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물과 학문의 유입
지리상의 발견 이후 중국에 전래된 서구의 천문, 지리, 의학, 종교 등을 다루는 학문을 서학西學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서헉'과 천주교 신앙만을 다루늕 '서교西敎'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넓은 범주에서 함께 다루려고 한다.
이 용어는 명말청초에 가톨릭을 전도하기 위해 중국에 도착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양의 다양한 과학 서적들을 가져와
한문으로 번역 출판한 것을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또는 '西學書'라고 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조 연간(1567-1608) 전래된 이후 실학자들이 개별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조선 왕실의 천주교 탄압은 서구의 과학
지식이나 문물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이어지며 근대적 사회체제로의 능동적 전환을 늦추는 부정적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1612년 에도 막부의 천주교 금지 이후,
서구의 학문이나 문물 수용이 네덜란드(和蘭)로 제한되면서 난학蘭學이라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성립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1517년 독일에서 마틴 루터(1848-1546)에 의해 일어난
종교 개혁이다. 중세 말부터 가톨릭 교회는 성당 건립이나 포교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면죄부를 남발하였고,
이러한 폐단을 반대하여 믿음에 의한 신앙을 내세운 개신교가 북유럽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러자 가톨릭은 자정운동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의 포교를 통해 위기 상황을 타계하려 하였으며,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은 새로 개척한 항로를
따라 동아시아로 건너와 전도 활동을 폈다.
이때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도착하였다.
左, 마누엘 페레이라, <마테오 리치 초상>
1610년, 캔버스에 유채, 로마 일 제수 성당
右,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
독일 예수회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편찬 『China IIustrata』중에서, 1667
마테오 리치가 중국으로 가져온 다양한 서적이나 과학 문물을 선교 과정에서 적극 활용하였기 때문에 서학 성립과 가톨릭 포교에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1583년 명 황실로부터 상륙 허가를 받은 그는 광동성 조경에서 6년 간 머물며 중국 문화와 풍속 및 중국어를 배웠다. 그는 자신이 머물던 공간을 천화사遷花寺라 이름 짓고 승복僧服을 입었느나, 중국 사회의 지식층이 문인이라는 사실을알고는 유복儒服으로 바꾸어 입었을 뿐만 아니라 사서삼경을 배우기도 하였다. 또한 소주, 남창을 거쳐 남경에서 서광계徐光啓,양정균楊廷筠(1557-1627) 등 다수의 문인들과 교유하였으며, 과학 서적이나 지구의, 시계, 지도, 천문관측기, 서양 그림 등으로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그는 포교 과정에서 중국인의 가톨릭에 대한 반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유교의 '상제上帝' 개념을 빌려와 하느님을 '천주天主'라고 소개하였다. 1601년 마테오 리치는 만력제萬曆帝(재위 1572-1620)를 만나 북경에서의 성당 건립을 허락받았고, 이로써 가톨릭 포교를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후 북경의 동서남북에 성당이 건립되었으며, 16023년에는 이지조(1565-1630)의 도움을 받아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교리서를 중국어로 집필하기도 하였다. 대화체인 이 책은 유교적 방식으로 가톨릭교리를 풀어낸 것으로 동양 사회에 서양의 신앙체계를 널리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밖에 『기하원본幾何原本』(1607)을비롯해 『태사수법泰西水法』(1612),『측량법의測量法義』(1617) 등의
과학서를 한역 출판하여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성립을 가능케 하였다.
마테오 리치
<곤여만국전도> 부분, 1708, 170×533, 서울대학교박물관
조선은 임란으로 사회질서가 흔들리고 도학을 정통으로 한 관념적 성리학에 맞서는 새로운 사상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를 왕래한 사신들에 의해 서학, 즉 서구의 과학이나 신앙서적을 비롯한 문물이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 동아시아 삼국에 전래된 기독교 미술 -
<성모자상聖母子像>
『정씨묵원』중에서, 1606년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인에게 가톨릭 교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성화나 화보집에 실린 시각적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였다. 대개는 유럽에서 동판화로 제작된 기독교 관련 화보집이었으며, 유화로 그
려진 원화原畵도 소개되었다.
