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황제상
중국에서 '황제皇帝'라는 칭호가 처음 사용된 것은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기원전 259- 210)로 부터 시작된다.
시황제가 황제를 칭하기 이전 은殷 · 주대周代에는 제후 위에 있으면서 중국 전토를 통치하는 통치자의 왕王 도는 천자天子라고 했다.
중국의 제왕상이 어느 시기에 처음 그려졌는가는 현재로서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공자(551-479)가 명당에 가서 선한 왕의 표상인
걸桀 · 주紂, 그리고 주나라 주공周公과 조카인 성왕成王의 초상화가 그려진 벽화를 배관했다는 기록이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보인다. 따라서 이미 주대에는 황제 초상이 그려졌음을 알 수 있겠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황제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양 무제 반신상>
군주를 그린 초상은 대부분 정적인 반면 이 그림에서는 오른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오른쪽으로 30도 가량 얼굴을 돌린 좌안칠분면으로, 상투를 튼 머리에는 잠관簪冠을 쓰고 있는데, 옆으로 유침留針을 꽃아
머리를 정돈하고 있으며, 넓은 폭의 포袍를 입고 있다. 왼손에는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난 옥으로 만든 규圭를 받쳐 들고
있는데이 규는 천자가 제후를 봉하거나 신을 모실 때 드는 것이다. 숱 많은 눈썹은 새카만 검은 턱수염과 잘 어울리며,
꾹 다문 입매와 팔자수염은 무제의 위엄 있는 표정을 돋우어 준다. 중국의 어용御用에서 반신상은 주로 전신상의 부본副本
으로 함께 그려지고 보통 동감動感이 나타나지 않는 데 반해, 이 반신상에선 오른 손가락이 마치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듯한
움직임이 시사되어 있다. 현재 이 초상화는 중국의 황제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원본으로 추정된다.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역대 제왕도> 부분
<역대 제왕도>에서 북주 무제의 모습(왼쪽)은 돈황 석굴의 벽화인 <유마힐경변도> 가운데
황제상(오른쪽)과 비슷한 형식을 보인다.
<역대 제왕도>를 그린 염입본은 당나라의 개국공신 24명의 초상 역시 그렸는데
명의 진홍수가 모사한 그림을 보면 움직임이 강조되어 있다.
당 고조(좌)와 당 태종(우)의 입상.
후대로 오면 대부분의 황제상들은 앉아 있는 좌상인데, 이 두 그림에서는 황제가 서 있다.
염입본이 그리고 서중화가 임모한 당 태종 <납간도>
납간은 군주가 신하의 말을 잘 새겨듣는 것을 뜻하며, 정관의 치를 이룬 당 태종의 면모를 기리고자 하는 초상으로 추정된다.
송첸캄포와 문성공주의 결혼을 성사시킨 가르통첸이 당 태종을 만나는 장면을 그린 <보련도>
7세기 초,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봉건 제국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중심이었다. 많은 타민족들이 당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기 원했으며, 혼인을 요청하러 온 사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의 티베트 일대를 장악했던 토번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토번의 32대 왕 송첸캄포(617-650)는 열세 살에 즉위해 비범한 용맹과 지략으로 몇 년 후 티베트 고원 일대를 통일하고 토번왕국
을 세웠다. 그는 634년부터 당나라에 두 번이나 사신을 파견해 혼인을 요청했으나 승낙을 받아내지 못하다가, 세 번째인 640년에야
대상大相인 그러통첸에게 황금 5천 냥과 보물 수백 점을 태종에게 바쳐 결국 당 태종의 허락을 받아 당 황실과 혼인을 통한 유대를
맺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때의 신부가 바로 문성공주로 그녀는 당 황족의 딸로, 어린 시절 태종의 양녀로 들어가 출중한 재능과 용모,
총명함으로 깊은 사랑을 받은 재원이었다. 문성공주는 성대한 결혼식과 함께 토번에서 40여 년간 살다가 680년 세상을 떠났다.
화려하고 웅장하기로 이름난 현재의 티베트 포탈라 궁은 바로 송첸캄포가 문성공주를 위해 지은 것이기도 하다.
가르통첸은 장식이 달린 옷을 입고 있는데, 약간 구부린 자세나 손의 포즈 등에서 온후하고 겸손한 성정이 드러난다.
넓은 이마의 주름살, 수수한 얼굴 표정과 자태는 그의 성실한 보습이 반영된 듯 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 태종은
당당하고 훤칠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똑바로 앞을 보는 눈, 엄숙한 표정은 원대한 계략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임을 시사해준다.
고대 회화 특유의 중요성에 따른 인물의 크기 차이가 확연해 보인다.
후당을 세운 장종의 초상
오대五代(907-960)는 당과 송나라(북송)라는 통일국가 사이에 낀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산수화라는 화목이 크게 성장하면서 이후 회화사상 대종大宗을 이루게 되는 준비를 마친 시기였다.
