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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다산의 두 하늘 천주와 정조

 

 

 

 두 권으로 엮은 정민 교수의 『파란波瀾』중

1권 <3장> 《다산의 또 다른 하늘, 천주교》 <4장> 《다산은 신부였다》

2권 <12장> 《닫힌 문 앞에서》 중 일부를 이 자리에 옮겨보기로 한다.

 

 

 

 

 

 

초기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명례방 공동체.

 

 

 


 

 다산의 인간적인 면모를 우리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의 문집은 사료로 치면 오염된 부분이 적지 않다.

 

 다산은 자기 검열을 통해 불리하거나 불편한 내용은 삭제하고 일관성 확보를 위해 많은 글에 손을 댔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기록과 겹쳐보자 다산이 썼다가 지웠던 부분들이 얼핏 드러났다.

 

이 책에서는 다산이 지웠음직한 자료를, 날것 그대로 맥락 없이 남겨진 다른 자료와

겹쳐 읽음으로써 지워진 부분을 복원해보려고 애를 썼다.

 

-  <서문> 중에서 -

 

 

 

 

 

다산이 썼다는 『조선복음전래사』

 

다산에게 서학, 즉 천주교는 평생 헤어날 수 없었던 굴레였다. 결정적 순간마다 천주교 신앙

문제가 다산의 발목을 났아챘다. 정조의 눈먼 사랑과 두둔이 없었다면 다산은 진즉 죽었을 목숨이었다.

 

조선 천주교회의 창립과 확산, 그리고 참혹한 박해이 과정에서 다산은 들 한복판에 있었다.

조선 천주교교회 창립 주역인 이벽은 큰형수의 동생이었고,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조선 교회 창설의 리더 역할을 맡았던

이승훈은 누나의 남편이었다. 형님인 정약전과 정약전의 스승 권철신, 권일신 형제도 초기 교회 창립의 핵심 주역이었다.

 

형 정약종은 평신도 대표로 있으면서 『주교요지主敎要旨』란 천주교 교리서까지 썼다. 그의 아내 유소사 체칠리아와

딸 정정혜, 아들 정하상은 모두 순교하여 가톨릭교회의 성인품에 올랐다. 먼저 세상을 뜬 큰아들 정철상은 복자福者가 되었다.

큰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는 무력으로 쳐들어와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탄원으로 온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황사형의 아내였다. 조상의 신주를 태우고 제사를 거부해 천주교 탄압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한 윤지충은 다산과 사촌 간이었다.

윤지충을 천주교로 끌어들인 것도 바로 다산 형제였다. 정약종과 윤지충 또한 2014년 복자품에 올랐다.

 

 

다산과 친가나 외가로 4촌 이내 범위 안에서 가톨릭교회의 성인과 성녀가 셋, 복자가 셋씩이나 배출되었다.

순교자 수는 훨씬 많다. 사우師友를 포함해 다산과 관련된 순교자 명단은 초기 조선 가톨릭교회의 핵심 그룹 자체였고

또 전체였다. 그의 집안은 성인과 순교자의 가문이었다. 다산은 어떻게 하더라도 헤어날 수 없게 깊이 얽혀있었다.

 

그는 이승훈에게 자청하여 세례를 받아 약망若望 즉 요한이라는 본명을 받았다. 한때 과거 시험공부도 팽개친 채

여럿이 모여 천주교 교리서를 공부하다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명례방의 종교 집회에 참석해 적발된 일도 있었다.

자식들이 천주학에 깊이 빠진 것을 뒤늦게 안 아버지 정재원이 곁에 두고 철통 감시까지 했어도 다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정조의 기대를 차마 저버릴 수 없어 배교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신앙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천주교 신자였던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다만 배교한 뒤 만년에 다시 참회해 신자의 본분으로 돌와왔는지 여부로

의견이 엇갈린다. 천주교 쪽의 가장 신뢰할 만한 문서인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는 다산이 만년에 참회의 생활을 계속하면서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고, 세상을 뜨기 직전 종부성사까지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비망기에서 초기 가톨릭의 조선 전래에 관한 기술은 너무 간략하나 매우 정확하고 잘된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 대부분 힘입었다고 분명히 썼다. 다블뤼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이래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할 때까지 21년간 조선에 머물렀던 조선통이었다. 그는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말을 잘한다는

 평을 들었다. 그의 비망기는 때로 전문傳聞과정에서 다소 과장이나 부정확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었을망정

거짓으로 꾸며 쓴 기록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정작 다산 자신의 글 속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안 나타난다. 다산은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이나 내용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거나 외면하는 자기 검열을 거쳤다. 그간 이 문제에 관한 한국학 연구자와 천주교계의 논의는 얼음과 숯처럼 갈라져서

중간 지대가 전혀 없다. 자기 쪽에 유리한 내용만 보려는 통에 감정의 골만 깊어졌다. 다산의 신양과 배교도 사실이고,

 만년의 참회도 거짓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산의 경학 연구는 이로 인해 허물어지고 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은 결코 모, 전부냐 전무냐로 갈라 말해서는 안될 문제다. 천주학과 유학의 공존, 이 가운데 다산을 배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인으로 다시 돌아온 것과  그의 경학 연구 사이에 특별히 모순 관계가 없다는 가설이 대전제다.

