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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시냇물을 따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묘역 일대

 

 

 

 

신도비神道碑

 

 

 

 

 

 

 

 

추기 신도비(追記 神道碑)

 

기존의 신도비에 1796년(정조 20) 정조가 하교한  문묘(文廟)에 종향(從享), 문정(文正)으로 개시(改諡),

증직(贈職), 명부조(命不祧) 등 추가 사적이 등재되지 않아, 1979년 정월 유림(儒林)의 총의(總意)를 거쳐

추기 신도비를 건립키로 결의하였다. 1980년 봄 본손(本孫) 담운(湛雲) 김상일(金相一)이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

에게 비문을 청문하여 늦여름에 완성을 보고, 진원(珍原) 박하주(朴廈柱)가 글씨를 써서 1982년 8월 기존의 신도비

 좌측에 추기 신도비(追記 神道碑)를 건립(建立)하였다. 추기 신도비문의 주요 내용은 기존의 신도비문에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 종향 상소 · 정조 대왕의 하교 · 6세 때 지은 상원(上元)의 망월시(望月詩) · 천명도 저술 내용 등.

 

 

 

 

 

하서 선생 묘역으로 오르는 길 왼편에 자리한 두 기의 묘.

오른편은 시아버지 종호(하서의 차남)의 묘이고, 왼편은 며느리 기씨의 묘인데,

팔 하나만 장사 지냈다는 뜻에에 일비장(一臂葬)으로도 불리우기도 한다.

기씨는 시아버지 종호의 아들 남중의 처로 고봉 기대승의 따님이기도 하다.

 

 

 

 

하서 선생 묘역 일원

 

 

 

 

십여년 전,  앞의 석물 중 羊 앞쪽에다 백마 한 쌍을 세웠던데,

오늘 와 보니 백마가 사라진 모습이다.

 

 

 

 

예전, 백마석이 막 설치되었을 때 모습이다.

 

 

 

 

하서 선생 묘 윗쪽의  묘 .

 

오른쪽은 하서 부모의 묘이고, 왼쪽은 하서 증손자 증손부 합장 묘이다.

하서 부친은 의릉참봉 령이고 어머니는 옥천조씨로 순창이 친정이다.

증손자 형복은 둘째 아들 종호의 큰 아들인 남중의 큰 아들이다.

남중은 4형제를 두었는데 큰 아들이 형복이다

 

 

 

 

부인 여흥윤씨와 문정공 하서선생의 합장 묘

 

 

 

 

묘역 오른쪽 한켠 땅에 박아 놓은 석물로, 마치 어떤 설치 미술을 보는 듯.

 

 

 

 

 

 

 

 

 

 

 

 

 

 

 

 

 

 

 

묘역 가장자리의 전사석.

 

 

 

 

묘역 앞산에 흐드러진 산 벚꽃 잔치.

 

 

 

 

잔뜩 흐린 날, 느낌 가는대로 산책길에 나섰다가 하서 선생 묘역까지 오게 되었다.

 

 

 

 

묘역 아랫쪽에 자리한 재실.

 

 

 

 

 

10살 때 모재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다.

1528년(중종 23)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33년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홍문관 부수찬으로 승진하여 차자를 올려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해 12월 부모 봉양의 걸양(乞養)을 청하여 옥과현감으로 나갔다.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1545년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이항과 기대승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그는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의 태극

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에 반대하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양론에 있어서는 성경(誠敬)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노수신과 함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 등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조희문·양자징(梁子徵)·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오건(吳健)·노적(盧適)·신각(申覺)·서태수

(徐台壽)·이지남(李至男) 등이 있으며, 기대승·정철·김천일·박순 등도 문인을 자처했다.

시문에도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며, 도학에 관한 저술은 일실(逸失)되어 많이 전하지 않는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장성 필암서원과 옥과 영귀서원에 주향되었으며, 성균관 문묘에 승배되고 대광보국승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문을 잘하여 명성이 전역에 떨쳤으며, 기묘사림들인 조원기·기준·송순·박상등의 아낌을 받고,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김안국·최산두에게 수학하였는데 그들은 기묘년(1519년) 11월에 화를 당한 인물들로,

그가 결코 기묘사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스승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같이 배웠는바,

이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김안국』으로 이어져 내려온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직계 인물이므로

그는 도통의 직계이다. 따라서 조광조와는 스승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숙질(師叔姪)이 된다.

이와 같이 그는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한 인물로 후대 사림들로부터 학문과 덕행의 사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광조·김정등 기묘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어도 그들의 자치주의 노선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또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문신으로서 처음으로 조광조등 기묘 사림을 죽인 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개진하며,

무고하게 희생된 그들의 신원 복원을 청하였던 것이다.

이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1528년(중종 23) 19세 봄에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에게 칠월 칠석(七夕)날을 기리는 시험을 보였는데

이에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다. 홍문과 대제학 이해(李荇)이 기특히 여기며 사람이나 글이 모두 옥이라고 하면서도,

다만 혹시 남의 손을 빌리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그를 성균관에 있게 하고 일곱 가지 글제를 내어 시험을 했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지어 권을 바쳤을 뿐더러, 시문의 운치가 모두 뛰어나니 이행은 크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 중의 「염부」, 「영허부」는 문집에 있다. 그때 지은 시권 《칠석부》(七夕賦)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렸다.

