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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전주 인근 사찰 순례 / 극락암,일출암,위봉사,송광사,봉서사

2007-08-24 19:55

 

 

 전주 아중역 뒷편 극락암 오름길에서

 

 

 

운무를 헤친 햇살의 쏟아짐.

 

 전주시 문화재 자료 제 157호 목조여래좌상을 소유한 극락암

무형문화재 제 18호 이강선이 머물고 있다고....
이강선은 1933년에 전주에서 태어나, 강보담·이길남 스님에게서 봉서사 작법을 배웠다.

1988년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봉서사 작법의 전승과 발전에 노력하였다.

작법은 불교의식에 쓰이는 춤으로, 나비춤·바라춤·법고춤 등으로 분류된다.

전북의 작법 역시 범패와 마찬가지로 전라도의 음악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서울의 것과는 다르다.

봉서사 작법은 춤사위가 다양하고 예술적인 바라춤과 발동작이 거의 없어,

춤사위가 보수적인 법고춤인 것이 특징이다.

*영산작법 (전북무형문화재 제18호)
: 석가가 영취산에서 행한 설법회상인 영산회상을 오늘날에 재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 천도의례 중 대표적인 제사로 일명 ‘영산작법’이라고도 한다.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 이미 행해지고 있었다.
영산재는 제단이 만들어지는 곳을 상징화하기 위해 야외에 영산회상도를 내다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신앙의 대상을 절 밖에서 모셔오는 행렬의식을 하는데, 이때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해금, 북, 장구, 거문고 등의 각종 악기가 연주되고, 바라춤ㆍ나비춤ㆍ법고춤 등을 춘다.

신앙의 대상을 옮긴 후에는 여러 가지 예를 갖추어 소망을 기원하며 영혼에게 제사를 지낸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대상을 돌려보내는 봉송의례를 하는데 제단이 세워진 곳에서

모든 대중이 열을 지어 돌면서 독경 등을 행한다. 예전에는 사흘 낮과 밤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근래에는 규모가 축소되어 하루동안 이루어진다.
영산재는 전통문화의 하나로,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 부처님의 참진리를 깨달아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하고 공연이 아닌

 대중이 참여하는 장엄한 불교의식으로서 가치가 있다.

- 자료 인용 -

 

 

 

눅눅하고 모기때가 엄청 달려드는 극락암, 이곳저곳 등산로를 찾아보니 맨 오른쪽 행량채 인듯한 건물옆으로 오름길이 나 있었습니다. 아마, 전주 인근 지맥 이어가기 코스에 들어있을 거라는 판단입니다.

 

 일출암

전주시 아중역 굴다리를 나와 아중저수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동쪽 방향으로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웬수네미에서 재전마을에 이르는 지역을 대개 왜망실 또는 왜막실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일출암은 바로 그 곳을 지나 구불대는 산길을 한참동안 올라야 한다.

지금 내가 일출암을 찾아가는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얼마전 나주 덕룡산 자락의 동원사를 찾아갔을 때 단소의 명인이자 다선일여의 세계를 일구고 계신

덕현 스님으로부터 전주 아중리 인근의 일출암에 관한 애기가 나왔었고

진묵대사와 지명에 얽힌 재미난 애길 들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초의 선사가 쓴 "진묵조사유적고"에 의하면 진묵대사는 전주의 왜막실에서 노모를 봉양하면서

그 마을 뒤에 있는 일출암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괴로워하자

 대사께서 산신령에게 고하여 모기떼를 다 쫓아버렸다는 것.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이 마을은 모기떼로 인한 괴로움이 없었다고......

 



절 입구에서..

진묵의 효성에 감동했는지 산신령께서 모기를 모조리 없애버렸다는 왜망실.....
허나,이제 세월이 흘러 진묵대사의 약발이 떨어졌음인가? 모기때가 엄청 설쳐대는 가운데 일출암에 당도 합니다.

 

 

 

스님네 공부방과 앞에 놓여진 편액들

 

 

이런 저런 편액과 전각을 위한 판재 들이 쌓여 있는모습을 보니 전각을 하시는 분이 이 절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진묵대사의 글씨로 전해져오는 일출암 편액.

