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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한국 추상미술의 미의식

- 한국 추상미술에 나타난 자연관 -

 

한국 추상미술이 보여주려는 많은 미적 가치의 내용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

자연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일조의 메타포인데, 그 중에서도

'참으로 존재한다' 는 뜻의 '실재實在' 의 메타포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들의 자연관은 삶의 리얼리티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인다.

즉 표현된 자연은 한국인들의 역사와 문화 등의 온갖 현실적 요소들을 반영한다.

추상미술은 비재현적인 방식으로 자연의 본질을 표현한다.

추상은 기하학적인 경향과 서정적인 경향으로 구분되는데,

한국의 추상미술은 서정적인 경향을 더 부각한다고 평가된다.

작가들은 추상기법을 통해 근원적 자연을 상징하는 미적 가치를 표현한다.

 

 

이태현, <공간 70-1>, 캔버스에 유채, 130.5×129.5cm, 국립현대미술관

 

기하학적인 요소들을 화면에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무한대로 펼쳐진 공간의 환영을 생성하여

자연과 우주에 대한 새로운 감성을 일깨워 준다. 이지적이고 명쾌한 화면 구성을 택하면서도

평면에 3차원적 공간의 환영을 신비롭게 구현하고 있다.

 

 

 

 

이승조, <핵 F-77>, 캔버스에 유채, 145×145cm

 

평면에 파이프 같은 형태를 수펴오가 수직의 엄격한 구조 속에 배치한다.

여기서 파이프 형태가 갖는 규칙적인 음영효과는 볼록함과 오목함이라는 시각적 환영으로

옵아트적 효과를 주면서 무한히 연속되는 리듬감과 다차원적 공간감을 보여준다.

 

 

 

 

서승원, <동시성 76-42>, 1976, 캔버스에 유채, 130.3×97cm

 

<동시성> 연작을 통해 평면 속에 3차원의 공간이 동시에 여러  개가 존재하는 듯한 화면을 구성한다.

기하학적 질서가 지배하는 지적인 화면을 구축하지만 동시에 여백의 면적을 넓게 확보하여

무한한 공간을 암시한다.

 

 

 

 

김태호, <형상 85-15>, 1985, 캔버스에 아크릴릭, 72×91cm

 

수직과 수평의 질서 속에서 유기적인 형태를 함께 배치하여

마치 인체의 요소들이 변형된 것 같은 형상을 보여준다. 특히 그는 명암의 대비에 의해

빛의 효과를 추구함으로써 옵아트적 조형을 추구한다.

 

 

 

 

주경, <파란>, 1923, 캔버스에 유채, 53.2×45.6cm,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최초의 순수 추상작품이다.

운동감이 강한 사선과 예각 등을 활용한 미래파적인 양상을 보이는 이 작품은

일종의 실험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유영국, <작품 4(L24-39.5)>, 1939(1979년 재제작), 나무에 유채, 70×90CM

 

작가는 1930년대 후반에 구성주의적 추상을 통해

자연의 본질을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재구성한 작품을 보여준다.

이후 그는 자연 대상을 모티프로 삼은 비구상작품을 주로 제작하는데

가장 선호한 대상은 山이다.

 

 

 

 

 

유영국, <바다풀>, 1959, 캔버스에 유채, 130×96cm, 용인 호암미술관

 

 

 

 

 

 

 

 

김환기, <론도>, 1938, 캔버스에 유채, 162×130cm, 국립현대미술관

 

바이올린을 배우고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던 김환기는 론도 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추상적인'

회화 언어(선, 면, 색)로 황원하여 한국의 선구적인 추상작품을 남겼다. 론도는 원무곡圓舞曲을

가리키는 음악 용어로, 하나의 주제가 다른 여러 개의 주제와 섞여서 나타나는 악곡이다.

 

 

 

 

 

김환기, <피난열차>, 1951, 캔버스에 유채, 37×53cm, 개인 소장

 

피난 열차에 탄 피난민들의 모습은 아기자기한 기하학적 형태들로 배열되어 삶의 혼란과

고통의 흔적이 가려져 있다. 참담한 현실에 대한 저항과 이를 초극하려는 작가의 밝고

낙천적인 세계관이 반어적인 정신으로 드러난다.

