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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판소리의 세계


 판소리의 세계




명창 김창환(金昌煥1855~1937 )


전남 나주(현 광주시 광산구 대산동) 生으로 서편제 명창이었다.

어린 시절 이날치 명창에게 가문소리를 습득하고 후 정창업 명창을 사사하고,

 신재효 문하에서 지침을 받아자신의 판소리 세계를 완성하여 20세기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생질인 임방울의 집안이 巫業에 종사한 것으로 미루어 김창환의 가계가 巫系임을 짐작케 한다고.

이날치판 <심청가>는 교훈적 윤색이 제거되어 있고, 설화의 초기적 단계가 드러나고 있으며,

일상적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의 평범한 생활과 무속적 세계관이 표명되어 있다.


(진양조) 춘향이 기가맥혀 도련님 앞의 꺼꾸러져 만보장으 기절을 허니 도련님이 기가 막혀 춘향 허리 후리쳐 안고,

"마라, 우지 마라. 목왕은 천자로되 요지어 연랑하고, 항우난 천하장사로되 만여추월에 인지비 비가 강패허고,

명황은 성주로되 화안 이별을 헐 적으 마우바우 울었나니, 허물며 후세의 날 같은 소장부야 일러 무삼하랴.

내가 오늘 간다 하면 너난 천연히 앉어서 잘가라고 말을 허면 대장부 일촌간장이 봄눈켜로 다 녹는디,

니가 나를 부여잡고 앉어서 못 가나니 하니 니가 어디 속 있다는 사램이냐. 우질마라." 춘향이가 기가 막혀


(중모리) "여보 도련님, 여보 도련님, 여보 도련님 날데려가오. 나를 데려 가오.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

쌍교도 말고 독교도 말고 워리렁 출렁덩 걷는단 말끄 반부담하야 날 데려가오."


(콜롬비아, 춘향전 이별가 김창환)


진양조로 부르는 부분은 김창환제 춘향가를 계승한 정광수와 백성환의 춘향가는 물론 다른 춘향가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대목이다. '이별가'의 이러한 모습은 김창환제 춘향가가 고제 서편제 춘향가를 기둥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데 김창환이 기둥으로 삼았던 고제 서편소리는 정창업제 판소리였던 것이다.


김창환은 정창업 명창에게 여러 해 동안 판소리를 배워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자 신재효 문하로 가서

이론과 실기에 대한 지침을 받아 자신의 소리제를 완성하였다.정광수(1909~2003)의 증언에 의하면

김창환이 신재효(1812~1884)에게 소리 지침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김창환은 20대 중반인 1880년대 초

2~3년 정도 신재효의 문하에 지도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창환이 당대 제일의 판소리 이론가인 신재효 문하에서 이론과 실기를 지도 받았기 때문에

창환제 판소리는 신재효의 결정적인 영향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김창환제 판소리의 정립에 문학적 층위는 말 할것도 없고 음악적 층위와 연극적 층위에까지

신재효의 영향을 두루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김창환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에 신재효 판소리 사설의

상당 부분이 그대로 수용되어 있고,김창환의 절제된 멋을 지닌 발림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 결과 김창환제 판소리는 정창업제 판소리와 상당 부분 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복각된 김창환 음반의 표지.







명창 송만갑(宋萬甲,1865~1939)


20세기 초반의 격변기 속에 판소리의 변화를 주도했던 동편제의 거장이다.

오늘날 활동하는 명창들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송만갑과 연결된다고 할 만큼 그가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명창 송우룡의 子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 구례, 낙안, 운봉, 진주 등이 거론된다.

기것은 거주지를 자주 옮기며 활동했던 유명 소리꾼의 거주 방식과 관련이 있다.

1914년의 구례 호적과 『조선창극사』등을 근거로 구례읍 봉북리가 유력하게 거론되어 왔으나

여러 정황과 종합적 검토 결과 순천 낙안이 출생지로 추정된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나는 전남 순천 낙안에서 나서 그곳에서 소년시대를 보내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송만갑은 명창 가계(家系)의 후예이기에 출생 환경부터가 대명창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송흥록과 동생 광록,  그리고 송흥록의 아들 송우룡을 거쳐 송만갑에게 이어지는 소리는

당대 최고의 소리제로 꼽혔다. 한편 근본적으로 그의 가계가 무계(巫系)였다는 사실.

이처럼 무계 집안 출신에서 명창이 나오는 것은 호남지방에서 일반적이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편 뛰어난 소리꾼으로서의 송만갑의 명성은 명문 가문의 후광과 선천적인 천재성만으로 획득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가문의 소리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소리를 찾으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갈등이 파생되었는데,

부친 송우룡과의 '이론투쟁'이 그것이었다. 그가 부친에 반발하고 나선 때는 새로운 소리제를 모색하고 그렇게 소리를 부르기

 시작한 30대 초나 중반이었을것으로 추정된다.『조선창극사』의 기록은, 이론투쟁을 거친 후

명창으로 명성을 날리던 협률사 참여 직후의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한일합방 수 낙향하게 된 송만갑은 구례에 머물며 제자들을 육성한다.

박봉래(1900~1932), 남원 출신으 소리꾼 김정문에게도 소리를 가르쳐 송만갑의 수제자로 꼽히는 명창이 되었다.

