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 쓴
훈민정음
訓民正音
훈민정음이 창제될 당시 중국은 明이 새로이 들어서면서 중국의 표준음이었던 남방 한자음이 북방 한자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따라 중국의 한자음과 차이가 나는 조선의 한자음을 조정하여 통일할 필요가 있었고 당연히 새로운 표준음을
학습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 즉 조선의 한자음을 통일하고 그것을 나타낼 문자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던 것이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본 훈민정음 창제의 한 까닭이자 이유였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분석이다.
현재 6천여 개에 이르는 세계의 언어 가운데 사용자 수로 볼 때 한국어는 대략 10 번째 내외에 해당한다고 한다.
한글 창제 이론과의 과학성과 창제 원리의 합리성 및 우수성은 현대 언어학 이론 원리를 모두 담고 있을 만큼
시대를 앞선 우수한 문자로, 세계 문자의 태생적 유래로 보아도 가히 독보적 가치를 지닌다.
훈민정음은 오늘날 우리가 한글이라고 부르는 '글자'의 이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책'의 이름이기도 하다.
'백성을 가르친다'는 뜻의 '훈민(訓民)'과 '바른 소리'라는 '정음(正音)'이란 말이 결합한 것으로 '백성이 쓰는 바른 소리글자'인
동시에 '우리말을 적는 바른 소리글자'로 세계적 보편 문자로 인정 받고 있으며 그 어떤 문자보다 실용적이고 민주적인 문자이다.
한글이 창제될 당시 사대부들은 한자로 쓴 글은 '진서(眞書)' 한글로 쓴 글은 '언문(諺文)'이라 부를만큼 달가워 하지 않았던 모양.
남존여비의 사회 관념으로 한글을 주로 부녀자들이나 사용하는 글이라 하여 '암ㅎ +글' (암클)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하지만 국가
에서나 지방 관아, 또는 사찰과 민간에서 다양한 한문 문헌을 언해해서 보급함으로써 줄기차게 한글의 생명력은 유지될 수 있었다.
특히 한글의 명맥이 유지되는 데는 조선조 여성들의 공헌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겠다.. 배워 익히기 쉬운 한글로 편지글인
내간(內簡)이나 가사(歌辭) 등의 글쓰기가 한글의 생명을 400여 년 동안 이어 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이다.
『훈민정음』이라는 책은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로 시작하는 『훈민정음』언해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한문으로 풀이한 해례본, 두 가지가 있다. 해래본이 1446년에 먼저 만들어지고 즈 중의 일부를 번역하여
언해본을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훈민정음』언해본은 몇 가지의 이본(異本)이 전하는 데 비해서 『훈민정음』해례본은 세상에 아직까지
단 한 권만이 전한다. 이 책은 경북 안동군 주하리에 있는 이한걸 씨 댁 회향당에 소장되어 있다가 1940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는데
글자를 만든 원리를 상세히 적고 있어서 훈민정음의 기원과 관련한 당시의 각종 가설을 불식시키게 되었다.
훈민정음의 서지(書誌)
『훈민정음』은 1962년에 국보 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현재 간송미술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목판본이며 전체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표지와 앞의 두 장이 떨어져 나갔으며 전체적으로 모서리가 닳아
있는데 특히 처음 몇 장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그리고 각 장의 이면에는 붓으로 글씨를 잔뜩 써 놓았기 때문에 앞면으로 배어 나와 있다.
떨어져 나간 앞의 두 장은 세상에 나올 당시에 원래의 모습을 수론하여 복원하였다. 이후에 배접과 제책 작업을 하였는데 배접한 후에 책을
재단할 때에 윗면과 아랫면을 지나치게 잘라서 원래의 책 보다 작아져 버렸다. 그리고 원래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제책 방법인 오침안정법
(五針眼釘法)으로 되어 있던 것이 사침안정법으로 제책이 잘못되었다. 즉 종이에 다섯 개의 구멍을 뚫어 실로 꿰매는 방법을 흔히 썼는데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하는 방법인 구멍을 네 개만 뚫어 제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겉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조선의 인쇄문화를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책 중 하나이다.
『훈민정음』은 세종 임금이 쓴 글[서문과 예의(例義)]과 신하가 쓴 해례로 이루어져 있다.
임금의 글은 크게 썼고, 신하의 글은 보다 작게 썼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목판본 반장(반곽(半廓)이라고 한다)에 전자는 7행으로 하고
한 행에 11자가 들어가 있으며, 후자 즉 신하의 글은 8행에 매 행 13자가 들어가 있다. 글씨를 쓴 이는 당대의 명필이자 세종 임금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용(瑢)인데 임금의 글은 방정한 해서체(楷書體)로, 신하의 글은 단아한 해행서체(楷行書體)로 썼다. 신하들이란 집현전
학사들을 말하는데 그들의 이름을 들어 보면,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8명이다(참고로 이 중에서
세 명이 사육신이다.) 이들 학자를 대표하여 해례이 서문을 쓴 이가 당시 예조판서(禮曹判書)이자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이던
정인지이다. 그의 서문은 일반적인 서문과 달리 책의 맨 마지막에 있는데 임금의 글과 같은 책에 들어 있는
신하의 글이므로 뒤로 간 것이다.
한편 신하의 글에서 임금이나 임금에 관련된 것을 지칭할 때에는 자신의 글을 내려 쓰거나 임금과 관련된 내용을 다음 행에 쓰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이 책의 경우에도 매 행을 한 글자씩 내려서 썼으며, 殿下(우리의 전하), 命(임금의 명령), 大智(임금의 큰 지혜)는 쓰던 행을
비워놓고 다음 행의 첫머리에 씀으로써 군신 간의 예의를 지키고 있다. 또한 세자(世子)라는 글자는 같은 행에서 한 글자를 비우고 쓰고 있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의 이름을 열거할 때에도 행의 반만 차지할 정도의 작은 글씨로 적어 놓았다.정인지 서문 외에 합자해(合字解)에도
이런 것이 있는데 칠언(七言)으로 된 결(訣)에 "하루 아침에 지으셨으나[一朝 制作], 신의 죄화와도 같으셔서" 에서
제작(制作)은 임금이 한 일이므로 행을 바꾸어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