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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일지암, 북미륵암, 녹우당, 운림산방, 미황사, 백련사

문화재 탐방 / 둘째날

 

 

녹우당 앞의 연지

 

 

조선조 남도 최고의 문화 예술 인문지리가 모여들었던 해남읍 연동리소재 녹우당




 

 

녹우당 앞의 퀴위밭에서

 

 

 

 

-해남윤씨가의 종택인 녹우당에 들어서면 사랑채에 붙은 ‘녹우당(綠雨堂)’이라는 현판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녹우당이라는 한자의 의미를 해석하여 각별하게 그 의미를 부여하고자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 녹우당이라는 당호의 명칭은 공재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옥동 이서가 써준 것으로 녹우당의 뜻을 해석할 때 보통 녹우당 고택 앞에 서있는 고목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녹우당’ 이라 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고택 뒤에 있는 푸른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의 한시나 옛 선비들이 절개나 기상을 표현할 때에 자주 사용하였던 말로 ‘녹우(綠雨)’를 말하는 것을 볼 때 공재와 절친한 사이였던 옥동 이서가 공재의 철학과 학문적 사고에 견주어 ‘녹우당’이라는 당호를 지어주지 않았나 보고 있다. 녹우(綠雨)는 절기로 볼 때 4월 하순 곡우에서부터 신록의 자연에 성장의 동력과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비로 공재의 학문과 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옥동 이서가 이러한 의미를 담아 지어준 것이라는 것이다.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를 놓고 볼 때 예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가장 화려한 문예부흥의 시기가 공재 윤두서가 살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산 윤선도의 비중이 가장 크기는 하지만 공재 윤두서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 낙서 윤덕희, 청고 윤용에 이르기까지 예술 활동과 이 집안의 고문서들이나 작품들이 이때를 중심으로 집대성된 것이다. 지금까지 녹우당에 이처럼 많은 문화유산이 잘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당시에 그동안 내려온 유산들을 잘 정리해둔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옛 양반가에서 사랑채는 사대부들의 학문과 교류, 그리고 시인묵객들이 오가는 예술의 장이 되었지만 그 문화적 영향을 놓고 볼 때 녹우당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재가 추구했던 실학이라는 학문적 영향 말고도 그가 남긴 그림(회화) 세계는 이후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녹우당이 예술과 학문의 공간으로 만들어지게 한 것이다.

공재가 이룩한 당시의 학문과 예술 문화적 성과들은 곧바로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녹우당, 대흥사를 중심으로 머물고 간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원교 이광사, 소치 허유 등 당대의 석학들이 남긴 문화적 중흥은 문예 부흥기를 연상시킨다.

실학의 완성자인 다산 정약용이 실학을 집대성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배경이 있을 수 있지만 남인이라는 정치적 배경과 함께 다산의 외가인 해남윤씨가와의 관계 속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다산의 어머니 윤씨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으며, 공재는 다산의 외증조가 된다. 다산은 정치적으로 남인이었으며 남인과의 교류를 통해 실학이라는 학문을 접할 수 있게 된 배경은 해남윤씨가와의 여러 공통성을 갖게 한다.

공재와 다산은 시기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정치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비슷한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공재의 외손인 다산이 서울에서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공재가를 오가며 받았을 영향과 유배시 해남의 녹우당과 교류를 가졌던 것을 본다면 공재의 다산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다 할 수 없다.

정약용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자주 외갓집에 갔다. 공재는 서울의 중심지인 종현(지금의 종로)에 집이 있었다. 정약용은 어머니를 따라 종현에 있는 외갓집엘 갔으며, 정약용은 일찍이 선대 윤선도의 글과 외증조부 공재 윤두서가 그린 그림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귀한 책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적 화풍이 더욱 뚜렷이 나타나게 된 것은 조선후기(18∼19C)다. 이때는 남종문인화의 영향이 뚜렷한 시기였으나 화풍, 화제에서 조선화풍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또한 김정희가 추사체로 불리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기도 하였다. 추사와 원교 이광사는 학문적으로 실학적 학풍을 계승하고 있고 동국진체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공재 윤두서 집안과의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곳 해남윤씨가 녹우당은 조선후기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로 대표되는 석학들이 이곳 녹우당과 대흥사를 무대로 학문과 예술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현재 녹우당과 대흥사에는 추사와 원교의 글씨가 남아있어 이들과의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정윤섭 기자의 글을 옮김 -

 

 

남종문인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은 녹우당에 와서 공재의 그림을 보며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였고, 추사 김정희의 제가가 되어 남종문인화의 화풍을 완성시켰다는 데에서 많은 연관성을 가질 수 있다.

