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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그림이 된 문학, 문학이 된 그림 (8)

안견, 「몽유도원도」, 비단에 수묵담채, 38.7×106.5cm, 일본 덴리대학교 중앙도서관

 

 

 

「몽유도원도」는 오늘날 전하는 조선전기 산수화의 걸작이며 기년작記年作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일본으로 팔려가 우리나라에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은 우리를 몹시 안타깝게 한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

운 일은, 막상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 자체에서 특별한 감흥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세월 속에 누렇고 붉

어진 비단바닥에 산봉우리며 나무숲을 그린 붓질이 희미하여 인상적인 선명함이 없고,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꿈꾸고

돌아왔다는 젊은 왕자의 꿈 이야기에서도 신선한 감동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일까.

 

이 그림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도 혹 그 쓸쓸함을 강조하고 혹 그 고요함을 감상하는데, 그것은  「몽유도원도」의

진면목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중국 문인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다시 읽고, 도원이 전해진 천 년의

세월도 생각해보고, 나아가 왕자 안평대군의 기상과 화가 안견의 고민도 고려해보면서

이 그림에 대한 다른 차원의 접근을 해보도록 하자.

 

 

안견으로 하여금 그림으로 만들게 하였다. 다만

'옛날부터 전해오는 도원'이 이와 같았는지 알 수 없구나.

훗날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옛 그림 을 구하여 나의 꿈과 비교한다면 무슨 말을 하겠지.

 

令可度作圖. 但未知古之所謂桃源者, 亦若是乎. 後之觀者求古圖, 較我夢必有言也.

 

 

 

안평대군이 「몽유도원도발」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몽유도원도발」은 안평대군이 완성된 「몽유도원도」를 보고

쓴 글로, 「몽유도원도」와 함께 두루마리로 표구되어 전하고 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옛날부터 전해지는 도원'

이란 4세기 중국의 문인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에 소개된 이래 많은 문객들이 거듭 시문으로 읊어온 '도원桃源'

이다. '도화원桃花源' 을 줄여 부르는 말이며, '복숭아꽃桃花의 근원지源' 를 뜻한다. 복숭아 꽃잎이 떠 흘러내리는

물길의 발원지이며, 깊은 산속에 위치한 복숭아 숲이다. '도원' 의 이야기가 중국의 무릉에서 발생하였기에 우리는

흔히 '무릉도원' 이라 부른다. 무릉도원의 이야기를 처음 제공해준 도연명의 「도화원기」,

'그 옛날부터 전해지는 도원' 의 원래 모습은 아래와 같다.

 

 

진秦나라 태원 때, 무릉에 어부가 살았다. 그는 물길에서 길을 잃었는데 얼마나 갔는지 모르다가 홀연히 복숭아꽃

가득한 숲을 만났다. 수백 걸음 되는 거리를 노를 저어 가보았더니 온통 복숭아나무뿐 다른 나무가 없었고, 향기로운

꽃이 아리따웠으며 떨어지는 복숭아꽃잎은 어지럽게 흩날렸다. 어부가 이를 신기하게 생각하여 복숭아숲이 끝나는

곳까지 가보고 싶어졌다. 숲이 다 끝난 곳은 물길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이어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이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었고 그 안에서는 빛이 어른거렸다.

 

어부가 배에서 내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가 좁아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었다. 다시 수백 걸음을 더 가니

넓게 트인 곳이 나왔다. 땅이 너르고 평평하였고 집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기름진 논과 밭에 아름다운 연못, 뽕

나무 숲, 대나무 숲이 있었다. 밭 사이로 낸 길이 사방으로 통하게 되어 있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오가며 농사짓는 것이나 남녀의 의복이 모두 바깥세상과 같았고, 어린애와 노인이 어울려 즐거워하고 있

었다. 그들은 어부를 보고 놀라며 어디서 왔는가 물었다. 어부가 예를 갖추어 곡진히 답하였다. 그들은 어부를 집

으로 초청하여 술상을 차리고 닭을 잡아 식사를 대접하였다. 바깥세상에서 사람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와서 자세히 물었다. 그들은 말하였다. "돌아가신 할아버님 때에 진秦나라의 혼란한 시절을 피하여

처자와 마을 사람과 함께 세상과 단절된 이곳으로 왔답니다. 그리고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았으니 외부 사람들

왕래가 끊겼답니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은 어느 시대입니까?' 그들은 한나라가 있었던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위魏나라 진秦나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에 어부가 알고 있는 것을 자세히 말하자, 모두들 탄식을 하였다. 다른

람들도 어부를 데려다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어부는 여러 날을 머문 후 돌아가겠노라 인사를 하였다.

