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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呑虛, 100년을 내다본 지혜 2

 

 

 

 

탄허 선사 평복 진영

 

 

 

 

국운이 트이는 시기,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새벽이 밝기 전, 짧은 순간이지만 주변은 가장 어두컴컴할 수 있다.

고난에 대한 각오도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도덕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힘이 종교가 아닐까 한다. 그런 종교는 우주 종교라 할 수 있다.

유불선을 한 덩어리로 하여 위정자가 그 장점만 취한다고 하면 훨씬 나아질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유교가 제일이고,

치신지학治身之學으로는 도교가 제일이며,

치심지학治心之學으로는 불교가 제일이다.

이런 장점을 잘 취해서 민중을 다스린다면 좋을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끝까지 자각하는 것이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자각하면 모든 고통이 빠져나간다.

우주가 생기기 전의 자리, 거기에 앉아 있으니 우주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이 종교의 개념이다.

불교에는 천당, 지옥설, 극락과 같은 말이 기독교보다 몇 백 배나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유치하고 무의미한 것들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최고의 이념은 자각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이고득락離苦得樂하는 데 있다.

자기 혼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중생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산불을 물 한 잔으로 끌 수는 없다. 한 개인, 한 종교인의 힘은 미약하다.

하지만 그 한 잔 물이 동해물로 변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오늘날 번잡하고 소란한 우리 주변 문제를

 개개인이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혁명이 오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 물질의 풍요만으로 복지국가라는 기준을 잡을 수 없다. 진정한 종교를 가르쳐야 한다.

불교뿐만 아니라 인간을 풍요하게 한 모든 종교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산상수훈, 유교의 《논어》, 《중용》,《역학》 불교의 《화엄학》같은 것 말이다.

불교의 인과 원리만 터득해도 이 사회의 교도소는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오늘의 나의 현실은 어제의 연장이요, 내일의 나의 현실은 오늘 나의 행동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오늘 나의 생활은 충실해질 것이다.

 

 

 

 

 

 

 

 

 

 

 

 ····· 술術과 도道의 차이는 무엇인가?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부처님은 육신통(六神通: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 누진통)을 했다.6가지 신통력 중에 누진통(漏盡通: 마음대로 번뇌를 끊을 수 있고 생사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지혜)을 제외한 나머지는 술術에 해당한다. 만일 누진통이 없다면 다 아는 것[知]이 붙어 있으니 '술'이다.
천안통天眼通은 인간 육체의 눈이 근거리만 볼 수 있는 것에 비해 장외, 즉 산이 수만 겹 겹쳤어도 장障 밖을 보는 것이다.천이통天耳通은 여러 나라, 여러 지역의 말, 나아가 짐승과 귀신의 말까지 듣지 못할 것이 없는 능력을 말하고, 타심통他心通은 상대방이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를 아는 능력을 말한다. 또 숙명통宿命通은 전생을 아는 능력을 말하고, 신족통神足通은 뜻대로 모습을 바꾸거나 마음재로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에 반해 누진통漏盡通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끊고 다시는 미계迷界에 태어나지 않음을 깨닫는 각자覺者의 신통력을 말한다. ·····



아는 것 보다 아는 것이 끊어진 각覺을 좇아야
····· 흔히 세상 사람들은 "불교는 생활화가 안 됐다'라고 말한다.그런데 칸트의 철학이야말로 생활화가 안 된 대표적인 사례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칸트의 철학은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론에 불과하다. 이 우주 만유의 인식 경계의 모체가 순수이성이라면 이 우주 만유의 모체인 순수이성을 타파할 때 우주 만유가 그대로 순수이성화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산을 대하면 산, 물을 대하면 물, 이것이 전부 순수이성화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칸트 사상에는 그러한 순수이성화 된 결론이 없다. 따라서 칸트 철학은 생활화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떤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구절을 살펴보자.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나니 세간사 그대로가 법이라."산을 보면 산 그대로가 진리이고, 물을 보면 물 그대로가 진리가 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똥 덩어리, 오줌 줄기까지도 그대로가 진리다. 이때 그것은 완전히 순수이성화가 된 것이다. 그것은 한 번 부정을 거친 긍정이다. 세간법世間法 그대로가 불법佛法이 된 것으로 거기서 다시 한 번 긍정하는 것이다. 만일 그런 부정을 통과한 긍정이 아니라 긍정의 긍정이 되면, 즉 망상이 우글우글한 것 위에서 세간법이 그대로 불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통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여기 있는 콩 한 개는 세간법으로 긍정인데, 그 콩을 땅에 심으면 콩은 없어지고 마니 한 번 부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세서 싹이 나와서 줄기가 생기고 잎이 나서 새로운 콩이 다시 열리면 그 콩은 부정을 거친 긍정의 콩이 되니 앞의 씨앗 콩이 아닌, 완전히 다른 새로운 콩인 것이다. 따라서 긍정의 긍정으로서 콩이 아니라, 한 번 부정을 거친 긍정으로서 콩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진리다.

