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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문화재 탐방 / 첫날 (월남사지, 무위사, 대흥사)

2007-08-14 17:01

 

 

풀치재를 넘어 월출산 경포대 아랫 자락에 위치한 월남사지를 찾아가면 준수한 백제계 양식의 석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석탑 바로 뒤편. 아마도 예전에 대웅전이 있었음직한 자리에 위치한 개인 집을 누군가 인수하여 사찰로 바꾸어 놓았더군요

 

 

월남사지삼층석탑(月南寺址三層石塔)
보물 제298호
소재지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54


이 석탑은 호남지방< 湖南地方 >에서는 규모로 보나 양식으로 보나 매우 중요한 모전탑< 模塼塔 >의 일례이다.

단층기단< 單層基壇 > 위의 삼층탑< 三層塔 >으로 기단 구조에서부터 전탑< 塼塔 >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기단에서 탑신부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작은 석재로 각부를 구성하고 있는 점이다.

특히 석탑의 옥개< 屋蓋 > 형식이 부여< 扶餘 >의 정림사지< 定林寺址 > 석탑< 石塔 >의 옥개받침 형식을 연상하게

하는 형식이며 추녀는 매우 넓고 상하 수평으로 나가다가 우각< 隅角 >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 反轉 >을 하고 있다.

전체 형식이 모전탑< 模塼塔 >이면서 석재결구< 石材結構 >에 있어 다분히 백제탑< 百濟塔 >의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특히 옥개< 屋蓋 > 이면< 裏面 >의 수법이 탑신 위에 '소로형< 小累形 >'의 1석이 첨가되어 정림사지탑< 定林寺址塔 >과 흡사하다.

따라서 전탑< 塼塔 >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백제탑< 百濟塔 > 양식을 전승한 양식으로 이 지역에서 백제계 모방품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모전탑< 模塼塔 >이다. 조성년대는 고려시대< 高麗時代 >로 본다.


탑에대한 전문 설명은 문화재청 자료에서 옮겨옴 -

 

 

경포대에서 산자락에 조성된 다원을 거치면 월출산 자락에 고즈넉히 자리한 무위사에 이르게됩니다.

 

 

너무나들 상찬 해 마지않는 무위사 극락전, 지극히 안정감을 주는 맞배지붕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국보 제13호
소재지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무위사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극락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공포는 간결하면서 아름다운 조각의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을 완성하였을 때 한 노인이 찾아와 49일간 안을 들여다 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안으로 들어간 뒤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49일이 되던 날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몰래 들여다 보자,

그 안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그림을 그리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균형있는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는 뛰어난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 문화재청 전문 자료에서 옮김 -



 

 

 

 극락전 앞의 당간

 

 

귀부를 가까이....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 (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소재지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274 무위사


이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 문화재청 자료 인용 _

 

 

정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극락전 측면의 면 분할







무위사 삼층석탑 [無爲寺三層石塔]
전남문화재자료 제76호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무위사의 선각대사 편광탑비(946년) 바로 앞에 있다. 조성연대는 탑비와 같은 시대인 고려 초기로 추측된다.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되고 균제된 석탑이다.

지대석은 수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였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의 중석이 연결되어 있다. 각구를 2구로 나누어 중앙에는 탱주 1주와, 양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모각하였다. 모서리 기둥과 탱주 사이에는 안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하대 갑석은 3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어 있다. 하면에 엷은 1단의 부연(附椽)을 각출하고, 상면도 역시 1단 각형 괴임대를 조각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상층 기단중석은 4매 판석으로 각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정연하다. 동서면에 벽판석이고, 남북면에는 2매 판석으로 결구하였다. 각면에 새겨진 면상은 그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볍게 반전되었다. 처마의 하면은 수평이며, 층급받침은 각층 4단이다. 지붕돌 상면의 중앙에서는 1단의 각형 괴임을 각출하여 상층의 몸체를 받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복발·구륜·보주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2∼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되었다. 3층 지붕돌과 1층 지붕돌 일부에서 약간의 파손을 입었을 뿐이다. 그 외의 부재에서는 완전한 상태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충실히 고수하고 있다.



- 문화재청 자료 인용 -

 

 

완당 김정희의 서체
현판 글씨를 비롯 각종 서체의 경연장을 방불케 하는 곳이 대흥사 랍니다.

 

 

 

대흥사 대웅보전, 원교 이광사의 서체
추사의 제주도 유배길에 떼어져 내려졌다가 해배 후 다시 내 걸리게된 기막힌 사연의 현판이다.
여기서 잠깐, 원교 이광사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원교가 51세가 되던 해에 소론의 윤지 등이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역모를 꾸미면서 나주괘서사건이란 일을 일으켰다.