물론 후대에 모각할 수도 있고 낙관이 없어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필획이 힘차고 선필의 기운이 감도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가운데 글자인 출(出)자 마지막 획 부분이 일반 유가들이 사용하는 필법이 아니며

무위자연에서 체득한 기운생동함을 느낄 수 있어 몹시 특징적이다.

이 편액은 일출암 석인스님이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진묵대사는 족적을 남기기 싫어했기 때문에 전혀 전하는 것이 없다.

허나 이 편액만은 일출암에 주석하면서 조그많게 쓴 편액이 아닐까 하고 추정해보기도 한다.

- 자료인용-

 

 

전주 일출암 석인스님은 서화와 불화로 일가를 이루고 있다.
스님은 표현주의적 산수를 하지 않으며 수목화가나 문인화가들이 주로 하는 사군자도 손을 대지 않는다.

오로지 필력 하나로 형상을 떠나 비형상의 상을 구사하며 그림을 그린다.

 때문에 스님의 그림이 표현하는 선은 탁월한 서예를 하듯이 그려진다.

- 자료인용 -

 

 

서예의 대가인 일타스님의 제자로 선화, 불화에 그치지 않고

 모든 여래인의 세계인 화엄의 정신세계에서 이룩된 보신불의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수묵화, 달마선화, 불화를 넘나들며 화엄정신을 담은 보신불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_ 자료인용 -

 

 

스님은 78년 대승사 출가 이후 국내 불교계의 내로라하는 큰스님 밑에서 공부했다. 일타는 물론 구산과 서옹, 진제, 송담스님이 모두 스님의 은사들이다.

- 자료인용 -

 

 

 

 

 

 

왜, 일출암이라는지 마당에 서면 그냥 알 수 있습니다.
명암을 달리하면서 중첩된 산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은 장관일듯.....

허지만 오늘은 운무가 자욱한 가운데
햇살만이 쏟아집니다.

 

 

마당 앞 햇살을 받는 복숭아 나무, 줄기와 가지의 구부러짐이 가히 예술이었습니다.

 

 

 

 

석인 스님은 여러번에 걸친 전시회도 연 바 있다고...

 

 

분명, 밖에 객이 와 있음을 알텐데도 끝내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일출암 하경

 

 

일출암이라는 편액에 답을 주는 햇살

 

 

 

위봉산성: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규 모: 둘레 약 16㎞. 전북기념물 제17호

송광사에서 동북쪽으로 3Km쯤 가면 원래 외성이라 했다는 오성마을이 나오고 여기서 추줄 산을 돌고 돌아 1.5Km쯤 오르면 위봉산성의 서문에 다다른다.  다행인 것은 문위에 있었다는 3칸의 문주는 자취를 감췄지만 높이 3m 폭 3m의 홍예석문이 지방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점이다.이 산성은 1675년 7년의 세월동안 인근 7개 군민 을 동원하여 쌓은 것으로 국토방위라는 목적보다는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었지만 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태조영정을 피난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결국 동학농민혁명 때 태 종 영정을 이곳으로 피난, 산성축조의 목적을 달성한 바 있다. 당초의 성규모는 길이16Km 높이 4∼5m 폭 3m 의 석축이었고 3개소의 성문과 8개의 암문이 이었다 한다. 지금은 극히 일부의 성벽과 동서북문 중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주촬산 위봉사 -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위봉마을

위봉산성에서 지척지간에 옛날 52개의 말사를 거느린 호남의 모사(母寺) 위봉사가 있다.
전주 동북방 26Km지점인 이곳 추줄산에 위치한 위봉사는 604년(백제 무왕 5년)서암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며 1359년(고려 공민왕 8년) 나옹화상이 중창했다.현재의 건물들은 조 선시대 건물이며 조서조 세조 때 포호대사가 쓴 보과영전현판기를 보면 당시 규모가 전각 28동에 암자가 10동에 달한다고 되어있는데 지금은 보물 제608호인 보광명전과 지방 문화 재 제698호인 요사와 삼성각만이 남아있고 백의관음보살 벽화가 자랑거리이다. 현재는 조 계종 비구니의 수련장으로 확대, 중창되고 있다.


