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천황상
일본의 군주는 천황(天皇, 덴노)이다. 제1대 천황인 진무(神武,711-585) 천황은 무려 기원전 660년에 즉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실제로 '천황'이라는 칭호가 처음 사용된 시기는 일러야 6세기 말, 즉 스이코 천황 때로 올라가며,
최근엔 7세기 후반,즉 덴무나 지토 천황 때라는 설이 유력하다. 일본 역시 이 시기 이전에는 왕(王, 기미)이라 불렀으며,
4-6세기에는 '대왕(大王, 오키미)'이라는 칭호도 사용 되었다.
그러면 왜 기원전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도록 천황 계보를 작성했을까? 그것은 바로 7세기 후반, 즉 천황 칭호가 사용된
시기가 바로 '일본'이라는 국가의식이 나타난 시기로, 『고사기(古事記)』(712년경)나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가 쓰인
때와 근접해 있다는 사실에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 이 시기 이후 일본에서는 이른바 '화이질서(華夷秩序) 사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사상은 일본, 좁혀 말하자면 나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천하관으로, 일본판 중화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초대 천황의 등장을 이렇게 끌어올렸던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645년 다이카개신 때부터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율령제(律令制)를 본떠 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이젠 더 이상 군주의 연호가 사용되지 않지만
일본은 아직도 군주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초상화가 어느 시기에 처음 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확단키 어렵다.
『만엽집萬葉集』에는 모노노베노 고마로라는 인물이 임지로 춟말할 때 애처가 그려진 모습을 휴대하고 싶다는 마음을
노래하고있어서, 이미 이러한 사모하는 마음에 기탁한 초상화 제작의 의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대실록三代實錄』에는
구다라노 가와나리가 가버린 종자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불러내었다고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초상화에서의 1차적 요건인 '초사성' 면에서 볼 때 그다지 신빙하기는 어렵다.
左) <진언오조상> 일본에서 초상화의 시작은 선진 문물의 상징인 불교의 승려상이었다
그림 속 주인공 역시 진언종의 다섯 조사 가운데 한 명인 불공이다. <진언오조상>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온 구카이는
그림의 스타일을 연구하게 한다. 중앙은 <용지상>, 우측은 <곤조 승정상>의 부분이다.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는 <쇼토쿠 태자상>
아스카시대를 이끌며 고대 일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쇼토쿠 태자는 일본에서 불교의 번창을 후원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대외 관계에도 신경을 많이 썼던 통치자였는데, 그래서인지 이 그림은 당나라 화가가 그렸다고도 전해지고
백제 위덕왕의 아들인 아좌태자가 그렸다고도 전해진다.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의 <부분도>
왼쪽 인물은 히카루겐지라는 인물로 아내의 불륜을 통해 태어난 아기를 안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귀족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묘사되어야 했다. 이는 오른쪽에 있는 귀족 여인의 표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아래의 시기산 연기 에마키에 등장하는 서민들의 표정은 과장되게 묘사된다.
신분에 따른 초상의 유형화이다.
만간지에 소장되어 있는 <도바 천황상>
도바는 다섯 살에 천황의 자리에 올라 16년만에 퇴위했지만, 그 이후 더 긴 기간 동안 상황(上皇)의 자리에 있으며 권력을 행사했다.
그의 아들 고시라카 천황은 아버지 사후에 부친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다. 늘 정치적 불안을 느껴야 했던 고시라카와는
초상화를 통해 강력했던 아버지의 영적 능력에 기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이덴보인에 소장되어 있는 <도바 천황상>
민간지본과 형식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上) 그림은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는 <천황 · 섭관 · 대신 영도권>
下) 도쿠가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천황 · 섭관 영도권>
한 · 중 · 일 삼국 가운데 군주상을 이렇게 한 두루마리에 많이 집어넣은 것은 일본만의 특수한 현상이다.
군주를 비롯한 실제 지배에 참여했던 이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아마 기록용 초상이었을 것이다.