마을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어부에게 말하였다. "가깥사람들에게 알릴 일이 못됩니다."

 

어부는 그곳을 나와 배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오며 곳곳에 표시를 해두었다.

마을에 돌아와 곧장 태수를 찾아가 사정을 아뢰었다. 태수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어부가 온 길의 표시를

따라 가도록 하였으나 끝내 길을 잃고 찾지 못하였다. 남양에 사는 유자기는 인품 높은 선비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며 찾아 나섰으나 결국 찾지 못했고 병들어 죽었다.

이후로는 어부가 배 대었던 곳을 다시 묻는 사람이 없었다.

 

-도연명, 「도화원기」 

 

 

 

도연명의 이 글은 사실의 전말을 기록하는 장르인 '기記' 의 문체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 글에 기록된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고,

도원의 존재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읽고 의혹이 충천해진 중국의 옛 호사가들은 무릉의 산속을 헤맸다.

그러나 아무도 어부가 방문했던 도원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후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를 거치면서 중국의 시인

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 도원에 대한 온갖 추측을 하였다. '도원의 사람들이 커다란 그물망을 둘러쳐 꽃잎이

떠내려가지 못하게 하는 걸까?"  '도원의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난 걸까?'  '그곳은 원래 신선의 마을이었나?'

'아니 도연명 선생이 꾸며낸 이야기일까?' 도연명의 생전에 산속에 숨어 사는 이들이 있었으며, 산속 마을에 대한

구구한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개 짖고 닭 우는 소규모 농촌사회에 대한 상상은 이미 기원전

《노자》에 제시된 내용이었다. 상상으로 지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도연명의 개인적 상상만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도연명 자신도 도원을 누려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귀족사회의 모수노가 농민의 봉기, 세상의

염원을 바라보며 도연명이 구상해본 평등과 이상사회가 도원으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연명의 또다른 시 「전원으로 돌아가 살리라歸園田居」는 이미 사라진 도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시에서 도연명은 전원으로 돌아가리라는 들뜬 마음을 시로 읊기 시작한다.

그러나 전원에 도달한 그가 맞딱뜨린 것은 이미 모두가 떠나가 쓸쓸해진 산수였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후 도원을 찾아다닐 사람들의 헛걸음을 예언하고 있다.

 

 

땔감 캐는 나무꾼에게 물어본다. "여기 살던 사람들은 어찌 되었소?"

나무꾼이 내게 말한다. "다 죽어서 남은 이가 없습니다."

한 세대 안에서도 세상이 달라진다더니, 빈 말이 아니로구나.

인생이란 환상의 조화 같아서 끝내는 마땅히 공空과 무無로 돌아가리라

 

 

借問採薪者,  此人皆焉如, 薪者向我言, 死沒無復余.

一世異朝市,  此語眞不虛 . 人生似幻化  終當歸空無

 

-도연명, 「歸園田居」

 

 

 

도연명 자신도 누려보지 못한 도원이었지만, 따스한 봄철 남녀노소가 더불어 즐겁게 지낸다는 이상사회의

꿈은 영원히 꿈으로 남게 되었다. 아니, 꿈속에서도 도원의 사회는 사라지고 쓸쓸해진 산수경만 남게 되었다.

여기서는 고려후기 문인 이색이 꿈에 도원을 찾아갔노라고 읊은 시 「꿈을 기록하노라記夢」를 읽어보도록

하겠다. 이 시는 조선초기 안평대군의 꿈 기록과 유사성이 많기 때문이다.

 

 

천암만학을 꿈속에 가노라니, 창 아래 남은 등불이 다시 밝아지네.

선경에는 본래 속됨이 없고, 신선 글씨 뭇사람과 논하기 어렵구나.

도원이 적막하니 객은 배를 돌리고, 뽕나무밭 아득한데 약초 캐는 이뿐이라.

다만 바라는 건 마음 맑고 깨끗함이니, 구름 가득한 산에 나의 정을 기댈 필요 없도다.

 

 

이색의 이 시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안평대군의 시절로 전달되는 도원의 이미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색과 안평대군이 도원의 꿈을 읊던 고려말기와 조선초기는 도연명이 「도화원기」로 '옛날의 도원' 이 만들어진

이래 대략 천 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이며, 이즈음 이들이 생각하는 도원의 이상사회는 사라진 지 오래다. 산수만

아름다운 그 도원을 그들은 꿈에 다녀왔으며, 마치 여행 기록을 쓰듯이 그 도원 꿈을 기록하였다.