소치 허유는 초년에 녹우당에서 윤두서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아 그곳에서 윤두서의 화풍을 익혔다. 이 때문인지 현종에게 올린 산수화첩 등 초기 작품에는 윤두서에 계승된 전통화풍의 잔영이 남아있다.

소치는 30대 초반 대흥사의 초의선사에게 소개를 받아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갔고, 1839년 상경하여 본격적으로 서화 수업을 받았다. 소치는 김정희를 통하여 왕공사대부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그가 접촉하였던 인물로는 해남의 우수사 신관호(申觀浩),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丁學淵) 외에 권돈인,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등 당대의 유명인들이었다. 스승인 김정희는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고 할 정도로 소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산수화를 비롯한 소치의 회화는 중국 남종화와 스승인 김정희를 섭렵한 것이지만 독창적인 화법도 개척하였다. 그의 이러한 화법은 만년의 그의 산수화에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같은 그의 회화관으로 인해 그를 남종문인화의 대가로 평가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고 있다.

소치가 공재의 산수화를 묘사하던 수습단계에서 방황자구벽계청장도(倣黃子久碧溪靑장圖),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를 그렸던 초기 추사 문하의 방작들도 뛰어났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후기 고산 윤선도 고택을 중심으로 한 해남의 녹우당은 학문뿐만 아니라 예술의 분야에까지 많은 학자들과 서화가들이 교류를 이어갔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정윤섭 기자의 글을 옮김 -

 

 

사연 많은 미인도

 

 

 

 

개요등

 

 

 

 

녹우당 후원 길

 

 

뒷산 비자림으로 이어지는 길

 

 

후원에서 바라본 모습

 

 

담 밖의 엄청나게 굵은 소나무 표피

 

 

 

 

 

ㅇ 금골산(193M)
ㅇ 위 치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해발 193m에 불과하지만 금골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로 우뚝 솟은 기이한 산이다. 금골산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조각가가 일일이 예술작품을 조각해 놓은 것 같다.

수십 길 절벽에는 층층바위를 이룬 곳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이 있는가 하면 보는 방향에 따라 사람으로 또는 짐승으로 연상케 하는 기암괴석들이 산 전체를 수 놓고 있다.

여기다가 황색, 흑색, 백색, 회색 등 기암마다 색깔을 달리하고 있어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기 그지 없어 예부터 ‘진도의 금강(金剛)’이라고 불리어 오고 있는 곳.

 

 

금골산 해언사 마당에서 바라본 진도 들?

 

 

첨찰산을 배경으로 운무가 래왕하는 운림산방을 보니 영락없는 선계라.....

 

 

운림산방의 핵심이되는 공간은 바로 이 연지에 있을 터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이던 허유(1807∼1890)가 말년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던 화실로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선생은 30대에 대흥사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에게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아 남종화의 대가가 되었다. 특히 헌종(재위 1824∼1849)의 총애를 받아 임금의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으며, 왕실 소장의 고서화를 평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시·서·화에 뛰어나 3절이라고 칭송되었는데, 대표작으로 ‘선면산수도’, ‘완당선생해천일립상’등이 있고 『몽연록』을 저술하였다.

운림산방은 철종 8년(1857)에 귀향하여 지은 것으로 본채와 사랑채인 화실, 신축된 유물보존각 건물과 연못이 있다.

