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점토는 아프로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어느 곳에서나 얻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을 꼽자면 큰 강들인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 및 유프라테스강 유역과
중국 황화 및 장강 유역의 범람원들을 들 수 있다.
9세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든 저장용 단지
암청색 유약을 바르고 녹색 칠을 했다.
초기의 도자기들은 색깔이나 섬세함에서 지역 점토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유약 바르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수입된 아이디어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녹색 무늬를 넣거나 뺀 중국 백자가 대표적이다. 도자기는 언제나 교역품의
일부였다. 지배층을 위한 고급 도자기라는 형태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기름, 포도주, 대추야자꿀 같은 상품들을
넣어 수송하는 용기로 쓰였다.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도자기는 그 환경을 반영한 것이지만, 도시 정착 또한 서기전 4세기 중후반 무렵의
해상 교역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 서기전 336~323)은 바스라에서 내륙 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티그리스 강변에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알렉산드로스는 점령지역 곳솟에 도시를 건설하고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를 건설했다. 나중에 이 도시는 카락스스파시누로 알려졌고, 지금은 나이산
으로 불린다. 파르티아(서기전 247~서기 224) 및 사산 제국(224~651) 치하에서 이곳은 팔미라, 하트라 등 광역
이란권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들의 상품들이 들어오는 큰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이들 제국의 행정 중심지이자 겨울 수도는 오늘날 바그다드 남쪽에 있던 크데시폰이었다. 이 도시는 티그리스강
양안에 걸쳐 있었다. 주민은 여러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이란인, 아랍인, 유대인이 있었고, 나중에
아랍인도 들어왔다. 크레시폰은 637년 바그다드가 건설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곳에서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및 그 지류 유역들의 경작 지역을 지배하고 세금을 거뒀다. 대략 북쪽의 티크리트에서 남쪽의 바스라와 아랍강
사이였는데, 복잡한 수로망과 육로를 통해 통제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든 9세기 사발.
암청색 쿠파 문자가 쓰여 있다. 모양과 불투명한 흰색 유약은 중국 석기를 모방한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도자기
글씨는 이슬람 문화의 여러 맥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도자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9세기의 접시는
지름이 28센티미터이며,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축복과 행운'이라는 의미의 암청색
글씨가 쓰여 있다. 이것은 쿠파 문자인데, 초기 필사본들이나 건축의 장식에도 사용됐다. 예루살렘 바위돔이
그 예이다. 이 도자기는 도기지만, 유약과 장식은 수입된 중국 자기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슬람 세계의 도공들은
불투명한 흰색 유약으로아마도 중국 백자를 복제하려 했던 듯하다. 중국 백자는 더 높은 온도에 구워 더 단단하고
더 나은 광택을 낸다. 산화동과 산화철로 만들어지는 녹색 장식을 흰색 유약 위에 칠해, 아마도 중국의
삼채(三彩) 도자기를 복제하려 한 듯하다.
2~3 세기 파르티아의 유약 바른 도기들.
동남쪽으로 오늘날 이란의 후제스탄 평원과 자그로스산맥 서쪽 지역 역시 이 네트워크의 일부였다. 큰 수로를 따라 도시 정착지들이 생겨났고, 수백 년에 걸쳐 이 강들은 평평하고 특별한 지형이 없는 층적토 평원을 만들어 냈다. 서쪽은 황량한 고원으로막혀 있었다. 둑과 보를 만들었지만 강이 자주 범람했고, 물이 경지를 가르며 흘러 강줄기가 변했다. 일부 옛 정착지들이 오늘날 강줄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유가 바로 그때문이다.
이 지역 일대에서는 건축 자재가 진흑과 구운 벽돌, 석고 및 석회석 반죽 등으로 제한돼 있었다. 바닥을깔고 벽돌가마 불을 때는 데 대추야자 잎과 갈대를 썼고, 지붕을 얽는 데는 대추야자줄기를 썼다. 조금 큰 건물에는 수입한 티크 제목을 썼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은 벽돌을 구우면 독특한 항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초기 이슬람 도자기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바스라 바탕색'으로 알려진 것과 같은 색깔이다. 원자재가 제한되다 보니 장식 형태도 천편일률이 됐다. 예를 들어 큰 주택에서는 안쪽 벽의 아래 절반은 틀에 찍거나 조각한 치장 벽토를 사용했고, 어떤 경우에는 그 위쪽에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알려지 양식 자료집을 사용하면 발굴된 잔편의 연대와 유래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6세기 것인 크테시폰의 틀에 찍은 치장벽토 타일은 비스듬히 잘린 사면(斜面) 양식인 사마라의 9세기 아바스 다도 판과 구별된다.
아바스 시대의 가마.
최근 시리아 락까에서 베로니크 프랑수아 등이 발굴했다.
