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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컬렉터와 컬렉션



- 한 컬렉터의 수집 철학과 민화 컬렉션 -


수집이란 중독성이 강해서 남들이 느낄 수 없는 미의 세계에서 얻은 행복감도 크지만,

때로는 감내해야 할 고통도 적지 않다.





우연히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공예가의 길』과 『수집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해서 한동안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론에 심취하여 그의 전집을 구하여 읽고 또 읽고 했던 것이 예술을 사랑하고 미를 즐기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더불어 그것이 내가 민화라는 장르를 수집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까 가난한 한 상인이 17년 동안 나름의 수집 철학을 바탕으로 민화 수집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야나기 무네요시의 수집 이야기에 대한 이해와 깨우침 덕분이다.



나는 부족한 미적 관점으로 오랫동안 방황하고 고민하며 한 점 한 점 수집해 왔다.

좋아하는 작품이 어느 날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나 눈물이 날 정도의 환희도 맛보았다.

미감이 부족함에 회의도 느끼고 자책도 많이 했다. 그럼에도 우리 고미술품이 지닌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놓을 수는 없었다.

탐험가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 고미술품의 진경眞景을 향한 끝없는 갈망 하나로 버티어 왔다.






<신장도>, 지본채색, 135.5×63.5cm,

조선 중기, 개인 소장



 



백자 해태연적, 높이 6.8cm, 길이 15.5cm, 18세기 개인 소장



어떻게 수집하고 보관할 것인가?

수집의 진정한 재미와 행복은 미를 탐험하고 작품과의 무한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수집한 작품을 가까이 두고 오랜 시간에 걸쳐 알아가고 즐기면 딘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지만

이 과정이 없다면 창조적인 수집은 의미가 없으며, 될 수도 없다. 수집을 위한 수집은 무미건조하다.

진정한 켤렉터라면 평소에 관련 전문서적을 확보하는 데 게을러서는 안 된다.















미술품을 사랑하고 수집할 때도 유명하고 비싼 작품보다 남들이 하찮게 생각하고 보지 못하는 싼 작품에서

특유의 미를 찾으려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이미 유명해진 작품보다 깨어진 와당이나 하찮게 생각하는 민화, 제기,

무속화, 옹기같은 고물古物에 애착이 가고 더 사랑스럽다.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쉽게 보여 주지 않는

아름다움이지만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다 보면 진솔하게 다가와 진한 행복감을 선사한다.






<까치호랑이>, 지본채색, 84.5×55.5cm,

조선, 개인 소장



아름다움은 가슴으로 느끼려는 사람에게만 슬며시 다가온다.

그러다 보면 점차 남이 알지 못하는 오묘한 미의 세계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일부 수집가나 전문가에게 나타나는 미적 감각의 결핍과 불균형은 바로 지식과 머리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백자 철채장병, 높이 27cm, 조선시대, 개인 소장








<까치호랑이>, 지본채색, 80×48cm

조선, 개인 소장





<관동팔경>, 지본채색, 56×31cm,

조선 후기, 개인 소장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지나치게 지식에 의지하다 보면,

지식의 편린에 부합하는 것만 보일 뿐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미감은 자칫 건조해질 수 있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오히려 순수한 미감의 작용은 방해할 수도 있다. 지나치게 지식을 탐하다 보면,

직관이 주는 짜릿한 감동과 멀어질 수 있다. 싱그러워야 할 작품이 마른 명태처럼 건조해지고 재화의 가치로 전락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재화의 가치에 치중하다 보면 결국은 처음에 추구했던 미적 가치관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토기 시루, 높이 23cm, 청동기시대, 개인 소장




회청자 철화죽문 주자, 높이 26.5cm, 고려 중기, 개인 소장







청화백자 익룡문호, 높이 42cm, 조선, 개인 소장




횡적 수집을 할 것인가, 종적 수집을 할 것인가?




'횡橫'과 '종縱' 이 두 글자를 통해 컬렉션의 스타일을 이야기할 수 있다.

말하자면 컬렉션에는 횡적 수집과 종적 수집이 있다. 먼저 수평적인 횡적 수집이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가급적 많은 것을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다양하게 많이 모아서, 많이 보고 싶은 것이다. 예술품 컬렉션은 단순히

모으는 데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재력과 열정과 지식이 있다고 해서 완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인 수집과 크게 다른 것은

높고 바른 미적 가치관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뚜렷한 미적 가치관이 없으면 방향과 목표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 매우 번잡하고

지저분해질 수 있다. 수집의 성광과 실패는 결국 미적 가치관과 안목의 수준에 의해 좌우된다.









<까치호랑이>, 지본채색, 99×61.7cm, 조선,

개인 소장



문제는 거의가 횡적 수집이라는 점이다.

