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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천하제일 황룡리 요월정 원림(邀月亭園林)

2007-08-29 22:46

 

 

장성 삼계면 소재 희뫼요에서 바라본 함동저수지 풍경

 

 

수월처사라 일컫는 도예가 김형규 선생이 거 하는 삼우정

 

 

삼우정에 피어나는 연

 

 

 

 

부처손
희뫼요에는 야생화 농장도 있고 연꽃 연구가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요월정원림 (邀月亭園林)

시도기념물 제70호 (지정일 1985.02.15)
전남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 171 (일원)
면 적 : 14.840㎡(4,489평)
황룡강의 북서쪽 기슭위에 강쪽으로 세워진 요월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각지붕형 건축물로서 2개의 방과 동쪽으로 마루가 이어져 있다. 이와 같은 평면구조로 보아 정(亭) 보다는 당(堂)에 가까운 건물로 볼 수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25년에 고쳐 지은 것이라고.

 

 

옛날에는 요월정 아래로 황룡강이 흘렀는데 명주실꾸리 3개가 들어갈 만큼 깊었다고 한다. 그리고 물이 맑아 고기가 맛좋기로도 유명했단다. 그러나 후에 물줄기가 바뀌어 몇 군데 소(沼)만 남게 되었고, 경지정리 후엔 수맥이 끊겨 지금은 흔적도 알 수 없고 마을 촌로들의 이야기로만 전할뿐.

 

 

주변의 울창한 송림 사이로 남도의 여름과 정열을 상징하는 배롱나무가 100여 그루나 군식하고 있어 가히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 요월정 원림의 배롱나무는 담양의 명옥헌 원림, 화순 사평의 임대정 원림의 배롱나무 등과 함께, 전문가들로부터 원림에 식재된 배롱나무 군락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22세기로 넘겨주어야 할 소중한 숲 중의 하나로도 선정된 바 있다

 

 

550년(명종 20년) 공조좌랑이시던 김경우 선생은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황룡면 황룡리 171번지에 요월정을 지었다. 지금은 황룡강 직선공사로 인하여 황룡강이 흐르지 않고 있지만, 그 때 당시에는 요월정 앞 깍아지른 듯한 절벽 밑으로 황룡강이 굽이쳐 감돌아 소(沼)를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당시 선비들은 요월정에 모여 우정을 나누고 정치를 논하면서 짬짬이 절벽 밑으로 낚시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시를 읊조리기도 하였다고.

 

 

천하제일 황룡리

요월정을 건립하였던 金景愚 선생의 9세손인 京燦(1796∼1819)은 요월정을 다시 중건하면서 경치가 빼어남을 찬양하여 다음과 같이 요월정 重修韻을 지었다.

百日花紅度幾秋 重光重喜且重修
朝鮮第一黃龍里 夜月更三白鷺洲
好個東山還舊主 超然南國有名樓
鳳凰己去臺空在 安得詩仙與共遊

백일홍꽃 붉어서 몇 가을을 지냈는고 세월이 지나고 또 지나서 집을 고치는도다
조선제일 황룡리요 달 밝은 깊은 밤에 백로 노는 물갓이라
좋은 동산에 옛주인이 돌아오니 남쪽의 유명한 누각이 더욱 뛰어나구나
봉황은 이미 떠나고 집은 비어 있으니 어느 때나 시선을 만나 함께 놀아 볼까.

 

 

위 글 중 '朝鮮第一黃龍里'란 대목이 문제가 되어 왕도(한양)를 능멸했다는 모함을 받아 임금님께 불려가게 되었다.

 

"朝鮮第一黃龍里라 한 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예"하고 대답하자

"

그러면 한양은 어떤고?"하고 다시 묻자 "天下第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장안은 어떤고?"하니 "萬古의 第一입니다."라고 답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 문곡 김수항 등 여러 명현들이 많은 시를 지어 음풍농월하던 명승지로

이 명현들의 시들이 지금도 현판되어 걸려 있다.

