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백년의 신화
1916 ~ 1956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전 세계에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오.
- 이중섭, 부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 유화 Oil Painting
<흰 소>(부분) 1955, 종이에 유채, 29×41cm,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바닷가의 아이들> 1952 - 53년, 종이에 연필, 유채, 32.5×49.8cm, 금성문화재단 소장
이 작품이 한국 전쟁의 틈바구니 속 피란지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가난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나름대로 행복한 나날이었음이 작품에 투영된다.
이중섭의 작품은 매우 '단색조' 경향을 띈다. 제한된 색채로 덧칠을 반복함으로써 아래의 물감층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효과를 사용한다. '색' 보다 '선' 을 더욱 강조하는 그의 작품은
'선조(線條)'를 중시했던 한국의 전통미학을 유하에 적용해보려는 의도적 시도로 보인다.
<봄의 아동> 1952 - 53년, 종이에 연필, 유채, 32.6×49.6cm, 개인소장
두꺼운 종이 위에 색을 여러 번 겹쳐 칠하고 선을 긋고 긁어내는 여러 단계를 거친 결과,
작품은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보는 것처럼 여러 층이 겹쳐 쌓인 표면 효과를 갖게 된다.
자연스러운 선의 흐름과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색의 변조로 인해,
결코 단조롭지 않은 풍요로운 이상향의 세계가 완성된다.
<줄놀이 하는 아이들> 1950년대, 종이에 연필, 유채, 32.3×49.8cm, 개인소장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7×36.4cm, 개인소장
물고기를 안고 있는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태양에 그을린 듯 붉은 색조를 띈 아이들과 초록빛의 물고기와 보색을 이룸으로써
화면에 강렬하고 싱싱한 에너지를 발산시킨다. 화면 아래 '대항' 이라는 사인은 이중섭의 어머니가 지어준 호로
'큰 고향' 이라는 뜻이다. 주로 초기 작품에 자주 나타난다. 이중섭은 식민지시대 일본에서 전시에 출품할 때에도
그 이후에도 언제나 한글로만 작가서명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와 새와 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32.5×49.8cm, 개인소장
1952년 전쟁 중에 아내와 아들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후, 홀로 방랑생활을 하던 시기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소' 는 어떤 점에서 이중섭의 '분신' 이다. 욕구를 분출할 길도 없이, 힘을 잃고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자조 섞인 표현이다. 우스꽝스럽고 해학적인 내용이지만 제작기법은 매우 공을 들인 것이다.
조명에 따라 여러가지 빛깔을 뿜어내는 작품이다.
<아이들과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5.8×19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애들과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7.7×18.5cm, 개인소장
<애들과 물고기와 게> 1954, 종이에 혼합재료, 19.3×26.4cm, 개인소장
<충렬사 풍경>
1953 - 54, 종이에 유채, 41×29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
1653, 종이에 유채, 40.9×28.2cm, 이중섭미술관 소장
<길> 1953, 종이에 유채, 40×7cm, 서울미술관 소장
<욕지도 풍경> 1953, 종이에 유채, 39.6×27.6cm, 개인소장
<까치가 있는 풍경>, 1953, 종이에 유채, 41.7×29.1cm, 개인소장
<세병관 풍경> 1954, 종이에 유채, 28.6×17cm, 개인소장
<청기와>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6×21cm, 개인소장
<벚꽃 위의 새> 1954, 종이에 유채, 49×31.3cm, 개인소장
<싸우는 소> 1954, 종이에 유채, 18×39.5cm, 개인소장
<황소> 1953년경, 종이에 유채, 35.5×52cm, 서울미술관 소장
소 한 마리가 묵직한 다리를 움직여 느린 걸음으로 화면 왼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앞발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땅을 내디디려는 순간, 고개를 돌려 관객을 쳐다본다.
살이 없이 비쩍 말라 골격을 다 드러냈지만, 육중한 동작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어깨를 치켜 올리고 뿔을 치받으려는 소의 자세는 어떠한 역경도 극복할 수 있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을 느끼게 한다. 몇 번의 붓질만으로 이처럼 해부학적으로 정확하게
소의 형상을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치 서예의 필법을 연상시키 듯,
강하고 약하고, 굵고 가늘고, 빠르고 느린 선의 흐름이 소의 형상을 지배한다.
매우 숙련된 서양식 데생의 기초 위에, 동양의 '기운생동'에 대한 이해가 더해졌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이중섭 화업의 절정기 작품으로 평가된다.
<흰 소> 1953 - 54, 종이에 유채, 34.2×53cm, 개인소장
화면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움직이는 소의 형상을 표현했다.