 

 

 

 

임전 작

 

  

 

 

 

 

 

 

 

 

유물 보존각을 배경으로 선 일지매(一枝梅)



운림산방에는 소치가 손수 심어서 가꾸고 사랑하던 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첫째는 일지매(一枝梅)요, 둘째는 백일홍이오, 셋째는 자목련이었다.
이 가운데 일지매는 해남 대흥사(대둔사)의 일지암(一枝庵)에 거주하고 있었던 스승

초의선사가 준 것을소중히 옮겨 운림산방의 동남쪽 뜰에 심었던 것이다.

 

소치는 운림산방 주변의 여러 산봉우리와 계곡 또 마을 등에 그 자신이 지은 고유명사를

붙인 것이 19개소에 달했는데, 그 중 매화천(梅花泉)이란 것이 있다.

이 매화천은 “큰 매화 한 그루를 옮겨 심고 돌 연못에 물을 끌어 가두었다.
푸른 구름이 늘 물에 젖어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의 매화나무는 일지매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이 일지매를 운림산방에 심은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소치가 운림산방을 건립했다는 말을 들은 초의선사가
그 준공에 맞추어서 선물로 준 것이라면 1856년에 심은 것으로 된다.

그리고 이 나무의 수령은 해방이 되던 1945년에 147년이었다고 하니

1856년에 수령 58년의 나무를 심은 것으로 확실시 된다.
이 매화나무의 이름을 왜 ‘일지매’라고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초의선사가 거처했던 곳이 일지암이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매화나무가 일지암의 뜰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혹은 일지암의 주인이 준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운림산방의 일지매는 꽃잎이 10장인 홍매인데,
열매가 보통 매실에 비해 둥글고 맛은 별로 시지 않고 단맛이 났다고 한다.
일지매는 소치와 그 가족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힘차게 뻗어나

 해마다 이른 봄이면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 후 1892년에 소치가 타계한 다음 운림산방은 그의 넷째 아들 허형(許瀅)의

손을 거쳐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관리되었으나 일본 강점기 말기에 이르러

 일지매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여기에는 임순재(任順材)씨와 얽힌 사연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겪었던 불행과 관련된 사연이기도 하다.

임순재의 아버지인 호석(湖石) 임삼현(任三玹)은 16세 때(1889) 소치의 문하에

입문하여 소치의 유언에 따라 소치가 타계한 뒤에도 1914년 41세로 운림산방을

떠날 때까지 26년 간 운림산방을 관리하였다.
임순재도 1911년 운림산방에서 태어나 네 살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일지매가 일본 강점기 말기에
임순재의 정원으로 옮기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김문규라는 사람이 임순재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당시 운림산방을 매입하여 살고 있던 차(車)모씨의 말에 의하면
의신 주재소(지금의 경찰서·파출소)소장이었던 엔토(遠藤)라는 일본사람이 욕심을 내어
이 운림산방에 있던 일지매를 5원을 주고 사서 곧 일본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임순재는 곧 일지매를 캐오기 위해 읍내에서 인부 30여명을 데리고 운림산방을

찾아와 차모 씨에게 주재소 소장이 준 5원의 배인 10원을 인부들 앞에서 건네주고
그날로 일지매를 캐어 자신이 살고 있는 정원에 옮겨놓았다.

그러나 다음날 엔토소장이 찾아와서 “수고했다. 여기다 캐어놓았으니

일본으로 가져가기가 한결 쉽게 되었다”고 하면서
일지매를 곧 가져가겠다고 공갈을 치는 것이었다.

임순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 매화나무는 아버지(임삼현)께서 26년간을 키운 나무다.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계신다. 우리 조선 풍속으로는 팔려간 물건을

되돌려 받으려면 판값의 배를 보상해주면 된다.
당신이 5원을 주었으니까 나는 10원을 주고 다시 되 찾은 것이다.

 

또 운림산방은 건물과 땅만 판 것이지
일지매도 함께 팔았다는 증거나 등기가 있으면 가져와봐라.

매도증서에는 일지매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도로 찾은 것이다”하고 버텼다.
그러나 3일 후에는 곤토(近藤)라는 일본인 경찰서장이 또 찾아와서

 “여기까지 옮기느라 고생했다. 곧 가져가겠다.”하기에

“내가 이 나무 하나를 옮기는데 70원이 들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께서 26년간을 관리하던 나무를 내가 캐온 것이다.