박봉례의 소리는 박봉술에게 이어지고 김정문의 소리는 박녹주, 김정문을 통해 강도근에게 전승되었다.

또한 아들 송기덕에게도 소리를 가르친 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음반 취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음반에 남은 송기덕의 소리는 송만갑을 빼어 닮았다고 평가된다. 녹음 곡목으로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등에

걸쳐 있고 녹음 분량도 많고 기량도 상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송만갑의 후손들은 최고 명문 집안의 후예라는 각광에도

 불구하고 소리꾼의 길을 외면했다.가족들의 생활고와 광대에 대한 사회적 신분의 차별이 원죄처럼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1894년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항우집단들은 그동안 양반들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을 했던 것과 다른 상황에 직면한다.

정치적 변동 속에서 대원군이나 고종같은 판소리의 절대적 후원자들의 지원도 사라진 것이다.1900년대 들어 극장들이 세워져

 대중 공연이 활성화되면서 판소리의 향유 방식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대중에게 다가가는 새로운 예술 세계를 구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송만갑은 서편제와도 타협하는 등다양한 새로움을 개척해 나가게 된다. 예술적 역량으로의 승부 수를 던진 것이다.


이처럼 송만갑은 20세기 초반의 격랑 속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명창이다.

그가 구축한 꿋꿋하면서도 힘 있는 동편 소리의 미학은 판소리의 균형적인 전승을 위해서 다시 주목해야 한다.






명창 이동백(李東伯, 1866~1950)


충남 비인 生으로 중고제의 대가인 김정근)金定根)과 동편제의 대가인 김세종(金世宗)을 사사했다.

그의 성음은 극히 미려하고 각양각색의 목청을 지녔으며 특히 저음의 웅장함은 그 당시 비교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중고제 소리는 현재 전승이 끊긴 상태이며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방법은 식민지 시대에 제작된

유성기 음반을 통해 일부분이나마 들을 수가 있다.


이동백은 '일축판 춘향전 전집'(1926년), 폴리도르판 '심청전 전집'(1935년),

폴리도르판 '하용도 전집'(1935년) 녹음에 참여했고 약 25장의 독집 유성기 음반을 남겼다고 한다.





이동백이 독창 만으로 부른 소리는 여덟 곡이었다.





이동백 득음처(용당굴)






명창 김창룡(金昌龍)1872(고종 9)∼1935


충청남도 서천 횡산리 출생. 조선 고종 말기와 민족항일기에 활약한 5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진양조를 처음으로 판소리에 넣었다는 김성옥(金成玉)이고, 아버지는 판소리에 삼공제비를

응용하였다는 김정근(金正根)이다. 따라서, 판소리 명문에서 태어난 셈이다. 아우 창진(昌鎭)도 명창으로,

한때 고종으로부터 참봉의 직계를 받기도 하였다.


 7세 때 아버지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였고, 13세 때에는 이날치(李捺致)에게 1년간 판소리를 배웠다.

 그뒤 오랫동안 홀로 공부하다가 32세 때 서울에 올라와 연흥사(延興社) 창립에 공헌하였다.

 1933년에는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과 조선성악연구소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창극공연에도 참가하였다.


「적벽가」와 「심청가」를 잘하였고다. 특히 「심청가」중에서 ‘꽃타령’과 「적벽가」 중에서

 ‘삼고초려(三顧草廬)’ 대목을 잘하였다. 원래 그의 집안은 경기도 및 충청도지역에 전승되는 중고제(中古制) 소리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김창룡도 또한 자기 가문의 소리제를 그대로 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전승이 끊어졌고 취입한 음반만 남아 있다. 그의 소리는 오늘날 전승이 끊어진 중고제 판소리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다.

 현재 남아 있는 여러 음반 중에서 「적벽가」중 ‘삼고초려’, 단가 중 「장부한(丈夫恨)」,

「수궁가」에서 ‘수정궁(水晶宮) 들어가는데’, 「심청가」에서 ‘화초타령’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김창룡의 동생 김창진






















명창 이선유(李善有 1873~1949)


고종 말에서 일제 강점기, 송만갑, 유성준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동편제 명창이다.

이 세 명창은 모두 동편제의 거두 송우룡 문하에서 공부했고, 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음반도 남겼다.

. 1908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송만갑협률사(宋萬甲協律社)에 참여해 전국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경술국치 이후 송만갑협률사가 해산되자 대중을 상대로 한 극장 공연 활동이나 협률사 공연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48세를 전후하여 악양에서 진주시 영정[지금의 대안동]으로 이사한 후 진주권번의 소리 선생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방송에 출연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 냈는데, 1936년부터는 김수악에게 2년간「춘향가」와 단가를 가르쳤으며,

이 밖에 임방울 ·신숙· 박봉술·오비취 등에게 판소리를 전했다. 1939년 건강상의 이유로 권번의 소리 선생을 그만둔 후,

1949년 4월[음력] 진주시 장대동 49-22번지 자택에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가사와 음조가 우뚝한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하지만, 정작 경상남도 지역에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선유는 판소리 창본집 『오가전집』을 펴냈다.

오자가 많이 보이고, 경상도 방언도 섞여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윤문을 하지 않은 채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





명창 유성준(劉成俊, 1873~1944)


동편제 판소리의 정통 계승자인 송우룡에게 배워 동편제 판소리를 후대에 전한 대표적인 동편제 명창이다.

