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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중국의 황제상


중국의 황제상



중국에서 '황제皇帝'라는 칭호가 처음 사용된 것은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기원전 259- 210)로 부터 시작된다.

시황제가 황제를 칭하기 이전 은殷 · 주대周代에는 제후 위에 있으면서 중국 전토를 통치하는 통치자의 왕王 도는 천자天子라고 했다.

중국의 제왕상이 어느 시기에 처음 그려졌는가는 현재로서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공자(551-479)가 명당에 가서 선한 왕의 표상인

걸桀 · 주紂, 그리고 주나라 주공周公과 조카인 성왕成王의 초상화가 그려진 벽화를 배관했다는 기록이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보인다. 따라서 이미 주대에는 황제 초상이 그려졌음을 알 수 있겠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황제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양 무제 반신상>


군주를 그린 초상은 대부분 정적인 반면 이 그림에서는 오른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오른쪽으로 30도 가량 얼굴을 돌린 좌안칠분면으로, 상투를 튼 머리에는 잠관簪冠 쓰고 있는데, 옆으로 유침留針을 꽃아

머리를 정돈하고 있으며, 넓은 폭의 포袍를 입고 있다. 왼손에는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난 옥으로 만든 규圭를 받쳐 들고

있는데이 규는 천자가 제후를 봉하거나 신을 모실 때 드는 것이다. 숱 많은 눈썹은 새카만 검은 턱수염과 잘 어울리며,

꾹 다문 입매와 팔자수염은 무제의 위엄 있는 표정을 돋우어 준다. 중국의 어용御用에서 반신상은 주로 전신상의 부본副本

으로 함께 그려지고 보통 동감動感이 나타나지 않는 데 반해, 이 반신상에선 오른 손가락이 마치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듯한

움직임이 시사되어 있다. 현재 이 초상화는 중국의 황제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원본으로 추정된다.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역대 제왕도> 부분





   


<역대 제왕도>에서 북주 무제의 모습(왼쪽)은 돈황 석굴의 벽화인 <유마힐경변도> 가운데

 황제상(오른쪽)과 비슷한 형식을 보인다.






<역대 제왕도>를 그린 염입본은 당나라의 개국공신 24명의 초상 역시 그렸는데

명의 진홍수가 모사한 그림을 보면 움직임이 강조되어 있다.







당 고조(좌)와 당 태종(우)의 입상.

후대로 오면 대부분의 황제상들은 앉아 있는 좌상인데, 이 두 그림에서는 황제가 서 있다.






염입본이 그리고 서중화가 임모한 당 태종 <납간도>

납간은 군주가 신하의 말을 잘 새겨듣는 것을 뜻하며, 정관의 치를 이룬 당 태종의 면모를 기리고자 하는 초상으로 추정된다.







송첸캄포와 문성공주의 결혼을 성사시킨 가르통첸이 당 태종을 만나는 장면을 그린 <보련도>


7세기 초,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봉건 제국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중심이었다. 많은 타민족들이 당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기 원했으며, 혼인을 요청하러 온 사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의 티베트 일대를 장악했던 토번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토번의 32대 왕 송첸캄포(617-650)는 열세 살에 즉위해 비범한 용맹과 지략으로 몇 년 후 티베트 고원 일대를 통일하고 토번왕국

을 세웠다. 그는 634년부터 당나라에 두 번이나 사신을 파견해 혼인을 요청했으나 승낙을 받아내지 못하다가, 세 번째인 640년에야

대상大相인 그러통첸에게 황금 5천 냥과 보물 수백 점을 태종에게 바쳐 결국 당 태종의 허락을 받아 당 황실과 혼인을 통한 유대를

맺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때의 신부가 바로 문성공주로 그녀는 당 황족의 딸로, 어린 시절 태종의 양녀로 들어가 출중한 재능과 용모,

총명함으로 깊은 사랑을 받은 재원이었다. 문성공주는 성대한 결혼식과 함께 토번에서 40여 년간 살다가 680년 세상을 떠났다.

화려하고 웅장하기로 이름난 현재의 티베트 포탈라 궁은 바로 송첸캄포가 문성공주를 위해 지은 것이기도 하다.


가르통첸은 장식이 달린 옷을 입고 있는데, 약간 구부린 자세나 손의 포즈 등에서 온후하고 겸손한 성정이 드러난다.

넓은 이마의 주름살, 수수한 얼굴 표정과 자태는 그의 성실한 보습이 반영된 듯 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 태종은

당당하고 훤칠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똑바로 앞을 보는 눈, 엄숙한 표정은 원대한 계략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임을 시사해준다.

고대 회화 특유의 중요성에 따른 인물의 크기 차이가 확연해 보인다.






후당을 세운 장종의 초상


오대五代(907-960)는 당과 송나라(북송)라는 통일국가 사이에 낀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산수화라는 화목이 크게 성장하면서 이후 회화사상 대종大宗을 이루게 되는 준비를 마친 시기였다.

한편 화조화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우게 된다. 하지만 황제상은 그다지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후당後唐의 장종壯宗(885-962)의 입상 뿐이다.