법이 있으면 법에 따라 가져가라”하고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결국 임순재 씨의 일지매에 대한 사랑과 기지,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효도와 애국심이 일본으로의 강제 이식을 막게 되었고,
피신 책으로 임순재 씨의 정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자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일지매는 1995년에 기구한 사연을 안은 채 죽고 말았다.

당시 수령은 187년이었다.

그리하여 그 밑등걸만 지금도 임순재 씨의 집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무서운 탑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일지매를 지켰던 임순재 씨도 2001년에 작고하고 말았다.

치 허유의 화업은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2~1938),

미산의 아들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8~1988),
남농의 장손 허진에 의해 이어져가고 있다.

 

그리고 소치 일가의 본거지인 운림산방은 전라남도 기념물(제51호)로 지정되어
현재는 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제 일지매는 사라지고 없다. 소치가 심었던 백일홍과 목련만이 같이
이곳에 왔던 친구 일지매를 잃은 허전함을 안은 채 자라고 있을 뿐이다.

다만 1982년에 운림산방의 본채와 사랑채를 복원하면서 소치의 손자 남농이
이곳에 심은 홍매화가 일지매를 대신하여 이른 봄이면 고아한 꽃을 피우고 맑은 향기를 퍼뜨린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일지매를 옮겨갔던 임순재 씨의 집 정원에는

일지매의 혈통을 이은 자목이 네 그루나 자라고 있다 한다.

운림산방에서는 이 중 한 그루를 원래 일지매가 있었던 자리에

옮겨 심어 그 대를 잇게 할 계획이라고 한다.


* 이상은 이상희의 글에서 옮겼는데 글중의 옮길 계획이라는 일지매가 바로 사신 속의 저 매화랍니다.

 

 

 

 

임전의 작품

 

 

유물보존각에 전시된 소치의 고매

 

 

남농의 삼송

 

 

 

 

                                                         운림산방과 담을 맞 대고 있는 쌍계사



                    국토의 맨 끝자락 달마산에 자리한 미황사, 둘축대를 거창하게 쌓아올려 누각을 세운 모습

 

 

보물 제947호
미황사대웅전(美黃寺大雄殿)

미황사 사적비(事蹟碑)에 의하면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신라 경덕왕(景德王) 8년(749)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1592)으로 전화(戰禍)를 입은 후 조선 선조(宣祖) 31년(1598) 중창하였으며,

그후 영조 30년(1754)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單層) 팔작집으로 외3출목(外三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의 다포계(多包系) 포작(包作)집이다.

살미첨차(山彌첨遮)의 외부로 뻗은 앙서(仰舌)나 내부에서 판형(板形)으로 장식된

살미첨차들로 보아 조선 중기의 다포건축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중앙에 '범(梵)'자를 선명하게 그렸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기원설로 중국에서 육로를 통해 고구려에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러한 정설외에 남해 해로를 통해 인도에서 바로 국내에 들어왔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그 속설의 기원이 되는 곳이 미황사이기도 하다.

 미황사의 창건설화가 이러한 불교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에 한 석선(石船)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에 와 닿았다고 한다.

 배안에서 천악범패의 소리가 들렸지만 어부들이 가까이 가면 배는 번번히 멀어져 가버려 전혀 살필 수가 없었다.

이에 의조화상이 향도 100인과 함께 목욕제계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안을 살펴보니 노를 잡은 사람은 금으로 만든 형상이었고 그 옆에는 화엄경80권과 법화경 7권 비로자나·문수보살 및

40성중(聖衆), 16나한과 탱화 등이 있고 금환(金環)과 흑석(黑石)이 각 한 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전과 부처님 상을 해안에 내려놓고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그리고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노를 젓던 금인(金人)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 (인도)왕으로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상을 모실 곳을 찾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불(一萬佛)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소에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經)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처음에 누운 자리에 세운 절이 통교사요,

다시 일어나 산을 오르다 마침내 소가 큰 울음을 터뜨리며 누워 일어나지 않았는데,

거기가 바로 지금의 미황사였다.