 

이것은 유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주 만물 하나하나가 각각 태극의 진리를 갖추었다.

즉 태극은 우주가 생기기 전 면목으로, 여기에 물건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태극에서 나왔기 때문에 물건 그대로가 태극이다.

또 우주 전체를 통합해 보면 태극의 진리일 따름이다.

 

현상적으로 드러난 모든 것이 그대로 태극이라면 우주 전체가 태극이요, 그대로가 진리일 뿐이다.

한 번의 부정을 거쳐 태어난 긍정 자체가 그대로 진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진리 아닌 것이 없으니 그대로가 순수이성화 된 것이다.

 

 칸트 철학은 그저 우주 만유의 인식 경계가 순수이성에서 나왔다고만 결론 내리고 있다.

이런 까닭에 칸트 철학은 생활화가 되지 못한 것이다.

 

 

 

 

 

 

 

 

 

 

 

 

 

●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놈이 제일 오래 사는 놈이다

 

물질은 정신이 아닌 모든 유형有形을 말한다.

 예컨데 우주에 불의 원소가 충만해 있지만 잠재해 있으니 없는 것 같다.

우주에 가득 찬 것이 불이고, 우주에 가득 찬 것이 물이며, 우주에 가득 찬 것이 바람이고, 우주에 가득 찬 것이 흙이다.

그러면 지 · 수 · 화· 풍地水火風, 즉 유교 사상으로는 금 · 목 · 수 · 화 · 토金木水火土, 이 오행五行이 똑같이 가득 차 있는데

다만 불은 잠재해 있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와 나무를 비비면 불이나오고, 돌로 돌을 쳐도 불이 나온다.

 

만일 불의 원소가 없다면 물질끼리 아무리 부딪히더라도 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불이 정신이라면 나무, 돌 등은 물질이 된다.

그런데 물질을 통하지 않고는 그 잠재되어 있던 불이 나타날 수가 없다.

 결국 물질과 정신이 언제나 맞붙어서 법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나만 가지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에만 치우친다면 그것은 편견이 된다.

 

물질론이니 유심론이니 하는 것은 서양에서 나온 논리다. 물론 불교에도 '우주 만법이 유심唯心' 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유물과 유심을 구분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우주 만유의 현실을 중생들이 보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집착하니

지금 우리가 현실로 보는 이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집착하니 지금 우리가 현실로 보는 이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 끊어진 정신 속에서 나온 것임을 일깨워 주기 위한 방편을 쓴 것이다.

 

 따라서 정신과 물질의 관계는 부즉불이不卽不離,비일비이非一非異라고 할 수 있다.

 '제법실유諸法實有' 라고 할 때는 제법을 진리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법法을 진리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 제법諸法이라 한 것은 물질物質을 일컫는다.

 

《논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안연이 인仁을 물으니 공자가 답하기를 자기 망상을 극복하여 본연本然한 천리天理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만 극기복례克己復禮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오나니, 인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지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의 인은 도道를 말한다. 공자는 현실 위주의 교법을 세웠기 때문에

이利, 즉 물질과 천명, 진리와 인, 우리 마음의 근본 자리 등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자공이 다음과 같이 탄식한 것이다.

 

"선생님의 문장은 얻어들었거니와 선생님이 본성과 천명을 말씀한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얻어듣고서 한 소리일 뿐이다. 공자가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전체가 유치원 학생인 것이다.

성인들이 중생을 볼 때는 다 그렇다. 유치원생에게 어떻게 큰 도를 얘기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드물게 도를 말하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공자는 3천 제자 가운데 안연과 증자에게만 돈법頓法을 가르쳤다. 돈법은 점법漸法의 반대다.

