족 사진은 자연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코스모스도 등장하고 이제는 가을 분위기가 코끝에 와 닿습니다.
2007-09-11
08:21:47
 
 
 
꽃뫼
언젠가 가본듯한 무장읍성,
학원농장의 너른 메밀밭
구시포 해수욕장의 갈매기
그리고 닷컴의 정겨운 친구님들
동동님네 가족...
모두의 모습이 내 얼굴에 미소가 나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산다는 것은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라 하는것 같군요
나도 언제까지 이 속에서 행복해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음악 또한 오늘 좀 장시간 들어도 좋을것 같군요..
창을 닫지 않고 열어두렵니다
2007-09-11
10:14:21
 
 
 
산마을
무장읍성의 모습이 선명합니다. 아직 이른 메밀밭이지만 분위기있게 잘 나왔군요.
바닷가의 사진도 선명합니다. 기름에 빠져나왔다 오더니 더 분위기있게 잘 나오는군요....
잔잔한 풍경들이 보기 좋습니다.
2007-09-11
19:18:11
 
 
 
첨단산인
무장읍성에 방문했을때 그마을에 사시는 문화해설사께서 전해주시던
축조의 비사들 이제 기억도 하기 힘들지만 건물 한채에도 그렇게
많은 의미를 지니고 축조했는지 그때야 깨닫게 되었지요
그 뒷면에 있는 철제 송덕비는 참으로 독특했습니다.
2007-09-11
21: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