컬렉터의 열망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너무도 수평적이어서 수집의 의미를 퇴색케 하는 수집가나 수집품을 많이 접했다.

대부분의 개인 수집가들은 하나의 아이템을 선정하여 수십 년 동안 모은다. 품목에 연관성이 있다면 뭐든지 수집한다.

그러다 보니 자금은 소진되고, 정작 반드시 있어야 할 작품이 나오면 그때는 놓치고 만다. 그런 가운데 서서히 잘못된

수집을 해왔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부족한 자금력으로 수준 높은 작품을 모을 수 없고, 값싼 작품을 수집하다 보니 수적으로

방대하여 소규모 박물관이라도 만들려 하니 수준 높은 작품을 보여 줄 수 없게 된다. 지방 곳곳에 이런 컬렉터가 너무도 많다.



청동 정병, 높이 37cm, 고려,

개인 소장



값진 명품은 귀해서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가짜 속에서 진짜를 찾아내고,

 평범한 작품에서 남이 보지 못하는 명품을 골라내는 것이야말로 컬렉터의 안목이고 능력이다.

미술품에 대한 안목은 단순히 진부를 가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남다른 안목으로 높은 미의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다.

평생 이 화두는 풀어야 할 숙제이다 즐겨야 할 가치로 여기는 이가 컬렉터이다.





<궁중 화조도>(부분), 견본채색, 각 178×51cm,

제작연도 미상, 개인 소장



더 높은 경지의 안목을 원한다면 가짜와 허접한 작품을 많이 봐야 한다고들 말한다.

가짜를 많이 봐야 진짜의 장점과 차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짜에 속아서 많이 사본 사람만이 진품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마련이다. 세상사가 그렇듯 아름다움가 추함에도 양면성이 있다. 안목이라 함은 지극한 아름다움과

지극한 추함의 관계에서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힘의 긴장감을 즐김 미의 본질을 알아가는 것일 테다.

그리고 높은 미감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추의 깊이도 함께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명품을 소유한 컬렉터는 그만큼 가짜에 많이 속아보고 하품下品을 많이 경험해 봤다고 믿어도 좋다.

수집 경력이 적고 안목은 낮은데, 명품만 골라 사겠다는 마음은 일종의 욕심이고 오만이다.

토기 시문 편병, 높이 23cm, 고려 중기, 개인 소장



세상은 가짜 천국이다. 진품의 가치가 높을수록 가짜가 판을 칠 수 밖에 없다.

명품은 가품에 가려 있기 마련이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가품을 사서 쓰디쓴 경험을 하며 애증을 쌓다보면, 진품의 가치가

얼마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귀한 것임을 자각하게 된다. 탐험가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듯 컬렉터도 용기와 열정이 있을 때만

새로운 미의 세계의 문 안에 들어갈 권리와 자격이 주어진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보이지 않는 미의 세계가 너무 많다.

독창적인 컬렉션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미를 찾아내는 집요함이 요구된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수 밖에 없다.






해주 항아리, 높이 34.3cm,

조선,  개인 소장



거듭 말하지만 경제적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쉽게 다른 사람의 안목을 빌리다 보면, 안목은 자연스레 녹이 슨다.

전문가라도 수집 경험이 일천한 경우에는 단 몇 백만 원짜리도 구매할 때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학술적인 연구와 작품을 직접 구입하는 것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이다.


가장 인상깊게 들은 말이 있다.

"평생토록 수집을 해왔지만 결국은 그 또한 단 한 점을 위한 준비이다.

최고의 한 점을 위하여 평생 도전을 하다보면 결국 이룰 것이고 결국 수집을 완성하는 데 도달한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작품에는 결코 도전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컬렉션이 아니라 투자이거나 취미로 모으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횡적인 수집보다 종적인 수집에 도전의 가치가 있다.






     


左, 김정희종이에 먹, 114×29.5cm, 조선


이병직 · 장택상 · 손재형 구장

右, <화조도>, 비단에 채색, 142×53cm,

조선, 개인 소장




감상에는 사심이 없다가도 막상 구입하려는 순간 이성이 발동한다.

이성적인 사람은 우선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림에 조예가 있는 지인에게 도움을 청한다.

해당 작가의 약력과 지명도, 가격 상승 가능성 등에 대해 다양한 조언을 듣는다. 문제는 작품이 좋기는 한데

지인의 이성적 조언에  압도당해 감성이 꺾인다는 점이다. 한순간에 순수하고 아름답게 느꼈던 그림은 온데간데 없고

시장 경제 논리에 의해 작품은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미술 애호가나 컬렉터들은 항상 이와 비슷한 문제로 감성이냐

이성이냐를 놓고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액수가 크고 중요한 작품일수록 선택의 고민은 깊어진다.