 

 그런데 퇴계 이황이 문인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돈법은 불교의 것이지 유교의 법이 아니다." 이것은 퇴계 이황이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안연의 물음에 답한 것이 공자가 안연에게 돈법으로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 증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의 도는 하나로서 꿰었다."

냉정히 비판하면 도 이외의 모든 것은 물질이다. 그러므로 성인들이 물질을 멀리하라고 한 것은

물질에 집착한 중생에게 하는 말이지 물질 자체를 돌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부정을 완전히 거쳐서 새로운 긍정이 될 때는 물질 그대로가 진리이고 도다.

이것은 불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성인들의 말씀을 보면 마찬가지라 하겠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좇아야 할지 답이 나왔다.

우리는 부처님의 팔만대장경 교리보다는 자기 마음을 닦는 선禪을 좇아가야 한다.

지식으로 1백 년, 1천 년, 1만 년의 앞일을 아는 것보다 아는 것이 끊어진 각覺 자리를 좇아가야 한다.

 아는 것과 통하는 술術을 좇기 보다는 도道 자리를 좇아가야 하며, 한 나라의 위대한 인물이 되기보다는

전 세계적이고 우주 차원의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길을 찾았다.결국 어떤 놈이 오래 사는 놈이냐, 어떤 놈이 잘 사는 놈이냐, 그것을 따져 봐서 가장 오래 살고 가장 잘 사는 쪽을 택해야 되지 않는가.

《도덕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놈이 제일 오래 사는 놈이다."이 세상에서 제일 오래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3대 성인이다. 석가, 공자, 예수, 이들이야말로 제일 오래 사는 사람이다.

 

그 다음으로 한 나라 안에서 오래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퇴계 선생, 이율곡 선생, 이순신 장군 같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들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영원히 죽지 않는 인물이 한 번쯤 돼 봐야 하지 않는가. 이왕이면 이 우주를 내 가정으로 볼 정도로, 영원히 죽지 않는 인물이 돼 봐야 한다.
공자의 제자였던 안연은 서른두 살에 요절했지만, 공자 이후에 안연을 넘어선 인물은 아직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꿈인 줄 알면 해결되는 지혜
오늘날 현대사회가 처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최근 들어 서양의 대학교수들이 우리나라에 자주 다녀갔다. 우리가 서양사회와 문화를 동경하는 데 반해,서양인들은 원자핵이나 다른 물질문명의 발달로 자멸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생각하여 그 위기 극복의 대안으로 동양의 정신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다.
서양인들의 양단론兩端論은 유有는 유이고 무無는 무일 뿐이며, 인간과 자연도 서로 모순되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대립과 투쟁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는 이론인데, 이것이 오늘과 같은 서구 문명을 낳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일으켜 결국 자연으로부터 보복을 받고 있다. 또한 극단적으로 대립을 일으켜 결국 자연으로부터 보복을 받고 있다.또한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되니 생명에 위협을 받고 위기의식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세상의 복잡함을 피하기 위해서 무조건 안정만을 추구한다면 문제 해결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여기서 동양 사상의 진가를 알 수 있다. 동양 사상에서는 세상이 아무리 복잡하고 힘들어도 허공에 고요히 앉아서 생각해 보라고 제안한다. 그러면 삼라만상이 괴로울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전부가 내 것이니 말이다.
백천중류百千衆流는 천만 년을 흘러도 쉬는 법이 없다. 바다를 볼 것 같으면 육지에서 모든 냇물이 내려와서 바다로 들어가지만 어떤 물이든 일단 바다에 들어오게 되면 짠맛이 되지 다른 맛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다는 원래부터 크고 한량없기 때문에 육지의 백천중류가 바다 맛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삼라만상이 허공에 이르면 하나가 된다.허공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이라는 것에는 차별이 없다. 마찬가지로 성인聖人의 입장에서 보면 위기가 있더라도 그것이 위기가 되지 않는다. 본래 빈자리라는 것을 확연히 봤거나 믿거나 체득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위기다, 불안이다 하는 것도 본연의 자리에서 말하면 본래 불안이 없으니 해소할 것도 없고 본래 위기가 없으니 안심할 것도 없다.
꿈속에서 큰 다이아몬드를 하나 얻어서 분명히 장롱 속에 넣었는데, 꿈에서 깨어나 장롱을 아무리 뒤져도 다이아몬드는 온데간데 없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짜인가? 꿈이 진짜인가? 꿈을 깬 상태가 진짜인가?인생은 대몽大夢이다. 중생은 꿈을 진짜라고 착각하며 살아 간다.
반면 부처님은 이 대몽을 깬 분이기 때문에 중생에게희로애락, 그 모든 것이 꿈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만상은 실체가 없다. 전부가 환이요, 허상인 것이다.어느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다가 결국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꿈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꿈속에서 보는 물건이라도 찬 것은 차고 뜨거운 것은 뜨거운 것이다.이것이 중생의 실상이다. 그래서 꿈속에 있는 사람에게 꿈속의 사실이 헛되다고 말해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따라서 꿈속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러한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꿈에서 깨는 것밖에 없다. 아니면 누군가 그 꿈을 깨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길밖에 없는데, 꿈꾸는 사람에게 아무리 꿈에서 깨라 해도 깨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잠꼬대하는 사람에게는 잠꼬대하는 것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다.요즈음 중 ·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불교 경전에 관한 글을 한 줄도 넣지 않으니,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한단 말인가.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이렇게 난감하지 않았다.그때는 중학교 교과서만 해도 유교의 《논어》, 불교 사상 등 성인의 말씀이 필수과목이었다.또 전문학교에서는 역학, 노장 사상老莊思想, 불교 철학을 필수로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이러한 과목을 가르치는 곳이 없다 보니 잠꼬대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지금 꿈속에 있다고 아무리 말해 줘도 이해하지 못한다.
동양 사상이 학교교육으로 제도화된다면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스스로 그것이 꿈인 줄 알고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길 것이다.