그의 소리는 송만갑에 비해 보다 고제(古制)적인 특성과 함께 기교적인 측면이 공존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창극사』에서는 실제보다 이론에 강하다고 평가하였다. 

수궁가와 적벽가를 임방울, 김연수, 정광수, 강도근, 박동진 등으로 이어져,

현대 판소리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전남 구례 生으로 그의 가계도 세습무 집안이다.










명창 정정렬(丁貞烈, 1876. 5. 21.~1938. 3. 21.)


근대 판소리 5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면서, 가장 현대적인 판소리를 개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판소리는 현대 명창, 특히 여류 명창의 판소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도 한다. 이른바 '정정렬 제 훈향가'를 완성하여

김여라-최승희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하였고,많은 창극 작품의 연출을 맡았으며, 숙영낭자전과 같은

새로운 판소리를 창작 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 50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 소리선생으로 활약하였는데, 그의 명망은 대단하였다

. 그는 고종으로부터 참봉 벼슬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춘향가」를 연마하였고, 「춘향가」를 새로 짜서

정교한 음악적 특징을 가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발표하자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춘향가」를 배우게 되었다.


1933년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교육과 판소리 공연에 힘썼다. 특히 창극공연에 힘써 그에 의해 편극되어 무대에 올려진 1935년의 「춘향가」와

「심청전」은 획기적인 것이었고, 공연의 대성황을 이룬 작품이었다.

당시의 창극발전에 끼친 지대한 공은 독보적인 것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목이 탁하고 성량이 부족하여 여러 번 좌절하였으나 50세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수련을 하여 대명창이 된 것이다. 그의 음반으로 여러 대목이 남아 있는데 춘향가」에 걸작이 많다.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에서 ‘신연맞이’이다. 그의 소리는 김여란(金如蘭)·김연수(金演洙)·이기권(李基權)·

조진영(趙進榮) 등 많은 명창이 이어받았으나, 김여란의 「춘향가」가 정정렬의 바디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명창 김정문(金正文, 1887 ~1935)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주천면에서 살았다. 유성준(劉成俊)과 장자백(張子佰)의 생질이다.

처음에는 외숙인 유성준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송만갑(宋萬甲)의 고수로 있으면서 그의 소리를 익히게 되었고,

 결국 그의 제자가 되었다.그뒤, 송만갑의 영향으로 동편제(東便制) 소리를 하였으나, 서편제(西便制) 김채만(金采萬)의

소리를 듣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배운 뒤, 동편제에 서편제의 맛을 섞어서 독창적인 소리를 하였다.


그는 타고난 재주는 적었으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여 마침내 명창이 되었고,

 판소리뿐만 아니라, 창극에도 솜씨가 있어 서울에 올라와서는 창극공연에도 참가하여 크게 인기를 모았다.


그는 특히 「흥보가」·「심청가」·「적벽가」를 잘하였고 단가인 「홍문연가(鴻門宴歌」도 잘 불렀다.

남원에 있을 때는 많은 제자를 길렀다. 그 가운데 박녹주(朴綠珠)·김준섭(金俊燮)·

강도근(姜道根)·박초월(朴初月) 등은 당대 명창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소리는 동편제에 기초를 두고 서편제의 맛이 나는 가락을 함께 구사하였기 때문에 순수한 동편제라고는 할 수 없다.

현재 음반으로는 「춘향가」 몇 대목과 단가 「홍문연가」가 남아 있다. 1930년 음반 회사 시에론(Chieron)에서

SP 열두 장짜리 「춘향전 전집」을 내기도 했는데, 이는 전집물로서는 이른 시기에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창 정응민(鄭應珉, 1894~1961)


일제 강점기 시대에 고향인 보성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 내어 이른바 '보성소리'를 확립시켰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기예능보유자인 정권진(鄭權鎭)의 아버지이다. 큰아버지이며 박유전(朴裕全)의 제자인

정재근(鄭在根)과 김세종(金世宗)의 제자인 김찬업(金贊業)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10대에 서울에 올라와 협률사 창극공연

활동을 하다가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며 제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좋은 목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목을 얻어 대명창이 되었다. 성대가 굳고 음량이 크지 못하여

극장공연에서는 크게 공연효과를 보지 못하였지만, 실내공연에서는 대단한 기량이 발휘되어 청중을 경탄하게 하였다.


정재근을 통하여 박유전의 「심청가」·「수궁가」·「적벽가」를 이어받았고, 김찬업을 통하여 김세종의 「춘향가」를 이어받

아 전통적인 특성이 강한 정응민제 판소리양식을 개발하여 많은 제자에게 전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김연수(金演洙)·박춘성(朴春城)·

정권진(鄭權鎭)·김준섭(金俊燮)·장영찬(張泳贊)·성우향(成又香)·성창순(成昌順)·조상현(趙相賢)·안향련(安香蓮) 등 많은 명창이 나왔다.


그의 소리제는 정권진·성우향·성창순·조상현을 통하여 1970년대 이후 판소리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는 판소리가 비속한 데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였고 기품있는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고도의 예술음악으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명창 박동실(朴東實, 1897~1968)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관리(호적은 담양읍 객사리 241)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박장원(朴壯元), 어머니는 배금순(裵今巡), 외조부는 판소리 명창 배희근(裵喜根)이다.