이렇게 보면 다산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율배반의 인간이 아니라 그 시대를 전신으로 받아들여 치열하게 진실을 살다간 영혼이

된다. 실상은 뭔가? 다산은 어떻게 천주교에 발을 들여놓았고 중간 과정은 어떠했나?

아니 그보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천주학이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답안에 쓴 노아의 방주 이야기
이능화李能和가 1925년에 펴낸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의 제18장은 제목이 「정씨형제삼인丁氏兄弟三人」이다. 그중 다산이 탄핵받은 일을 다룬 「정약용피핵丁若鏞被劾」조에 묘한 기사가 있다.정조가 다산과 이학규李學逵에게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켰다. 책이 완성되어 올라갔다.임금이 보니 '부父'자의 풀이에 '시생기始生己'란 말이 나왔다. 시생기란 처음 나를 낳아준 분이란 뜻이다.
정조가 불쑥 물었다. "이 뜻풀이는 어느 책에 나오는 것이냐?"천주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처음 나를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교리서 설명 중에 나오는 대목이었다.이 문제로 신하들 사이에 『규장전운』을 훼판毁板해야 한다는 비난이 비등했지만 정조는 애써 무시했다.

 

한번은 '홍수'를 제목으로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한 일이 있었다. 다산이 올린 응제시應製詩 중에 놀랍게도 '나아방주挪亞方舟'의 일, 즉 성경 속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인용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방주의 일은 어느 책에 나오느냐?"다산이 대답했다. 신이 전하를 모시고 읽을 적에 그 책에서 이 뜻을 보았나이다.
시생기와 노아의 방주는 모두 천주교 서적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정조 또한 그 책을 다산과 함께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이 이야기는 월북한 최익한이 1955년에 펴낸 『실학파와 정다산』에서도 소개되었다. 여기서는 노아의 방주를 나닉那搦의 상주箱舟로 적었다. 이능화와 최익한 두 사람 모두 인용의 명확한 근거를 밝히지는 않았다.당시 천주교 서적에서 노아는 낙액諾厄, 즉 '노에'로 표기하였으니 근거가 된 원전 자료의 확인 문제가 남는다.혹 당시까지 다산 집안에 분명히 있었던 『균암만필』속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단정키는 어렵다.
최익한은 이 일화를 소개한 뒤 한 발짝 더 나아가 "당시 반대당의 공세가 없었다면 서서西書 연구와 서교西敎 신앙은 큰 문제로 되지 않고 오히려 자유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유당전서』를 독함」에서는 "가령 당시에 벽파 서인이 영구히 집권하고 또 왕위 계승자가 정조의 혈통이 아니었다면정조 자신도 사학邪學을 비호한 연좌율을 죽은 뒤에 어떤 형식으로도 받지 않았을까?" 라고 했다. 그 혜안이 참으로 놀랍다.


 

 

 

 

 

명례방(현재 명동) 지도.

 명례방 아래에 청계천이 있고, 중인이 모여 살았다.

옆에 영희전이 있어 성당을 세울 당시 풍수를 침해한다고 문제가 되었다.

 

 

 

 

 

 

칠극

   

칠극

 

판토하(Pantoja, D., 龐迪我)가 쓴 『칠극』

7가지 죄악의 근원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7가지 덕행에 대해 서술한 천주교서. 천주교수덕서.

 

 

 

 

 

 

 

 

 

다산은 신부였다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 10인의 명단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주교로 지명되고,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최창현崔昌顯 요한,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지역에서 설교하고 세례를 주고, 견진성사를 행했다. 신자끼리 행하던 고백성사는

 이후 사제가 전담하게 되었다.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영하게 하는 등 신부로서 직임을 각 지역에서 개시하였다.

 

미사를 준비하는 신도들의 열성도 대단했다. 이들은 화려한 중국제 비단으로 미사 집례 때 입을 제의祭衣를 지어 입히고,

정성껏 미사에 임했다. 1786년 가을, 신부를 결정하던 모임에는 권일신, 이승훈, 정약용 형제가 참여했다. 임명한 신부가

10인이라 했는데, 확인된 명단은 권일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 5인뿐이다.

 

별도의 기록에 홍낙민洪樂敏과 최 야고보가 더 보인다. 나머지 확인되지 않은 3인은 누구일까?