 

 

이렇듯 아름답기만 하던 요월정도 임진왜란의 여파가 밀려왔다. 무자비한 왜놈들이 마을 부녀자들에겐 갑작스런 변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젠가는 오리라 짐작은 했었지만 너무 빨리 다가온 현실 앞에 도망을 못한 부녀자들은 통곡마저 잃고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극악무도한 왜구들은 연약한 부녀자들을 겁탈을 하려 들었고,

허나 절개를 생명처럼 여기는 여인들이라 이들의 악행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

 

 

 

 

 

 

그럴바엔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났다고 다짐. 왜놈들의 눈을 피해 요월정 앞 바위로 모여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바위 위에서 못 속으로 자미화 꽃잎처럼 몸을 날려 절개를 지켰다고.

후로 이곳 절벽을 낙화암이라 이름짓고 그들의 순결한 뜻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고 한다.

 

 

 

 

황룡에 맨 처음 옮겨 산 광산김씨는 김충손의 장자인 김승조로, 그는 자를 희지
호를 서청자라 하며 김굉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연산 1년(1495)에 문과에 급제하여
숭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김승조는 그후 승차하여 사간원 정언, 사건부지평 등으로 있으면서 민폐를 없애고 근검절
약을 적극 주장하다가 연산군대의 간신 유자광등의 미움을 사서 갑자사화때는 사림파들과
유배에 처해졌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자 그는 성균관 전적으로 복직하여 사간원
헌납, 사간으로 있으면서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동참했다. 중종은 처음에 개혁정치를 시도하
다가 남곤, 심정등의 훈신들에게 동조하여 우유부단하고 기묘사화를 일으키자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여 황룡에서 살다가 이듬해인 중종 15년(1520)에 죽으니 황룡면 와룡리 건곤산
에 묻혔다. 그는 중종대에 나주 목사로 근무한 일도 있으며 사헌부, 사간원의 요직을 맡아
개혁정치를 시도하다가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런데 황룡마을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여양진씨였다. 그들은 500여년전에 이곳에 옮겨
와 살게 되었는데 김숭조의 넷째 아들인 김기가 이 마을에 사는 참종 진삼의 딸과 결혼하게
되어 김숭조가 난세를 개탄하며 벼슬을 사직하고 이곳에 은거하였던 것 같다.
김숭조의 아들인 김기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살면서 자암 김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 재주를 칭찬받았는데 16세에 황룡의 참봉 진삼의 딸과 결혼했으며 중종 14년(1519)에
문고 별시에 뽑혀 한림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검열, 주서로 있으면서 중종의 명으로 원자의
시강에 참여하여 왕의 은총과 기대를 받았다. 그는 기묘사화를 당해 파직되어 황룡에 내려와
지내면서 아버지의 상을 치렀고 3년간 상례를 다하였다.

그후 벼슬이 수여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계속하여 왕의 부름을 받고 예문과 검열을 제수
받았으며 사헌부 장령으로 언관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는 그후 홍문관 교리, 수찬을
거쳐 의정부 사인이 되었으며 경상도 어사로 활약했고 서강원 필선, 용강현령을 거쳐 홍문
관 전한으로 휴가중 병을 얻어 향년 33세의 나이로 죽으니 조정과 재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특히 하서 김인후는 만사에 이르되 "조정에서 더 나은 이 없고 문벌로는 누가
겨룰 수 있는가"라 하였다.

김숭조나 김기는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황룡에 머무른 기간은 짧았으나 김기의 아들인 김
경우는 벼슬이 정3품인 퉁훈대부로 공조좌랑을 역임했으나 일찍이 낙향하여 황룡마을에 요
월정을 짓고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 송천 양응정과 더불어 시문을 짓고 자연을 벗삼으
면서 살았다. 이들은 중앙정계에서 간신배들이나 소인들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
들이었기에 뜻이 맞았고 사는 곳이 이웃이어서 서로 잘 어울렸다. 이 때는 기묘사화의 장본
인인 중종이 왕으로 있으면서 김안로의 전횡이 심했고 인종이 왕위에 오른지 1년도 못되어
죽었으며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대비가 섭정으로 있으면서 윤원형, 이기 등과 함께 을사사화
를 일으켜 사람들을 숙청하는 난세였던 것이다.