원교도 이에 연루되어 의금부로 끌여가서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밤새 남편의 안위를 몰라 안절부절하던 아내에게 원교가 취조 중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들보에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원교는 그의 재주와 학문이 아깝다하여 목숨만은 살려주어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을 갔다.

유배지로 가는 길에서 아내의 죽음을 전해 듣고 원교는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
유배지에서 쓴 그의 시에는 피를 토할 듯한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죽어서 뼈가 삭아 재가 되고 살아서는 백 번의 윤회를 거듭할 때까지 한은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수미산이 개미집처럼 작아지고 황하가 물방울처럼 가늘어지고, 천지가 뒤바뀌어 태초가 되도록 ...,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단단해지리라고 하였다. 토해내면 대천세계에 가득 채울 만큼 한이 크다.

 내 한이 이럴진데 그대 한도 또한 그럴 것이다 라면서 언제가 반드시 만날 인연이 있으리라 하였다.”
뼛속까지 사무친 한이 넘쳐나고 아내를 그리는 심정이 수미산 만큼이나 크게 느껴진다.
원교는 이렇게 큰 회한을 가슴에 품고 함경도 부령에서 호남의 진도를 거쳐

신지도에서 23년간의 유배생활을 끝내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유배생활 동안에 그는 예술 혼을 불태우면서 동국진체를 완성 하였다고한다.

그의 서체를 보면 모든 군더더기를 털어내 버리고 무심만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한과 분노를 모조리 붓끝에 삭여내어 청정한 경지를 이루었다는 애기다.

-자료 일부 인용-

 

 

대흥사응진전전삼층석탑 (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

보물 제320호


대흥사 응진전 앞에 서있는 탑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형성한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아래·윗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자료 인용-

 

 

반원을 그리는 문턱

* 여기까지가 첫 날(8월12일 일요일)의 여정


 

 

해남 읍내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 일찍 두륜산을 올라 일지암을 찾아갔습니다.

 

 

여연 스님이 팽주로 자리 해야 할 누마루는 적막하기만 하고

 

 

누마루 구석에 놓인 동백열매 꽃병, 누마루의 심심하고 적막함을 깨우는 포인트로 알고

감상에 열중하고 있는데 들려오는 신경질적인 고함 소리 ......

 

"조용히좀 허쑈"

누마루가 딸린 방에서 뒹글고 있던 자가 답사꾼들의 웃음소리가 시끄럽다고 지르는 소린데 ....

글쎄 올씨다.

 

쏟아지는 빗속에 여기까지 찾아온 객에게 차 한잔 공양은 못 할 망정 고함이라니 이거야 원......!

 

 

 

 

 

 

템플스테이차 와서 큰 절에서 자고 일어나 일지암에까지 올라온 용감한 배꽃큰학교의 학생

 

 

일지암 축대 돌에 새겨진 "다암"

 

 

우여 곡절을 겪은 끝에 국보 제308호로 지정된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大興寺北彌勒庵磨崖如來坐像) -고려시대 -
햇빛이 마애불을 직접 비추도록 투명한 캐노피를 씌운다음 마매불의 앞 쪽으론 법당을 조성 해 놓았습니다.





거대한 암벽을 다듬어 불상을 조각, 둥글고 넓적한 얼굴은 근엄하게 표현되었으며, 신체는 두터운 법의< 法衣 >에 싸여 있으나 비교적 양감< 量感 >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옷주름은 신라< 新羅 > 말기< 末期 >에 유행< 流行 >하던 얇게 빚은 듯한 옷주름의 전통을 잇고 있으나 도식적< 圖式的 >이며, 왼쪽 어깨에 있는 가사< 袈裟 >의 끈이 이색적이다. 하체로 내려올수록 신체는 빈약해져 있는데,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 >의 손은 힘이 빠져 있고 결가부좌< 結跏趺坐 >한 발의 표현도 부자연스럽다. 신체 전반에 걸쳐 상당한 양감이 있으나, 신체의 비례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조각수법도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어제작시기는 고려< 高麗 > 전기< 前期 >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거구< 巨軀 >의 마애불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크게 주목된다 -옮긴글 -

 

 

보물301호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大興寺北彌勒庵三層石塔)


두륜산 정상 부근의 북미륵암에 세워진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밑면의 단의 수가 층에 따라 다른데, 1·2층은 4단, 3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한반도의 남쪽 끝인 해남에 이처럼 구성이 가지런한 탑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양식에서 일부 간략화된 곳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며,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해남대흥사북미륵암동삼층석탑(海南大興寺北彌勒庵東三層石塔)
문화재자료 제245호


자연적으로 형성된 큰 암반 위에 단층 기단부를 안치하고 그 위로 탑신부를 구성하여

고려시대(10∼11세기)에 조성한 신라양식의 3층 석탑으로 각 부재가 정제되고 탑신의 체감율이 알맞아

매우 우아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어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에 올라 내려다 본 북미륵암 전경


일지암 바로 옆길을 따라가다보면 아무런 현판이 없는 건물 한 채가 나타나고 계속해서 가다보면 임도가 나오고 그 임도를 따라 오르다보면 임도가 끝나고 바윗덩어리로 이루어진 너덜길을 가게되고 그 끝에 북암이 나타납니다. 길은 외길이니까 비교적 안심하고 가셔도 됩니다.