적어도 이 중 두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이다.

두 사람은 조선 교회의 출범 당시부터 핵심 중 핵심이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어째서 빠졌을까?

다블뤼나 달레가 애초에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 이 기록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산은 이 부분을 기술하면서 자기 형제의 실명을 빼고 '그 밖의 여러 사람' 속에 숨어버렸다.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은이승훈이 임명한 10인의 신부 속에 포함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다산은 신부였다.

 

 

 

 

 

닫힌 문 앞에서

 

1800년 6월 28일,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 소식이 조야를 뒤흔들었다.

그 보름 전인 6월 12일 밤에 정조는 갑작스레 다산의 집으로 서리를 보냈다.

 내각에서 간행한 『한서선漢書選』 열부를 보내며, 그중 다섯 부에 책 제목을 쓰라는 분부였다.

 

당시 정조가 내린 말은 이랬다.

"오래 서로 못 보았구나. 책을 엮을 일이 곧 있을 게다. 즉시 들어오게 해야 하겠지만

주자소鑄字所가 벽을 새로 발라 지저분한 상태다. 월말쯤 들어오거든 경연에 나오너라."

 

서리는 이 말을 전하며, 책에 제목을 쓰라는 것은 핑계고 그저 안부를 물으시려는 마음인 것 같다고 얘기했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 이때 일을 이렇게 썼다.

 

서리가 떠난 뒤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마음이 흔들려 불안하였다.

그 이튿날부터 임금이 옥후玉候가 편치 못하시더니, 28일에 이르러 마침내 돌아가셨다.

이날 밤 서리를 보내 책을 내리시고 안부를 물으신 것이 마침내 영원한 작별이 되고 말았다.

군신의 정의情誼는 이날 저녁 영원히 끝이 났다.

 나는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눈물이 철철 흐르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다산의 거짓말

 

2월 10일에 영중추부사 이병모와 영의정 심환지, 좌의정 이시수, 우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참석한 가운데,

붙들려온 이가환과 다산, 이승훈 등에 대한 취조가 시작되었다.

 

심문관은 다산이 예전 천주교를 믿은 자취가 드러나자

그것을 감추려고 「변방소」를 올려 변명한 일과 그 뒤로도 은밀한 곳에서 요상한 짓을 거리낌 없이 행했고,

 임금을 속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며 준절히 나무랐다.

 

이어 책롱冊籠에서 형제와 삼촌, 조카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가 나와 요사스러운 행동이

파다하게 드러났으니, 천주교가 임금과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면서까지 그토록 잊기 어려웠던 것이냐고 힐난했다.

 

다산이 대답했다.

"저도 사람입니다. 임금의 큰 은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뼈에 살을 붙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어찌 한 치의 거짓이 있겠습니까?"

 

심문관은 책롱에서 나온 편지에서 다산을 거론한 내용을 두고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다산은 실물을 보여달라면서,

"위로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 형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제게는 다만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심문관이 편지를 보여주자, 다산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다른 편지 한 장을 더 보여주었다. 다산은 역시 모르겠다고 딴청을 했다.

 

심문관이 다시 물었다. "여기 편지 속에 나오는 정약망丁若望이 누구냐?" 다산이 대답했다.

"저희 일가에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당시 다산의 문답은 『추안급국안』의 심문 기록 속에 빠짐없이 나온다.

 

다산의 이 대답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정약망은 바로 다산 자신이었다. 약망은 다산의 세례명이었다.

심문관은 약망이 세례명 요한의 한자 표기인 줄 모르고, 돌림자인 약若 자 항렬의 이름인 줄로만 알았다.

다산은 자신을 콕 집어 말했는데, 자기 집안에 그런 사람은 없다고 딱 잡아뗐다.

 

이번에는 심문관이 다산의 편지를 내밀었다. "이것은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황사영입니다." 황사영은 다산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였다. 초기 천주교회의 핵심 인물 중 다산에 가 닿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심문관의 질문은 편지의 내용을 따라 잇달아 관련 인물들을 호명해냈다. 이튿날인 2월 11일에도 다산은 추국장으로 끌려 나갔다.


어제와 같은 추궁에 다산이 말했다.

"1799년 형조에 근무할 때 『척사방략斥邪方略』을 지어 임금께 바치려 했습니다. 이제 이 지경을 당하고 보니,

천주학을 하는 자는 제게 원수입니다. 제게 열흘의 기한을 주시고 영리한 포교와 함께 나가게 해주신다면,

이른바 사학의 무리들을 마땅히 체포해 바치겠습니다.