 

 

봉황이 깃든 곳에 자리한 비구니 수행도량 위봉사(威鳳寺)

위봉사는 고려후기의 불교를 이끌어간 나옹(懶翁) 스님이 머무르며 거찰의 면모를 일구어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유사시에 왕실의 영정을 보관하고자 사찰 주위에 위봉산성을 축조하였던 17세기에는 성곽 수호의 임무까지 띄게 되어, 동학 농민혁명 당시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던 태조의 영정을 이곳으로 피난시켜 수호하기도 했으니 그 위세는 대단하였을 것이다.
근세 초까지 이 지역을 대표하는 큰 사찰로서, 1911년 조선총독부가 모든 사찰을 30본말사로 구획할 때 위봉사는 전북 일원의 50여 사찰을 관할하는 본사(本寺)의 위상을 갖추고 있을 정도였다. 또한 명강사와 무수히 많은 인재를 배출해온 강원(講院)으로서 사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으면서 퇴락하였다가 1988년 주지 법중(法中) 스님의 원력으로 10여 간의 대정비에 매진함으로써 오늘날 전북을 대표하는 비구니 선원으로 일신하였다. 현재 50여 명의 비구니 스님이 수행하며 포교의 전당으로 도량을 일구어가고 있다고.


 

 

주춧돌에 위봉사를 새기고 鳳자 자리에 기둥을 세웠네요.

 

 

# 위봉사의 창건배경과 역사

위봉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먼저 1799년 전국의 사찰에 대해 기록한 『범우고(梵宇攷)』에는 고려 초에 최용갑(崔龍甲)이라는 인물이 처음 암자를 세운 뒤 나옹스님이 중창한 것이라 하였다. 수록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봉사는'圍鳳寺'라고도 한다. 속전에 의하면 산의 형세가 사방이 둘러싸여 있고, 처음 창건할 때 마침 봉황새의 이적(異蹟)이 있었기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 초 전주의 최용갑(崔龍甲)이 명산을 유람하다가 이 터를 얻고 처음 암자를 건립하였다. 이후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곳을 지나다가 지형의 아름다움에 탄복하였으며, 석잠(釋岑) 스님이 구조를 고쳤다가 승숭(僧崇) 스님이 큰 사찰로 만들었다. 산내에는 북암(北唵)ㆍ달마암(撻摩唵)ㆍ승가암(僧伽唵)ㆍ익수암(益水唵)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정년간(至正年間, 1341~1367)에 창건된 것들이다.
그러나 현재 사찰 내에 남아 있는 「극락전중건기(極樂殿重建記)」에 의하면, 신라 말에 최용각(崔龍角)이라는 사람이 산천을 섭렵하다가 3마리의 봉황이 날아든 흔적을 발견하고 이곳에 절을 지어 위봉사라 칭했다고 한다.
- 옮긴 글 -

 

 

창건에 관한 또 한 가지 설은 신라시대인 604년(진평왕 26) 서암(瑞巖) 스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기록이다.
창건에 관한 설이 분분한 가운데 늦어도 고려 초에는 위봉사가 창건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후 1359년(공민왕 8)에 나옹스님이 대규모로 중창하여 전사(殿舍)가 28채, 외암(外唵)이 10여 개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이미 고려 말부터 거찰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는데, 현재 보광명전 앞에 있는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이 무렵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나옹스님은 고려 후기 불교를 이끌어간 위대한 고승으로, 이러한 위상 때문인지

추줄산위봉사사적사병서(崷崒山威寺事蹟詞幷序)」에는 나옹을 창건주라 기록하였다.