위 두 그림 모두 인물들이 특징을 잡아 간략한 스케치로만 묘사되었다. 니세에 형식이다.
천황, 섭관, 이들을 수행하는 무관들을 그린 <수신정기 에마키>(위)나 섭정, 관백, 대신 등 주요 인물 57인의 초상을 그려넣은
<공가열영도권>(아래) 모두 역사적으로 비중이 높은 인물들을 묘사했지만 다소 코믹하기까지 하다.
천황의 공식 연회 장면이 묘사된 <중전어회도> 역시 니세에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인물들은 매우 간단한 몇 개의 선만으로 개성 넘치게 표현된다.
<미나모토노 오리토모상>이라고 전해지는 작품(위)은 일본 초상화의 걸작이며,
<다이라노 시게모리상>이라고 전해지는 작품(왼쪽 아래) 역시 유사한 스타일로 제작된 것이다.
그런데 몇 개의 선으로만 특징을 잡아 니세에 식으로 그린 작품(오른쪽 아래)의 등장은 새로운 느낌을 준다.
세밀한 붓 놀림은 초상 속 주인공에게 진지하고 엄정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런데 불과 선 몇 개로 대상의 특징을 잡아내는 니세에
기법의 등장은 초상 속 주인공들에게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근엄하게 묵직한 회화 속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발랄한 만화 속으로 자리를 옮기는, 아주 유쾌하지만은 않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교토 시라미네신궁에 소장된 스토쿠 천황의 초상.
많이 낡았지만 기법과 양식을 짐작해볼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다.
궁내청에 소장된 <천황 영도권>에 포함된 <스토쿠 천황상>
시라미네신궁 소장본과 느낌이 다르다. 앞의 것은 비운의 천황에 대한 감정을 적절히 표현했다면,
궁내청 소장본은 기록의 성력에 충실하다.
세속의 천황보다 불교로 귀의한 법황의 자리가 권력을 쓰기에 더 나았기에, 고시라카와는 천황이 된 지 3년만에
법황이 되었다. 불상을 연상케 하는 고시라카와의 목조 초상이다.
왼쪽의 <고시라카와 법황상>은 오른쪽의 <호넨상인상>, 즉 <소승상>과 형식이 유사하다.
화폭이 손상되어 그림 상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배경에 등장하는 장지나 인물이 앉아 있는 다타미를 보면 천황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불교 발전에 힘을 기울인 쇼무 천황과 네 명의 승려를 그린 <사성어영>
도요토미 히데요시(왼쪽)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른쪽) 초상.
배경에 휘장이 있고, 휘장 뒤로는 신비로운 풍경이 보인다. 신격화되는 인물의 초상에 사용되는 방식이다.
위에 나온 고시라카와 천황의 목조 초상 안에서 발견된 그림
고시라카와는 즉위 3년 만에 천황의 자리에서 물러나 불가에 귀의하고 법황이 된다. 그리고 법황이 된 그는 이후 5명의
천황이 바뀌는 동안 실권을 유지한다. 가늘지만 깊게 패인 것으로 묘사된 주름은, 여러 정치 세력들을
적당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노련한 군주의 얼굴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간단한 선묘로 인물의 특징을 잡아낸 니세에 방식의 <고토바 천황상>
그림 속 쇼무 천황과 세 명의 스님은 도다이지 대불 조성에 기여했으며, 그 인연으로 한 화면에 등장한다.
이 그림에서 가운데 있는 쇼무 천황만을 뽑아 예배용으로 그린 것이 아래 왼쪽의 그림이다. 아래 오른쪽의 그림은
사가 천황을 그린 초상으로 가마쿠라시대 회화의 표현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左.中)니세에 방식이지만 장중함이 드라나는 <고우다 천황상>
右) 오래 전에 비단에 그려져 군데군데 해진 흔적이 있는 다이카쿠지 소장의 <고우다 법황상>
左) 다이카쿠지에 소장된 또 다른 <고우다 법황상>
右) 젊은 시절, 아직 천황 자리에 있을 때의 하나조노 천황상이다. <천황연도권>에 포함된 작품이다.