 

이렇듯 미황사의 '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의미하고

'황'은 노를 젓던 금색 사람 형상을 의미한다.

이후 미황사는 고려말기에 이르러 중국에서 스님들이 찾아올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러차례의 중창을 거쳐 융성하게 사세를 이어오다가 150여년 전 주지 혼허(渾墟) 스님이

중창을 위해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을 당한 뒤에 점차 퇴락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지금도 완도와 청산도사람들은 폭풍이 많을때면 ‘미황사 스님들 군고치듯 한다’ 는 말로 빗대기도 한다.

 

현재 미황사에는 보물 947호인 대웅보전, 보물 1183호인 응진당과 명부전, 삼성각, 선원으로이용되는 만하당,

승방인 달마전,스님들의 공부방인 세심당 ,요사체, 향적전 등이 절마당을 가운데 두고 둥글에 자리잡고 있다.

미황사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은 단연 대웅전이다. 보물 제947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오랜 세월에 씻겨

건물 외부의 단청이 지워지고 나뭇결만 남아있는데, 이 모습이 더욱 소박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 옮겨온 글 -


 

 

 

                                                               미황사 부도암의 부도군

미황사에가서 대웅전과 낙조를 감상하는 것으로 탐방을 마무리 짓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치라.
반드시 부도암에 들러 그 어느 절에서도 보기 어려운 독특한 소재와 소박한 형태로 밀집한 부도밭을 꼭 감상 해 보시길....

 

 

비신을 떠 받친 귀부의 표정이 참으로 예술입니다.
여의주를 입에 물고 절대 뺏기지 않으려는 듯한 엄청나게 험상굿은 표정이 차라리 귀엽기조차 합니다


 

 

강진 만덕산 백련사

 

 

누마루 아래 돌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원교 이광사의 골기어린 서체 대웅보전

이 편액은 액판을 세로 두쪽으로 나누어 걸었는데 공포가 촘촘히 자리잡고 잇는 다포계의 건물인지라

걸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일 것이라 여겨진다,

1760년 소실된 전각을 원담 윤철 등이 중창하면서 마침 근처 신지도에 이배되어 온 이광사의 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용이 꿈틀거리는 노건한 필치가 돋보이는 이 행서는 원교의 회한서린 유배의 한이 담겨있는 듯 하다

 

 

용처 불명의 돌확

 

 

 

 

백련사사적비
(白蓮寺事蹟碑)


보물 제1396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2004년 1월 26일 보물 제1396호로 지정되었다. 백련사에는 여러 기의 석비가 있었으나, 1669년(현종 10) 세워진 조종저(趙宗箸:1631~1690)의 비만 남아 있다. 훼멸된 여러 석비 중 고려시대 최자(崔滋:1188~1260)의 비는 왜란 때 훼손되었다.

조종저가 최자의 글을 따라 다시 각석하려고 각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몹시 불민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 비의 귀부는 그대로 남아 있어, 이 위에 조종저의 비를 세웠다고 한다. 결국 귀부는 고려시대의 것이고, 비신은 조선 시대의 것이다.

비의 크기는 귀부 높이 110cm, 비신 높이 233cm, 비 너비 118cm이다. 비의 외형을 보면 귀부와 탑신, 그리고 이수를 갖추었다. 귀부는 용두의 두 눈이 험상궂게 생겼고, 비신 위에 개석이 놓여 있다. 이수는 용이 반결하는 정사각형의 옥개석이다.

비의 건립 연대는 ‘숭정기원무진후오십4년 신유5월일립’이란 말미의 명문으로 보아 1618년(숙종 7)임을 알 수 있다. 건립 연대가 비록 조선시대이긴 하나 귀부를 안치하고, 이수에서 반결하는 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등 전통기법을 잘 고수하고 있다.

*귀부만 찍었습니다

 

 

 

 

천연기념물 백련사 동백숲에서

동행하신 답사꾼들의 뇌리에 이번 장대비 속의 문화재 탐방이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여정이었길 바랍니다.
