1447년 봄, 조선초기의 왕자 안평대군의 도원 꿈은 다음과 같다.

 

 

1447년(정묘년) 음력 사월 스무 날 밤, 내가 자리에 들자 정신이 나른하여지더니 푹 잠에 들었고 꿈까지 꾸었다.

나는 홀연히 인수[박팽년]와 더불어 산 아래의 한 곳에 이르렀다. 산봉우리는 층층으로 솟고, 골짝은 깊고 그윽

하였고,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으며, 좁다란 길이 숲 밖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발 바를 몰라

서성거렸는데, 산관을 쓰고 야복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말하였다. "곧장 북으로 가서

골짝을 들어가면 그곳이 도원입니다." 나와 박팽년이 말에 채찍을 가하여 찾아가노라니, 산벼랑이 울뚝불뚝하고

숲이 빽빽하고 물길은 백 굽이로 휘어지니, 하마터면 길을 잃을 것 같았다.

 

골짝으로 들어서니 마을이 툭 트여 2,3리쯤이고, 사방에는 산이 바람벽처럼 솟아 있고 구름과 안개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곳의 도화 숲에는 붉은 노을이 어리비치고 있었다. 대나무 숲과 초가가 있었고 싸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흙섬돌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 개, 소, 말 등은 없었고 앞 시내에 조각배가 물결에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 정경이 쓸쓸하고 깨끗하여 마치 신선의 마을 같았다.

 

이에 한참을 머뭇거리며 돌아보다가 박팽년에게 말하였다.

"바위에서 서까래를 거쳐 골짝을 뚫어 집을 지었다더니 이를 두고 말한 것이야. 정말로 이곳이 도원이군."

내 뒤에는 정보[최항]와 범옹[신숙주] 등 함께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한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신발끈을 조이고 오르내리며 유유자적 돌아보다가 문득 깨었다.

 

 

歲丁卯四月二十日夜, 余方就枕, 精神蘧栩, 睡之熟也, 夢亦至焉. 忽與仁叟, 至一山下,

層巒深壑, 崷崒窈窅, 有桃花數十株, 微徑抵林表而分岐. 徊徨竚立, 莫適所之, 遇一人山冠野服,

長揖而謂余曰: "從此徑以北, 入谷則桃源也." 余與仁叟, 策馬尋之, 崖磴卓犖, 林莽薈鬱, 溪回路轉,

蓋百折而欲迷. 入其谷則洞中曠豁, 可二三里, 四山壁立, 雲霧掩靄, 遠近桃林, 照暎蒸霞. 又有竹林茅宇,

柴扃半開, 土砌已沈, 無鷄犬牛馬, 前川唯有扁舟, 隨浪游移, 情境蕭條, 若仙府然. 於是踟躕瞻眺者久之,

謂仁叟曰: "架巖鑿谷開家室, 豈不是與. 實桃源洞也." 傍有數人在後, 乃貞父,泛翁等, 同撰韻者也.

相與整履陟降, 顧盻自適, 忽覺焉.

 

 

 

 

안평대군이 도원에 도착하여 처음 한 일은 도원 확인 작업이었다.

그 근거는, 당나라 문인 한유가 남긴 도원 묘사였다. 도원에 저녁노을이 비친다든가, 바위에 기대어 서까래를

얹은 집이 있다든가 하는 묘사는, 도연명의 글이 아닌 한유의 시에서 도원을 묘사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유의 이 시는 당나라 화가 두상이 그린 「도원도」를 묘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평대군이 그의 「몽유도원도발」에서 한 말, "훗날 이 그림 「몽유도원도」를 보는 사람이

'옛 그림' 은 한유가 보았던 「도원도」를 염두에 둔 말이며, 안평대군이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훗날 누군가

 이 「몽유도원도」를 보는 사람이 한유가 보았던 그 「도원도」를 찾아 비교해 본다면, '안평대군께서

꿈에 가신 도원은 옛날부터 전해진 그 도원이 틀림없군요' 라고 반드시 말해줄거야" 였으리라.

도원임을 확인한 안평대군은 학자들과 함께 산수 구경을 시작한다.

신발끈을 단단히 잡아매는 것은 적극적인 선수 구경의 태세이다. 왕자는 이곳저곳을 오르내리며

모처럼 방문한 도원을 유유자적 기분 좋게 구경한 후, 꿈에서 깨어나 미련없이 현실로 돌아온다.

