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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실크로드의 거대 제국들

아프로유라시아 대륙 곳곳의 큰 강들은 평원에 물을 공급해 부와 교역을 늘리고 제국을 성장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제국들 가운데는 황하와 장강의 물을 이용하는 중국 평원에 들어선 한 왕조(서기전 202~서기 220),

인더스강 유역과 중앙아시아에서 바다로 나가는 통로를 지배한 쿠샨 제국(1~3세기), 이란 고원에 세워진

파트리아 제국(서기전 247~서기 224),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지중해 일대의 로마 제국(서기전 27~서기 395)

등이 있었다.

 

 

 

1221년의 인더스강 전투.

호라즘 기병대가 강을 건너 칭기즈칸의 군대로부터 달아나는 모습이다.

징기즈칸 서사시를 엮은 이 책에 나오며, 반와리 후르드와 다름다스가 1596~1600년에 그렸다.

 

 

 

파르샤 부근 나크시에로스탐의 아케메네스 및 사산 공동묘지에 있는 바위 돋을 새김 조각.

사푸르 1세(재위 240~270)와 발레리아누스(재위 253~260)에게 승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콥트의 양모 및 아마포 각반 잔편에 새겨진 전투 장면.

중앙의 사산 황제 호스로 2세(재위 590~628)와 악숨 왕국 군대가

남부 아라비아 함야르에서 벌인 전투 장면으로 비정한다.

 

 

 

 

 

캅카스에서 나온 사산 주화

 

5세기 말 이후 사산 제국 주화가 더 많이 캅카스 지역으로 들어왔다. 거의 대부분이 드라크마 은화였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사산 영토 전역의 주조소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2천 개 가까운 아르메니아 및 조지아에서 나온 표본이 공개되었다. 주로 주화 저장고에 있던 것이다. 7세기 초에는 상당한 양의 동로마 은화 역시 사산 드라크마와 함께 캅카스 지역에서 유통됐다. 조지아 데도폴리스츠카로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1385개의 사산 드라크마아 열 개의 동로마 은화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산 제국은 또한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에 현지 주조소를 운영했다. 그곳에서 발행한 주화에는 파흘라비 문자로 ALM이나 WLC에 해당하는 주조소 펴시가 들어 있는데, ALM은 아르민, 즉 아르메니아를 나타내고, WLC는 위루찬, 즉 조지아 중동부를 의미한다. 위 사진들은 호스로 1세와 아르다시로 3세의 주화다. 사산 드라크마가 현지 발행 통화들의 모델 노릇을 했는데, 현지 통화 대부분에는 아직 제대로 해독하지 못한 'ZWZWN'이나 'GWGWN' 같은 표시가 들어 있다. 드물게 나오는 일부 주화에는 조지아의 전승이 담겨 있는데, 그 연대에 대해서는 현재 논란이 있다. 이 주화들은 과거 6세기 말의 것으로 여겨졌으나, 8세기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일부는 사산 주화에 있던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적 상징들을 십자가 같은 기독교의 도안으로 바꿔놓았다. 현지 기독교도 지배층의 문화적 ·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동로마 황제 테오필루스(재위 829~842)와 그 옆의 두 경호병.

이들 경호병은 대체로 북유럽 출신으로 구성된 정예 바랑고이 경호대 소속이다.

그리스 역사가 요안네스 스틸리체스의 11세기 저술 ≪역사 개요≫에 나온다.

 

 

파르티아인들은 스텝 변경에서 이란고원과 메소포타미아의 강가 평원에 정착하고 실크로드 교역망의 일부가 됐다. 그들은 사산 제국(224~65)에 밀려났고, 그 서쪽의 로마 제국은 둘로 나뉘어 동로마가 사산과 접경한 지역을 통치했다. 한편 중국은 여러 왕국들이 이어가며 지배했|는데, 그 가운데 몇몇은 스텝출신의 튀르크족이었다. 그러다가 수(581~618)에 의해 재통일되고 이어서 당(618~907)이 들어섰다. 아무다리야강 남쪽의 박트리아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만들어진 연결망을 처음으로 이용한 무역 집단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강 북쪽의 소그드인은 그 동쪽과 북쪽 상당 부분을 지배한 것으로 유명했다. 호라즘인들은 북쪽으로 카스피해 북안의 스텝과 볼가강 및 돈강 주변의 평원으로 가는 통로의 지배자였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루시인들은 여기서 무역을 하기 위해 남쪽으로 흐르는 유럽의 큰 강들을 이용했다. 고향을 떠난 파르티아인, 페르시아닌,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상인들 역시 잇달아 여려 육상 및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게 됐고, 그들의 관여는 이슬람교의 전파와 함께 확산됐다.