이 작품은 앞서 본 당 고조상이나 당 태종상과 마찬가지로 명대에 함께 그려진 본으로 생각된다고.

이들 세 황제 초상은 군주 초상화에서 요구되는 웅위한 기개 표현이라는 부면에 주력한 것으로 평가된다.







경령궁에 봉안되었던 송대 황제 · 황후상들은 원나라  때인 1276년 12월에는 항주로부터 북평北平(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겨져

내전內殿에 소장되어 있었으며, 다시 명나라 성조 때에는 자금성 안 봉선전奉先殿에 봉안했다가 청대의 건륭제 대에 이르러

남훈전南薰殿에 소장케 되었다가 장개석 정부에 의해 일괄 대만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전해

 오는 송대 황제 · 황후의 초상화 29폭은 모두 당시의 원본이며, 그 표현 형식 또한 서로 유사해 황제 초상 제작에 있어

 얼마나 고정된 형식과 보수적 표현 기법이 줄곧 이어져 왔는가를 알 수 있다.





   




左)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복희의 좌상>으로 송대에 그려진 상상적 제왕 초상화이다.

右) <송 대조 좌상>으로 좌안구분면의 전신좌상이다.


송대의 여타 황제 초상이 모두 구륵鉤勒을 기조로 한 초상화로서 얼굴의 구성

요소만을 발췌 표현하 데 반해, 이 초상화는 안면의 육리문肉理紋을 그려내기 위해 선염이 짙게 삽입되어 있다.

 후대에 덧칠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조광윤은 중국을 통일해 송을 건국한다. 건국 이후 그는 무인들을 곙계하고 문인들을 등용해 문치文治를 펼친다.

그 자신이 뛰어난 무장武將이었기에 칼의 힘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황제가 된 장수는 붓을 들었다.

패기 넘치는 무사의 얼굴이 긴 전쟁 끝에 칼집에 칼을 넣고 붓을 꺼내든 연륜과 노련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변했다.


송 태조에게는 이 밖에도 전신 입상과 같은 형식의 반신상, 그리고 무사 차림의 반신상 한 점이 전해 온다.

그 중 무사 차림의 반신상은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 즉 후주에서 전전도점검으로 지낼 때의 화상으로 보인다.

소폭이지만 복두의 초기 형태로 보이는 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으며 비포緋袍, 즉 붉은색 포를 입고 지팡이를 쥐고 있다.

오른쪽 귀 밑 옷깃에 작은 쪽지를 붙여 '송 태조 점검상點檢像'이라 써 넣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점검으로 있었던 시기,

즉 황위에오르기 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년의 무사상과 노년상은 면모가

비슷하면서도 10년간의 풍상을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송 태종의 입상.


이 송 태종상은 다른 송대 황제 초상들과 달리 크기도 작고 입상 형식으로 보아 원래 경령전 봉안본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황제상을 경령전에만 보관하기 이전 황자의 집이나 사 · 관 등에서도 황제 초상을 받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런 곳에 모셔지던 황제 초상일 가능성이 크다.






  


左) 간결하게 묘사된 송 인종의 좌상. 정면관으로 인물을 그릴 때는 코 등의 특징을

그리기 힘들지만 이와 같은 칠분면은 상대적으로 쉽다.


右) 좌안 칠분면으로 그려진 남송의 고종 좌상.


남송을 세운 고종은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잡혀갔기 때문에 남경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허난성 상처우)에서 황제로 등극한다.

그 후 적을 피해 남쪽으로 더 내려가서 임안(臨安, 지금의 항저우)에 도읍을 정하고, 진회秦檜(1090-1155)를 재상으로 삼는다.

그는 당시 금나라도 두려워 떨던 용맹한 무장 악비岳飛(1103-1142)를 죽여 금나라에 화목을 청했으며, 천자 스스로 '신臣'이라

칭하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후세의 중국인들은 악비를 구국 영웅으로 여겨 악왕묘岳王墓에 모시고 있으며,

 고종은 원래 성정이 비겁해서 안일만을 택했다며 두고두고 비난하게 된다.






송 진종후의 좌상.


우안칠분면의 각도에다가 공수 자세를 취하고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이다.

용문화채관龍紋花釵冠을 쓴 화려하고 위엄 있는 형상으로 안면에는 붉은색의 강사絳絲를 늘어뜨리고 있으며,

또한 일종의 비녀 장식인 박빈博鬢도 관과 연결되어 양쪽에 늘어뜨리고 있다. 의복은 휘의(예복)을 입고 있다.







<송 인종후 좌상>


좌우에 시녀를 거느리고 있어 불교 미술에 등장하는 삼존불 형식을 연상케 한다.

송 진종후 좌상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장신구가 눈길을 끈다.






<송 철종후 반신상>


다른 황후의 초상과는 달리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송대 황제와 황후상들은 북송과 남송을 모두 관통해 보수적인 형식이 그대로 답습된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원나라는 칭기즈칸(1162-1227)이 몽골국을 건립한 후 모두 15명의 황제가 163년간 통치하게 된다.