 

1531년(중종 26) 22세 성균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같이 합격한 동방(同榜)은 화담 서경덕, 대곡 성덕,

휴암 백인걸, 임당 정유길, 금호 임형수 등이 있다. 이듬해 할아버지 훈도공(訓導公)이 돌아가셨다.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기묘사화를 겪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선비들이 학문을 소홀히 하며, 도학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풍조였는데,

퇴계와 한번 보고 서로 깊이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며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은 소득이 있었다.

후일 퇴계는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그와의 돈독한 우의를 표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정표로 ‘증별시(贈別詩)’를 지어 주었다.

이와 같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황을 비롯한 휴암 백인걸·임당 정유길·금호 임형수·미암 유희춘을

비롯한 많은 현능들을 만났다.

1536년(중종 31) 성균관에서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고 머리에 가마(加麻)를 하고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기일에는 치제(致齋)를 올렸다.1539년(중종 34) 여름 4월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이미 제술관을 많이 뽑았사오나, 성균관 과시에서 큰 명성을 얻은

김인후 등을 차출하여 이에 대비케 함이 어떠하옵니까?」하니 그렇게 하라 전교 하였다.

1543년(중종 38) 봄 2월에 스승 모재(慕齋) 김안국의 부음을 듣고 가마(加麻)를 하고, 이후 기일에는

치제(致齋)를 올렸다. 스승을 애도하는 글 '만사(輓詞)'가 문집에 전한다.

 

- 백과사전 발췌 정리 -

 

 

 

 

 

열녀서녕유씨(1807 - 1831) 정려각

울산김씨 남편이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젊은 나이로 죽게되자 향리로 옮겨 3년상을 정성스럽게

지낸 다음 날 자결하였다고,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기려 1832년(순조 32년)에 월평리에 비각을 세웠으며

1839년(헍옹 5년) 국가로부터 정표를 받았다. 1983년 정려 앞에 철도가 부설되자

지금의 맥호리로 이건하였다.

 

 

정려문

 

 

 

 

난산卵山

 

 

 

 

난산비卵山

절의 정신은 절개와 의리를 말하는데 의리란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는 본성이 발현된 것으로 인의 구체적 실체이다.

그의 인종에 대한 의리는 자신의 올바름을 지키려는 어진 본성에서 나왔기에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에는 의를 실천 할 수 있는 민초들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불의에 맞선 절의 정신은 실천적 도학으로 계승되어 호남 사림들로 하여금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게 된다.

 

 

 

 

 

 

호패형의 일반형 돌비석으로 전면 상단에 전서로 ‘난산지비(卵山之碑)’라는 글씨가 가로로 세겨져 있으며,

첫줄에 세로로 ‘난산비(卵山碑)’라 고 되어 있다. 이어 찬자 윤행임(尹行恁)과 서자 이익회(李翊會)를 쓰고

비문을 적었다. 비문은 비의 제목을 포함하여 모두 31행(전 10행, 좌 5행, 후 10행, 우 6행, 1행 26자)이다.

비문은 석재 윤행임(1762∼1801)이 짓고, 이익회(1767∼1843)가 글씨를 썼다.

끝 부분에 추기가 있는데 ‘영력 사계묘 윤정현 근지(永曆 四癸卯 尹定鉉 謹識)’라는 기록이 있어

1843년(헌종 9)에 윤정현(1793∼1874)이 추기하고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윤정현은 난산비의 비문을 지은 윤행임의 아들이다.

 

 

 

 

 

 

북망통곡단(北望慟哭壇)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그만두고 손님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또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들고 집 앞 '난산(卵山)'에 올라가 곡을 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밤을 지세고 내려오기를

세상 떠나기 전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하서.

 

 

 

 

 

 

그는 중종 5년에 태어나 명종 1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시기는 연산군의 혼란된 조정을 중종반정으로 바로 잡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자, 중종 초기 문치의 기운을 열고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중종의 등극과 함께 '신비'를

폐출하면서부터 내부적으로는 외척 세력 간 다툼이 치열하고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노골화되었던 시대였다.

이 때에 일어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는 이러한 시대적 성격을 잘 대변하여주고 있다 하겠다.

그는 정신적으로는 사림 사상을 계승한 도학자로서 복재의 사랑을 받고, 모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신재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인종의 신하였기에 윤임이나 윤원형 어느 편에도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러한 집권 세력들과 같은 조정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니 이는 그들과 연속된 싸움이었다.

그러나 인종과는 남다른 깊은 정을 나누며 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같아서 세자와 신하로서 뿐 아니라,

세자의 보호자로서 유일한 벗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입지를 펼칠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이니 그로서는 불우한 시대를 만나

그 높고 깊은 경륜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것.

 

 

 

 

 

붓바위

 

 

 

 

 

 

하서의 본향 맥호리 가는 길.

 

 

 

 

산야 여기저기 산도화 만발.

 

 

 

 

 

 

 

 

아스팔트 길을 피해 시냇물을 따라 거닐다 보니 어느새 하서의 묘역 일원.

다시 졸졸거리는 물소리를 벗삼다 보니 하서의 통곡이 들려오는 난산卵山.

천지사방으로 순을 밀어 올리는 찔레 순의 얼크러진 모습에 투영되는

하서의 궤적을 잠시 떠올려 보는 사색 동반 산책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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