<학죽도>(부분), 비단에 채색, 106×42.5cm,

제작연도 미상, 개인 소장



질서 있는 컬렉션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비움이다.

연못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물이 들어가지 못한다. 아무리 물이 맑은 연못일지라도

새로운 물이 유입되지 않으면 그 연못은 정체될 수 밖에 없다.









<화조도> 종이에 채색, 53.3×36.2cm,

조선, 개인 소장



좋은 작품은 항상 자기를 예우해 주는 사람에게 가려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는 사람은 사정없이 외면한다.

 경제적 논리로 작품을 수집하다 보면 최고 작품은 나타나지 않고 꼭꼭 숨어버린다.

옹기, 높이 58cm, 입지름 38cm,

19세기 말, 개인 소장



뛰어난 컬렉터는 켤렉터 혼자만의 노력으로 탄생할 수 없다.

동시대의 화상이나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 등이 건강하고 건전한 수집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운데 뛰어난 컬렉터가 탄생하는 법이다.



백자동화작호문호, 높이 28.7cm,

일본 민예관 소장




금제 반가사유상, 높이 7.6cm,

삼국시대, 개인 소장


반가사유상을 금동이 아닌 금으로 만든 것은 현재로서는 최초의 예이다.

석탑이나 목탑 안에 봉안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자 달항아리, 높이 34cm,

조선, 개인 소장


300여 년 동안 얼마나 귀하게 보관했는지, 사용한 흔적이 거의 없고, 몸체와 굽과 구연부가 깨끗하다.

실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굽이 작아 안정감이 부족하다. 아마도 철저한 감상용으로 제작되어 사랑받았음을 알 수 있다.

봍통은 굽보다 구연부가 조금 큰 것이 일반적이다 이 달항아리는 상승감이 최고이다. 작은 가시라도 닿으면 터질 것 같은

볼륨감에서 깊은 맛이 나고 상승감이 비롯되는 가벼움을 동시에 느낀다. 안방이나 사랑방 사방탁자 위에 백자 달항아리를

올려 놓고 바라보며, 작은 공간에서 소우주의 확장성을 느꼈을 것이다. 조선이 만든 이 백자 달항아리는

흠을 찾을 데 없는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 준다.








<산수도>(8폭 중 1폭, 부분), 지본수묵, 각 64×40.5ccm,

조선, 개인 소장





      


<소상팔경도>(8폭 중 2폭), 지본채색, 각 127×38cm,

조선 후기, 개인 소장






<까치호랑이>,견본채색, 135×81.7cm,

조선 중기, 개인 소장



민화가 과연 순수 회화인가?

민화가 진정 순수 회화 장르로 인정받아 국제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을까? 민화를 처음 수집하고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이 두 가지

의문점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결론은 민화는 순수 회화이며, 세계적으로 불가사의할 정도로 뛰어난 회화라는 것이다. 미술사가나 전문가

들은 민화가 순수 회화가 될 수 없다는, 그러기에는 적지 않은 결격사유가 있다고 논리적으로 반박할 것이다. 물론 그들의 논리에 저마다

타당성이 있으나 아직까지 민화의 정의를 언급한 이론을 그저 재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예를 들면 못 배운 사람이 그렸다거나,

정해진 초본草本을 따라 그린 그림이어서 공예에 가깝다거나, 제사 혹은 결혼식에 사용한 장식용 그림이라거나, 그렇지 않으면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상징으로 그려진 그림이라는 등의 이유로 흠을 잡을 것이다.


 더욱이 미술사학자들은 민화를 순수 미술로 다루지 않는데, 그것은 일정부분 작가 미상이나 제작연도 미상 등에 기인한다.

이에 따라 전문적 연구에서 배제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이유보다는 선배 학자들의 접근 방법이 미학적 접근이 아니라 민족적 접근

이었고, 그것을 추종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민화에 대한 학자들의 사적인 연구는 부족하지 않다. 다만 지나치게 사적인 연구에

치중하다 보니 조형미나 회화적 해석은 등한시한 것 같다.


나는 민화를 학문적인 지식 없이 오로지 그림으로만 인식하고, 감상하고, 사랑했다. 주로 회화적 관점에서 민화에 접근하였다.

민화를 사랑하고 수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스스로 확인하고 확신하기까지 17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소상팔경도>, 지본수묵, 69×33cm,

조선, 개인 소장



민화는 내면의 세계를 쉽게 보여 주지 않는다. 전문가들도 민화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규명을 했지만,

회화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무궁한 미지의 세계가 있음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민화에 쉽게 접근하여

손쉽게 규정하는 나의 미적 감각적 미감의 오만을 자책하기도 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민화의 거대한 조형 세계는 쉽게 다가갈 수 없을 만큼 깊고 푸르다.