원 세조 쿠빌라이가 국호를 '원元이라 칭한 후 11명의 황제가 재위해 98년간 통치했다. 명나라 군대가 대도大都를 점령해 원 순제가

북방 변경으로 도망간 뒤에도 여전히 원이라 불렸으며, 역사에서는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명 건문建文 4년 쿤테무르 칸이

피살된 이후 원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원대(1271-1368)는 중국 민족에게 정치적 · 사회적으로 가혹한 질곡이아닐 수 없지만

예술 면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원말 사대가四大家를 중심으로 문인화가 성숙기를 맞이했으며, 작가의 내적 성찰이 회화적 결실을

맺은 시기이기도 했다. 사실성을 위주로 하는 초상화에서도 원대는 주목할 만한 시기였다.






1328년경 그려진 만다라.


왼편 아래를 보면 원나라 문종과 코실라 왕자의 병좌상이 있고, 오른편 아래에 보면 황후와 바부챠 병좌상이 있다.

이런 형식은 고려로 넘어와 부부가 함께 그려진 부부 초상화에 영향을 주었다. 원대 황제 초상이 송대의 칠분면과는 달리

거의 정면관을 취한 것은 티베트 불교의 만다라 형식의 영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사실은 원대 황제 초상들은

 명 영종 이후의 제상들처럼 아주 완전한 정면상도 아님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左) 칭기즈칸 초상.  右)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칸의 초상.


두 그림 모두 사실적인 묘사를 퐁해 초상 속 주인공의 카리스마를 표현하고 있다. 사실적인 묘사는 원대 초상화의 큰 특징이다.

현재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전해 오는 원대 황제상들은 화폭이 완전하기는 하지만 대폭의 종축縱軸 전신상은 없으며, 모두

가슴까지만 그려진 반신 화첩본만이 전해 오고 있다. 현존본은 태조 · 태종· 세조· 성종 · 무종 · 인종 · 문종 · 영종 등

 여덟 황제의 초상들인데, 이들의 머리장식이나 복식 역시 몽골 유목민들의 복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원의 개국 군주인 태조상을 보면 넓적한 얼굴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눈매에선 웅략과 기개다 넘쳐난다.

그러나 사실적인 묘사에서는 오고타이 칸, 즉 태종상에서 더욱 역연하게 나타난다. 웅대한 기개가 뿜어져 나오는 듯 하다.

원 태종의 초상을 통해 외모의 골상은 물론 특히 눈주름 처리, 광대뼈의 묘사는 화가의 엄정한 사실안事實眼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태종은 도량이 풍부하고 관대했다고 전한다. 송나라와 힘을 합쳐 금나라를 멸하고 고려를 정벌했으며, 도 장병을 파견해 러시아를 토벌하고

나아가 폴란드 · 헝가리까지도 침공했다. 화면에는 당시 막강한 카리스마를 소유했던 태종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초상


원 세조는 원의 건립 이전부터 황하 이북 지역 전체의 군사 · 행정 업무를 통괄했으며, 당시 학문이 뛰어난

많은 한족 지식인들과 교분을 쌓았다. 승려 유병충柳秉忠, 학자 장문겸張文謙, 학경郝經, 요추姚樞 등은

모두 쿠빌라이가 신임하는 모사들이었다.






쿠빌라이칸이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원 세조 출렵도>


쿠빌라이는 세력을 넓혀 일본으로 동정東征했으며, 버마 · 베트남 등 유럽 동부를 포함해 미증유의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력만 막강했던 게 아니다. 세조 자신은 도량이 넓고 사람을 널리 잘 임명했으며, 유학을 신봉해 치국의 대법을 세웠다.

농업과 잠업을 중시하고 수리사업을 일으켰으며, 또한 원대의 행정 · 군사 · 부세 등의 제도 등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행성行省 제도는 후대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민족 국가를 공고하게 발전시켰으며,

민족 문화와 외국 문화 교류 촉진에도 중대한 공헌을 했다.


위 작품은 쿠빌라이가 흑마를 타고 시자들과 함께 만리장성 밖에서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모두 열 명의 말 탄 인물들은 만궁彎弓이나 매를 손에 잡고, 혹은 사냥개를 데리고 있다. 뒤로는 언덕 너머로

 낙타 대상들이 그려져 있어 사막 지방의 경관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화려한 복식과 그 화려함을 표현하기 위한 극세필의 묘사는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치세를 상상하게 해준다.

원 세조는 거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는 유목민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한족을 압도하는 화려한 문화를 일으켰다는 자신감으로 묘사되었다.






    


왼쪽은 원나라 문종의 초상으로 머리에 발립을 쓰고 있다.

오른쪽은 고려 후기의 문신 이포의 초상이다. 역시 머리에 발립을 쓰고 있어 원과 고려의 관계와 당대의 유행을 유추케 한다.







두 그림 모두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부인 차부이의 초상이다.