추후쿠지에 소장되어 있는 하나조노의 법황상
막부는 쇠퇴하기 시작한 황실에 개입한다. 하나조노 천황은 막부가 제안한 천황 승계 방식에 따라 열두 살에 즉위해
스물두살 양위하고 법황이 되었다. 기품이 있지만 허약해 보이는 법황. 화가는 신랄하게 특징을 잡아내고 정확하게 대상을 묘사했다.
묘신지에 소장되어 있는 <하나조노 법황상>
세련된 솜씨로 그려져 니세에 기법으로 그려진 하나조노 법황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 상이라고 전해지는 그림. 아시카가는 본격적인 막부 시대를 열었다.
독특한 구도의 <고다이고 천황상>.
고다이고는 앞에 앉은 시신에게 정무를 듣고 있는 듯하다.
左,<고다이고 천황상>에서 시신 부분.
右) <공가열영도권> 가운데 등장하는 대신들의 재미있는 표정.
교조코지에 소장되어 있는 고다이고 천황의 비운의 삶을 애도하는 의미의 초상.
오른쪽에 있는 <천황 영도권>에 실린 고다이고 천황의 얼굴과 유사해 재세 시에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고다이고 천황상>의 관, 얼굴, 지물 부분. 지물이 불교적 물건들이다. 관이나 의상은 천황이지만
들고 있는 물건을 보아서는 동시에 부처이기고 하다는 의미의 관정 초상이다.
左) 금강살타 도해. 右) <고다이고 천황상>에 쓰인 글과 삼두사자 그림
화가인 도사 미쓰노부의 작품으로 그의 스타일이 잘 살아 있는 <고엔유 천황상>.
입 근처의 부분에 나타나는 심약한 느낌은 미쓰노부가 그린 초상에 자주 등장한다.
左) 도사 미쓰노부가 그린 모모이 나오아키상. 역시 입 주위 묘사에 있어 심약한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 있다.
右) <오기마치 천황상>. 옷과 바닥 장식 등에서 화려함이 보인다.
<고요제이 천황상>. 가노 단유의 아버지인 가노 다카노부 작품이다.
<레이겐 천황상>(왼쪽)과 <후묘인미야상>(오른쪽).
레이겐 천황상은 황녀 마사코 내친왕이 그렸으며, 후묘인미야상은 천황의 자화상이다.
천황과 친근한 사람들이 그린 에도시대의 천황상은 주로 친교의 의미를 지닌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에도시대(1603-1867)에 제작괸 천황상들은 대체로 표현이 딱딱해지고, 인물의 포착 방식도 패턴화되었으며, 묘사에도 신선미가
결여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천황 초상을 그리는 화가들은 근세에 오면 이름이 대체로 전해지고 있는데, 전문 화가들도 있지만
황자나 (내)친왕 혹은 고관들이 제작한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자고하 계기 자체가 숭배심에서 출발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까운 존재에 대한 친애의 정이 더욱 강했으며, 작품들에는 전문 화가의 솜씨와는 달리 소박한 필기가 드러나 있음을 본다.
이들 근세 천황상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 묘소가 있는 센뉴지에 전래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 것도 사후에 그려진
유상이라는 점이다. 결국 이들 초상화는 35년 내지 50년간 행해지는 기일 법회 등의 불사에 사용된 것이다.
여덟 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안토쿠 천황의 초상.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초상. 모두 수염이 없다.
황자인 교조 법친왕이 그린 고미즈노오(왼쪽)와 가노 단유가 그린 고미즈노오 천황상(오른쪽).
에도시대는 막부의 시대였다. 주인공은 막부의 통치자 쇼군이었지 천황이 아니었다.