이러한 동작과 자세는 이중섭이 즐겨 그리던 소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유독 '흰 소'를 좋아했는데, '흰 소' 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상징이었다. 흰 옷을 입는 조선인, 인내심과 끈기로 역경 속에서 묵묵히 삶을 개척하는
조선인에 대한 암호 같은 것이 바로 '흰 소' 였다. 일본에서 결성된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체명이
처음에 '백우회(白牛會)' 였다가, 일본 당국의 탄압으로 명칭을 변경했던 적도 있다.
이 소는 마치 흰 바탕에 '먹' 으로 그린 듯한 인상을 준다.
유채물감으로 그렸는데도, 표면의 물기가 완전히 흡수된 동양화와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물기 없는 붓으로 문지르듯이 표현한 동양화의 '갈필' 그림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효과는 서양의 기초에 동양의 기운을 담으려 했던 이중섭의 의도적 장치이다.
최근 공개된 전시장 사진을 통해, 이 작품이 1954년 통영 호심다방에서 유강열, 장윤성,
전혁림 등과 함께 했던 <4인전.에 출품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흰 소> 1955, 종이에 유채, 29×41cm,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황소> 1953 - 54, 종이에 유채, 29×41.5cm, 개인소장
<황소> 1953 - 54, 종이에 유채, 32.3×49.5cm, 개인소장
황소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울부짖는 한 순간을 포착했다.
황소의 얼굴만이 클로즈업 되었는데 강렬한 기운이 온통 가득하다
마치 서예의 필법을 연상시키는 검은 선들이 지나온 인고의 세월을 증명하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경 이중섭은 통영에서 부호들의 후원을 받으며 최고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 무렵 제작된 이중섭의 <황소>는 그 어떤 다른 소들보다도 특별히 강력한 기운을 발산한다.
이중섭 개인의, 나아가 민족의 자존심을 건 작품으로 평가된다고.
<파란 게와 어린이>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9.3×22.4cm, 이중섭미술관 소장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1953 - 54, 종이에 유채, 41×31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새와 아이들> 1953, 종이에 유채, 49×34cm, 개인소장
<아이와 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6.5×64.5cm, 개인소장
<물고기와 석류와 가족>
1954, 종이에 유채, 40×27.8cm, 개인소장
<닭과 가족> 1954 - 55, 종이에 유채, 36.5×2cm, 개인소장
이중섭의 작품에는 인간과 동물이 거의 구분 없이 함께한다.
특히 '닭' 은 이중섭이 '소' 다음으로 즐겨 그렸던 소재이다.
<길 떠나는 가족> 1954, 종이에 유채, 29.5×64.5cm, 개인소장
<길 떠나는 가족> 1954년경, 종이에 유채, 22×51cm, 개인소장
아직은 태양이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온 가족이 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누런 소가 끄는 수레에 엄마와 두 아이가 타고 있고, 아빠는 의기양양한 자세로 한 팔을 치켜든 채
황소를 끌고 있다. 수레 위의 한 아이는 아무 걱정도 없이 새 한 마리와 장난을 치고 있고 꽃잎들이 축복하듯
이들의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빛이 화면의 왼쪽에서부터 들어와 이 무리를 비추어줌으로써, 화면 전체는
강렬한 극적 효과를 갖게 된다. 이중섭은 곧 열릴 개인전이 성공하면 이내 가족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중섭은 끝내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1956년 생을 마감하고 만다.
<아버지와 장난치는 두 아들> 1953 - 54, 종이에 유채, 39.5×48cm, 개인소장
<아버지와 장난치는 두 아들> 1952 - 53, 종이에 유채, 32×49cm, 개인소장
<부부 A Couple>
1953, 종이에 유채, 40×2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투계 Cokfighting> 1955, 종이에 유채, 28.5×40.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싸우는 소> 1955, 종이에 유채, 26×38.5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소와 아동> 1954, 종이에 유채, 29.8×64.5cm,
<물고기와 나뭇잎> 1954, 종이에 유채, 27×39cm, 개인소장
<너를 숨쉬고> 1950년대, 종이에 유채, 16×15cm, 개인소장
<환희> 1953, 종이에 유채, 29.5×41cm, 서울미술관 소장
<사계> 1950년대, 종이에 유채, 19.3×23.8cm, 개인소장
<호박>
1954, 종이에 유채, 54.5×2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호박꽃> 1954 - 55, 종이에 유채, 62×98cm, 개인소장
풍성한 호박넝쿨이 가득 화면을 채우고 있다. 호박꽃이 푸근하게 피고, 넝쿨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호박이 탐스럽게 영글어 간다. 분명 호박넝쿨을 그린 것이지만, 작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마치 추상화를 보는 것처럼 자유로운 필획들이 화면을 지배한다. 매우 즉흥적이고
거침없는 표현은 작가의 격정적인 정신 상태를 반영한다.