왼쪽은 단독 반신상이고 오른쪽은 앞서 쿠빌라이칸이 사냥을 하던 그림에 함께 그려진 것이다.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는 원대 황후 초상 15폭이 전해 온다. 세종후상(1폭), 순종후상(3폭), 무종후상(3폭), 인종후상(1폭),

영종후英宗后상(2폭), 명종후상(1폭), 영종후상(1폭) 등이며, 이외에 <後納汗像> 1폭과 미상 4폭이 있다.

차부이의 초상화는 모자 꼭대기에 구슬 장식을 한 홍색의 고고관姑姑冠을 쓰고 있는데, 고고관은 벗나무로 만들어진

일종의 장관長冠으로 홍색 비단으로 겉을 쌌다. 고고관은 후비나 대신의 아내가 썼다고 한다.

옷은 오른쪽 섶이 위로 가도록 옷깃을 교차시킨 포袍인데, 깃은 다른 색으로 처리해 산뜻한 느낌을 준다.






원 제국을 정치적으로 좌우했던 순종의 부인 다기의 반신상


원나라 황후 초상화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순종의 황후 다기(㙮濟)상 일 것이다.

『원사』에 의하면 '소헌원성황후昭獻元聖皇后, 이름은 '다기答己'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答己'를 '㙮濟'로 표기한다.

그녀는 순종順宗의 비이고 무종武宗과 인종仁宗의 모친이며, 무종이 즉위하자 황태후가 된다. 욕심이 많고 음흉한 여인으로

황태후의 지위를 이용하여 케무데르, 시라몬 등의 간신을 신임했다. 인종은 쿠빌라이를 계승한 후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한법漢法을 추진했는데, 다기와 테무데르 등은 이러한 인종에게 큰 불만을 가졌다. 그래서 그들은 인종을 종용해 인종의 열세 살된

아들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옹립하고 원래 왕위를 계승하기로 정해진 무종의 아들 코실라를 운남성의 태수로 보낸다.

1320년 인종이 서거하고 열일곱 살의 시데발라가 등극하니 그가 원 영종이다. 그는 부친보다도 더 한족 문화를 받아들여 한족

봉건제도를 표준 삼아 국가를 다스리고자 했다. 그러나 힘이 미약해 조모 다기와 그의 측근 테무데르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1322년 다기와 테무데르가 연이어 세상을 뜨자 영종은 일련의 신정을 추진했으나 보수적인 몽골 귀족의 큰 불만을 야기해 시해된다.


이 작품을 보면 일자로 된 눈썹, 광대뼈, 코와 동공 처리, 인중 및 오르린 입, 턱 밑의 살집 등에서 화가가 대상을 얼마나 세밀히 관찰

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원나라 초상화가들의 관찰과 묘사력에 놀라게 되는데, 초상화론에서도 이때에는 실제적인 작법에 대한 이론이

크게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원대의 대표적인 초상화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안면 구조에 대한 의식이 논의되고 있음을 본다.


무릇 상을 그리는 것은 반드시 상법像法을 꿰뚫어야 한다.

개인의 면모面貌 부위는 무릇 자연의 오악五嶽 · 사독四瀆과 같다.


중국 산에 숭산(崇山: 중) · 태산(泰山: 동) · 화산(華山: 서) · 형산(衡山: 남) · 항산(恒山: 북)의 오악五嶽이 있듯이,

인간의 골상에도 오악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즉 코는 중악, 왼쪽 관골은 동악, 오른쪽 관골은 서악, 하관과 턱 부분은 남악,

이마 부분은 북악이라는 것이다. 또한 사독四瀆은 중국의 사대 강인 양자강을 남독, 제수濟水를 북독, 황하를 서독, 회수를 동독이라

보았던 것으로, 이를 눈구멍, 콧구멍, 입구멍, 귓구멍과 유비하는 입장이다. 이것은 인간의 안면 구조가 지닌 높고 낮은 형세를

자연의 고심세高深勢와 유비하는 이른바 골상법을 염두에 둔 서술이다. 따라서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골상법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며, 이런 부면은 원대 황제 초상에서 잘 예시되어 있다.








1368년 주원장朱元璋(1328-1398)은 응천應天(지금의 장쑤 성 난징)에서 황제를 칭하며 명(1368-1644)을 건립한 후

정치 · 군사  등의 방면에서 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군사 대권을 집중시켜 중앙집권을 강화하게 된다. 홍무洪武 연간에는

 사회 · 경제가 역사상 최고 수준에 달했으며, 이는 명대 사회의 경제가 번영하는 기초가 되었다. 명나라는 성조 영락제永樂帝

(1360-1424)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15세기 초에는 환관 겸 정략가였던 정화鄭和(1371-1433?)가일곱 차례나 서양 원정에

 나서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 항해사상 장거를 이룩하게 된다. 하지만 영종 정통제正統帝(1436-1499)부터 쇠락으로 치달아

환관이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가 부패했으며, 토지 겸병이 심해지고 농민 봉기가 빈번해진다. 계급모순의 격화는결국 명 왕조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1606-1645)이 이끄는 봉기군이 북경을 점거함으로써 명 왕조는 막을 내린다.






<명 태조 좌상>

바닥에 화려한 채전이 보이는데 이는 이후 한국의 어진 제작에도 영향을 준다.