누가 민화를 좋아하고 사랑할까?

천부적으로 미감을 타고난 사람이거나 평생 작품을 수집하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드나들면서 미의 세계를

터득한 사람, 아니면 화가로서 평생 자신의 조형세계에 천착하여 일가를 이룬 사람일 것이다.








     


<산수도>(8폭 중 2폭), 지본수묵, 각 83×26cm,

조선, 일본 민예관 소장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수준 높은 회화관繪畵觀을 엿볼 수 있으며,

이 작가의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는데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행복했다.






<화조도>, 지본채색, 67×35.6cm

조선, 개인 소장



민화는 회화이다. 민화는 이제 고대의 상징가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주목받아야 하고,

회화의 관점에서 감상 대상이 되어야 한다. 즉 상징과 관념의 덩어리에서 한걸음 더 나나가 회화적인 해석과 이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제작 연도를 알 수 없다고 해서 예술성이나 작가정신이 소멸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동안은 소재의 도상성과 관념이 이해의 대상이었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는 철저히 외면해 왔다.

그 결과 민화에 등장하는 소재의 의미를 고대 중국의 『산해경山海經』과 고사故事 등을 빌려 해석해 왔다.

이것을 독화법讀畵法이라고 하여, 민화 전문서마다 똑같은 방법으로 민화를 설명하고 있다.






<문자도-충>, 지본채색, 84×34cm,

조선, 개인 소장



'문자도'를 예로 들더라도 그린 작가가 다 다르고 해설은 대동소이하다.

민화는 당시의 용도가 혼례용이든, 제사 병풍용이든, 그 용도가 소멸되어 지금은 하나의 회화로 존재한다.

이제 과거의 정해진 관점으로만 해석하기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무속화가 무당집에 있을 때는 철저히 귀신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면 귀신의 역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무속화에 투영된 조형세계만 남는데, 계속 귀신으로만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무속화를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누가 귀신 그림을 가정집 거실이나 공공장소에 걸 수 있겠는가? 오히려 창고 속의 유물로 전락해써 죽은 역사의 유물로만

취급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민화의 조형 세계는 누구나 인식하기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오랫동안 민화의 예술적인 면에 주목해 오다가 문자도의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중

'자를 구성하고 있는 그림을 모아서 비교해 보았다.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와 새우 이미지의 조합과 표현을 통해 같은 소재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가의 독창성과 풍부한 조형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민화는 그림이지만 아직 회화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바르게 자리매김하여 대표적인 한국 문화로 세계인과 공유하려면, 우리부터 민화를 회화로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19세기에 그림 교육을 받지 않은 떠돌이 무명 작가가 그린 서민의 생활 장식화라는 틀에만 가둬둘 것이 아니라

우리부터 회화로 당당히 인정할 때 비로소 세계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민화가 회화로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장점은 인간적인 그림이라는 것이다.

민화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가장 솔직하고 진솔하게 담아낸 그림 아닌가. 이보다 더 가치 있는 표현의 세계가 어디에 있을까.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해학과 추상이 곁들여진, 독창적이며 매혹적인 그림 아닌가.

이러한 민화를 세계에 알려서 새로운 문화로 꽃피워야 할 시기가 왔다.




- 궁중 장식화와 민화 분류의 당위성 -


궁중 장식화는 화원이 궁중의 여러 공간을 장식하거나 의식에 사용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궁중 장식화에 감각적인 아름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화와 전혀 다른 미의 세계를 갖고있다. 궁중장식화는 압도적인 스케일과

표현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축되게 만든다. '아!' 하고 감탄하게 되지만 그림이 지닌 묘한 압박감이 권력에 지배당하는

느낌을 주어서 오래 보지 못하고 이내 시선을 피하게 된다. 왕실 권력의 상징으로 지극히 양식적이어서

여기에 개인의 관념이나 사적인 것도 이입될 수 없고, 공동으로 조화를 이루어 집단적으로 제작되었다.


반면 민화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사물과 대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표현된 독창적인 회화이다.

민화에서 볼 수 있는 개성적인 모티프나 활달하고 여유 넘치는 표현은 화원들로부터 도저히 나올 수 없다. 민화 작가는 자기를 버리고

민중이 원하는 바를 찾아서 꽃과 새와 나비가 나는 꿈의 세상을, 그 환희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즐겼다. 때로는 이웃과 함께 삶의 희로애락

을 나누며, 평생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삶을 일궈나갔을 것이다. 평생 산 넘고 개울을 건너다니면서 대자연을 가슴으로

느끼고 호흡하며 자연과 하나 되어 그리는 그림이 진실로 예술이고 회화 아니겠는가. 민화는 평범한 사고를 파괴하고,

이성을 초월하여 합리성의 한계를 이탈한 자유 분방한 그림이다.