 

 

 

서울 종로구 안평대군의 집터에 남아 있는 '무계동' 이 새겨진 바위

 

 

 

안평대군의 글을 읽노라면, 도원이 비었다고 느끼는 쓸쓸함의 감회가 없고, 이룰 수 없는 무엇에 대한

간절함도 없고, 도달하고픈 어떤 세계에 대한 바람이 없다. '사상의 빈곤' 이라는 한 현대 연구자의 지적이

별로 가혹하지 않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는 도원을 꿈꾼 인품을 세상에 알리고픈 은근한 자기표현이고,

현실의 공간을 도원까지 확장하고픈 낙관적 포부이다. 「몽유도원도」의 제작은 그러한 그의 낙관을 축하하고

미래를 기대하는 하나의 행사였다. 이후 안평대군은 궁전 가까운 곳에 명당자리를 점지하여 '무계武溪' 정사를

지었다. '무계'란 꿈에 본 도원 즉 '무릉의 계곡' 을 뜻한다. 세상을 떠나 깊은 산으로 숨어 들어간 무릉도원의

전설과는 완전히 다른 행보이다. 안평대군은 왕자라는 그의 권력을 떠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풍족한

현실에 무릉도원의 아름다움까지 더해놓고 싶었다. 그가 점지하였던 터는 '무계동武溪洞' 이라 새겨진

커다란 바위와 함께 서울 종로구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안평대군의 꿈속에서 도원에 함께 이르고 산수를 구경한 학자들은 그 당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며

새 문명을 이끌어 가던 긍지에 찬 젊은 동지들이었다. 안견의 도원 꿈은 귿르과 함께할 낙관적 미래에 대한

약속이며 바람이었다. 당시 안평대군은 갓 서른에 접어드는 젊은이였고, 집현전 학사들과 어울려 시문과 예술

을 논하던 전도양양한 왕자였다. 진귀한 꽃으로 정원을 꾸미고 문사들을 불러 모아 학식과 친분을 쌓았고, 귀

한 옛 그림과 글씨 수백 점을 사들여 동아시아 역사에 기록될 만한 국제적 개인 수장고를 만든 예술애호가였다.

이 시절의 안평대군은, 수양대군의 정권 찬탈로 그의 정원과 이 소장품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흩어지게 될

배반의 미래에 대하여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이 그림 「몽유도원도」를 볼 때 우리는

모종의 비애감을 배제하기 어렵다. 요절당한 주인공의 꿈과 아픔을 잊은 채 이 그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애감은 이 작품이 그려질 당시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안견, 「몽유도원도」의 부분

 

 

 

 

젊은 화가 안견은 왕자의 꿈 기록을 받아 들였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화가였다.

안평대군의 서화수장고에는 유명한 중국 화가의 작품들뿐이었는데 오직 안견의 작품이 조선 화가로서

그 안에 속했던 이유이다. 안견은 자신을 그토록 아끼는 안평대군을 위하여 그의 꿈을 그리는 데

재주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수장고 덕분에 중국의 필묵법을 널리 익히면서 자신의 실력을 연마할 수 있었다.

원나라, 명나라 화원들이 그리던 북송화풍이나 원나라 초기 특유의 구름 자욱한 산 풍경 등을 안견은 모두 잘

그릴 수 있었다. 그는 안평대군이 말을 달린 험준한 산세를 표현하기 위하여 북송화풍으로 전해오는 섬려한 

붓질을 택하였다. 터럭 같은 선으로 산악의 주름을 그리고 산자락을 돌아가며 구불구불 산길도 그렸다.

화면의 아랫부분에는 도원으로 드는 골짝과 도원으로 통하는 동굴을 선명하게 그녀넣었다. 화면의 오른편에는

도원을 넓게 배치하였다. 도원은 동굴 속에서 드러나는 곳이며 기이한 산이 감싸 안은 은밀한 곳이면서 동시

에 넓게 트여 빛나는 곳이어야 한다. 이를 표현하기 위하여, 안견은 도원의 둘레를 기이한 암석으로 돌러싸듯

그렸다. 도원을 둘러싼 ㅂ마위들은 형태가 기괴하고 흑백의 먹색 대비도 강하다. 이는 도원의 환한 빛을 돋보

이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 안견은 도원 내부를 화사하게 만드는 데 유난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분홍,

연분홍 외 주홍과 홍색의 안료가 듬뿍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복숭아꽃 만발한데 노을이 어른거리는 색조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원도에서 볼 수 있는 분홍색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복숭아꽃과 함께 삐죽삐죽 새로

오른 연초록빛 작은 잎들을 빠뜨리지 않은 것도 안견의 도원 표현의 특색 중 하나이다. 이로써 녹색과 홍색이

어울리는 화사함을 연출하였다. 홍색의 꽃 위로 점점이 찍어낸 흰점들이며, 꽃나무들 사이로는 자욱하게 베푼

흰 안개가 도원의 화사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로써 실제의 복숭아나무보다 더 빛나는 환상을 만들었다.