요월정의 주인공인 김경우는 김사화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김숭조의 손자며 중종 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펴면서 나라를 바로잡으려던 김기의 아들이다. 하
서 김인후는 인종의 스승으로 인종이 죽은 후 명종 때의 을사사화에 간접적인 피해자였으
며, 고봉 기대승은 기묘명현인 기준의 조카요, 송천 양응정은 기묘명현인 학포 양팽손의 아
들이었다. 이들은 서로간에 왕래하면서 시문을 읊고 세상을 한탄하며 울적한 심사를 토로했
고 서로의 충절과 의리를 소중히 하였다고.

- 옮긴글 -

 

 

 

 

 

 

 









2007, 8, 29 수요일

막바지 더위로 혀를 길게 빼 물 즈음에 찾아온 장대비 덕으로 모처럼 호흡 조절을 할 수 있었던 어제 오늘이 아닌가 싶다.
가을의 전령사를 자임하며 찾아오신 명경헌님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세심원을 비롯, 축령산과  조용헌 선생의 휴휴산방을
거쳐 장성 삼계면의 희뫼요를 찾은 다음 장성 황룡면 소재 요월정 원림에서 오늘의 탐방을 마무리 지었다.

하서 김인후로 대표되는 장성을 비롯 인근에 거주하는 당대 문사들의 집결처 노릇을 했다는 요월정 원림.
담양 명옥헌 원림, 화순 사평의 임대정 원림, 장흥 고영환 가옥 등에 식재된 배롱나무와 함께 전문가들이 손 꼽는다는 요월정  

원림의 배롱나무, 그 화려함과 꿋꿋함으로 뜨거운 여름 내내 요염하게 피어나는 자미화는 남도인의 감성 그 자체일 터.

소리 소문없이 경향 각지에서 많이 들 이곳 요월정 원림을 찾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요월정의 자미화도 좋지만  노송과 배롱나무의 어우러짐도 또한 볼만하다.  개인적으론 뒷편의 울창한 송림에 오히려 더 눈길이

오래 오래 머문다는 점을 애기 해 주고 싶다.

邀月이라,,,,,,,.... !
달을 부른다는 것은 곧 벗을 부름이요, 시를 청 함이요, 낭만을 부름이 아니겠는가?
동편에 둥근 달이 떠 오르는 날을 택해  요월정 원림을 탐방한 후 황룡강의 유장한 물길을 따라 강변의 둑길을 걸어 보시라.
강물에 잠긴 밝은 달의  유현함이 처연하게 가슴에 다가온다는 말 뜻의 의미를  아마도 처절하게 실감할 수 있으리니........

 

 

 

 

 

무늬
요월정 원림..
그 숲길과 내력
님을 통해서 또 한번
우리 고장의 향기를 느낍니다
감사의 맘 전합니다
2007-08-30
08:19:45
 
 
 
한병인
파초도 보이고
기둥을 보와서는 한가닥 했을 법한 기운이 도는데요
소나무 껍질을 보니 배만들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여름방학 숙제로 요리깍고 저리깍고 배를 만들곤 하였는데
보기 좋습니다.
2007-08-30
08:24:57
 
 
 
명경헌
김선생님 덕분에 일생에 만나기 힘든 요월정을 소개받아서 매우 감사 드립니다.
배롱이의 개체수로는 아마도 전국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
거기에 육송의 빼어난 기개가 어우러지니 과연 광산 김씨들이 조선제일(?)이라 칭한 연유를 알겠습니다.
말벌에 봉침 쐬신 첨산대사께서 김선생 뒤를 절대(?) 따르지 말라 하셨지만...
이만한 경관이면 봉침이 두려우리... ㅎㅎㅎ


 
2007-08-30
11:51:09
 
 
 

 

류재원
김환기님의 눈으로 보니 더 멋있습니다.
소쇄원에서 보름달을 고목위로 보고 시인의 시낭송도 듣고 요월정에 들렀을때는 보름달밤에 소나무숲을 거닐었고
두번째도 제일 먼저 요월정을 들러서 애일당으로 갔었는데...
좋습니다.
발써 귀뚜라미가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지요?
이번비로 늘더위는 물러가고 가을이 코앞에 왔습니다.
다음엔 희뫼요쪽으로 한번 가 볼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2007-09-01
1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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