19세기 인상파 이래 21세기 현대미술에서 추구하는 미적 요소가 오히려 서구 미술보다는 추상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우리 민화에

더 많이 스며 있다고 서양 학자들이 평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민화를 '실용 장식화'라는 틀로 묶어놓고, 하나의 민예품으로

해석하며 민예적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화는 비움으 미학이고 반복의 미학이다.

마음을 비우고 사물을 수없이 반복하여 수천수만 장을 그리다 보면, 그리는 이의 자아와 관념과 그기는 대상 사이에 하나의 질서가

형성되어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한다. 현대미술은 철저한 개인주의의 산물로서, 개인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스스로 경력을 쌓아서 자신의 지명도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예술계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민화는 조선 오백 년간 우리 민족이 만든 결과물이다. 길게는 반만년을 이어온 예술의 결정체이다 그래서 야나기는 한국 미술과

공예품은 만든것이 아니라 탄생한 것이라고,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다고 표현하였다.





   


<구운몽도>(8폭 중 2폭), 지본채색, 각 114×36cm,

조선, 개인 소장




- 민화의 추상미와 해학미 -


민화를 면면히 들여다보면 온통 추상이다.

꽃과 나비, 산과 바위, 풀과 나무 같은 소재가 무엇 하나 사실대로 똑같이 그린 것이 없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다른 세계의 그림이다. 민화는 현대미술 이상의 추상성이 있지만 기이하게도 난해하기보다 친숙하다.

추상과 반추상이 섞여 있고, 여기에 적절한 해학이 가미되어 생명력이 넘친다. 작가와 감상자 사이에 여유와 재미를 주고

건강한 소통을 이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되고 감동하는 추상의 세계이다. 민화는 현실과 공존하는 내용이어서 친숙하고,

진솔하고, 건강하고, 사랑스럽다. 또한 번잡하지 않고, 간결하며, 솔직하고, 해학이 있다. 빛나는 예지력과 통찰력으로 자연과 사물의

해석이 명쾌하고 담백하다. 이는 전문교육을 배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한민족의 감성과 심성의 유전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조도> (8폭 중 1폭), 지본채색, 각 85×38cm,

조선, 개인 소장



민화는 곳곳에 추상미가 가득하지만 어렵지 않다.

민화의 추상은 완성도가 높다. 머리에서 나오는 추상이 아니라 무수한 작업 과정에서 정리된 추상이라 더없이 건강하며 완벽한

골격미를 이룬다. 여기에 추상미와 해학미가 가미하여 재미있고, 이해하기 쉽고, 아름답다. 민화에는 추상미와 해학미가 공존한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 토우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회화와 소설, 연희, 판소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해학과 추상이 넘친다.


민화에 내재된 추상미늕 서양미술이 추구하는 추상미와 통한다.

민화는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회화의 본질에 충실한 그림이다.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책거리>(6폭 중 1폭), 견본채색, 각 72.5×36.5cm,

조선, 개인 소장


민화 작가의 이름이나 생몰연대 등을 알 수 없는 것은 애석한 일이나, 그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다.

현재 남아 있는 그림이 바고 그 작가의 역사이고 이름임을 인정하고 주목해야 한다. 평생 작가로서의 명예와

사회적 욕망 따위를버리고 독창적인 조형 세계를 이루고자 최선을 다했음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오랫동안 수많은 민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면서 발견한 점이 있다. 언뜻 보면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 같은데, 직감적으로

 '아, 이 작품들은 같은 사람이 그렸겠구나' 하게 되는 작품이 있다. 또한 같은 작가가 그렸을 것 같은 작품도 여러 점을 함께 보면

어떤 작품이 초년에 그린 것이고, 어떤 작품이 중년에, 또 말년에 그린 것인지 대략 구분이 된다. 그것은 같은 작가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집한 민화 작품을 매일 보니 다양한 관점이 저절로 생겨났다.








책거리는 책을 중심으로 한 문방사우 등을 그린 그림으로 책 뿐만 아니라 채과 기물이 평편의 화폭에서

어떻게 서로 대칭, 비례, 정제, 조화의 관계를 맺는가를 보여 주는 정물화이다.



2017년 여름 우연히 발견하여 구입한 책거리가 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생소했다.

작품의 바탕이 장지도 아니고 비단도 아닌 생모시로 보였다. 일반적인 민화 그림에서 볼 수 없는 재료이다.

