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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조로아스터교 유물 유적

 

언어학적 증거에 따르면 조로아스터교는 서기전 제2천년기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됐으며, 서남쪽 이란

고원을 넘어 이란 서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종교는 훗날 아케메네스(서기전 550~330),파르티아

(서기전 247~서기 224),사산(224~651) 등 세 제국의 신앙이 됐다.

사산 제국 아래서는 멀리 아라비아반도 남부와 동쪽으로는 북중국에까지 전파 되었다.

 

 

 

6세기 중국에 묻힌 한 소고드인의 장례용 대리석 침상에서 나온 장식판. 조로아스터교의

'영원한 불꽃'을 돌보는 모습 등 그의 생전 모습이 그려져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성서 ≪아베스타(Avesra)≫는 이란 동부 언어인 아베스타어에서 이름을 따왔고, 그 말은 서기전 1200년에서

100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살았다고 생각되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영어식 표기다)가 사용하던

언어였다. 그는 아후라마즈다가 세상을 창조한 신이라고 주장했다. ≪아베스타≫는 이란 서부에서 최종 형태로

완성 됐으나, 5~6세기까지는 그것이 글로 옮겨진 증거가 전혀 없고 현존하는 가장 이른 필사본은 9세기의 것이다.

이란 서부에서 이루어진 조로아스터교의 의례와 종교 활동은 아케메네스 시기에 역사 기록에 들어갔다. 수도 파르사 부근의

유적지들에서 발견된 바위 조각품과 비문 증거들, 그리고 헤로도토스 같은 그리스 작가들의 기록은 아후라마즈다 숭배와

불에 대한 숭배, 1년 열두 달이 조로아스터교의 일곱 주요 신과 기타 비중이 덜한 신들에게 봉헌된 책력 등이 있었음을 입증한다.

아케메네스의 초기 왕들은 중앙아시아의 상당 부분을 자기네 지배하에 편입시켰다. 소그다아니는 서기전 540년 키루스2세

(제위 서기전 559~530)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조금 뒤에 호라즘도 정복되었다. 두 지역은 토착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주류 조로아스터교 사상 및 종교 관행의 혼합을 보여주는 자료의 원천이다. 예를 들어 아케메네스 시대 말기에

빅토리아, 소그디아나, 호라즘에서 사용된 조로아스터교 달력은 각 날짜와 달의 이름을 조로아스터교 신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반면에 이 지역의 미술과 도상에서는 아후라마즈다가 중요한 신이 아니었다.

 

 

 

 

● 타크이부스탄: 조로아스터교

 

 

케르만샤 부근의 타크이부탄에 있는 바위 돋을새김들은 샤푸르 2세(재위 309~379), 아르다시르 2세

(재위 379~383), 호스로 2세(재위 590~628) 등 몇몇 사산 왕들의 즉위식 장면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곳은 천연 수원지의 물이 흘러드는 두 개의 큰 저수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두 개의 벽감 가운데 큰 것의 위칸에는 호스로 2세가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마즈다와 물의 여신

 아나히타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나히타는 호스로게게 왕관과 길게 흘러내린 띠를 주고 있다. 그가 사산 왕가의 일원으로서 왕이 될 수 있는

성스러운 권리를 지녔음을 상징한다. 아래 칸에는 왕이 완전 무장하고 말을 탄 모습이 보인다. 옆쪽 벽에는

두 가지 사냥 장면이 장식되어 있다. 하나는 왕이 사슴을 쫓고 있는 모습이고, 또 하나는 멧돼지를 쫒고 있다.

이 장면들의 세부 내용은 왕실에서 사냥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보여준다.

전투에 대한 훌륭한 준비로 생각했던 것이다.

 

 

 

 

나크시에로스탐에 있는 아케메네스제국 아르타크세르크세스(제위 서기전 465?~424?) 왕릉의 조각,

왕과 배화단, 그리고 날개 달린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이 보인다.