8세부터 부친에게, 나중에 서편제 명창 김채만에게 소리를 배웠다.


1909년 12세의 소년 명창으로 부친과 함께 광주 양명사(陽明社) 창극 공연에 참여하여 춘향 역을 맡은 것으로 전하며,

이후 1910∼1935년 무렵까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화순협률사, 리리협률사, 부안협률사 등의 창극 공연에서 널리

활동하였고, 1936∼1945년까지는 청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공기남·임소향·조상선 등에게 판소리를 가르쳤으며, 박석기의 후원으로 김소희·한애순에게

심청가를 전수하였다. 1939년 오케 레코드에서 「흥보치부가」와 단가 「초한가」를 취입하였다.

광복 후 창작 판소리 「열사가」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에 안기옥·정남희·조상선·임소향·공기남 등과 함께 월북하였다.


 월북 이후 창극 「춘향전」, 「리순신장군」을 만들었으며, 단가 형식의 「김장군을 따르자」를 창작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여 창작판소리 「녀성영웅 주옥희」 「보천보출진」 「해군영웅 김군옥」 등 9편,

 장가 형식의 「조국해방실천사」, 「새로운 조국」, 「사회주의 좋을시구」, 「승리의 10월」 등 10편,

단가 형식의 「해방의 노래」, 「단결의 노래」, 「금강산 휴양의 노래」 등 수십 편을 작곡했다.


1954년과 1956년에는 예술단을 이끌고 중국을 순회하면서 창극 「춘향전」, 「심청전」을 공연하였다.

 1956년 평양음악대학 교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판소리의 쐑소리(수리성)를

버리고 맑은 목을 쓰는 주체창법으로 전환하였다. 1958년에 공훈배우, 1961년에 인민배우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1967년에는 개성 관음사에서 공기남·임소향·조해숙·신우선 등에게 판소리 5바탕을 재전수하여 녹음하였다.


 1956년 전쟁고아 박영선·박영순을 자녀로 입양하였고, 1968년 12월 4일 향년 71세로 작고했다.

박동실은 구성진 수리성을 지녔고, 정교하고 치밀한 소리를 구사하였으며, 특히 초창기 창극과 창작 판소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날치-김채만-박동실-김소희·한애순으로 전승된 심청가는 대표적인 서편제 판소리 바디로 꼽힌다.










명창 임방울(林芳蔚, 1904~1961)


1904∼1961. 전라남도 광산 출생(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아버지의 소망에 따라 14세 때 박재현(朴載賢) 문하에서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웠고, 뒤에 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

「수궁가」·「적벽가」를 배웠다.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났고 성량도 풍부하였다.


오랫동안 수련한 그는 25세 때 상경하여 송만갑(宋萬甲)의 소개로 처녀무대에서 「춘향가」가운데 ‘쑥대머리’를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의 창작으로 전하는 ‘쑥대머리’를 비롯한 많은 음반을 내었다.

특히 일본에서 취입한 ‘쑥대머리’는 우리나라·일본·만주 등지에서 100여만 장이나 팔렸다한다.

그 뒤 음반취입과 판소리 공연에만 힘을 쏟았고 창극운동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를 판소리 전통을 최후까지 고수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서편제 소리의 최후 보루라고도 하고 있다.

판소리 다섯 마당을 다 잘하였지만 특히 「춘향가」·「수궁가」·「적벽가」를 잘하였다.

1960년에 원각사(圓覺社)에서 「수궁가」 발표회를 가진 것을 비롯하여 몇 가지 공연을 가졌다. 이때 녹음하여 둔 테이프를

복사하여 취입한 음반인 「수궁가」와 「적벽가」가 전한다. 일제 때에 그는 이화중선(李花仲仙)과 더불어 가장 인기있는

 명창이었으나 판소리의 사설에는 치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많은 음반 가운데 「춘향가」에서 ‘쑥대머리’,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 대목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소리는 박귀희(朴貴姬)·한애순(韓愛順)·신평일(申平日)·김용준(金龍準)·성우향(成又香) 등이 이어받았다.










명창 박록주(朴綠珠, 1905~1976)

 판소리에 일생을 바치며 치열한 예술적 삶을 살다간 판소리의 거장이다.

20대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소리꾼으로 주목을 받았고,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20세기의 판소리

특히 해방 후 판소리사의 중심에서 판소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20세기에 들어 이화중선, 김녹주, 강소춘, 배설향, 김초향· 김추월, 신금홍 등 적지 않은

 여류 명창들이 명성을 얻었지만 박록주 만큼 명문의 법통 소리를 고루 익힌 정통파 소리꾼은 드물다.

그리고 김소희·박귀희·박송희·한애순·조상현·한농선·성창순 등 이 시대의 판소리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고, 자신의 개성에 맞게 「흥보가」를 새로 다듬었으며,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판소리보존회를 설립하여 정통 판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 사실 등을 통해 볼 때,

오늘날의 판소리에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록주에게 있어 박기홍은 첫 소리 선생이다.

소리꾼에게 있어서 첫 스승의 더늠은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할 만큼 그 영향력이 크다.

그 어떤 여류 명창 보다 스케일리 넓은 동편제 소리의 맛을 지닌 것으로 평가 받는다.