명 태조는 다면적 인격을 지닌 인물로, 청나라 학자 조익趙翼(1727-1814)은 명 태조를 가리켜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고 평한 바 있다. 초상화 제작에 있어 명 태조는 시조라는 의미에서 중시되었던 듯,

현재 전해 오는 작품만 해도 무려 11폭이나된다. 크게 보아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봉선전 봉안을 위한 것으로 실인물實人物에

핍진한 초상화이며, 또 한 종류는 '이상異像'으로서 오악조천五嶽朝天 식의 기괴한 형상을 한 초상화이다.


전자는 익선관에 황포黃袍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이다. 안면의 각도는 완전한 정면은 아니고 약간 오른쪽으로 틀고 있다.

우리나라 어진이 주로 손이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데 반해, 이 명 태조상에서는 오른손은 허벅지 위에 놓고 왼손은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어 더욱 활달한 기개를 보여 준다. 어깨가 넓고 당당한 풍채, 그리고 조심스럽지 않게 발받침대를 딛고 있는 양 발의 형상은

위풍 당당함과 연결된다. 치켜 올라간 눈썹과 정기 어린 눈의 표현, 꾹 다문 입매와 팔자 콧수염, 숱은 많지 않지만 용이 도사리듯

형용된 규염虯髥 등은 군주의 카리스마를 뿜고 있다. 또한 옷주름선은 선묘를 위주로 해서 아주 강력하게 표현했으며,

 바닥에는 기하학적 문양의 화려한 채전이 깔려 있다.






명 태조 초상 중 후자, 즉 오악조천식 초상화는 '이상異像'이라고 부른다.

이 오악조천식 이상은 면류관을 쓰거나 익선관을 쓰고 있는데, 얼굴 묘사에 있어 이목구비가 왜곡되어 있으며, 많은 점과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황제상은 고궁박물원만 해도 무려 10점이나 전해온다. 이런 오악조천식 황제상이

제작된 배경에는 주원장이 천하를 통일한 뒤 자객을 우려해 제작 · 유포하게 했다는 설이 있었는데,

이것은 초상화가 사실적 도상을 기피하려는 사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고 한다.






명 태조의 오악조천상과 맨 오른쪽의 『계왕씨비전지인풍감원리 상법전서』라는 관상책에 나오는 용의 상.

즉 용형龍形이다. 오악조천상은 인물의 이목구비를 중국의 유명한 다섯 산에 대입한 것으로, 오악조천식으로 태조를 묘사했다.

어떤 관을 쓰고 있는지에 차이가 있을 뿐 얼굴이 모두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며,

이는 모두 용형과도 관계가 깊어 보인다.





    



左) 명 성조 영락제의 좌상.  右) 명 성조 영락제의 반신상


1398년 명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황태손 주윤문이 즉위한다. 그가 바로 명의 혜종이며, 역사에서 그의 연호를 따서 건문제라 부른다.

건문제는 얼마 안 있어 삼촌인 주체朱棣에게 황위를 빼앗겼고, 그렇게 해서 제위에 오른 이가 바로 명 태종이다. 그는 후에 성조로

개칭되었으며, 연호는 영락永樂이다. 영락제는 건문제를 시해했다는 사실이 불편했던 듯, 남경을 떠나 북경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명은 이 성조 대에 가장 번성한다. 문화적으로 성조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아마도 『영락대전永樂大典』의 편찬일 것이다.

5년에 걸쳐 완성된 이 대형 백과사전은 모두 2만 2937권에 달하는 중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책으로

 민족적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명을 강성 국가로 만들었던 영락제의 단호하고도 과감한 면모는 초상화에서도 유감없이 잘 드러난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전해 오는 전신좌상과 반신상 두 점은 거의 같은 모습이다.






명 선종 선덕제의 좌상


명 선종(1399-1435)는 즉위한 후 숙부인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의 반란이 일어나자 황제 스스로 정벌에 나서 진압했으며,

1426년에는 여진의 한 부족인 우량카이의 침공을 격파해 강력한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으나, 영락제와는 달리 적극적

대외정책을 쓰지는 않았다. 그는 서른일곱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림에도 뛰어나 휘종과 함께 황제 화가로

유명하며 신하들에게 호의를 베풀 때 자신의 그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선덕요宣德窯는 이 시대의 풍조의 일단을 반영한다.







위의 그림은 선종 선덕제의 마상상으로 황제가 수렵에 나선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며, 청대에 그려진 행락도 가운데

수렵도의 원형을 보여 준다. 아래의 그림은 명 선종 행락도로 선종이 교외로 나들이 가는 모습을 그렸다.

두 그림 모두 황제의 일상 생활을 그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명 영종 정통제의 좌상


앞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는 정면관이다.

살아 있는 동안 두 번이나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명을 위기로 몰고 가는 황제, 정치적으로는 무능했지만

그의 초상은 중국 황제상의 전범이 된다. 보는 이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정면관 초상.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황제는 존경을 '요구' 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명 세종 가정제의 좌상


이 초상 역시 정면관인데, 익선관, 곤룡포라는 황제의 상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이다.