 

 

죽은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로아스터교의 규정은 법전 격인 아베스타어 문헌 ≪벤디다드≫에

나와 있으며, 여기에는 유기(遺棄) 의식도 포함되어 있다. 이란에서는 시신들을 모아두기 위해 산꼭대기를

둘러 담을 쌓는 관습이 있는데, 이러한 목적을 위해 다흐메('침묵의 탑')를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 테헤란 남쪽 샤흐르에레이로 알려진 곳의 산꼭대기에 세워졌다. 메리보이스는

박트리아에서 온 상인들이 일찍이 서기전 8세기에 이곳에 정착했다고 주장했다. 육탈(肉脫)이 되고 바랜 뼈는

점토 유골함이나 나우스라는 납골당에 안치된다. 나우스는 같은 집안 사람들의 유해가 함께 묻히는 곳이다.

유골함은 조로아스타교의 종교적 소신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 유골함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샤흐르이사브즈 부근의 유말락테파에서 발견된 것인데, 아래 단에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영혼을 위해 올리는 의례 장면이 새겨져 있었다.

 

또 다른 사례는 소그디아나의 사마르칸트 부근 물라쿠르간에서 나온 것이다. 아래 단에 배화단(排火壇)

앞에서 의례를 행하는 두 명의 사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위에는 두 명의 춤추는 소녀와 함께 별을

상징하는 꽃 같은 것들이 보인다. 천국의 미녀인 후리가 낙원에서 영혼이 누리게 될 즐거움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파흘라비 문서≪자드스프람 선집≫의 내용에 어울리는 모습이다.

 

 

 

 

 

 조로아스터교 경전

 

 

조로아스터교가 소그드인들의 전통 종교이기는 했지만, 지금 남아 있는 소그드어 필사본 대부분은

조로아스터교 경전 보다는 불교, 마니교, 기독교와 관련된 것이 많다. 이 문서 잔편은 드문 예외다.

가로 23cm, 세로 27cm의 크기인데 둔황 장경동에서 발견되어 현재 영국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이 문서의 주요 부분은 셋째 줄 이하인데, 9세기 무렵의 표준적인 소그드어로 쓰였다. 선지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최고 신'과의 만남을 묘사하고 있다. 앞의 두 줄은

조로아스터교 경전인 ≪아베스타≫에서 가장 성스러운 기도문 가운데 하나인 <아셈보후>의 번역이다.

이상하게도 이 기도문은 표준 소그드어도 아니고 표준 아베스타어도 아니며, 화석화된 고대 이란어다.

오늘날 알려진 ≪아베스타≫의 것보다 훨씬 더 고풍스럽고, 보존된 필사본보다 천 년 이상 오래된

문서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6~7세기 사산의 도금한 은제 물병으로 조로아스터교≪아베스타≫에 나오는

신화 속의 새 시무르그가 보인다.

 

 

 

피레사브즈: 조로아스터교 동굴 신전

 

 

 

'녹색 신전'이라는 피레사브즈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들에게 오랫동안 중요한 순례 장소였다.

조로아스터교 신들에 대한 찬가인 <야시트>에 따르면, 예배는 전통적으로 야외에서, 산꼭대기

수원지 옆에서 하는 것이었다. 편지에서 착착이라고 부르는 피레사브즈가 그런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란 중부의 도시 야즈드 북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바위 절벽에 자리 잡은 이 신전은 산속의

샘물이 흘러드는 웅덩이 옆에 있다. 신전은 오래된 버드나무 등의 나무 그늘에 있고, 뒤틀린

버드나무 몸통이 신전 입구의 윗 부분을 이루고 있다. 신전은 바위 안에 있다.

 

 

 

 

신전의 전승에는 사산 제국의 마지막 통치자 야즈데게르드 3세(재위 632~651)의 딸인 하야트 바누

('생명의 귀부인') 공주가 등장한다. 아랍 침햑군에 쫒긴 공주는 바위에게 숨겨달라고 청했고,

바위가 열려 안으로 들어갔다. 더 이른 전승은 이 신전을 물의 여신 아니히타와 연결시키고 있다.