명창 김연수(金演洙, 1907~1974)


1907(융희 1)∼1974. 호는 동초(東超).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14세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고흥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상경하여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졸업 후 고향에서 농삿일에 전념하던 중

판소리에 흥미를 느껴 축음기로 7년간 독학하였다.


그 뒤 당시 순천군수 집에 머물고 있던 명창 유성준(劉聖俊)으로부터 「수궁가」전편을 배웠고, 상경하여

송만갑(宋萬甲)에게서 「흥보가」와 「심청가」 전편을, 정정열(丁貞烈)로부터 「적벽가」·「춘향가」 전편을 배웠다.

1935년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가입하였고, 1937년에는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조선창극좌(朝鮮唱劇座) 대표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일본 빅타레코드사에서 판소리 다섯마당 중 중요 대목을 30여 매의 음반에 담았다.


1940년 조선창극단 설립을 비롯, 1945년 김연수창극단, 1950년 우리국악단을 설립하였으며, 1957년 대한국악원장을 거쳐

1962년 초대국립창극단 단장에 임명되었다.「심청가」·「적벽가」에 뛰어났으며 창극 「심청가」의 심봉사역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판소리계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지식인으로 판소리 노랫말의 잘못을 고쳐 이면과 표현이 정확하고

격조에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판소리 노랫말 정리에 힘썼다.


그리하여 정확한 장단과 주석을 붙인『창본 춘향가』가 1967년 출판되었고, 죽은 뒤 1974년에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김연수창본』이라는 이름으로 「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가 출판되었다. 1964년 되었다.

 그의 제자로는 성순종(成順鍾)·김동준(金東俊)·오정숙(吳貞淑)·박봉선(朴奉仙)·박옥진(朴玉珍) 등이 있으며,

그 중 한농선(韓弄仙)에 의하여 「수궁가」와 「심청가」가 전해지고, 성창순(成昌順)에 의해 「심청가」가 전해지고 있다.





명창 박동진(朴東鎭, 1916~1903)


 충남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친은 농사를 지었으나 조부는 줄광대였고, 숙부도 소리를 했다고 한다.

 중학교를 다니던 중 협률사 공연을 보고 판소리에 입문하기로 결심하고 18세에 충남 청양의 풍물패 상쇠였던 손병두에게

도막소리를 배웠으며, 이어 김창진에게 「심청가」를 배웠다고 한다.


21세에는 정정렬(1876. 5. 21.∼1938. 3. 21.)에게 「춘향가」를 배웠고, 계속 박지홍의 「흥보가」, 유성준의 「수궁가」,

조학진의 「적벽가」를 배웠다고 한다. 여러 선생을 전전하며 짧은 기간에 소리를 배운 만큼 다양한 소리제를 경험할 수는

있었으나, 소리를 학습한 이력이 분명하지 않고 어느 바디도 완전한 전승이 되지 못하였다. 소리를 배운 뒤 일제 말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 무렵까지 혼란기에는 권번의 소리선생과 여러 국극단을 전전하였고, 한국전쟁 기간에는

국민방위군 창극단에서 활약하기도 했으나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명창으로서 두각을 내타내지는 못하였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 근무하면서부터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판소리 수련에 매진하여 6년 뒤인 1968년 9월 30일

 남산 국립국악고등학교 강당에서 「흥보가」를 5시간에 걸쳐 완창하였다. 광복 후에 판소리 완창은 1956∼57년 임방울이

「수궁가」와 「적벽가」를 각각 2시간가량 부른 것이 유일한 기록이었다. 1930년대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도 판소리는

 도막소리나 창극, 여성국극 형태로 공연되었다. 광복 직후 완창을 부를 수 있는 명창도 극히 적었고, 공식 무대에서

 완창을 부르는 관례도 없었다. 5시간에 걸친 박동진의 「흥보가」 완창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전통 판소리 공연 형태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를 무명의 소리꾼에서 판소리계의 중심인물로 서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때부터 박동진은 판소리 5바탕은 물론, 실전(失傳) 판소리의 복원과 창작 판소리까지 계속 완창을 발표하였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흥보가」(1968년, 5시간), 「춘향가」(1969년, 8시간), 「심청가」(1970년, 6시간), 「

변강쇠타령」(1970년, 5시간), 「적벽가」(1971년, 7시간), 「수궁가」(1972년, 5시간), 「배비장타령」(1972년),

「성서 판소리(예수전)」(1972년), 「이순신장군일대기(충무공 이순신)」(1973년), 「숙영낭자전」(1974년),

「팔려간 요셉」(1975년), 「옹고집」(1977년). 이러한 완창은 지금까지 아무도 넘어서지 못하는 대기록이다.


박동진은 한 스승으로부터 완전한 바탕소리를 물려받지 못한 대신 여러 스승을 거치면서 다양한 판소리의 더늠과 소리 특징,

 공연 현장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기존 5바탕을 새로 짜서 자신의 소리로 가꾸었고, 여러 더늠을 두루 수용하여

길이도 대폭 늘였다. 또한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전」 등 실전 판소리 사설에 새로 곡을

붙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박동진의 「예수전」, 「충무공 이순신」 등 창작 판소리이다. 「예수전」은 주태익이 쓴 사설에

박동진이 곡을 붙인 것으로, 판소리의 새로운 소재와 영역을 개척했으며, 교회를 중심으로 500회 이상 공연한 것으로 전한다.