 

 

일지암과 북암을 거쳐 큰절로 내려와 성보박물관에 들러 나와 바라본 초의선사 좌상

 

 

어제 저녁까지는 수련이 전혀 없었는데...... 노랑어리연도 많이 피어났습니다.


대흥사 무염지(無染池)
참선문구인 처염상정(處染常淨)에서 나온 것으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이라는 뜻.


 

 

 하룻밤 사이에 여러 송이의 연이 피어났습니다.

 

 

큰 절에서 두륜산을 바라보니 여전히 운무속에 가려진 모습

 

 

사천왕상 대신에 자리한 선재동자상


불교에 자주 등장하는 동자승(童子僧)은 매우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에서는 동자라는
개념 규정의 기준을 신체적인 성장 발달에 두기보다는 구도를 향한 서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출가하여 불법에 귀의하고 구도자로서의 조건을 구비하면 그것으로서 동자의 요건을 갖춘것으로 본다.
그러한 동자승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구도자가 바로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 동자이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문수 보살을 문수 동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보살이라는 말 대신에 동자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선재동자상

 

 

 

 

 

 

 

 

 

 

 

 

 

 

 

 

 

 

영남에서 찾아온 귀인을 모시고 쏟아 붓는 비 따윌랑 아랑곳 없이
강진, 해남, 진도 일원을 이틀간에 결쳐 부지런히 돌아봤습니다.

해가 더 해질 수록 저 험한 산중 암자에 이르기까지 불사라는 거창한 명목아래 세우고 짓고 파내고 옮기고.

천년을 바라보는 지극한 안목으로 우리의 산과 문화재를 가꾸고 보존하는 지혜가 제발 그 들에게 만땅이길......!

 

 

 

 

 

 

 

 

 

 

 

 

 

 

 

 

 

              명경헌
                 좋은 곳을 다녀 오셨군요.
                 일지암을 틀어차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몰라도 너무...
                  선객 중의 선객을 몰라 보고... 원.
                  덕분에 좋은 곳을 둘러 보고 갑니다.
                  총각시절 북미륵암을 오르던 때가 눈에 선합니다.
                  좋은 때였는데...ㅎ
2007-08-14
19:07:48
 
 
 
고현정
ㅎㅎ 안녕하세요 ! 사진 찍어주셨던 학생이예요~
오늘 기행을 마치고 돌아왔답니다~ ^^ 사진 너무 잘 찍어주시고 감사해요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곳 발로 사진으로 담으시길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
2007-08-16
21:06:39

[삭제]
 
 
 
김환기
고현정학생
사진상 왼쪽? 오른쪽????
일지암 뒷편 세개의 돌확에 흐르는 물이 바로 유천이라 이름한 그 유명한 찻물이랍니다.
사실은 그날 그 물로 우려낸 차 한잔 마셔보자고 암주에게 청 할 생각이었는데 그만
조용히 해 달라고 악을 써 대는 꼴을 보고 마음을 접고 말았습니다.
우리 일행과 북암을 들렀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언제라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사진과 실제의 감동은 한참 차이가 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늘 왕성한 탐구심으로 무장한 학인이시길.....
2007-08-17
12:41:35

[삭제]
 
 
 
고현정
^^ 사진에서 오른쪽 학생이예요~ 왼쪽언니는 며칠뒤에 중국으로 돌아간답니다..
그날 물 맛이 정말 맛있었어요. 담아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북암이라면 마애불이 있는 곳 말인가요?
그리고 여기서 알게 된 건데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이 원교의 글씨였군요..;;;
아 그걸 몰랐다니 ㅜㅜ 어쩐지 기억에 남는 현판이었어요... ㅎㅎ
2007-08-21
09:30:26

[삭제]
 
 
 
류재원
월남사지 삼층석탑이 그림같은 미인입니다.
다른 사진들도 다 좋지만 월남사지 사진을 보는 순간 너무 색감과 균형과 모든 비례가 가슴에 확 다가왔습니다,
너무 멋있습니다.
화이팅!
2007-08-21
14: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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