11대 황제인 무종의 사후, 무종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촌동생인 열다섯 살의 주후총朱厚㷓(1507-1567)이 황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세종이다. 그는 연호를 따서 가정황제嘉靖皇帝 불린다. 도교에 몰두해  끊임없는 도관道觀 건설로 인한 가정제의

사치와 낭비는 국고를 텅 비게 하였으며, 탐관오리로 인해 백성의 곤궁함을 가중시키고 만다.






 


왼쪽은 명 세종 가정제 출경도이고 오른쪽은 입필도이다.


이 두 그림은 가정제가 생부의 무덤에 가는 길과돌아오는 길을 그린 것이다. 화면에 다양한 복식과 풍광이 담겨 있어 풍속화,

기록화적인 요소가 발견되는 그림이다.이 두루마리 그림들은 미상의 궁정 화가에 의해 1536년에서 1538년 사이, 30대 초반에

접어든 가정제가 호북성湖北省에 잇는 선대 황제들의 묘에 여러 차례 방문한 일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명 황제의

초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표장 · 예복 · 무기 · 부채 · 마차 · 모자 같은 세부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출경도는 세종이 황릉에 배알하기 위해 궁정을 나서는 그림으로 황제는 무장한 채 무장한 말을 타고 있다.

황제의 모습이 다른 시신이나 종자들의 모습보다 크게 그려져 있는데, 보는 이를 빤히 쳐다보는 정면관이 너무 강조되어

부자연스러울 정도이다. 또한 입필도는 세종이 황릉을 배알하고 어좌선御座船을 타고 궁전에 돌아가는 그림으로 여기서 세종은

용을 수 놓은 자포紫袍를 입고 배 안에 정좌해 있다. 황제의 얼굴 모습은 비록 초사성肖似性에선 떨어지지만,

 화면에는 풍속적 요소가 가미되어 분위기를 돋운다.






명 신종 만력제의 반신상


명대는 세종 이후 더욱 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대 화아제인 신종 만력제萬曆帝(1563-1620)는 초기에는

장거정張居正을 등용해 일조편법을 시행하는 등의 내정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발전을 가져온다. 하지만 장거정이 죽은 뒤 신종이 친정을 하면서 황제의 역할과 정무를 내팽개쳐

더욱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결국 명의 멸망을 재촉하게 된다.





   


左는 명 성조의 황후인 인효문황후 초상이고  右는 신종의 황후인 효단현황후의 초상으로

명대의 초상화는 황제의 초상화와 짝을 이루며 화첩으로 장정되었다.







청나라의 황제상은 마지막 황제인 부의浮儀(1906-1967)가 당시 나이가 아직 어려 정식 초상이 없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황제들 모두가 상당한 수의 초상화를 제작했으며, 제법 많은 작품들이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전해 오고 있다.

특히 성조 강희제康熙帝, 제종 옹정제雍正帝, 고종 건륭제乾隆帝 시기에는 궁정회화의 발전에 따라서 황제 초상의 유형도

조복상朝服像 · 독서상讀書像 · 융장상戎裝像,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행락도 등이 매우 광범위하게 제작되었으며,

그 질적 수준에 있어서도 높은 성과를 이루어냈다.







上은 청나라 황제들의 초상을 모셔놓은 수황전의 외부와 내부 사진이고

下는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의 초상 사진.








청나라의 처음 두 황제인 태조 누르하치(1599-16236)와 태종 숭덕제崇德帝(1592-1643)는 아직 본토로 들어오기 전의

황제들이므로, 청대 황제 초상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초상화는 재세 동안에 그려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현재 전해 오는 제1대 황제인 태조 조복상朝服像과 제2대 황제인 태종 조복상은 사후에 추화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형식은 제3대 황제인 세조 순치제順治帝(1638-1661) 조복상과 매우 유사하다.


세조 조복상을 보면, 필법이 정교하고 색채가 화려함을 알 수 있다. 청 태조와 태종의 얼굴은 중국 전통의 초상화 기법에 따라

선조를 이용해 정확하게 얼굴 윤곽과 오관 위치를 구륵했고, 다시 선염을 써서 얼굴의 요철을 부드럽게 조화시킨 후 윤색해서

얼굴에 체적감이 생기게 했다. 채전의 묘사 방식은 이전 시대 제왕 초상들과는 달리 보는 이에게 깊이감을 느끼게 한다.

이는 서양 초점투시焦點透視 화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강희제의 장년 조복상








     


) <조주>   中 <금불>  右 <관정>






강희제의 조복상으로 노년의 모습을 그린 초상이다.