左, <갈릴리 호숫가의 베드로> 右, <갈릴리 호숫가의 예수와 베드로>
『그리스의 수난』중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정씨묵원』중에서, 1606년
左, <수태고지> 右, <수태고지>
『복음서화전』중에서, 1593. 『송념주규정』중에서, 1617
左, <수태고지> 우, 김준근 <천사의 수호>
『천주강생언행기상』중에서, 1635년 『 텬로력덩』중에서, 1895년 이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우리나라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기독교 미술이 등장하였다. 조선 말기에 활동한 마지막 풍속화가 김준근이 그린 그림 42점의삽화가 수록된 『텬로력명天路歷程』이 기독교 미술의 효시에 해당된다, 이 화보집은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제일이 존 연연의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 출판하면서 김준근에게 삽화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도포를 입은 한국인의 모습으로 표현된 예수를 비롯해갑옷을 입은 주인공 크리스천, 사찰 벽화의 비천상을 연상시키는 천사 등에서 기독교 미술의 주체적 수용을 확인할 수 있다
左, <성모자상>
1597년, 일본 오우라 천주당
右 , 성모자상 벽화
스페인 세비아 대성당
- 초상화와 서양화법의 만남 -
증경曾鯨, <장경자초상張卿子肖像>
1622년, 견본채색, 111.4×36.2cm, 절강성박물관
무배경의 단독 입상으로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몸은 왼발을 디딛으며 움직이기 직전의 모습으로 변화를 주고 있다.
특히 얼굴은 윤곽선을 대강 묘사한 다음 오목한 곳에는 붓질을 많이 하고 볼록한 부분에는 적게 하는 입체적 표현으로
사실성이극대화되어 있다. 이는 기존에 얼굴 윤곽이나 이목구비를 선묘로 나타낸 것과는 다른 차원의 핍진逼眞함으로
매너리즘에 빠진 초상화분야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심소心韶, <가정삼선생상嘉靖三先生像>
1662년, 견본채색, 115.8×50.5cm, 북경 고궁박물원
명 말의 유명한 문인화가 唐詩升(1551-1636)과 程嘉수(1563-1643, 李流芳(1575-1629)을 그린 것이다.
이는 현실에 없는 문인들의 집단 초상화로 기억을 더듬어 그린 것이다. 소나무 아래 의자에 않아 있는 노인은 당시승이며,
영지 달린 지팡이를 등 시동이 그 옆에 서 있다. 이유방은 왼쪽 앞에서 오른손에 여의如意를 들고 있으며, 정가수는
바로 뒤에서 공수를 취하고 있다. 세 명의 문인 얼굴은 서양화법으로 정교하게 표현된 반면, 의복은 필선으로 간략하게
묘사혀여 파신파의 특징적 화법을 잘 보여준다. 또 소나무와 바위 같은 배경이나 영지, 여의 등의 지물은 장수를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이 밖에 인기가 높았던 진홍수의 인물화풍도 보이고 있어
증경의 제자들은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호병, <김육초상>전신좌상본, 1637년 견본채색, 174.5×99.2cm, 실학박물관
조선은 양난을 겪으며 경직된 성리학을 대신한 새로운 학문이나 사상이 요구되었고, 중국을 방문했던 사신들에 의해 서구의 천문, 수학, 역법, 종교 등의 한역서와 지구의, 세계지도 등이 소개되었다. 동시에 중국화가들이 그린 조선 사신들의 초상화가 유입되면서 조선 후기 초상화 제작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현전하는 작품들 가운데 중국인 화가 호병胡炳이 그린 <김육초상金堉肖像> 2점은 조선시대 초상화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주목된다, 김육金堉(1580-1685)은 대동법으로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려 한 실학자로 1636년부터 1650년 사이에 세 차례나 북경을 사행하였으며, 1640년대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