「열사가」의 전통을 이은 「충무공 이순신」은 1960∼70년대 ‘이순신 선양화 사업’과 맞물려 창작된 곡으로

 전바탕이 약 9시간에 이르는 대작이며, 박동진의 창작 역량과 소리 기량이 집약된 작품이다.

박동진은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같은 해 국립창극단장에 취임하였다.

박동진은 1970∼80년대 판소리 명창으로는 가장 많은 공연을 하였고,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판소리계에

완창 관례를 이끌어내었다. 1998년에는 고향 공주의 생가 터에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을 개관하였으며,

2003년 7월 8일 이곳에서 향년 87세로 작고했다.


박동진은 맑은 청구성 계통의 성음을 지녔으며, 스승의 소리를 판박이로 부르지 않고

자유로운 선율을 구사하였다. 그는 즉흥적으로 판을 짤 수 있는 당대 유일한 명창으로 꼽히며,

아니리와 재담에 능하여 대중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판소리의 반은 아니리’라는 말로

재담에 대한 자신의 지론을 피력하였다.


그의 소리에 대해 선율을 즉흥적으로 짜기 때문에 음악성이 부족하다든가 아니리에 치중한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완창을 밥 먹듯이 하는 그의 소리 공력과 공연 능력은 당대 최고로 꼽히며, 조선조 광대놀음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중요 녹음으로는 『박동진 애창곡집 판소리 다섯마당(1∼5)』(1971, 5LP),

『충무공 이순신』(1973, 5LP), 『적벽가 삼고초려, 적벽대전』(문화재관리국, 1976),

『인간문화재 박동진 판소리 대전집』(SKC, 18CDs, 1988) 등 많은 음반과 공연실황 녹음이 남아있다.









명창 김소희(金素姬, 1917~1995)


본명은 김순옥(金順玉). 호는 만정(晩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전라북도 고창 출신. 1932년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 수료하였고, 당대 명창 이화중선의 「추월만정」을 듣고

감동받아 판소리에 입문하였다.1930년에 명창 송만갑을 찾아가 판소리에 입문하여, 단가와 「심청가」 몇 대목을 배웠다.

송만갑이 떠난 후 이화중선이 어린 김소희를 창극무대에 향단이 역으로 세상에 소개했다. 그 후 15세가 되던 해인

 1932년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온 지 한달여 만에 김소희는 한성준의 주선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1932년 전계문에게 가곡과 시조를, 김용건에게 거문고와 양금을, 1933년 정경린에게 무용을 배웠다.

1934년 정정렬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김종기 명인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1938년에는 박동실에게, 광복 후에는

정응민, 김여란, 정권진, 김연수한테서 판소리를 배웠다.


1936년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했고, 1948년에 사단법인 여성국악동호회 이사, 1954년에 민속예술원 원장,

1957년 대한국악원 이사, 1962년 국립창극단 부단장, 196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주요 공연으로는 1949년 제9회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참가 및 유럽 순회공연, 1964년 동경올림픽 공연,

1972년 미국 카네기홀 공연,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순회공연, 1979년 국악생활 50주년 대공연,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공연 등이 있다.


김소희는 특히 「춘향가」와 「심청가」를 장기로 삼는데, 그는 소리뿐 아니라 각종 악기 연주와 춤,

 서예에도 일가를 이룰 정도의 기량을 지니고 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수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안향련, 한농선, 박초선, 박송희, 김동애, 오정숙, 안숙선, 성창순, 남해성, 이일주, 신영희,

박양덕, 오정해 등이 김소희한테 판소리를 배웠다. 수많은 제자 가운데 안숙선이 김소희의 소리를 가장 잘 물려받은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신영희는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김소희제 춘향가 보유자 후보로 인정받았다.


김소희는 장단 붙임새 운용에 변화가 많고 매우 기교적이다.

슬픈 대목이 많은 「심청가」도 서정적이고 청아한 느낌이 나게 부를 정도로 고운 목소리를 가졌다.

김소희는 「들국화」같은 신민요도 작곡한 바 있고,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국립창극단 공연시

편곡을 해주었으며, 「탕자가」·「부활가」같은 창작 판소리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1932년 말에는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처음으로 녹음하여, 1933년 상반기에 음반으로 나왔다.

이때 취입한 것은 단가, 「춘향가」, 「심청가」 등 유성기 음반 5면이다.

 1934∼1935에는 오케레코드사에서 「심청가」, 「춘향가」, 민요 등 다수의 음반을 취입했는데,

유성기 음반이 17면으로 확인되었다.


1936년에는 빅타레코드사에서 「춘향가」 전집, 「춘향가」 중 ‘이별가’와 ‘옥중상봉’, 「춘향가」 중 ‘심봉사 황성 가는데’,

「적벽가」중 ‘군사 설움타령’ 등을 녹음했다. 1959년 KBS레코드에서 제작된 해외 소개용 국악음반에 남도민요,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녹음했고,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문화재관리국에 「춘향가」 전 바탕을 녹음했다.