강희제 조복 노년상은 상당히 뛰어난 작품으로 주목된다. 산호 조주를 하고 있는데, 얼굴 묘법엔 더 이상 구륵 위주가 아니라 붓질을

되풀이해 준찰皴擦 했다. 얼굴 채색은 전반적으로 제법 짙으며 얼굴의 우묵 들어간 부분엔 붓질을 여러 번 덧칠하고 좀 나온 부분엔

덜 해서 여러 층으로 홍염烘染 함으로써 요철감을 부여했다. 또한 눈꼬리 주름에도 붓질을 여러 번 해서 음영기를 집어넣었는데,

이러한 기법은 명나라 증경曾鯨(1654-1647)을 잇는 이른바 파신파波臣派(파신은 중경의 자〔子〕인 파신을 따 지음)

 화법의 적극적인 구사를 보여준다.





   


강희제 반신상(노년상)                                 건청궁에 있는 '정대광명' 현판






여름 조복을 입고 있는 옹정제 조복상


이 작품에서 옹정제는 팔자수염을 기르고 있고, 입술 밑에 수염이 나 있다. 옹정제에 오면 의복은 더욱 화려해진다.

포즈는 왼손으로는 조주를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놓고 있는데, 이런 포즈는 청대 황제 초상의 기본 포즈로서

후대에도 모두 이 포즈를 따르게 된다. 바닥엔 화려한 채전이 깔려있고 옷의 주름은 매우 선명한 완전한 선묘식 화법이다.






옹정제의 <이소채회상泥塑彩繪像>


이것은 초상화가 아니라 소상에 채색을 입힌 일종의 초상 조각이다.

 나이는 30세 전후로 추정되며 이것은 옹정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건륭제 조복상(노년상)





건륭제의 아들 가경제의 유년상(왼쪽)과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의 조복상(오른쪽), 강희 · 옹정

건륭제의 전성기 이후 쇠락해가는 국력에 비례해 청의 황제상 수준도 떨어지기 시작한다.






        


左) 청 태종 홍타이지의 두 번째 황후 효장문황후의 상복상.

右) 효성인황후 조복상(매우 화려하고 복잡하다).







효성인황후 조복상에 묘사된 금약, 영약, 채세.






강희제의 첫 번째 황후, 효현순황후의 조복상.


황후의 초상이 황제 초상보다 더 화려해 보이는 것은 바로 포 위에 조괘는 모양이 우리나라의 긴 배지와 같으며

길이는 길어서 포와 같다. 석청색으로 가선을 두르고 앞 · 뒤, 좌 · 우에 각각 용 한 마리씩을 수놓고 그 사이에 오색의 구름 문양을

수 놓았습니다. 겨드랑이 밑에 끈을 달아 뒤에서 조여 몸에 맞게 묶는다. 그리고 괘 아래에는 포 위에 조군朝裙을 입었다.

여러가지로 서양의 초점투시 기법을 통해 보좌의 용마저도 입체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보좌의 방석이나 조복의 아랫단에 나타난 빛의 표현은 중국 전통 회화에서는 이제까지 볼 수 업었던 특징이다.

리고 옷의 질감이나 조복 가장자리에 있는 검은 담비의독특한 질감은 운염의 효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사실을 중시하면서도 정신성의 표현에 달한 뛰어난 작품으로 건륭제 조복상과 마찬가지로 효현순황후 초상 역시 낭세녕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낭세녕은 예수회 일원으로 중국에 건너와 강희 · 옹정 · 건륭 세 황제에게 봉공한 이탈리아 화가이다.





  


左) 낭세녕이 그린 건륭제와 후비들의 초상


건륭제는 이 그림을 특히 아껴 함부로 꺼내 볼 수도 없게 명했다.

건륭제가 가장 사랑했다는 효현순황후의 얼굴을 기본으로 해서 후비들의 특성을 묘사해 인물들이 모두 닮았지만

똑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다. 이 두루마리를 펴면 우선 건륭제의 초상화가 나타나고, 다음에 황후와 귀비 貴妃 ·

순비純妃 · 가비嘉妃 · 영비令妃 등 12인까지 모두 13인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右) 무장한 향비香妃의 초상


청대 궁정 황비들의 유화 초상화 작품 중에는 특이하게도 향비가 갑주를 입고 있는 무장한 향비상이 있다.

향비는 아름답고 신비한 여성으로 이야기나 소설 등에 많이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1769년 작으로 추정되는 이 초상에서

향비의 용모와 채색은 17세기 서양 고전화파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서태후 초상


우리 고종황제의 초상화를 그렸던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인 화가 보스가 1905년 중국을 방문해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사실적 묘사보다는 서태후가 요구한 대로 수정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보스는 2개월 여 동안

콧등의 그림자까지 없애는 등 서태후를 훨씬 젊게 묘사했다고 한다.






왼쪽부터 강희제 편복사자상, 광서제 사자상, 이하응 초상. 모두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문방구를 배경으로 책상에 앉아 있는 그림이 유행했는데

 맨 오른쪽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도 역시 이런 사자상의 영향을 받았다.







강희제(왼쪽)와 옹정제(오른쪽)의 독서상.





도광제의 편복 마상상(左)과  갑주 마상상(右)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은 유목민족 출신 황제에게 중요한 정체성이었다.






낭세녕이 그린 <건륭제 대열도>




<만주 팔기군 도해>

소수의 이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구조였던 청에서 황제는 늘 훌륭한 군이이어야 했다.






