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전북 김제 출생, 속명은 택성.
오대산의 방한암 스님에게 구도의 편지를 띄우기 수 년.
"짧으면 3년, 길어야 10년"을 기약하고 오대산을 찾아들어 탈속의 길을 걷게 된다.
1955년, 한국대학(지금은 폐쇄)의 요청으로 맡았던 노장철학 강의는 너무도 유명.
1961년, 방한암의 유촉을 받들어 방대한 규모의 화엄합론 번역을 시작한다.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피가 맻히는 난해한 연의演義 작업'에 매달려 발원한 지
10년만인 1971년 봄, 원문 10조 9만 5천48자에 달하는 《화엄경》80권 집필을 마쳤다.
우여곡절 끝에 이 원고는 1975년 《신화엄경합론》이란 타이틀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영원을 내다보는 사상과 예지
김중배(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동양의 마음은 유 · 불 · 선儒佛仙을 근기根氣로 다듬어지고 밝혀져 왔다.
유교는 존심양성存心養性을 말하고, 불교는 명심견성明心見性을 말하며, 도교는 수심연성修心練性을 말한다.
모두가 심성, 곧 마음자리를 탐구하는 데 일관해 왔음은 물론이다.
두어 기른다는 유儒나, 밝혀 본다는 불佛이나, 닦아 단련한다는 선仙이나, 그 표적은 필경 마음이었다.
다만 접근의 길과 깊이가 달랐다면 달랐을 뿐이다. 그 차이는 흔히 유식근儒植根, 도배근道培根, 석발근釋拔根이라고
말한다. 유가 뿌리를 심는 것이라면, 도는 뿌리를 북돋워 주는 것이며, 불은 뿌리를 뽑는 것이라는 견해다.
애써 심을 것도 북돋을 것도 없는 초월의 경지에 이른다는 문맥은 사뭇 변증법적 지양止揚을 방불케도 한다.
물론 식 · 배 · 발植培拔의 논리는 불가의 것이며 따라서 아전인주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불선이 나름대로 갖는 특성을 대담하게 강조하고 또 그것을 한 묶음으로 조감하려는 뜻에는 동의할 만하다.
유불선을 총괄하는 체계 위에서 동양의 마음을 찾으려는 시도는 문화권과 문화사의 종합적 파악을 위해서도
분명히 의미있는 일이다. 더욱이 문명의 내일을 내다보는 정신의 지표를 위해서도 헛된 시각은 아니다.
말하자면 탄허 스님은 바로 그 시각의 선지식善知識이며, 또한 선지자다.
새삼스럽게 그가 유불선에 통달한 철승哲僧임을 기록할 필요는 없다. 화엄학의 대가로서 《화엄경》을
국역했다는 사실도 구태여 되풀이하여 적을 필요가 없다.
탄허 스님은 그 위에 동양의 역학易學 원리로 어제의 역사를 되돌아 보고 내일의 역사를 예지한다.
비록 몸은 산간에 있으나 눈은 우주의 운행을 뚫어 보고자 한다.
그것이 탄허 스님이 말하는 '큰 공부'인 것이다.
동양 사상의 섭렵을 바탕으로 역학을 동원하는 탄허 스님의 예지력은 다음 세계의 주축은 동방의 한국이며.
그 주인공은 당연히 한국인이라는 데 귀착한다. 그는 다시 23도 7분가량 기울어진 윤도閏度數로 말미암아 저질러졌던
인간 사회의 부정부패도 사라지리라고 믿는다. 듣기에 따라서는 예지의 거창함이 지나쳐 허황됨으로 이어지는 느낌을
뿌리치기 어렵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지식까지 동원하는 그의 예지에는 분명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부정적이며 피해망상이라 할 수 있었던 우리 역사의식에 새로운 긍정, 새로운 용기를 불어 넣어 준
탄허 스님의 예지는 미래 적중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현실의 예지일 수도 있다는 실감에 젖게 한다.
사실 탄허 스님이 아니더라도 높은 하늘에서 보는 눈의 밝음을 한 손으로 뿌리쳐 버리는 것은 어리석다.
가령 일상적으로 두어지는 바둑판을 바라보자. 윗수가 훤히 보는 수를 아랫수는 보지 못한다.
아랫수가 보지 못하는 것을 윗수가 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정신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정신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미 체험했을 것이다.
탄허 스님에게는 몇 차례 예지 적중 내력이 있다는 사시은 알 만한 이들은 이미 아는 일이다.
그 하나는 6 · 25 직전, 스승 한암 스님의 만류도 뿌리치고 양산 통도사로 남하했던 이력이다.
그 둘은 울진, 삼척 지방에 무장공비가 몰려들기 직전 《화엄경》의 번역 원고를 월정사에서 영은사로 옮겼던 이력이다.
그러나 탄허 사상과 예지의 매력은 더욱 깊은 곳에 있다.
그는 예언한다. 지구에 잠재하는 화질火質이 북방의 빙산을 녹이기 시작한 것은 지구의 규문閨門이 열려
성숙한 처녀가 되는 과정이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지구의 초조初潮 현상은 소멸이 아니라 성숙의 모습이라는 낙관론이다.
그는 또한 머지않아 민중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믿는다. 땅의 민중이야말로 핵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역학의 산리算理로 헤아려 내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선지자는 고독하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나면 큰 우주의 운행과 같은 호흡으로
인간의 역사를 내다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