이「춘향가」 전 바탕 녹음은 1976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한국전통음악대전집』에 담아 제작한 바 있고, 1988년 중앙일보사에서

『국악의 향연』 전집에 담아 제작하기도 했다. 1960∼1970년대에 지구레코드, 신세기레코드, 시대레코드, 힛트레코드,

대음반, 미국 넘서치레코드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여러 장의 단가, 판소리, 창극, 민요음반을 냈고,

사가판으로 「심청가」(성음 4LP, 1974), 「춘향가」(성음 6LP, 1978)를 제작한 바 있다.





명창 박초월(朴初月, 1913~1983)


본명은 삼순(三順). 아호는 미산(眉山).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갈계리에서 성장하였다.

김정문(金正文)·송만갑(宋萬甲)에게서 판소리를 배웠고, 임방울(林芳蔚)·정광수(丁珖秀)에게서도 배웠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1930년 전주에서의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여러 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흥보가」·「심청가」·「춘향가」

등을 취입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참가하여 여러 선배명창들과 창극운동에 참여하였다.

광복 후 여성국극동지사(女性國劇同志社)를 창단하였고, 1955년에는 현재의 서울국악예술학교의 모체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박귀희(朴貴姬)와 함께 설립하고 교사로서 많은 신인을 양성하였다.


1966년부터는 집에 당대의 명창 156위의 신주를 모셔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는 정성을 보였다. 1964년 10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보유자로 지정을 받았고, 1973년 11월에는 「수궁가」의 보유자로도 지정을 받았다.


장기는 「춘향가」와 「심청가」인데, 조순애(曺順愛)·한농선(韓弄仙)·성우향(成又香)·남해성(南海星)·조통달(趙通達)·

전정민(全貞珉)·김봉례(金鳳禮) 등이 그의 소리를 계승하였고, 이 중 조통달·남해성·전정민·김봉례 등은 그의 후계를 담당하였다.

「춘향가」와 「수궁가」일부가 음반으로 남아 있다.















명창 강도근(姜道根, 1918~1996)


17세 되던 해에 동편제 판소리 명창 김정문 문하에서 소리를 배운 강도근은 흥보가 중 ‘제비 후리는 대목’이 특기이다.

20세 때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당대 최고 명창의 한사람인 송만갑 선생에게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배웠고,

25세 때에 구례로 가서 박봉술의 형 박봉채(朴奉彩)에게 판소리를 지도받았다.

지리산 쌍계사 일대에서 7년여 동안 혼자 공부한 후 하동으로 유성준을 찾아가 판소리 수궁가를 배웠다.


해방을 전후해서 동일창극단·조선창극단·호남창극단 등을 전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목포·이리·여수·순천 등지의 국악원에서 창악 강사를 지냈다. 1973년 이후 남원국악원을 창립하여 강사를 지냈고,

틈만 나면 선유폭포 등 지리산 등지를 다니며 연습을 한 노력파였다.


조선시대 명창으로 추앙되던 송만갑의 판소리 전통을 이어받아 동편제 소리를 고수해 오던 그는

환갑을 넘겨 60대 중반에서야 판소리계에 이름을 내기 시작한 은둔의 예술인이기도 했다.


그는 돈이나 명예에 초연한 고집스러운 소리꾼으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농사꾼임을 자처하며

 고향 남원에서 농사를 지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강도근 후계자 양성소를 설립, 동편제 소리의 맥을 이어온

판소리 동편제의 마지막 대가이다. 안숙선(국립창극단장)은 초기에 그가 길러낸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모습으로

약간 쉰 듯하면서도 청청한 수리성과 가늘고 단단한 상청을 이루는 성음이 특징이다.





1979년 겨울, 남원 국악원에서의 판소리 교육.






명창 박봉술(朴奉述, 1922~1989)


호는 청운(靑雲). 전라남도 구례 출생. 판소리 명창 만조(萬朝)의 넷째 아들이며 역시 판소리 명창 봉래(奉來)의 아우이다.

전라남도 순천과 부산 등지에서 살다가 1970년 서울에 올라왔다.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큰형 봉래로부터

 소리를 배우다가 형이 일찍 죽자 아버지 만조와 둘째형 봉채(奉採)로부터 동편제(東便制) 판소리를 터득하였다.


어려서 잠시 서울에 올라와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서 송만갑(宋萬甲)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

 소년 시절에 목이 좋고 공력이 있어 시골에서 소년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과도하게 수련을 하다가 목을 다쳐

고음을 내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다. 한동안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지냈으나 재기하여 천신만고 끝에

 다시 목을 얻었지만, 그래도 목이 탁하고 고음이 나지 않아서 암성(가성)으로 소리하였다.

공력이 대단하여 젊은층보다 판소리를 깊이 들을 줄 아는 고로들이 그의 소리를 좋아하였다.


1953년부터 순천에서 오랫동안 국악원 판소리 사범으로 제자를 가르친 것을 비롯하여, 목포·전주·군산·부산 등지를

 전전하며 국악원 사범으로 있었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어느 명창보다 순수한 동편제 판소리를 계승하였고 판소리 다섯마당을 다 불렀는데,

특히 「흥보가」·「수궁가」·「적벽가」에 출중하였고, 「춘향가」도 더러 공연하였으나

「심청가」는 그리 능하지 못하여 공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1961년 서울 신세기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흥보가」·「적벽가」·「수궁가」·「심청가」를 각각 대목소리로

음반에 취입한 것을 비롯하여 문화재관리국에서 출판한 ≪한국의 음악≫이라는 문화재 음반전집에 「적벽가」를

취입하였고, 뿌리깊은나무에서 제작한 판소리 다섯마당에 「흥보가」·「수궁가」를 취입하였다.