류재원
바쁘신 중에도 사흘이나 시간을 내 주시고 좋은곳을 모두 안내해 주셔서 감사 또 감사!
유홍준 교수의 남도답사를 10여년이 지나서 꿈에도 그리던 많은 곳들을 빗속을 뚫고 다닐 수 있었음은 인연의 무러익음이 아닐런지...
금곡 숲속 미술관의 달덩이 사진이 빠져서 섭섭합니다.
언제 금곡 숲속 미술관 달 항아리 3점을 올려 주시길 바랍니다.
축령산 편백림을 운무 자욱한 날 오픈 카 프레이드로 한바퀴 도는 즐거움도 만끽했답니다.
애일당의 강기욱 선생님. 세심원의 변동해 선생님, 무등산 장원을 일구고 계시는 송문제 선생님, 김환기님, 산 아가씨 모두 감사합니다.
다음엔 경주 산책을 한번 해 봅시다.
비록 보길도는 못갔지만 그래도 남도의 진수는 거의 다 돌아본듯 합니다.
눈을 감으면 우주가 내속에 , 눈을 뜨면 내가 우주속에(다즉일, 일즉다)의 이야기도 좋았고 소쇄원도 자궁속으로 들어가 새사람이 되어 밖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도 좋았고 광풍각이 우주의 센트라는것도 좋았고...
부도답사에 초의 선사의 행적을 따라간 여행에, 다산 선생님의 체취와 고산 선생님의 행적과 소치의 본향까지 그야말로
종합예술 여행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2007-08-15
22:29:14

[삭제]
 
 
 
김환기
류제원 선생님
제가 워낙 부족한 역량인지라 좀 더 세심하게 남도의 진수를 보여드리지 못하여 죄송할 뿐입니다.
모처럼 귀한 시간을 내신 것으로 알기에 좀 욕심을 내 강행군을 하기로 했답니다.
역시 답사의 고수답게 예리한 눈으로 문화의 이면을 들여다 보시는 혜안은 저를 감탄케 합니다.
모든것에 대한 부담을 제가 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여 아쉽기 한량없습니다.
늘 웃음띤 얼굴과 평온함으로 세상을 관조하시는 그 저력도 그저 부럽기만 하답니다.
여러가지로 불편함을 감추시고 즐거워 해 주시니 이 또한 감사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늘 가내ㅣ에 행복이 충만하시길 빕니다.
2007-08-16
16:4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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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산인
참으로 많은 곳을 다녀오셨습니다.
생활이 안정되고 풍요로워 질수록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갈급함과 갈증이 더하는듯 합니다.
우리의 것 우리의 문화와 예술이 들어온지 갓 100여년 정도밖에 되지않은
천박한 **문화에 비기리까?
외국것 이라면 사족을 빼두고 좋아하는 천박한 사대주의적 흐름에
우리문화찾기에 전도사이신류제원님 같은 분이 계시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합니다.
2007-08-16
23:33:10
 
 
 
산아가씨
류재원님,
안녕하세요?
휴가 잘 보내고 계신가요?
이번 답사때도 같이 동행하여 좋은 경험을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래도 그 중 가장 으뜸인 것은
류재원님의 변함없는 平靜心, 信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대부분 우리네 한 쪽 마음에는 이리 저리 흔들리는 바람선이 차지하고 있어 가끔
마음을 어둡게 하고 흐트러지게 하는데...
타고난 품성이 그러하면 쉼없이 마음을 닦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천에 옮긴다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류재원님은 어쩜 그렇게 한결같으세요?
이미 벌써 득도 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막바지 무더위에 건강하게 잘 보내세요.
여러 좋은 분들과의 인연복,고맙습니다.
2007-08-17
15:58:52
 
 
 
MT사랑
장중한 설명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집니다.
작년 11월 홀로 두륜산 중턱에 있는
초의선사가 거쳐 했던 일지암에 다녀온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배우고, 느끼며...수고하셨습니다.
2007-08-17
22:02:04
 

 

 

 

 

 

 

 

 

 

2007-08-14 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