어느 시기에나 도자기는 저장 용기나 금고, 식기 등으로 사용된 중요한 제품이었으며, 배수구나 매장 용기, 건축 자재로 재활용 되었다. 큰 그릇에는 물이 새지 않게 안에 역청을 발랐고, 작은 그릇에는 유약을 칠했다. 점토 종류로 기록된 것은 여러가지지만, 지배적인 것은 황색 석회암 유형이다. 파르티아 '신발형 관'과 저장 용기, 사산의 유약 칠한 도기, 그리고 초기 이슬람 시기 불투명한 백색의 이른바 '바스라 도기' 등에서 사용되었던 종류다.
9세기 아바스 시대 사마라의 칼리파 주거지의 장식용 치장 벽토.
1911~1913년 프리드리히 자레(1865~1945)와 에른스트 헤르츠펠트(1879~1948)가 발굴했다.
6세기 사산 시대 귀족 저택 장식에 쓰였던 치장벽토.
티그리스 강변의 크테시폰 유적지에서 출토.
역사 자료들은 칼리파 알무타심(재위 833~842)이 836년 사마라를 건설할 때 바스라, 쿠파, 바그다드에서 도공들을 데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승기류형 가마는 곳곳에 있었다. 발굴에서 가마가 발견되었다고 보고된 곳은 크테시폰, 바빌론과 몇몇 다른 유적지의 파르티아 및 사산 충위들이다. 티크리트 바로 북쪽의 이슈르에서는 편자형 가마와 순환형 가마가 발굴되었다. 사실 발견된 가마 설비로 판단해보면 파르티아와 사산, 그리고 이슬람 제국의 기법 사이에는 유약을 제외하고는 과학적인 차이가 별로 없었다. 영국국립박물관에 있는 우루크 출토의 녹색 유약을 바른 커다란 신발형 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만든 곳에서 멀리 옮기기에는 너무 연약하고 크다. 도자기 작업장이 여러 도시 유적지에 있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예비 연구에 따르면 도자기 수입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여서, 현지 생산으로 수요를 감당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해로로 들어온 도자기
이 접시는 지름이 23cm이며, 당 왕조(618~907) 시대 북중국 궁센에서 암청색 유약을 사용한 완전한 그릇으로 희귀한 사례다. 이 유약은 중국 도공들에게는 얼마 전에야 이란에서 수입된 새로운 것이었다. 아마도 유약을 싣고 온 그 배에는 이것과 같은 도자기가 함께 실려 왔을 것이다. 유약은 현지에서 쓸 물건들, 특히 무덤에 부장할 수상(小像)을 만드는 데 사용됐으나, 이 접시는 수출용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벨리퉁 나파선에서 발견된 비슷한 작품 세 점 가운데 하나다. 현재 싱가폴박물관에 소장이다.
마름모꼴 및 초목 장식 모티프는 비슷하게 장식된 아바스의 불투명 백자를 연상시키는데, 확실히 중국인의 취향에 맞춘 것은 아니다. 비슷한 장식은 사마라 칼리파 궁전에서 발견된 많은 잔편들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발견된 중국산 수입품들 가운데 암청색으로 장식된 것은 없고, 모두 녹색뿐이다. 중국 양저우 항과 궁센의 백하요 터에서 발견된 잔편 사례들과 함께 놓고 보면 벨리퉁에서 발견된 접시는 교역을 위한 견본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특별 주문을 했을 것이다.
못 구멍이 있는 같은 중국산 청색 및 백색 도자기의 작은 잔편이 시라프에서 발견됐다(시라프는 페르시아만의 이란 쪽에 있는 중요한 환적항으로, 바스라보다 더 깊은 항구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이는 이런 도자기들이 얼마간 서방으로 운송됐음을 입증한다. 벨리퉁 조난 사고가 자바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모든 화물이 서양으로 향하던 것이라고 학언할 수는 없다. 그 가운데 일부는 틀림없이 도중에 거래할 물건들이었을 것이다. 스리랑카 만타이에서 발견된 것들이 이를 시사한다.
파르티아의 녹색 유약을 바른 신발형 점토관.
길이 1.96cm로, 옛 유프라테스강 유로에 있던 우루크에서 윌리엄 로프터스(1820~1858)가 발굴했다.
중국 남쪽 바다에서 난파된 난하이 1호의 선창.
16만 점으로 추산되는 화물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화물 가운데는 많은 중국 도자기가 있었다.
중국 또한 고급 도자기의 주요 생산자였으며, 제1천년기에 도자기와 유약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 교역되면서 두 문화권의 접촉이 많아졌다. 첫 번째 사례는 아마도 외교적 선물로 들어왔을 것이다.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도 그런 선물을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824년에서 850년 사이에 지금의 인도네시아 벨리퉁섬 부근에서 일어난 조난 사고는 이슬람 시장을 겨냥하고 만들어진 중국 도자기의 유통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게 해준다. 남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만 지역 유적지들에서도 몇몇 사례들이 발견됐고, 모방품은 훨씬 더 많았다.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유약 바른 그릇을 생산하는 전통이 오래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9세기에 도공들이 중국산 수입품을 복제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없다. 그러나 의문스러운 점은,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전통이 있는데 왜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느냐 하는 것이다.
인용: 로절린드 위이드 해든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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