 

 

 

 

 

김환기, <산>, 1958, 캔버스에 유채, 65×81cm, 개인 소장

 

평론가들은 김환기가 한국적인 멋에 산 예술가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구름과 달, 항아리와 여인 등 자연을 탐색했던 시기에 그의 작품은 흐르는 선과 살아 있는 호弧 등

신비로운 함축성을 나타내고, 후기 작품에서는 자연의 숨소리를 엿듣게 하고 있다.

 

 

 

 

 

김환기, <16--70>(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작)

1970, 면천에 유채, 231×172cm, 개인 소장

 

 

 

 

박서보, <회화 No.1>, 캔버스에 유채, 95×82cm, 개인 소장

 

 

 

 

서세옥, <작품>, 1962, 100×70cm

 

1950년대 말부터 젊은 작가들이 선도했던 앵포르멜 경향의 추상은 한국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1960년대의 한국화에서는 기법과 형식에서 앵포르멜 작품과 유사한 작품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서세옥을 중심으로 박세원, 민경갑, 신영상, 장선백, 장운상, 안동숙, 정탁영이

1960년에 결성한 '묵림회'의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다. 수묵과 담채의 은은한 깊이감,

운필효과 등을 추구하여 수묵채색화의 분위기와 문인화의 전통을 되살리고 있다.

 

 

 

 

 

이종상, <기-맥 2>, 1964, 화선지에 수묵, 127×63cm

 

이종상은 1960년대 중반 수묵추상을 선보이는데 이는 전후의 어두운 의식을 반영한다.

검은색은 죽음과 실존적인 침묵을 나타내지만 솟구쳐 올라가는 유사한 형태들의

운동감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을 암시한다.

 

 

 

 

박석원, <초토>, 1968, 청동, 130×150×50cm

 

1960년대 조각 분야에서는 재질감이 강하고 형태가 정형화되지 않은 추상조각들이 등장한다.

일그러지고 파괴된 구球 형의 변형들은 환경의 파괴와 황폐화된 우주를 암시한다.

원래 원圓과 구球는 완전한 것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박석원의 작품에서는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고 뾰족한 모서리가 날카롭게 뻗어 있어

내적인 갈등이 밖으로 표출된 형상을 암시한다.

 

 

 

 

 

송영수, <순교자>, 1967, 동, 125×80×2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철은 늘이거나 용접으로 붙이기 쉬우며 그 결과 표면 효과의 거친 질감은 그대로 활용될 수 있다.

1960년대에는 이러한 철의 재질감을 부각한 철제 용접조각이 여러 작가들에 의해 시도된다.

고영수, 박종배, 송영수, 엄태정, 오종욱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 단색조 회화 -

 

최명영, <Sign of Equality 75-21>, 1975, 캔버스에 유채, 160×130cm

 

단색조 회화을 주도했더 대표적이 작가는 박서보, 윤형근, 하종현, 최명영, 권영우 등이다.

이러한 단색조 회화느 1960년대 말 이래 한국화단의 주된 조류였고 이후 1980년대까지

영향을 미친다. 당시 작가들은 그룹전에서 유사한 경향의 작품을 동시에 출품하였기 때문에

'집단 개성의 미술' 로도 불렸다.

 

 

 

 

윤형근, <UMBER-BLUE>, 1975, 리넨에 유채, 113×93.5cm

 

이런 경향의 미술은 서구 미니멀리즘과 형식적인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독특한 동양적 정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서구와 차이가 있다. 또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어

한국적 모더니즘 미술의 전성기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고, 평면성의 논리를 고수하는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너무

몰입해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박서보, <묘법 No,14-78>, 1978, 캔버스에 연필과 유채, 195.4×300.5cm, 삼성 리움미술관

 

1970년대 추상작가들이 자연을 상징하는 데 많이 활용했던 기각기호는 조형의 근본 요소인

점, 선 그리고 원이다. 점과 선은 모든 회화적 표현의 기초가 되지만, 미니멀적인 형상화 방식을

지향하는 한국 추상작가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수단이다. 특히 이우환, 박서보와 같은