고미즈노오는 그런 에도시대의 천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막부에 반발하고 적극적으로 정사에 나서려고 했다.
정력적이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천황의 만년 표정은 그래서 기력이 더 쇠한 듯하다.
두 그림 모두 출가한 고미즈노오를 그린 그림이다.
천황이 쓴 관의 뒤쪽의 끈은 왼편의 모모노조 천황상에서처럼 늘어지게 되어 있으나,
오른편의 고모모노노 천황상 부터 하늘로 치솟는 형상을 해, 아래의 닌코 천황상에서는 한층 더 높게 위를 향하고 있다.
이는 막부에 밀렸던 천황권이 서서히 회복되어 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메이 천황상(왼쪽)으로 가면서 끈은 더 하늘 높게 치솟는다.
오른쪽은 메이지 천황의 사진으로 궁정 개혁 전의 것이다.
관에 달린 끈이 극단적으로 커지고 방향도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
서양식 군복을 입고 있는 메이지 천황의 사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 있어 군주로서의 위엄은 다소 부족해 보인다.
사진의 한계를 감안해, 그림을 먼저 그리고 사진으로 이를 복제해 전국에 배포한 <메이지 천황상>
태조 이성계 어진의 얼굴 부분 배채
정면관은 초모나 기념적 의도로 제작된 일본 천황상에서는 한 번도 시도 되지 않았지만, 국가적으로 봉안사업을 벌였던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누차 시도되어 왔다. 특히 중국은 명 영종부터 청이 몰락할 때까지 진전에 모시는 의례용 황제상은 줄곧 정면상
으로만 그렸다. 정면관이 주는 근엄성은 유럽의 군주상에서도 확인되는데, 앵그르가 그린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은 그 좋은 예이다.
태조 이성계와 나폴레옹(위), 명 영종 정통제와 겐트제단화의 예수(아래).
모두 보는 이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는 정면관이다.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앞쪽을 응시하고 있는 나폴레옹은 마치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겐트제단화의 예수 모습과 비견될 정도로
당당하고 영웅적인 모습이다. 바닥에 깔린 카펫에는 고대 로마와 카롤링거 왕조(751-888)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있으며,
옷에는프랑크족의 벌 문양이 보인다. 오른손에는 왕홀을 쥐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지만, 허벅지 안쪽에는 샤를마뉴
대제(재위 768-814)의 검이 세워져 있다. 이 레갈리아, 즉 왕권의 상징물들은 이미 루이 14세 초상에서도
등장했던 것으로 유서 깊은 프랑스 황제로서의 권위를 말해준다.
왼쪽부터 송 인종, 명 선종, 청 세종 옹정제 초상의 손 부분.
그런데 동아시아 군주상에서는 왕조나 국가의 상징물이 화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의 어진은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손 자체가 보이지 않고, 따라서 손에 쥔 지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일본 천황상의 경우는 천황이나 상황을 그린 속체상에서는
손이 소매 바깥으로 나오지만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으며, 출가한 뒤 그려진 법체상에서는 간혹 지물을 들고 있기는 하나
이 역시 염주나 오고저 등 불교관계의 지물이지 천황이나 국가의 상징물은 아니다. 중국 황제상의 경우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모를
보인다. 명 · 청 대 중국 황제상에 나타나는 손의 포즈는 우리 어진들과 비교하면 무언가 멋을 부리고 있으며, 나아가 자기현시적
느낌도 있다. 그러나 이런 포즈들을 <루이 14세 초상>같은 유럽의 제후상과 비교하면 인상조작효과를 통한 권력자의 자기시위란
점에서 볼 때 현격하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고가 그린 <루이 14세 초상>에서 황제는 담비털을 덧대고 황금백합무늬가 수놓인
파란색 대관식 망토를 입고 연단에 서 있다. 특히 허리에 손을 얹고 돌아보는 자세는 남성적 섹슈얼리티와도 연결되는데,
이런 점은 동아시아 군주상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특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