 

다산은 이번만큼은 모면하기 어려운 것을 알았다. 다급했던 심경이 이 대답 속에 드러났다.이날 다산은 곤장 30대를 맞고 실려 나갔다.
 이튿날인 1801년 2월 12일 책롱 사건의 당사자인 정약종이 추국정에서 심문을 받는다.오전 오후로 잇달아 열린 추국에서 정약종은 시종 당당했다. 모든 형벌을 받아 죽더라도 천주 믿은 일을 조금도 후회하지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천주야말로 온 천하의 위대한 임금이요 훌륭한 아버지시니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모르면 이는 천하의 죄인이요 살아있어도 죽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하지만 관련자를 대라는 심문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오후 심문에서 책롱 속에서 나온 정약종의 일기가 문제가 되었다. 일기 속에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다. 집안에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다國有大仇, 君也,  家有大仇, 父也" 라고 한 구절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앞뒤 맥락을 잘라내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로 천주교를 싸잡아 힐난했다. 특별히 돌아가신 임금에 해

불측한 말이 들어 있는 것을 문제 삼았다. 『눌암기략』에는 정약종이 공초에서 선왕을 무고했다고 썼다. 당일 추국청에서는

정약종에 대해 하루도 더 이 세상에 살도록 용납할 수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 이튿날인 2월 13일에는 다산이 다시 끌려나왔다. 이때 다산은 평소 그답지 않게 최창현을 고발했고, 조카사위 황사형은

죽어도 변치 않을 인물로, 자신의 원수라고까지 진술했다. 다산은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김백순金伯淳과 홍교만洪敎萬을 더

지목했고, 묻기도 전에 천주교도를 체포해 신문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었다. 상황이 워낙 다급했다.

멸문의 화가 저만치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자기가 말한 천주교 지도자들의

이름은 어차피 나올 수밖에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같은 날 추국장에 끌려 나온 총회장 최창현은 다산이 너를 사학의 괴수로 지목했다는 진술을 들이대자,

그는 지난날 자신이 천주를 배반했던 일을 깊이 뉘우친다며 천주를 위해 기쁘게 죽겠다고 말했다.

이승훈도 같은 날 끌려나왔다. "지금 정약용이 저를 원수로 여긴다면 저 또한 그를 원수로 여길 것입니다."

추국청은 이승훈에 대해 "오락가락하며 진술을 번복하는 것이 매우 악랄하다" 라고 보고했다.

 

심문장에서 다산은 천주교의 고급 정보를 다 털어놓았다. 핵심 인물들을 지목했고 체포 방법까지 일러주었다.

심지어 주문모 신부의 거처까지도 알려주었다. 이 일로 다산은 심문관들에게 동정을 샀다.

 

다산을 죽음의 수렁에서 결정적으로 건져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셌째 형 정약종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약종의 책롱 속에서 튀어나온 문서가 다산을 살렸다. 문서 속에 있던 다산이 황사형에게 보낸 친필 편지에는

"재앙의 기색이 박두했는데도 이를 하라고 종용한다면 내가 장차 손수 베겠다." 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가장 핵심 증거품에서 다산이 천주교에 대해 일관되게 배척의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이 입증된 것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는 정약종의 책롱이 발각된 것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어린 국왕을 끼고 전권을 틀어쥐게 된

노론 벽파가 남인 공서파를 품고 조정에 남아 있던 채제공 세력을 재기 불가능하도록 제거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획책해왔지만, 번번히 정조의 비호에 가로막혀 실행에 옮길 수 없던 일이었다.

 

이로써 조정은 정조의 손때 묻은 남인들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는 노론 벽파의 세상이 되었다.

공서파의 주요 타깃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유일한 예외가 다산이었다. 채제공과 가까웠던 이들은 알아서들 줄을 새로 섰다.

남인의 새로운 수장은 다산의 사촌 처남 홍인호였다.

 

정약종과 이승훈, 황사형은 신유박해 때 사형당했고, 윤지충은 10년 전인 1791년 진산사건 당시에 죽었다.

이 네 사람은 천주교와 관련된 가장 큰 사건의 중심인물들인데, 다산은 이들 모두와 피를 나눈 형제거나 혈족으로 얽힌

지극히 가까운 사이였다. 이 짧은 설명만으로도 이들이 왜 그토록 다산을 죽이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러고도 다산 형제가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기적에 가까웠다.

 

 

 

 

 

- 글을 닫으며 -

 

젊은 다산에게 두 개의 하늘이 있었다. 정조와 하느님이 그것이다.

임금을 따르자니 천주를 버려야 했고, 천주를 따르자니 임금의 사랑이 너무 깊었다.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릴 수 없었던 데 젊은 다산의 고뇌와 번민이 있었다.

 천주의 가없는 사랑과 임금의 특별한 은정 사이에서 다산은 길고 깊게 방황 했다.

 

 

 

인용서적: 정민 著 『파란波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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