작가들은 일정 시기 동안에 이 두 요소를 기반으로 작업한다. 점은 위치를 나타내는 단절된 기본

요소로, 이 점들이 반복되면서 선적인 것으로 연장된다. 선은 표면에 그어진 흔적이고, 공간에

남겨진 시간의 자취이기도 하다. 손으로 그은 그 자취는 신체적인 것이 갖는 힘과 인간적인 것의

흔적을 시사한다. 반복적으로 그어진 선은 유사해 보이지만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삶의

조건에 대한 메타포다. 이러한 점과 선은 자연의 리드모가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

여겨져 1970년대 단색조 추상회화의 가장 빈번한 모티프가 된다. 점과 선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본질

적 형태이기도 하다. 구상보다는 추상으로 나아갈수록 작가들은 본질적 형태를 중요시하는 경향이다.

본질적 형태란 가장 단순한 표현수단이면서도 정신적 메시지를 대변하는 은유다.

 

 

 

 

 

높이 45.0cm 몸체지름 44.0cm 입지름 21.0cm 밑지름 17.0cm

18세기 전반 / 국보 제310호 / 남화진 소장

 

원은 또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다.

70년대 추상작가들은 경직되고 기계적인 것을 지양하고, 원이 주는 자연스럽고 원만한 이미지를

선호했다. 이러한 원은 인간이 직접 찍거나 그렸다는 흔적이 보이도록 표현되고, 원을 대신하여

타원이 형상화되기도 했다. 타원은 한국인들의 삶에 녹아 있는 자연스러운 원형 이미지에 가깝다.

바가지와 한국적인 미의 사례로 종종 거론되는 <백자 달항아리>가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근현대 작가들 중 백자를 사랑했던 이들로 김환기, 도상봉 등이 있는데 이들은 회화작품에 백자를

모티프로 넣을 때 일부러 완전한 형을 일그러뜨리기도 했다. 이런 예들은 자연스러움을 지향하고,

자연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려는 한국적 미의식의 추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서보, <묘법 n=No,55-73>, 1973, 캔버스에 연필과 유채, 195.4×290.5cm, 구겐하임미술관

 

박서보는 <묘법> 연작에서 무심히 반복되는 잔 사선으로

'무위자연無爲自然' 의 이념을 표현한다.

 

 

 

 

 

左) 최명영, <평면조건 8108>, 1981, 캔버스에 유채, 65×90.5cm

右) 허황, <가변의식 78-Q>, 1978, 캔버스에 유채, 116×91cm

 

최명영은 롤러로 물감층을 겹겹이 쌓아가는 전면회화를 통해 깊어지는 색조와 물감이 갖는

질료적 효과를 탐구한다. 이미 칠해진 선면을 다시 덧칠하고 두꺼운 층을 쌓아가면서 미묘한

색조의 환영을 만들고, 이를 통해 안료라는 물질적 성질과 그것이 일으키는 비물질적

실재로서의 환영 사이에 존재하는 대비를 추구한다.

 

허황은 여백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실재를 암시하는데 바랜 듯한 희끄루레한 백색을 전면적으로

칠하고 화면 가장자리에 희미한 얼룩을 우연처럼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거의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화면을 통해 보이는 것 너머의 실재에 대해 묻고 있다. 이 같은 작가들으 작업은 평면이라는

캔버스의 조건을 지속적으로 환기한다는 점에서 회화 자체가 갖는

문제에 대한  물음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적인 특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요소가 우연성이다.

작가들은 종종 제작 행위와 결과물을 통해 우연적인 효과를 얻으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1970년대 단색조 회화의 흐름에도 나타난다. 우연성은 인간이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자연'이 발언하는 것이며, 자연과의 우연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작품에 우연성을 침투시킴으로써 인간의 의도를 넘어

자연에서 더 큰 것을 얻고자 한 것이다.

 

 

인용 : 이주영 저 <한국 근현대미술의 미의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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