그림 또한 어떠한 형상도 배제한 채 완전한 기하학적 문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세실로 엄청남 공력을 들여 그린 조형 세계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소장자에게 작품의 내력을 물어보니 큰 사찰의 고승이 소장하던 것이라 했다.

언뜻 '아, 그냥 장식적인 그림이 아니라 고도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그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접하는 스타일이

당혹스럽기도 하고, 작품이 발산하는 강한 정신성에 압도되어 한동안 말을 잃었다.






시간이 지나 혹시 이 책거리 작품과 같은 작가가 그린 비슷한 그림이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민화 도록을 찾아봤다. 역시나 프랑스의 기메동양박무로간 도록에 실린 책거리에 해답이 있었다.

전율이 일었다. 한 책거리 도판을 보는 순간 같은 작가가 그린 작품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 추상성은 이를테면 구상적인

책거리 작품에서 모든 형상이 빠지고 남은 상태였다. 그동안 작가 개념으로 민화를 구분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은 워낙 생소하고 특수하여 같은 작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로 인해 민화를 수집한지 17년 만에 처음으로 민화를 한 회화 작가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유사한 조형의 DNA를 가진 책거리 작품을 각종 도록에서 발췌하여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다수의 민화책에서 같은 작가라고

생각되는 책거리 그림을 30여 점을 골라내 스캔하고, 충무로에 가서 크게 확대해 가며 여러 날을 비교 관찰했다.

사물을 표현한 조형성으로 볼 때, 분명 같은 작가인데 복사하듯이 그린, 같은 작품이 하나도 없었다. 기법이나 조형성으로 분류하면,

동일한 작가라고 생각되나 작품마다 철저하게 다른 구도로 전혀 다르게 그렸다. 민화를 작가적인 측면에서 보지 않으면 절대로 같은

작가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 30여 점을 10호 정도로 인화해서 늘어놓고 비교해 보니 초년, 중년, 말년 작품임이 대략 구분되었다.

찾아낸 작품은 분명 천부적인 소질이 발휘된 것이었다.그 중에서도 어떤 작품이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고,

어떤 작품이 뛰어난지도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독창성을 지향하는 작가는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리되 같은 작품은 철저히 피해 간다.

창의성이 넘치고 넘쳐 매번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소재가 무궁무진한데, 굳이 같은 작품을 반복해 그리는 지루함을 자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행이 내가 구입한 책거리가 이 작가가 가장 마지막에 그린 것으로 최고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동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작품을 그리기 전에 그린 것은 기메동양박물관 소장품 도록에 실린 책거리로, 한눈에 봐도 전傳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나타난 천재적인 작가의 최고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공간 조형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선禪적인 정신세계까지 구현한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엄청난 집중력과 인내심으로 그린, 섬세함의 극칙를 보여 준다.

 이 도도한 미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다.





左, <책거리>, 지본채색, 77×49cm, 조선시대.

이우환이 기메동양박물관에 기증한 이 책거리는 제작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여겨진다.

右, <책거리>, 지본채색, 52.9×25cm, 조선시대

일본 민예관 소장으로 야나기 무네요시의 수집품으로 불가사의한 미의 세계가 있다고 극찬한 작품이다. 













<문자도>(8폭 중 1폭), 지본채색, 각 98×38cm,

조선, 개인 소장



2017년 말 큰 충격을 받은 작품을 구했다. 걸출한 또 한 사람의 천재 작가를 발견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처음 민화를 수집하던 당시 나는 고단샤의 『이조의 민화』(1892)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게 되었다. 한 점은 일본의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화조 8폭 작품'이고, 다른 한 점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소장한 '동물과 새의 그림 8폭 병풍'이다. 두 작품 모두 회화적이면서 추상적인

이미지가 인상 깊다. 이들 그림이야말로 세계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최고의 작품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문자도>(8폭), 지본채색, 각 98×38cm

조선, 개인 소장


화조도와 문자도에 탁월한 작품성을 보여주는 작가의 작품이다.

조형적인 관점으로 작품을 비교하다 보면 도저한 조형의 깊이를 체감할 수 있다.

이 작품을 그린 작가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이조의 민화』에 실린 두 작품.


위의 두 작품에 구현된 작품성을 추궇파여 수집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오랜 시간 관찰하던 중

위 <문자도 8폭병>발견을 계기로, 같은 작가라는 관점과 개념으로 조형의 DNA를 찾다보니 여덟 점을 발견하였다.

그 일부를 제시한다.





우리  민화에는 꽃 나무, 새, 동물 등을 그린 화조도가 절대적으로 많은데, 그 까닭은 집 안팎을 단장하는 데

꽃과 동물 그림이 가장 적절했을 뿐 아니라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꽃과 동물을 사랑했고 친숙하게 여겼기 때문이리라.