한편 화조화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우게 된다. 하지만 황제상은 그다지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후당後唐의 장종壯宗(885-962)의 입상 뿐이다.
이 작품은 앞서 본 당 고조상이나 당 태종상과 마찬가지로 명대에 함께 그려진 본으로 생각된다고.
이들 세 황제 초상은 군주 초상화에서 요구되는 웅위한 기개 표현이라는 부면에 주력한 것으로 평가된다.
경령궁에 봉안되었던 송대 황제 · 황후상들은 원나라 때인 1276년 12월에는 항주로부터 북평北平(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겨져
내전內殿에 소장되어 있었으며, 다시 명나라 성조 때에는 자금성 안 봉선전奉先殿에 봉안했다가 청대의 건륭제 대에 이르러
남훈전南薰殿에 소장케 되었다가 장개석 정부에 의해 일괄 대만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전해
오는 송대 황제 · 황후의 초상화 29폭은 모두 당시의 원본이며, 그 표현 형식 또한 서로 유사해 황제 초상 제작에 있어
얼마나 고정된 형식과 보수적 표현 기법이 줄곧 이어져 왔는가를 알 수 있다.
左)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복희의 좌상>으로 송대에 그려진 상상적 제왕 초상화이다.
右) <송 대조 좌상>으로 좌안구분면의 전신좌상이다.
송대의 여타 황제 초상이 모두 구륵鉤勒을 기조로 한 초상화로서 얼굴의 구성
요소만을 발췌 표현하 데 반해, 이 초상화는 안면의 육리문肉理紋을 그려내기 위해 선염이 짙게 삽입되어 있다.
후대에 덧칠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조광윤은 중국을 통일해 송을 건국한다. 건국 이후 그는 무인들을 곙계하고 문인들을 등용해 문치文治를 펼친다.
그 자신이 뛰어난 무장武將이었기에 칼의 힘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황제가 된 장수는 붓을 들었다.
패기 넘치는 무사의 얼굴이 긴 전쟁 끝에 칼집에 칼을 넣고 붓을 꺼내든 연륜과 노련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변했다.
송 태조에게는 이 밖에도 전신 입상과 같은 형식의 반신상, 그리고 무사 차림의 반신상 한 점이 전해 온다.
그 중 무사 차림의 반신상은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 즉 후주에서 전전도점검으로 지낼 때의 화상으로 보인다.
소폭이지만 복두의 초기 형태로 보이는 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으며 비포緋袍, 즉 붉은색 포를 입고 지팡이를 쥐고 있다.
오른쪽 귀 밑 옷깃에 작은 쪽지를 붙여 '송 태조 점검상點檢像'이라 써 넣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점검으로 있었던 시기,
즉 황위에오르기 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년의 무사상과 노년상은 면모가
비슷하면서도 10년간의 풍상을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송 태종의 입상.
이 송 태종상은 다른 송대 황제 초상들과 달리 크기도 작고 입상 형식으로 보아 원래 경령전 봉안본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황제상을 경령전에만 보관하기 이전 황자의 집이나 사 · 관 등에서도 황제 초상을 받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런 곳에 모셔지던 황제 초상일 가능성이 크다.
左) 간결하게 묘사된 송 인종의 좌상. 정면관으로 인물을 그릴 때는 코 등의 특징을
그리기 힘들지만 이와 같은 칠분면은 상대적으로 쉽다.
右) 좌안 칠분면으로 그려진 남송의 고종 좌상.
남송을 세운 고종은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잡혀갔기 때문에 남경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허난성 상처우)에서 황제로 등극한다.
그 후 적을 피해 남쪽으로 더 내려가서 임안(臨安, 지금의 항저우)에 도읍을 정하고, 진회秦檜(1090-1155)를 재상으로 삼는다.
그는 당시 금나라도 두려워 떨던 용맹한 무장 악비岳飛(1103-1142)를 죽여 금나라에 화목을 청했으며, 천자 스스로 '신臣'이라
칭하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후세의 중국인들은 악비를 구국 영웅으로 여겨 악왕묘岳王墓에 모시고 있으며,
고종은 원래 성정이 비겁해서 안일만을 택했다며 두고두고 비난하게 된다.
송 진종후의 좌상.
우안칠분면의 각도에다가 공수 자세를 취하고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이다.
용문화채관龍紋花釵冠을 쓴 화려하고 위엄 있는 형상으로 안면에는 붉은색의 강사絳絲를 늘어뜨리고 있으며,
또한 일종의 비녀 장식인 박빈博鬢도 관과 연결되어 양쪽에 늘어뜨리고 있다. 의복은 휘의(예복)을 입고 있다.
<송 인종후 좌상>
좌우에 시녀를 거느리고 있어 불교 미술에 등장하는 삼존불 형식을 연상케 한다.