무경자수(無竟子秀) 스님이 지은 『무경집(無竟集)』에 수록된 이 병서(幷序) 역시 절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인데,

이상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위봉사와 나옹화상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ꡐ최용갑' 또는ꡐ최용각ꡑ이라고 표기되는 인물은 위봉사 창건시기의 시주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뒤 최용각의 후손인 최흥남(崔興男)이 1466년(세조 12) 진도군수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선조의 유적을 살펴보러 위봉사에 들렀다가, 선석(善釋)ㆍ석잠(釋岑) 대사로 하여금 절을 중수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위봉사는 14ㆍ15세기의 두 번에 걸쳐 중창 및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675년(숙종 1년)에 전주부윤(全州府尹) 권대재(權大載)이 사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위봉산성(威鳳山城)이 축조하고,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되어 있는 이태조(李太祖)의 영정을 유사시에 이안하기 위한 6칸 규모의 행궁(行宮)과

다른 부속건물 등을 산성 내에 설립하였다. 이때 성밖의 태조암(太祖庵)도 함께 설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처럼 태조의 영정을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위봉산성을 축조한 것은 17세기 이후 위봉사의 성격이

성곽 수호의 임무도 띄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17세의 사찰기록을 살펴보면 보광명전 암막새에 새겨진 명문(銘文)이 전하여 1673년(현종 14)에 번와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1675년(숙종 1)에 동종(銅鐘)이 조성되고 1687년(숙종 13)의 벽허당대사(碧虛堂大師)의 부도 등이 세워졌다.

1838년(헌종 4)에 보광명전을 중수하였고, 1868년(고종 5)에 포련대사(布蓮大師)가 60여 칸에 이르는 불전을 중수하여

가장 큰 규모의 중수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때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는 전반적인 중수와 함께,

건물에 수장될 대부분의 성보(聖寶)도 함께 조성ㆍ봉안되었다.

19세기에 60여 칸의 위용을 자랑하던 위봉사는 20세기 초반까지도 그 명성이 이어져,

 1911년 조선총독부의 30본말사법 제정에 따라 본산의 하나로 지정되면서 전북 일원의 50여 사찰을 관할하기도 했으나,

광복 후 6.25를 거치면서 급속히 퇴락하였다.
그러나 폐사 직전이던 위봉사는 1988년 법중(法中)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10년에 걸친 대불사를 시작하여,

보광명전ㆍ관음전을 보수하고 10여 동 100여 칸의 건물에 60여 명의 대중이 머무는 옛 대찰의 면모를 회복하였다.

- 옮긴 글 -

 

 

비구니 사찰이어서인지 보살님들이 많이 와서 절 살림을 거들고 있는 모습

 

 

완주 송광사를 찾았습니다.

 

 

목불 장승의 표정.

 

 

 

 

폭염 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어난 홍련

 

 

송광사 당간

송광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에 위치한 천년 고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

(867년)에 구산선문의 개산조인 보조체징선사 가 개창하였다.

원래의 사명은 백련사였으며, 현재의 일주문이 3km밖 나들이라는 곳에 서 있던 대찰이었으나,

역사의 변천속에 거의 폐찰이 된 것을 순천 송광사의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중창을 발원하신 후

 현재의 도량 전각들은 1600년대 보조 지눌국사의 법손들이 대 대적인 불사를 추진한 것이다.

특히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세자를 청나 라에 볼모로 보낸 인조대왕이

두 왕세자의 무사환국과 국란의 아픔을 부처님의 가호로써 치유하고자 대대적으로 중창한 인조대왕의 호국원찰이다.

이렇듯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호국원찰이어서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대웅전, 나한전, 지장전의 불상이

많 은 땀과 눈물을 흘리곤 한다. 특히 대웅전의 불상은 KAL기 폭파사건, 12.12사건, 군산 훼 리호 침몰사건,

강릉 잠수함 출몰, 그리고 97년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엄청난 양의 땀과 눈물을 흘려 I.M.F한파를 예견하였다고 한다.