사랑과 부귀영화를 꿈꾸던 서민들의 순박한 마음이 화폭 가득 담겨 있다.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민화에 대한 본질이나 개념에 대한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민화라는 명칭도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름 붙인 것을 그대로 사용할뿐, 우리식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의견만 분분할 뿐이다.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현재 우리나라에서 민화 붐이 일어서, 민화를 공부하고 그리는 인구가 20여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민화는 주류 미술에 들지 못하고 있다. 내 생전에 제자리를 찾지 못해 추방이라도 당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동안의 경제적인 고통과 어려움은 민화를 수집하면서 느낀 행복과 깨달음으로 대체할 수 있다지만

 내가 애정을 쏟은 무명의 조선 민화 작가들에게는 무슨 면목이 서겠는가.


요즘 민화를 그리는 사람을 '민화 작가'라고 하면서, 정작 그림은 궁중 장식화만 그리고 있다. 아이러니하다.

민화와 궁중 장식화를 분류해 궁중 장식화가 떨어져 나간다면, 민화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장르로 전락할 것이라는 미술사가 민화계의

중심에 있는 한, 우리는 모순 덩어리를 안고 살며 아이러니한 상황을 후세에 그대로 물려줄 수박에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1960, 70년대 초기 민화 운동을 할 때 민화가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여 궁중 장식화를 끌어들인 미술계의 실수가 있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것이다. 민화의 본질을 너무 모르고 저지른 일이 아닌가 싶다.

민화 작가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고 그린 그림이라 예술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학벌과 상관없이 창의력이 요구되는

21 세기에 어울지지 않는다. 민화 작가는 기성세대가 남긴 틀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한 상상력으로

자기만의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고, 독창적인 표현 방법을 가질 수있다.






<무속화>, 견본채색, 99×66.3cm

조선, 개인 소장



몇 십 년 전, 프랑스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 민화에는 최고의 예술세계가 있으며, 불가사의한 미를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일찍이 야나기 무네요시도

민화가 제대로 알려진다면 세상이 충격을 받을 만큼 대단한 미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며, 지구상의 미가 아닌 하늘이 선사한

신선하고 통쾌한 신비의 결정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이처럼 외국의 전문가나 학자들은 민화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를 인사치례로 듣고 지나치는 바람에, 그 실체를 깨닫지 못한 채 외국에 헐값으로 내보내고 말았다.

정말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호랑이 가족>, 지본채색, 59.7×39.5cm

조선 후기, 일본 세리자와케이스케 미술관 소장



프랑스인이나 일본인이 수집해 간 민화의 양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은 왜 프랑스나 일본 수집가들이 이 서민 민화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원점에서 민화의 가치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왜궁중 장시고하를 수집하지 않고, 떠돌이 무명화가가 그린 그림만

골라갔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본은 당시 최고의 경제 호황기였기 때문에, 궁중 장식화의 가격도 비싼 금액이 아니어서

부담 없이 살 수 있었음에도 왜 굳이 서민 민화만 골라 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일본에서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설립한 일본 민예관, 구라시키 민에관, 시즈오카시립미술관, 덴리대 부속 참고관 등이

민화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들의 도록이나 책에 소개된 민화를 보면 모두 서민 민화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집요하게 수집했기 때문에 그 수량과 수준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특히 한국 미술에 관해서는 철저히 비밀에

붙인 채 항상 일부만 공개하는 것이 관례이다. 한꺼번에 공개하면, 상대국의 지탄을 받고 환수 요구에 시달리니 꼼수를 써서, 아주

오래전부터 소장하고 있었던 것처럼 조그씩 공개한다. 이것이 유럽 패권국이나 문화 정복자의 공통된 현상이다.

 우리 정부 관계자나 전문가는 책으로알려진 작품만 생각하나 그것은 현실을 너무 모르는 이야기이다.

일제 강점기에 수탈당하고, 헐값에 가져간 문화재가 얼마나 일본에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화조도>, 지본채색, 49×31cm,

조선 후기, 일본 구라시키 민예관 소장


우리는 은연중에 유럽의 찬란한 성당이나 궁정 회화와 비교해 스스로 기가 죽어서, 민화보다는 궁중 장식화를 내세워 은근히

자존심을 찾으려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할 일이다. 사실 궁중 장식화는 유럽의 궁중화와 대결해도 결코 손색이 없다.

설령 민화로 본다 해도 세계 어느 나라에 이런 민중 회화가 있는가. 어떤 관점으로 봐도 최고가 아닐가. 이는 세계적으로도 인정하는

부분인데 왜 우리는 민화의 가치를 부정하며 궁중 장식화를 등에 업고 같이 가려 하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민화는 민화끼리 비교해야 하고, 유럽 왕실의 궁정화와 비교 대상은 마땅히 우리 궁중 장식화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전문가는 아직도 궁중 장식화를 민화의 일종으로 보려 한다.