사냥 도중 소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강희제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낭세녕의 <건륭제 사렵도>

사냥의 정치적 군사적 의의가 중요했던 청에서 황제의 수렵도는 상당히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건륭제 초록도>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는 건륭제의 모습을 낭세녕과 당대 두 사람의 화가가 그렸다.










<건륭제 궁중행락도>










    


왼쪽부터, <가경제 고장상> 자연을 배경으로 한 초상화 양식이다.  명의 <강순부 초상> 이 역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초상화다.

청 도광제의 두 번째 황후인 효신성황후가 대나무를 감상하고 있는 <관죽도>와 연꽃을 감상하고 있는 <관련도>






 


황제의 가족이 등장하는 그림은 정치적인 의도를 많이 지닌다.

왼쪽부터, <평안춘신도>에는 옹정제와 건륭제가 한족의 복식을 하고 함께 등장하며, 다음 황위를 이을

<홍력세조행락도>에는 건륭제와 황자들이 등장하는데 황자들 가운데 가경제가 미늘창(무기)을 들고 있다.






<도광제 가족도>(위쪽)와 <희일추정도>(아래쪽)도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강희제 남순도>

기록의 의미가 강조된 그림에 등장하는 황제는 초상성이 약하다.








<건륭제 남순도>(위)와 그 부분(아래)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던 남순의 거대하고 화려한 행차가 묘사되어 있다.






<마술도>

 그림 속에서 건륭제가 마상곡예를 보고 있다. 청의 민족족 정체성과 군사적 시위를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만법귀일도>

실제 역사적 사건을 그리고 있다. 건륭제가 몽골을 영접하면서 현회를 베풀고 있다.

다민족 국가 청이 어떻게 국가를 경영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기록화라고 볼 수 있다.






<윤진 행락도>

시계방향으로, 몽골 귀족, 무굴 전사, 라마장, 자호. 베이징 고궁박물원






옹정제 반신상

옹정제가 서양식 가발을 쓰고 있다. 피지배충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황제는 당시 청에 있던 유럽인들의 지배자이기도 했다.

그런 논리 속에서 옹정제가 유럽인의 모습으로 그림 속에서 등장하는 것은 자유스러운 일이었다.






청의 지배력은 네팔과 티베트까지 미쳤다.

그래서 건륭제는 이 지역에서 붓다의 지위에 버금가는문수보살(만주스리)로 등장한다.

낭세녕이 그린 것이다.





<건륭제 보령사 불장도>

이 그림에서도 건륭제는 문수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홍력 세상도>(왼쪽)와 <홍력 유마연교도>(오른쪽)

건륭제가 왼쪽 그림에서는 보현보살로 오른쪽 그림에서는 유마거사로 분장하고 있다.





동아시아 군주상 가운데 중국의 황제상은 수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보여왔으며, 한국이나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황제상은 대략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의례용, 즉 제사를 지낼 목적하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로 시대마다 복식은

 다르지만 황제의 상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시좌상이다. 화폭은 대부분 괘축 형식으로 크기도 상당하다.

하지만 명대의 황제 초상은 괘축형과 아울러 화첩본으로도 전해 오는데, 화첩본은 반신상으로 역시 반신상인

황후 초상과 함께 한 벌로 장정되어 전해 온다. 아마도 반신상은 부본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황후상은 송대 이후 원 · 명 · 청대까지 두루 전해 오는데, 이점은 한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부면이다.

한국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왕과 왕후의 초상화가 함께 제작 · 봉안되었음이 기록에 보이며, 조선시대에도 중기 이전까지는 제작되었던

기록은 보이지만 현재 전해 오는 작품은 없다. 또한 일본의 경우에도, 이제까지 여천황은 10명이나 되지만 초상화 제작 기록이나

작품 모두 전해 오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중국 황후상의 의미는 주목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황제 초상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다른 인물로 꾸며 나타나는 분장초상화일 것이다.

이런 분장초상화에는 당시의 다문화 · 다종족 현실에서 중국이 맞대면하고 또 감싸안아야만 할 심각한 과제의 해결사로서 황제는

임팩트 강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건륭제의 경우는 세속적 존재만이 아닌 종교적 존재로 분장하고 있다.

때로는 유마로, 때로는 문수로 때로는 보현보살로, 황제는 역할 변경이 얼마든지 가능한 군주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군주로 부터 바라는 모습이 한국이나 일본과 달랐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폭넓은 초상화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면에 이처럼 다양하게 형상화해내는 발상과 그 실현은 중국 민족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 경직되지 않고 융통성 있는 예술적 잠재 능력의

한 표현일 것이다. 중국의 화가들은 고정된 패턴을 보여주는 위엄 있는 군주 초상 이외에, 정치적이면서도 상징적이고 우의적인 의미를

담은 또 다른 유형의 군주 초상을 화폭 안에 형상화함으로써 중국 황제상의 세계를 보다 풍요하게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인용서적 : 조선미 著  『왕의 얼굴』






C'Era Una Volta Il West(Once Upon A Time In The West) - Lanfranco Per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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