 

 

비천신도무

송광사 대웅전 천정의 비천도 모사품


 

 

전국 4대 지당기도량답게 최대 크기의 지장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나한 전의 석가여래와 500의 나한상은 대웅전과 함께 많은 이들의 참배처가 되고 있으며

평지가 람으로 노약자가 편히 올수가 있으며, 대형버스 30대가 주차할 수 있는대형주차장과

식당 이 준비되어 있고, 봄철 송광사 벚꽃 터널의 아름다움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대웅전, 삼세불상, 아(亞)자형 종각, 사천왕상 등 4점의 보물 문화재와 8점의 유형 문화 재 등

역사의 숨결을 느낄수 있는 사찰이다. * 유물 1) 금강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2)

목조삼전패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3) 소조삼불상 및 복장유물 보물 제 1274 호

4) 명부전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68호 * 주요문화재

1) 대웅전 (보물 제 1243호) 1620년대 건축, 1857년 1층으로 개창 천정의 주악비천도 11점이 특이

2) 소조 3세불상 (보물 제 1274호) 국내 최대 실내소조 좌불상 :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 여래의 삼불 진묵대사 점안 (나라에 큰 일이 있을때 땀 흘림)

3) 십자각 (보물 제 1244호) 국내 유일의 아(亞)자형 지붕 종각 4) 사천왕상 (보물 제 1255호)

소조상으로 국내 최고의 조형미 구비

 

 

송광사는 종남산 아래에 자리한 사찰로, 867년 신라 경문왕(景文王) 7년에
보조 체징선사(804~880)가 세웠습니다.
도의선사께서 당에 가시어 마조도일의 문하인 서당 지장(735~814) 선사에게 선법을 처음 전해 받고
설악산 진전사에서 수행하시면서 제자인 염거화상에게 법을 전하였고,
염거화상은 다시 체징에게 전법하였는데, 송광사는 바로 이 체징선사에 의하여 창건된 선찰입니다.

염거화상에게 법을 전해 받은 체징은 그후 당에 가서 법을 구하였으나, 더 구할 법이 없음을 알고
그대로 귀국하여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를 창건하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을 개산하신 개산조이시기도 합니다.
송광사의 당시 이름은 백련사(白蓮寺)였는데,
규모가 얼마나 컷었는지 일주문 대웅전과의 거리가 3㎞나 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 임진왜란 때 황폐해 폐찰이 되었다가 1
622년(광해군 14)부터 승려 응호·운쟁·덕림·득정·홍신 등이 다시 세우기 시작해
14년 만인 1636년(인조 14)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전주부 송광사 개창지비(사적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부터 절 이름도 송광사로 바꾸어 불렀는데,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승보사찰 송광사와 한자(漢字)까지 같습니다.



 

 

세심정에 내 걸린 그림 들..

 

 상전벽해(桑田碧海),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이 있다.

최근의 완주 종남산 송광사(松廣寺)를 보면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도 없을 듯 싶다.

지난 5년, 하루도 쉬지 않고 변화를 모색한 송광사의 모습은 요즘 말 그대로 괄목상대(刮目相對)다.
쇠락한 대웅전과 전각 몇 채만이 남아 황량하기까지 했던 송광사의 옛 모습은

2001년 포교원장 도영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후

계속되는 불사로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고풍스러우면서 기품 있는 도량으로 달라졌다.

처음 송광사에 왔을 때 대웅전은 쇠락했고 가람배치는 엉망이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불상들도 여기저기 금이 가고 말이 아니었어요.

송광사 주지로 부임하자마자 포교원장 소임을 맡는 바람에 욕심껏 불사를 하진 못했지만,

요즘 찾는 사람들마다 절이 고와졌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주지 부임 당시 송광사의 모습은 참담했다. 마당에 흙이 쌓여 대웅전의 상당부분이 파묻혀 있었고,

보물인 소조삼존불의 복장은 도굴 당하고 몸체는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또 가람은 후대에 수리를 거듭한 탓인지 요사와 전각들의 가람배치도 엉망이었다.

2001년 드디어 불사가 시작됐다. 전각들과 불상들을 보수하고, 가람을 다시 배치하는 대역사였다.

스님은 먼저 대웅전 주변의 흙을 70cm이상 걷어냈다. 덕분에 대웅전이 하늘로 우뚝 솟아

원래의 웅장했던 옛 기품을 되찾았다.

 

2003년에는 대웅전 전체를 해체 보수한데 이어 보물인 삼존불 또한 말끔하게 복원해

송광사의 얼굴에 대한 불사를 마무리했다.