송 진종후 좌상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장신구가 눈길을 끈다.
<송 철종후 반신상>
다른 황후의 초상과는 달리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송대 황제와 황후상들은 북송과 남송을 모두 관통해 보수적인 형식이 그대로 답습된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원나라는 칭기즈칸(1162-1227)이 몽골국을 건립한 후 모두 15명의 황제가 163년간 통치하게 된다.
원 세조 쿠빌라이가 국호를 '원元이라 칭한 후 11명의 황제가 재위해 98년간 통치했다. 명나라 군대가 대도大都를 점령해 원 순제가
북방 변경으로 도망간 뒤에도 여전히 원이라 불렸으며, 역사에서는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명 건문建文 4년 쿤테무르 칸이
피살된 이후 원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원대(1271-1368)는 중국 민족에게 정치적 · 사회적으로 가혹한 질곡이아닐 수 없지만
예술 면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원말 사대가四大家를 중심으로 문인화가 성숙기를 맞이했으며, 작가의 내적 성찰이 회화적 결실을
맺은 시기이기도 했다. 사실성을 위주로 하는 초상화에서도 원대는 주목할 만한 시기였다.
1328년경 그려진 만다라.
왼편 아래를 보면 원나라 문종과 코실라 왕자의 병좌상이 있고, 오른편 아래에 보면 황후와 바부챠 병좌상이 있다.
이런 형식은 고려로 넘어와 부부가 함께 그려진 부부 초상화에 영향을 주었다. 원대 황제 초상이 송대의 칠분면과는 달리
거의 정면관을 취한 것은 티베트 불교의 만다라 형식의 영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사실은 원대 황제 초상들은
명 영종 이후의 제상들처럼 아주 완전한 정면상도 아님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左) 칭기즈칸 초상. 右)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칸의 초상.
두 그림 모두 사실적인 묘사를 퐁해 초상 속 주인공의 카리스마를 표현하고 있다. 사실적인 묘사는 원대 초상화의 큰 특징이다.
현재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전해 오는 원대 황제상들은 화폭이 완전하기는 하지만 대폭의 종축縱軸 전신상은 없으며, 모두
가슴까지만 그려진 반신 화첩본만이 전해 오고 있다. 현존본은 태조 · 태종· 세조· 성종 · 무종 · 인종 · 문종 · 영종 등
여덟 황제의 초상들인데, 이들의 머리장식이나 복식 역시 몽골 유목민들의 복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원의 개국 군주인 태조상을 보면 넓적한 얼굴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눈매에선 웅략과 기개다 넘쳐난다.
그러나 사실적인 묘사에서는 오고타이 칸, 즉 태종상에서 더욱 역연하게 나타난다. 웅대한 기개가 뿜어져 나오는 듯 하다.
원 태종의 초상을 통해 외모의 골상은 물론 특히 눈주름 처리, 광대뼈의 묘사는 화가의 엄정한 사실안事實眼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태종은 도량이 풍부하고 관대했다고 전한다. 송나라와 힘을 합쳐 금나라를 멸하고 고려를 정벌했으며, 도 장병을 파견해 러시아를 토벌하고
나아가 폴란드 · 헝가리까지도 침공했다. 화면에는 당시 막강한 카리스마를 소유했던 태종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초상
원 세조는 원의 건립 이전부터 황하 이북 지역 전체의 군사 · 행정 업무를 통괄했으며, 당시 학문이 뛰어난
많은 한족 지식인들과 교분을 쌓았다. 승려 유병충柳秉忠, 학자 장문겸張文謙, 학경郝經, 요추姚樞 등은
모두 쿠빌라이가 신임하는 모사들이었다.
쿠빌라이칸이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원 세조 출렵도>
쿠빌라이는 세력을 넓혀 일본으로 동정東征했으며, 버마 · 베트남 등 유럽 동부를 포함해 미증유의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력만 막강했던 게 아니다. 세조 자신은 도량이 넓고 사람을 널리 잘 임명했으며, 유학을 신봉해 치국의 대법을 세웠다.
농업과 잠업을 중시하고 수리사업을 일으켰으며, 또한 원대의 행정 · 군사 · 부세 등의 제도 등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행성行省 제도는 후대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민족 국가를 공고하게 발전시켰으며,
민족 문화와 외국 문화 교류 촉진에도 중대한 공헌을 했다.
위 작품은 쿠빌라이가 흑마를 타고 시자들과 함께 만리장성 밖에서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모두 열 명의 말 탄 인물들은 만궁彎弓이나 매를 손에 잡고, 혹은 사냥개를 데리고 있다. 뒤로는 언덕 너머로
낙타 대상들이 그려져 있어 사막 지방의 경관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화려한 복식과 그 화려함을 표현하기 위한 극세필의 묘사는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치세를 상상하게 해준다.
원 세조는 거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는 유목민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한족을 압도하는 화려한 문화를 일으켰다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