<책거리>, 지본채색, 49×28cm,

조선, 개인 소장



민화야말로 우리가 해외에 당당히 내놓을 수 있는 자랑스러운 문화예술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국립' 민화박물관이 없다. 해방 후, 잘 살기 위해 온 국민이 열심히 노력하여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선조가 물려준 문화유산을 잘 가꾸어 미래의 문화강국으로 뻗어나갈 디딤돌로 삼았으면 좋겠다.






<까치 호랑이>, 지본채색, 106.5×75cm,

조선, 개인 소장






<산수도>,(8폭 중 1폭, 분분), 지본수묵, 각 64×40.5cm

조선, 개인 소장


인생을 흑백으로 담담하게 담아낸 그림이 지난 시절의 겉치례와 허황된 삶은 잠시 접어두고 내게로 오라고 한다.

각 폭마다 배치한 그림은 선승이 산책하며 마주함직한 풍경을 때묻지 않은 붓질로 그린 것 같다.

이상적인 세계와 높은 경지를 보여 주려 함인가. 산과 하늘, 바다와 강물이 엷은 먹빛의 바림으로 더욱 깊고 높다.

이 광대한 회화 세계를 적절히 형언할 단어를 찾지 못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데, 문득 야나기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과 비슷한 그림을 책에 자랑스럽게 소개하며, 이 같은 민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높은 미의 세계여서 현대 미학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다. 세상의 오만과 교만과 기교를 걷어내고, 먹빛 하나로 만가지 색과

만 가지 형상을 표현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두고, 못 배워서 그린 그림, 그리다가 만 그림, 장식적이고 실용적인 용도의

그림이리라고 폄하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작가는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그림이 보여 주는 미지의 세계에, 그 심연에 깊이

가 닿지 못함을 심히 자책하나, 그래도 이 그림에 구현된 해맑은 산과 나무, 하늘과 깊은 강물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세계에 가슴이 벅차 오른다. 퍽이나 다행스럽고 행복하다.






<제주 문자도>(8폭 중 2폭), 지본채색, 각 106×37cm,

조선, 개인 소장






<제주 문자도>(8폭)


제주도 민화는 문자도가 가장 많지만, 산수도와 화조도도 전한다.

지형적으로 육지와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육지의 정형화된 문자도를 제주도 정서에 맞게 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미술의 추상미가 진하다.





<제주 문자도>(8폭 중 1폭), 지본채색, 각 86×39cm,

조선, 개인 소장






이 문자에 펼쳐진 무수한 선은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현대미가 느껴지는 선묘에서는

대서사시를 풀어놓은 듯 선율이 인다.







<제주 문자도>(8폭), 지본채색, 각 86×39cm,

조선, 개인 소장






<제주 문자도>(8폭 중 1폭), 지본채색, 각 97×37cm,

조선, 개인 소장








<제주 문자도>(8폭), 지본채색, 97×37cm,

조선, 개인 소장






<화조도>(8폭 중 1폭), 지본채색, 각 52×32cm,

조선, 개인 소장





<화조도>(8폭 중 1폭), 지본채색, 각 52×32cm,

조선, 개인 소장









<화조도>(8폭), 지본채색, 각 52×32cm,

조선, 개인 소장







<문자도>(8폭 중 1폭),






<문자도>(8폭), 지본채색, 각각 84×34cm,

조선, 개인 소장







<문자도>(8폭 중 1폭), 지본채색, 각 76×40cm,

조선, 개인 소장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라는 여덟 가지 도덕적 덕목을 그림 글씨로 만들어 8폭 병풍으로 꾸몄다.

조선조의 지배 이념인 유학의 윤리관을 드러낸다. 문자도는 자른 장르에 비해 독창성이나 회화성이 돋보인다.






<화조 책거리>(8폭 중 1폭)









<화조 책거리>(8폭 중 1폭), 천에 채색, 각 87×30cm,

조선, 개인 소장




인용서적 : 김세종 著 『컬렉션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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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자신이 직접 미술계 현장과 시장을 누비며 체득하고 느낀바를

담담함 가운데서도, 일견 호소력있는 톤으로 들려주는 대한민국 미술계의 오늘과 내일에 대한 상세한 고찰.

학자가 아닌 일반 켈렉터가 펴낸 책을 어느 전공자의 글 보다 더 꼼꼼히 읽어보았다.

여러 궁금증을 많이 해소시켜 준 저자의 열정어린 노고에 진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Fields Of Hope - Tron Syver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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