 





● 성인은 성性의 자리, 범부는 정情의 마음자리
마음자리에서 보면 인간성人間性과 불성佛性은 둘이 아니다.그런데 인간성이다, 불성이다, 신성神聖이다 하여 구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어느 자리에서 쓰냐에 달려 있다. 성인은 그 모든 것이 성性의 자리에 앉아서 쓰는 것이고, 범부는 정情의 자리에앉아서 쓰는 데 있다. 성의 자리에서 쓰는 사람에 따라 성 자리를 이름하여 '중中' 이니 '도道' 라 한다.
 도는 '사람이 당연히 가는 길' 을 의미하고 다른 말로는 '덕德'이라고도 한다.

 

 덕이란 "마음을 닦아 얻은 진리" 를 말한다. 또 진리란 모양이 끊어졌다는 뜻인데 온갖 다른 이름의 대명사로 불린다.대명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달을 가리키면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본다.여기에서 대명사는 마음자리를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편들이다. 이를테면 그 대명사에는 하나님, 도, 진리 등이 있다.
····· 결론적으로 인간성과 불성은 둘이 아닌 것인데 성인은 성의 자리를 알고 쓰니 하루 종일 희로애략애오욕의 칠정을 써도 칠정이 없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범부는 시공이 끊어진 성의 자리를 모르고 쓰므로 항상 망상에 허덕이면서 고해苦海에서 생멸을 거듭하게 된다. 성의 자리를 깨닫는 것을 가리켜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맹자》의 진심장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마음을 극진히 연구하는 자는 그 성리性理를 아나니, 그 성리를 알면 천리天理를 안다."유교 서적 수천 권을 종합해 놓으면 존심양성存心養性 또는 진심지성 眞心知性으로 정리할 수 있다.또 불교서적 수천 권을 종합해 놓으면 명심견성明心見性, 즉 "마음을 밝혀 성을 본다." 로 요약할 수 있다.그리고 도교 서적 수천 권을 모아 핵심을 정히하면 수심연성修心練性, 즉 "마음을 닦아서 성을 단련한다" 가 된다.
결국 도교의 수련, 修練, 유교의 존양存養, 불교의 명견明見, 이 모두가 심성心性을 말한 것이다. 즉 철학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같은 것을 일컫는 말이다. ·····