도원의 두어 채의 집이 바위에 바짝 붙어 있는 것이나, 집 뒤로 대나무 숲이 오른 것도

안평대군이 묘사한 도원의 재현이다.

 

여기까지는 공인된 최고의 산수화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차원이 다른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그림으로 '꿈'을 그리느냐의 문제이다. 화가 안견은 이 그림을 사흘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니, 안견은

꿈을 그리기 위한 몇 가지 묘안을 빠르게 마련했음이 분명하다. 그 묘안 중 하나가 이 그림의 방향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꾼 것이라 생각된다. 험한 산세를 지나 동굴을 거쳐 도원에 이르는 꿈속 이야기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 이 방향에 대하여는 이 그림을 가장 자세히 글로 묘사한 신숙주의 제찬에서 분명

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고 있기에 안견의 이 그림이 오히려 편안

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반대였다. 모든 문서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두루마리는 오른쪽 끝을 펼치

시작하여 풀어가며 왼쪽으로 눈을 옮겨 가며 읽었다. 시간이며 공간이 모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가던

시절이다. 그런데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공간은 현실을 뒤집어 놓은 현실의 뒷면이 되었다. 안견의 역행은 '꿈' 꾸

는 몽롱함을 제공해주려는 재기발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 시절에 바뀐 좌우는, 물구나무를 서서 뒤집힌

세상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 묘한 현기증과 유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몽유도원도」를 보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몽유도원' 의 주인공인 안평대군과 학자들이 그림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그림은 몹시

쓸쓸하고 고요한 그림으로 낙인찍히곤 한다. 그러나 인물을 그려넣지 않는 것 또한 안견의 고안이 아닐 수 없다. 

안평대군은 험한 산길에서 오로지 박팽년과 함께 말을 달렸는데, 도원에 도착하니 최항과 신숙주가 불쑥 나타났다고

했다. 꿈속이라 벌어지는 불합리한 만남이다. 다만 그 시절에 꿈이란 원래 몸은 이곳에 있고 정신만이 저곳에서 노닌

다고 하여 '신유神遊' (정신의 노님)라 일컬어지고 있었으니, 정신만이 노니는 모습을 그린 안견의 표현은 오히려 적절한

착상이다. 「몽유도원도」를 다시 볼 때는 바탕화면에 쌓인 세월의 흔적을 걷어내고 훨씬 밝았던 비단 바닥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화려하게 빛났던 원래의 주홍 점, 분홍 점, 연두 점 등이며 좀 더 짙었을 먹색의

붓질을 보며 눈길을 왼편 에서 오른편으로 옮겨가며 살펴야 한다. 왼편의 험준한 길은 왕자와 박팽년이 말발굽 소리

힘차게 울리며 달려간 길이다.산관야복을 한 선지자가 나타나 공손히 안내해준 길이었고

뜻을 같이했던 박팽년과 동행한 길이다.

 

두려움이 있었을 리 없다. 동굴 속 도원경은 안평대군과 학자들이 기꺼이 구경하며 즐겼던 곳이다.

도원의 사람들은 오래전에 떠나갔기에 빈 배와 빈 집만 남아 고요하였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은

여전하여 왕자와 학자들이 감상하며다니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광사, 「도원도」, 종이에 담채, 29.4×13.6cm, 18세기, 개인 소장

 

 

 

「몽유도원도」는 중국과 한국에서 빈번히 그려졌던 '도원도' 와는 다르다.

대개의 '도원도' 들은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도해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부와 마을 사람들이 마땅히 그려진다.

위 원교 이광사의 「도원도」가 그러한 예이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조선초기의 「몽유도원도」는, 마을은

사라지고 산수만 남은 도원이 그려졌고 여말선초 문사들이 생각한 도원이 그려졌다는 점에서

여타 도원도의 도해와는 각별히 구별되어야 한다.

 

 

 

인용: 고연희 著 <그림, 문학에 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