이후에는 가람을 새로 배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요사와 식당채를 증축해 스님들의 단독 공간을 마련하고

흩어져 있던 관음전, 지장전 등을 모아 대웅전과 함께 ‘ㅁ’자로 배치해, 아름다운 도량의 모습을 복원했다.

또 벌이 서식할 만큼 훼손이 심한 사천왕을 보수하고 금강역사 가운데 3분을 새롭게 조성해,

오는 가을 점안식을 준비 중이다.

“대웅전 주변 땅을 파는데 얼마나 많은 돌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중간에 포기할까 몇 번이나 망설였던 기억도 있습니다.”

스님의 손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갈라지고 부서진 지장전의 시왕 32위를 깔끔히 보수했고,

일주문 옆에는 40여 평의 정갈한 백련다실을 조성, 불자들의 문화 공간으로 개방했다.

또 경내에 법구경의 글귀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세심정(洗心亭)이라는

고풍스런 이름의 정자를 지어 불자들의 쉼터로 제공하고 있다.

 새로 조성된 연 밭의, 백련의 향연도 송광사의 품위를 더욱 높이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남은 불사가 아직도 많아요. 나한전을 새로 지어야 하고,

한지의 본향이라는 송광사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한지 체험실도 마련할 생각입니다.

작설차를 재배하고 직접 차를 만들어 보는 경관농업도 계획 중에 있지요”

님은 최근 절 주변 땅 2000여평을 새롭게 매입했다. 백련 밭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송광사의 옛 이름이 백련사(白蓮社)였다는 역사적인 기록을 감안하면

스님의 의중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승보 사찰인 전남 순천 송광사와 한자까지 같은 완주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867)에 조계종 종조인 도의 선사에 의해 창건됐다.

원래 이름은 백련사(白蓮社)였는데, 지금의 일주문이 창건 당시에는 3km밖에 있을 만큼 대가람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폐찰이 됐다가 인조 14년(1636년)에 다시 재건됐다고 한다. 063)243-8091

완주=김형규 기자 법보신문

 

 

송광사에는 특이한 문화재가 많은데,
대웅전(보물 1243),
종루(보물 1244),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보물 1255),
소조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1274),
일주문(전북유형문화재 4),
사적비(전북유형문화재 5),
동종(銅鐘:전북유형문화재 138),
나한전(전북유형문화재 172),
금강문(전북유형문화재 173),
벽암당부도(碧巖堂浮屠:전북문화재자료 144) 등이 있습니다.

 

 

 

경내에 서 있는 맘껏 굽은 소나무

 

 애고 무셔워라.........!

 

 

부처꽃과 부처상

 

 

 

 

 

 

 

어린 진묵이 어머니에게 부탁해 스스로 입산한 절, 봉서사(전주시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서방산 깊고 깊은 골짜기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다. 봉서사를 품고 있는 서방산(617m)은 운장산에서 금남정맥과 갈라진 산줄기가 서쪽으로 치달리다 호남평야 끝자락에 우뚝 멈춰 서서 솟아오른 산이다.
풍수가들은 봉서사 터를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보고 있다. 봉황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솟아오른 봉우리 한가운데 봉서사가 자리했고, 그 봉우리를 중심으로 연봉들이 휘감아 도는데 어느 하나 모난 곳 없이 모두 부드럽게 펼쳐져 있다.
신라시대 해철 국사가 창건한 봉서사는 보조 국사, 진감 선사, 보우 선사, 나옹 화상 등의 대덕 고승들이 잠시 머물던 수도터로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걸출한 고승 진묵 조사를 배출한 뒤로는 수행자들이 수없이 몰려들어 열두 암자를 거느리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 때 빨치산의 은신처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경찰에 의해 봉서사는 물론이고 주변 암자까지 모두 불에 타 폐사가 되었고 스님들 또한 서방산을 떠났다. 그 뒤로 호산 스님이 들어와 대웅전, 요사채 등을 새롭게 지었다


 

 진묵당 부도 앞에 늘어선 그렇고 그런(?) 고승들의 흔적

진묵대사 부도는 매년 조금씩 자라나는 이적을 보인다는데...........