<문현동 풍경> 1953, 종이에 연필, 유채, 15.1×21cm, 개인소장
<동촌 유원지> 1950년대, 종이에 유채, 19.3×26.5cm, 개인소장
<왜관 성당 부근> 1955, 종이에 유채, 34×46.5cm, 금성문화재단 소장
이중섭의 친구인 시인 구상은 왜관의 관수재(觀水齋)라는 자신의 집에 이중섭이 자주 머물렀다고 회고 한다.
이 성당은 관수재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데, 정신적 은신처가 필요했던 시기, 정신병원을 오가는고통속에
나날을 보내던 무렵 제작된 작품이다.
<시인 구상의 가족> 1955, 종이에 유채, 32×49.5cm, 개인소장
<가족과 비둘기>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9×40.3cm, 개인소장
한 면에는 <가족과 비둘기>, 다른 면에는 <회색소>가 그려진 양면화이다.
<회색 소> 1956년경, 종이에 유채, 29×40.3cm, 개인소장
다른 면에 그려진 회색빛깔의 소는 미완성작으로 추정된다.
이중섭의 다른 '소' 에 비해 지쳐있고 기운을 잃은 회색빛이다. 1955년 중반 이후 정신적인 질환 가운데
제작했던 것으로 전해지면, 이중섭의 주치의였던 정신과 의사 유석진이 소장했던 작품이다.
<소> 1955년경, 종이에 유채, 27.5×43cm, 서울미술관 소장
늘어뜨린 얼굴의 이마에는 상처가 나서 피가 묻어있고, 바닥으로는 선연한 붉은피가 뚝뚝 떨어진다.
전체적으로 침울하고 거친 느낌을 강조한다. 정신병원을 오가며 온갖 고초를 겪고, 가족들에게
더 이상 편지조차 쓰지 못하던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작가 자신이 처한
비극적 현실을 여지없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 1950년대, 종이에 유채, 30×45cm, 금성문화재단 소장
<무제> 1955년경, 종이에 유채, 34.5×24.5cm, 개인소장
<무제> 1955년경, 종이에 유채, 34.5×24.5cm, 개인소장
<정릉 풍경> 1956, 종이에 유채, 44×30cm, 개인소장
<나무와 노란 새> 1956, 종이에 크레파스, 14.7×15.5cm, 개인소장
<나무와 달과 하얀 새> 1956, 종이에 크레파스, 유채, 14×19.5cm, SAN 소장
<노란 태양과 가족> 1955, 종이에 혼합재료, 15×14cm, 개인소장
<돌아오지 않는 강> 1956, 18.5×14.5cm, 개인소장
<돌아오지 않는 강> 1956, 종이에 유채, 20.2×16.4cm, 박동건 소장
<돌아오지 않는 강> 1956, 종이에 유채, 18.8×14.6cm, 임옥미술관 소장
한 소년이 자그마한 집 창문에 기대어 물끄러미 관객을 향하고 있다. 지친 표정으로 창틀에 얼굴을 기댄 체,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저 뒤에는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장에 갔다 돌아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관객들은 곧 어머니가 집으로 도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소년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다. 함박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강> 1956, 종이에 유채, 18.8×14.6cm, 임옥미술관 소장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은 이중섭의 절필작이다. 1956년 서울의 정릉 골짜기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제작된 것이다, 이 작품의 뒷면에도 같은 연작의 드로잉이 그려져 있다. 뒷면의 드로잉은
크레파스로 그려졌고, 개 한 마리가 더 등장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 특이한 제목은 이중섭과 함께 있던
친구들이 지은 제목으로, 마릴린 먼로가 주연을 맡았던 동명의 영화제목을 따른 것이다. 이중섭이 짧았던
생애 마지막에 그린 작품으 주제는 바로 '어머니'였다. 한국전쟁 중 어머니를 북녘에 홀로 남겨둔 채
내려온 것에 대한 죄책감은 이중섭을 늘 괴롭혔다. 마침 1956년에는 36월인데도 원산을 포함한
영동일대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 이재민이 속출했다는 신문기사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안은 채, 이중섭도 같은 해 생을 마감했다.
● 드로잉 Drawings
대부분의 드로잉은 엽서나 담뱃갑 은지, 혹은 종이 위에 먹이나 잉크, 크레용, 과슈, 수채와 유채를 다양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기법 면에서도 암각화나 분청사기의 선묘를 연상시키는 표현 기법, 수묵화의 번지기,
먹지에 베껴 그리기, 수채와 유채의 혼용 등 기발하고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월남하여 창작 여건이 열악한 가운데서도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작업을 했는가 하는 점은
한 종이의 앞 뒷면을 이용해서 그린 여러 점의 양면화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신화에서> 연도미상, 판화, 15×9cm, 개인소장
<소> 1941, 종이에 연필, 23.5×26.5cm, 개인소장
이 작은 연필화는 마치 습작처럼 보이지만,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소 한 마리가 애써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순한 눈을 하고 뿔은 축 쳐져서 그다지 힘이 세어 보이진 않지만
구부린 앞발을 디뎌 올리면 곧 일어설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화면 왼쪽에 두 앞발이 희미하게 그려진 체 보이는데,
이것은 실수로 그렸다 지운 흔적이 아니라 바로 구부리고 있는 저 앞발의 다음 동작을 예시하는 것이다. 즉 이 연필화는
두 개의 시간대를 합성한 것이다. 이중섭은 이 작품을 1942년 도쿄에서 열린 제6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했다.