7세기 이후 아랍의 칼리파국들은 지중해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메소포타미아 및 이란고원을 지나 당 제국의 경계에 도달했다. 두 세력은 중앙아시아에서 충돌했다. 751년의 탈라스 전투였다. 여기서는 이슬람 세력이 이겼지만, 중앙아시아는 두 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장소였다.

튀르크족이 스텝에서 이동해 이 지역 일부를 지배했지만, 중앙아시아에서 제국의 경계가 무너진 것은 몽골족이 스텝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이동해 확장하기 시작한 이후였다. 몽골족은 북중국의 강가 평원을 점령했고, 그런 뒤에 스텝과 중앙아시아를 가로 질러 이란고원과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멀리 유럽의 경계까지 들어갔다. 드들의 지배는 전통적인 지리적 경계를 넘어 |뻗어 나갔다.

 

 

 

 

남아시아의 동로마 주화

 

500개 가까운 동로마 금화가 남아시아에서 분명하게 확인됐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모아진 것이며, 거의 대부분 인도반도 남부에서 발견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 치세 이후의 것은 매우 드물다. 구멍 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장식용으로 사용됐던 듯하고, 현지에서 모방품을 만들기도 했다. 이와 함께 4~5세기에 발행된 동로마 동전 수천 개가 심하게 닳은 상태로 발견됐다(오른쪽). 주로 타밀나두에서였다. 많은 수의 주화가 또한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목적은 분명하지 않다. 5세기 말 스리랑카에서 이것들이 소진되자 그들은 잠시 현지에서 모방품을 만들었고, 이것 역시 진품과 마찬가지로 보관되었다. 귀금속 주화가 발견되는 경우는 많지 않으며, 이런 주화들은 스리랑카가 서부 인도양 교역로에 참여했다는 증거물이 되고 있다.

 

 

 

 

초기 이슬람 세계의 주화

 

무함마드(570?~632)의 고국인 히자즈(아라비아반도 서쪽 홍해 연안 지역의 명칭)는 현지에서 주화를 만든 전통이 없었다. 그곳에서 유통된 많지 않은 주화는 동로마와 사산 제국에서 온 것이었다. 7세기 중반에 동로마와 사산 영토를 침략한 이슬람교도들은 지배자와 국가 종교(각기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다)를 강조한 전통적인 주화를 접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과거 동로마 지역에서 동로마 동전을 모방한 주화를 발행했는데, 거기에는 기독교의 상징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이슬람교식으로 바꾼 초기 사례는 드물게 보일 뿐이다. 우마이야 칼리파 압둘말리크 이븐 마르완(재위 685~705) 치세에 별도로 아랍 도상을 넣은 주화(위 왼쪽)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앞면에는 칼리파의 초상이 들어갔다. 그러나 발견된 주화는 693년부터 696년까지 단 4년의 짧은 실험 단계의 것들이다. 동쪽의 사산 지역에서는 드라크마 은화에 기본적으로 조로아스터교 도상이 들어갔다. 아랍어로 짧은 종교적 문구를 추가했고, 사산 왕의 이름을 아랍 지배자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위 오른쪽에 보인 우바이달라 빈 지야드(?~686) 주화(오른편)가 그 한 예다. 696~698년의 통화 대개혁은 그림 요소를 모두 배제하고 쿠루인의 내용을 쿠파 문자로 새기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주화 유행을 창조했다. 이것이 이슬람 주화의 시작이었다.

 

 

(왼쪽) 호스로 2세로 보이는 사산 황제의 모습을 담은 비단 세이마이트.

7~8세기 사산 또는 중앙아시아에서 직조한 것이다.

(오른쪽) 유리와 금박으로 만든 4세기 초의 원형 장식.

여성과 아이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로마 제국의 알렉산드라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좌) 유약과 광택제를 바른 1200년 무렵의 병.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을 한 소상(小像)

(우) 장안에서 출토된 7~8세기 중국 귀족 부인의 소상

산화 코발트로 만든 암청색 유약은 7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이란에서 중국으로 수입되었다.

 

 

 

이 모든 제국들의 종교는 그 제국과 함|께 확산됐다. 조로아스터교는 사산 제국과 함께, 이슬람교는 아랍인들과 함께, 기독교는 로마 및 동로마 제국과 함께 확산되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살아남고 번성한 다른 종교아 신앙들도 여럿 있었다. 강의신 와흐시 같은 신들을 가진 박트리아의 현지 종교미술에는 그리스 · 인도 · 이란의 종교적 도상이 섞여 있었다. 미술 전통은 때로 융합돼, 아프가니스탅 바미얀 북쪽의 도흐타르이누시르완 동굴의 니가르 벽화 같은 독특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이 그림에는 사산계 이란풍의 왕과 신들에 대한 묘사가 간다라의 불교 · 힌두교 예배용품과 표지물에 들어가 있다.

 

 

인용: 투라지 다리어이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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