잔뜩 기대하고 찾아간 봉서사는 한 마디로 전혀 아니올시다 였다.
유치찬란한 석물들이 가득 늘어선 모습에다 시주자의 이름 석자가 새겨진 돌덩어리까지 합세하고 있는 모습은

서글프기까지 했고 부도 앞에 불전함까지 놓고 순례자의 주머니를 터는 행위도 여간 괘씸 해 보이지 않았다.

 

극락을 거쳐 환생했을 진묵이 저 꼬락서니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를 생각하니 등에 식은 땀이 ......

 

 

시도유형문화재
제108호 (완주군)
진묵대사부도(震默大師浮屠)

이 부도는 봉서사내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승려인 진묵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진묵대사는 이 절을 새단장한 후 이곳에 머물며 수행하다 일생을 마쳤다.
탑은 기단(基壇) 위로 둥근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대부분의 부재가 8각을 이루고 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대칭되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서로 맞닿는 곳에 각각 연꽃을 굵게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아래·윗면이 약간 눌린 둥근 모습으로, 그 위로 뭉뚝한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꼭대기에는 앙화(仰花;솟은 연꽃무늬 장식),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 장식),

보주(寶珠;꽃봉오리 모양 장식)를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각 부분의 양식과 장식이 형식적으로 흐르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부도이다

 

 

 

 

 

 

 

 









2007, 8, 23 목요일

애당초 전북 완주의 종남산과 서방산을 오르겠노라 찾아 갔건만

도저히 작열하는 태양과 맞설 자신이 없어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바로 인근 산자락에 자리 잡은 사찰 순례.
전주 근교 사찰치고 진묵을 팔고(?)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별 행적도 남아있지 않은 진묵대사의 유력은

대단하다 못해 현재 진행형 이라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맨 처음 찾아간 극락암,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산너머의 일출암에 이르기까지 웬 모기는 그리도 많은지?
효심 지극한 진묵이 모기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위해 산신령께 협조를 구해 몽땅 모기를 없앴다는 

외망실 이라는 지명에 얽히고 설킨 설화가 결코 헛 말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어지간히 모기에 무신경한 나로서도 성가실 정도로 모기가 많음을 느꼈으니 하는 말이다.

나주 덕룡산 자락의 단소 부는 덕현 스님으로부터 지금도 그렇게 모기가 많은지 전화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과연 여전하더라는 소식을 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신 새벽에 찾아간 일출암,  건물에 내걸린 당호가 허명이 아님을 확인 한 게 커다란 소득이라

확실히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일출을 볼 수 있는 기막힌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칼 같은 정적이 흐르는 일출암......
분명 방문자의 인기척을 느끼고 있을 터 인데도 누구하나 방문을 여는 자가 보이지 않음은

참을성이 대단한 경지의 불제자 일 거라는 느낌이었다.

선과 범패 그리고 선화는 결코 불이의 세계가 아님을 경내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는 일출암,

저 아래 왜망실이라는 동네에서 절에 이르는 동안 그 어떤 표지판 하나도 붙여 놓지 않음은
홍보(?)엔 신경 쓰지 않아도  자신 있다는 뜻?

일출암에서의 샹쾌한 아침, 용기를 내어 방부를 드린 후 차 한잔 얻어먹고 내려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비구니 절로 근자에 엄청난 불사를 단행한 완주 위봉사

그리고 봄날 화려한 벚꽃 길로 명성이 자자한 송광사,
그 옛날 비포장 신작로길을 따라 찾아갔던  송광사는 그 어디에도 없고 건물, 석상, 당간, 석등 담장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리모델링을 확실하게 끝내고 뭇 중생들의 소원성취 도량으로 변모했음을 확실하게 각인 시켜주고 있었다.

사실 오늘 가장 큰 기대를 하고, 또한 대미를 장식 해 줄 거라는 믿음아래 찾아간 봉서사.
향토사단의 유격장 시설이 길 양 옆으로 즐비한 숲길의 끝에 온통 파헤쳐지고 뒤집어진 모습으로 불사 중인

태고종 봉서사에 당도하니 황량하다 못해 아예 황당하기까지 하다.