그나마 자유정신을 가진 일본인들이 모인 미술단체 전시였는데, 원래는 1937년 '자유미술가협회' 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점차 심해지는 군국주의 분위기 속에서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로 명칭을 바꾸어야 했다.
이중섭은 이 일본인들의 미술단체전에 보란 듯이 의도적으로 '일어서는 소' 를 출품했다.
일제 강점기에 '소' 는 지식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조선인에 대한 '코드' 였다.
즉 이 소는 식민치하의 조선인, 그리고 이중섭 자신의 자화상인 것이다.
비록 크기는 작고 가녀린 연필로 그려졌지만
슬프고도 힘찬 기운을 간직한 소이다.
<세 사람> 1945년경, 종이에 연필, 18.2×28cm, 개인소장
<소년> 1945년경, 종이에 연필, 26.4×18.5cm, 개인소장
<가족> 1950년대, 종이에 연필, 15.7×21.9cm, 개인소장
<부산풍경> 1950년대, 종이에 연필, 15.7×21.9cm, 개인소장
<비둘기> 1950년대, 종이에 연필, 22×14cm, 개인소장
<비둘기와 손> 1950년대, 26.5×19.5cm, 개인소장
<물고기와 동자> 1952, 종이에 콘테, 10.1×12.5cm, 개인소장
이 작품은 1952년 10월 4일자 <주간문학예술> 이라는 타블로이드판 주간지의 삽화로 처음 실렸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화랑엣 열린 이중섭의 개인전 팜플렛 표지화로도 쓰였다.
<네 어린이와 비둘기> 1950년대, 종이에 연필, 31.5×48.5cm, 서울미술관 소장
<복숭아와 아이들> 1950년대, 종이에 유채, 10×12cm, 금성문화재단 소장
<꽃과 어린이> 1950년대, 종이에 크레파스, 18×26.2cm, 개인소장
<개구리와 어린이> 1950년대, 종이에 잉크, 유채, 10.5×25.7cm, SAN 소장
<다섯 어린이> 1950년대, 종이에 잉크, 유채, 24.3×18.4cm, 개인소장
<헌병에 쫓기는 사람들> (김이석 소설 <휴가>의 삽화 시안)
1952, 종이에 혼합재료, 17.5×11.5cm, 개인소장
<사슴과 두 어린이> 1950년대, 종이에 연필, 유채, 13×19.4cm, 개인소장
<꿈에 본 병사>(문중섭의 전쟁수기 <저격능선> 표지화 번안본)
1954, 종이에 유채, 26.2×18cm, 개인소장
<결박>(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황금충> 표지화 번안본)
1954년, 종이에 유채, 19.2×15.4cm, 개인소장
<달과 손> 1950년대, 종이에 잉크, 21.1×16.2cm, 개인소장
<달밤> 1950년대, 종이에 잉크, 유채, 23×17cm, 개인소장
<여인과 게> 1953년경, 종이에 목탄, 19×19cm, 서울미술관 소장
<자화상> 1955년, 종이에 연필, 48.5×31cm, 개인소장
<북한산성과 경복궁> 1955, 종이에 유채, 25×17cm, 금성문화재단 소장
<꽃과 노란 어린이> 1955, 종이에 연필, 크레파스, 22×1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꽃과 어린이와 게> (현대문학 1955년 4월 목차화), 종이에 펜, 6×42cm, 개인소장
이중섭의 그림은 서양미술의 비평적 분석방식 보다는 오히려 동양회화의 근본원리를 정리한
사혁의 화육법론(畵六法論)을 적용하면 잘 어울린다. 작품 속에 깃들어 있는 생동하는 혼과 정신(氣韻生動),
사물의 형상을 묘사하는데 있엇 구조적인 필획의 사용(骨法用筆), 정확한 관찰에 의거한 대상의 묘사,
적절한 색채의 구사와 표현, 전체적인 구도와 설계, 모사와 반복을 통한 끊임없는 수련 등 동양미학의 가치가
그의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화의 방법론을 구사하면서 새로운 실험과 모색을
거듭하였지만 근본에 있어서 동양의 전통과 미학을 잃지 않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작가이기도 했다.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드로잉, 선묘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용: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 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