● 삶과 죽음의 문제를 자유로히 해결하는 법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삶과 죽음일 것이다. 생사 문제야말로 그 무엇보다 궁극적이고, 이 세상에서 몸을 담고살아가는 동안 기필코 풀어내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인간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생겼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에 생사가 없음을 깨달음으로써 생사 문제를 해결 한다.덧붙여 설명하면 마음이란 그것이 나온 곳이 없기 때문에 죽음 또한 없다고 보는 것이다.본디 마음이 나온 곳이 없음을 확연히 간파看破한 것을 '도통道通했다' 고 한다.
우리 자신의 어디든 찾아보라. 마음이 나온 곳이 있는지 말이다.나온 곳이 없으므로 죽는 곳도 없다. 따라서 도道가 철저히 깊은 사람은 이 조그만 몸뚱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어리석은 종생들이나 죽음을 두려워하며 천년만년 살고 싶어 하지, 도인道人이나 성인聖人은굳이 오래 살려고 하지 않는다.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중생들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도에 통한 사람은 몸뚱이를 그림자로 본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을 간밤에 꿈을 꾸고 다닌 사람이 꿈을 깨고 나면 꿈속에서는 무언가 분명히 있긴 있었느나 헛것임을 알듯이 마음대로 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중생에게는 나서 멸함[成住異滅]이 있고, 몸뚱이에게는 나고 죽음[生老病死]이 있으며,1년에는 봄 · 여름 · 가을 · 겨울[春夏秋冬]이 있고, 세상에는 일었다가 없어짐[城主壞空]이 있으나,오직 도인道人에게만 생사가 붙지 않는다.
혹자는 도인도 죽는데 어찌 생사가 없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겉을 보고 하는 소리다.옷 벗는 모습을 보고 죽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은 이 '옷'을 자기 '몸'으로 착각한다.그러다 보니 죽음의 경계에 걸린다.
그러면 도인이나 성인은 무엇을 자기 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몸 밖의 몸, 육신 밖의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좀 어렵게 말하면 시공이 끊어진 자리,이것을 자기 몸으로 안다.
시공이 끊어진 자리란 죽으나 사나 똑같은 자리, 몸을 벗으나 안 벗으나 똑같은 자리,우주가 생기기 전 시공이 끊어진 자리, 생사가 붙지 않는 자리를 뜻한다.
부처는 바로 이 '자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오셨다. 이 세상이 한바탕 꿈이란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꿈속에서 덥고 춥고 괴로운 경험을 했을 것이다. 꿈을 만든 육신이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 누워 10분도 안 되는 시간의 꿈속에서 몇 백 년을 산다. 그러다 보면 우주의 주체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곧 '내'가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우주 속에서 내가 나온 것이 아니다.

 

세간世間의 어리석은 이들은 꿈만 꿈인 줄 알지 현실도 꿈인 줄을 모른다.그러다 보니 간밤의 꿈만 꿈으로 보고, 현실을 현실로 보니 몇 백 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어 집착하는 바가 없다. 결국 천당도 지옥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영원하다면 영원하고 찰나로 보면 찰나일 수 있다.요컨대 우주의 창조주, 즉 하느님이란 하늘 어느 한 구석에 담요를 깔고 앉아 있는어떤 실재 인물이 아니란 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 26《주역》이나 《천부경》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십시오.

 

《주역》이란 태극太極이 생양의生兩儀, 양의가 생사상生四象, 사상이 생팔괘生八卦, 팔괘가 생육십사괘生六十四掛이다.

태극은 우주가 생기기 전 면목, 태극의 원리가 죽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동정動靜의 요소를 갖추었다.

동정의 요소를 갖추었기 때문에 한 번 동한 것이 하늘의 형상이 되고, 한 번 고요한 것이 땅의 형상이 되었다.

하늘이 하늘만 되지 않은 것이 음양학이다.

 

따라서 사람 생긴 것도 이 콧구멍이 둘이면 속에서는 하나요, 눈이 두 개면 속에서는 하나가 되고,

 입이 하나면 속에 들어가 둘이 된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하늘이 하늘만 되지 않고, 땅이 땅만 되지 않고, 눈이 윗꺼풀만 동動하지 밑꺼풀은 동하지 않는다.

밑까지 같이 동한다면 주역이 아니다. 입은 밑에만 동하지 윗입술은 가만히 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이것이 《주역》의 역리易理다. 동정이 동정을 갖추었기에 사상이 나온다.

사상이 시간적으로 춘하추동이고 방위로 말하면 동서남북이다. 사상에서 팔괘가 나온다.