오로지 진묵당 부도를 보기위하여 찾아갔건만 이건 정말 내 눈을 의심할 지경이라......
맨 위쪽, 목 좋은 곳엔 해년마다 살이 쪄 간다는 진묵당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었고

부도 바로 앞엔 돌로 깎아 만든 묵직한 불전함, 불전함 위엔 목탁과 불경까지 돌에 새겨놓았다.

그 옆 상자 안에선 여러 개의 촛불이 타다 넘어져 있는 보기 흉한 모습이고 한 단을 내려서면 다소 좀 오래된

몇 기의 소박한 부도와 함께 근자에 똑 같은 모습으로 제작한 엄청난 크기의 부도가 일 열로 줄을 지어 있었는데......

괜히 못 볼 걸 본 양, 심사가 뒤틀리고 이 불볕더위에 여기까지 찾아온 내가 한없이 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도대체 오늘을 사는 우리네 인간들은 과연 저런 유치한 짓들을 언제나 멈출 수 있단 말인가?

모처럼 작정하고 찾아든 봉서사의 진묵대사 부도 앞에서 알 수 없는 배신감에 치를 떨 수 밖에 없었던 건

과연 나 혼자만의 생각이란 말인가?

대사의 부도가 예술적으로 뛰어나서도 아닐 것이요,
오로지 그의 사상과 행적의 편린을 느껴보고자 찾아올 것인바, 저따위 졸렬한 판을 벌여  놓고

과연 어떻게 요즘의 수준 높은 답사객들의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에
생각이 미치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요즘 어딜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 이런만 앞에서도 애기했지만 똑 같은 형태의 부도를 그것도 한 두기도 아니요

 여러 기를 일 열로 늘어세우는 따위의 유치함은 당장 시정했으면 한다.

불가마 속에 펼친 전주 근교의 사찰 순례..........
비록 산은 오르지 못 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었던 일정이 아니었나  감히 자평 해 본다.





첨단산인
광주전남 주변의 사찰과 문화재를 순례하면서
그곳의 모습을 올리려고 했는데
환기형님께서 전북과 전남의 문화재와 사찰순례를 먼저 하시니
우리의 짐이 덜어지는것 같습니다.
더위에 수고 많이하셨고 애쓰셨습니다.
2007-08-24
21:45:33
 
 
 
명경헌
다선일여의 순례기가 이어 지는군요.
가보지 못하고 명성만 들었던 곳을 리포트해 주시니,
마치 다녀온듯 싶네요.
송광사가 그렇게 변했다니 한번 가보고 싶네요.
더운 여름에 너무 무리한 산행은 조심하시기를...
2007-08-25
09:31:02
 
 
 
류재원
전각작품에 서양화와 동양화의 만남.......
너무 많은곳을 안내해 주셔서 기쁠뿐입니다.
앉아서도 모든곳을 같이 가 볼 수 있다니 아니 김환기님의 눈으로 볼 수 있다니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한여름 무더위에 너무 무리는 마시고 적당히, 알맞게, 속도조절을 하면서 더욱더 많은 일들이 있기를....
오늘 땡볕에 텃밭갔다가 느낀 소감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07-08-25
19:27:56

[삭제]
 
 
 
산아가씨
다음 인연을 생각해서 모기의 안부를 전해야 될 것 같은데요?

류재원님 말씀마따나,
환기님의 사진과 글로 보니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풍요로움이 마음 한가득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사진들 하나 하나에 정성이 가득 깃든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더위에 좋은 글과 사진 올려줘서 고맙습니다.

류재원님!
반갑습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하시고 즐거운 하루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2007-08-26
00:06:27
 
 
 
김환기
권선생님, 늦더위가 보통이 아닙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활기찬 날이 이어지시길 바랍니다,
류선생님, 텃밭이리굽쇼? 이 폭염을 이겨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산은 그늘이 대부분 인지라 조금 낳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다복하시길 바랍니다.
산아가씨님, 불가에서는 다음 인연이 소중한만큼 왜망실의 모기 소식을 덕현스님께 전 해야겠죠?
2007-08-26
07: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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