신전에서는 개별 또는 단체 예배를 올리는데,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르며 기도문을 암송하고

봉헌 리본을 근처 나뭇가지에 대단다. 인근에는 가건물들이 지어져, 종교적 일정에 따라 며칠씩

피레사브즈로 모여드는 순례자들에게 묵을 곳을 제공했다.

 

 

 

 

배화신전과 봉화탑이 있는 아스파한 교회의 사산 제국 신전단지.

 

 

 

'침묵의 탑'

 

불과 물과 땅의 오염을 막기 위한 사체 유기는 조로아스터교 법전인 ≪벤디다드≫에 자세히 나오는데,

이것이 오랜 관습이라는 증거가 중앙아시아에 있다. 죽은 것은 종교 의례를 더럽힐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생각됐고, 죽음 자체는 악(악령인 아흐리만 또는 앙그라마이뉴라는 형태로 의인화됐다)

이 의인(義人)에게 승리하는 것을 의미했다. 장례 의식은 영혼이 친바트 다리('심판의 다리'라는 뜻,

조로아스터교에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갈라놓는 다리)에서의 심판을 향해 빨리 건너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전통적으로 죽은 자의 시신은 바위산에 버려져 새와 야생 동물이 먹게 하는데, 남은 뼈들이

햇빛에 바래면 유골함이나 도기 관에 안치했|다. 시신을 집단적으로 버려두기 위해 산꼭대기에 담을

두르는 관습은 4세기 유적지인 옛 호라즘(지금은 우즈베키스탄의 자치공화국인 카라칼팍스탄)의

칠픽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아무다리야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흙담으로 둘러싸인 이 바위 돌출부

안에는 한때 불이 있던 곳인 사그리와 시신을 버려두는 곳으로 구분 지어졌던 곳인 파비스가 있었다.

 

다흐메('침묵의 탑')로 알려진 원형 탑(위 사진)은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슬람 시대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이란에서 널리 학산됐으며 오늘날 뭄바이의 파르시교도 공동체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야즈드 북쪽의 참에 있는 작은 다흐메에서는 시신을 올려놓았던 돌판 잔해와

육탈된 뼈를 쓸어 넣던 중앙 구덩이를 볼 수 있다.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발견된  6~7세기 유골함으로,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영혼을 위해 올리는 조로아스터교의 의례를 보여주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중앙아시아의 조로아스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지가 아무다리야강 삼각주에 있는 서기전 3`2세기의 악차한칼라다. 거대하게 그려진 인물상의 일부가 이 유적지의 의례 구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조로아스터교의 기도의 신 스라오샤인 것으로 밝혀졌다. ≪아베스타≫에 나오는 중요한 신인 스라오샤는 때로 수평아리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는 새벽이 왔음을 상징하며 사람들에게 그날의 첫 번째 시간과 기도의 의무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벤디다드≫에는 수탉이 스라오샤의 보조 사제로 언급되어 있다.  이 인물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로아스터교 주제들이 여럿 있다. 특히 튜닉의 가운데 부분에 세로로 줄지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새(鳥) 사제들'이 대표적이다. 사람 머리를 한 이 수탉들은 성스러운 불의 오염을 막기 위해 성직자들이 착용하는 입마개인 파담을 하고 있다. 그들은 손에 사제들이 의식에서 사용하는 도구인 바르솜이라는 막대를 들고 있다.

 

장례 전통은 아마도 조로아스터교가 중국 등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에 있는 소그다니아 상인의 무덤에선 시상(尸床)이라는 장례용 침상이 있었다. 돌을 조각하거나 나무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 상인의 생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전파된 뒤 조로아스터교도들이 남아시아로 이주해서는 자기네의 유기 의례를 유지했|다.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예인 파르시교 공동체가 사용한 뭄바이의 다흐메는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마지막 다흐메 중 하나다(위 사진).

 

 

 

※ 인용서적: 수전 휫필드 外 著 / 이재황 옮김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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