동서남북 그리고 간방間方하면 팔방, 팔팔은 육십사, 육십사괘가 나온다. 부연하자면

이것은 육십사괘만 되는 것이 아니다.육천사백, 육만사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주역의》역리다.

역리란 태극의 원리가 죽지 않는 산 물건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주 만유를 자전해 내고야 만다는 것,

역리 하나가 우주 만유가 된다는 것, 이것이 연역演繹이다.

 

서양학의 연역은 이렇게 되어 있지 않다.

하나가 우주 만유를 만들고야 만다면 만들지 않고는 쉬지 않는다는 것이 연역이다.

그러면 귀납歸納이란 무엇인가? 복희伏羲,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4성인의 철학이 바로 귀납이다.

 

먼저 우주 만유가 어디서 나왔느냐? 육십사괘다. 육십사괘는 어디서 나왔느냐? 팔괘다.

팔괘는 사상, 사상은 음양, 음양은 태극, 태극은 나온 곳이 없다. 태극, 나온 곳이 없다는 것을 소위 부처라 한다.

민족 사상으로는 최제우의 동학이나 강증산의 증산교가 있다.

우리가 우리 민족적 주체성에 서 본다면 불교를 제외한 최고의 철학은 《주역》이다.

 

복희 때 《주역》이 창작되었는데 그때는 그림 뿐이었다. 그림만 보고도 다 알 수 있었다.

우주 만유의 진리를 문자화한 것이 복희, 신농, 황제, 요 · 순 · 탕 · 문 · 무 · 즉 문왕 때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를 단사彖辭라 한다. 괘를 2개 놓고서 총명한 것을 단사, 괘사卦辭라 하고, 문왕의 아들 주공이 효사爻辭를 지었다.

공자는 십익十翼을 부연했다. 열 가지 돕는 것, 그래서 《주역》14권이 되었다.

 

역사에 단군 국조가 '요堯로 병립' 이라 한다.

복희, 신농, 황제, 요, 순, 우, 탕, 문황에서의 '요임금과 병립' 이라면

《천부경》은 단군의 사상으로서 《주역》보다 몇 백 년을 앞선다. 《천부경》은 81자다.

81자를 가지고 주역 14권을 함축해 놓은 것이 《천부경》이다. 왜 81자가 되었느냐?

천 · 지 · 인, 3재 원리를 3 ×3=9, 9×9=81, 《천부경》의 대의가 어렵다.

처음 일一은 시무시始無始의 일一이다. 끝의 일一은 종무종終無終의 일一이다. 이것이 《천부경》의 핵심이다.

 

《주역》의 문왕 이전에 사상은 《천부경》이다.

역학을 '우리 단군의 것'이라고 해도 좋다. '조직적인 견지에서 볼 때' 말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주역》을 한국의 것으로 보아도 좋다.

 

서구에서는 동양 사상을 신비 철학이라 한다. 서구의 사상 학문을 철학이라고 번역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색, 명상, 침묵, 영감, 즉 '사지사지思之思之하야 사지부득思之不得이면 신명神明이 자통自通이라.'

유교에서는 물물物物이 일태극이다. 우주 만물이 물건마다 하나의 일태극을 갖추었다. 즉 통째로 일태극이다.

 

 

 

 

 

 

 

 

 

 

 

 

 

 

탄허 스님이 쓴 글씨와 열반에 든 처소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

 

 

 

 

 

 

 

 

1983년, 5년 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미질微疾이 봄에 이르러 더욱 더 악화되다.

음력 4월 24일(양력 6월 5일)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方山窟에서 세수 71세,

법랍法臘 49세로 열반에 든다.

 

열반 당시 시봉 환원 수좌가 물었다.

"스님 여여如如하십니까?"

 

"여여하지 몽롱하랴!"

 

제자 대규수중 수좌가 말했다.

"법연法緣이 다 된 것 같습니다. 한 말씀 남겨 주십시오."

 

"일체무언一切無言이다!"

 

때는 선사가 66세에 입적할 때를 예언하신 날이다.

열반 당시 사부대중 50여 명이 선사의 입적을 지켜보며 오열했다.

 

1986년 4월 24일(음력) 오대산 상원사에 부도浮屠와 비碑가 세워지다.

 

 

인용서적:  『呑虛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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