문하에서 송순섭(宋順燮)·김일구(金一求)·안숙선(安淑善) 등 여러 명창이 나왔는데,

송순섭·김일구가 그를 계승하는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기예능보유자 후보로 인정되었다.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 박송희.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 송순섭.








동편제 게열 <춘향가를 부르는 보유자 성우향.








서편제 계열 <심청가>를 부르는 보유자 성창순.










판소리 <고법) 보유자 정철호









1960년대 故 박녹주와 소리공부하는 모습.





1976년 박녹주 함께(좌로부터 박송희, 안향련, 박녹주, 오정숙)




- 판소리의 문학론 -


애당초 판소리는 열두마당이었다고 한다.

조선 순조 때의 문인인 송만재(宋晩載 1769~1847)의 '관우희(觀優戱)'라는 글에

열두마당의 내용이 간단히 적혀 있어그 모습을 알게 해준다.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강릉매화전><장끼타령>  <왈자타령>  <가짜신선타령> 이다.


이 열두마당에 대해 1940년에 나온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에서는  

'왈자타령'이 무숙이타령으로, '가짜신선타령'이 '숙영낭자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왈자타령과 무숙이타령은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같은 것이므로 '가짜신선타령'만 서로 다른 셈이다.


이 열두마당 가운데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가짜신선타령>은

사설조차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열두마당 가운데 오늘날까지 소리와 함께 전승되고 있는 것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인데 이것을 판소리 다섯마당이라고 부른다.


 이 다섯마당 가운데 문학성으로나 음악성으로나 연극적인 짜임새로 보았을 때

가장 뛰어난 구성은 단연 <춘향가>라고 할 것이다.

<춘향가>를 잘 불렀던 명창으로는 송홍록, 모흥갑, 고수관, 박유전, 김세종, 이날치, 장자백,

김창환, 송만갑, 정정렬, 임방울 등이고, 근래에 <춘향가>를 불렀던 명창들로는

 박동진, 오정숙, 김여란, 김소희, 정광수 등을 들 수 있다고.

현재 성우향이 보성소리 <춘향가>의 중요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예술성 면에서는 구슬픈 계면조 가락이 많은 <심청가>가 그 뒤를 따른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바디는 김채만제와 정응민제 뿐이라고. 

김채만제는 한애순이 부르는 것으로, 박유전, 이날치를 거친 것이고, 정응민제는 정권진이 부른 소리로,

역시 박유전과 이날치를 거친 것이다. 다른 바디는 전승이 중단되었거나 몇 대목만 전할 뿐이다.

현재 성창순이 강산제 <심청가>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흥보가>는 다섯마당 가운데 가장 민속성과 재담성이 강한 마당으로 꼽힐만큼

민중의 해학이 가득 담긴 작품으로 공유되어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흥보가>에는 송홍록으로부터,

송광록, 송우룡을 거쳐 송만갑에게 이어지는 동편제 <흥보가>와 정창업에게서 김창환에게 이어지는 서편제

<흥보가>가 있다. 송만갑의 <흥보가>는 김정문을 거쳐 박녹주, 강도근이 이어 받았고, 또 박봉래를 통하여

박봉술이 이어 받았다. 서편제 <흥보가>는 김봉학, 오수암, 박지홍을 통하여, 정광수, 박초월, 박동진이

이어 받았다. <흥보가>는 박녹주 바디를 박송희가 이어 받아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수궁가>는 <토끼타령>, <별주부타령>, <토별가> 등으로도 불린다.

동편제 <수궁가>는 송만갑과 유성준을 통해 전승되었던 소리가 전해지고 있으며,

강산제 소리로 정응민의 <수궁가>가 조상현 등에게 전해지고 있다. 유성준 바디는 김연수, 임방울, 박동진,

정광수, 박초월 등 많은 명창들에게 전승되었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였던 정광수와 박초월은 작고하였고,

현재는 보유자가 없고 전수조교만 있는 상황이다.


<적벽가>의 바디로는, 박유전, 정재근, 정응민을 거쳐 정권진에 이른 정응민제, 송홍록, 송광록, 송우룡,

유성준을 거쳐 정광수에 이른 유성준제, 송홍록,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을 거쳐 박봉술에 이른 송만갑제,

정춘풍, 박기홍, 조학진을 거쳐 박동진에 이른 조학진제가 있다. 현재 박봉술 바디를 잇고 잇는 송순섭이

종요무형문화재 <적벽가>의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단가(短歌)는 '허두가(虛頭歌)', '초두가(初頭歌)', 영산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단가(短歌)'는 장가(長歌)'의 상대적 의미이므로 판소리에 비해 짧다는 것이며, 허두가나 초두가 역시

본사가(本事歌)라 부르는 판소리의 앞에 부른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들이다.

단가 사설의 문학적 형식은 가사체로 되어 있어 가사문학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즉 단가가 본래는 독립된 가사의 한 장르였다가 나중에 판소리와 연계된 장르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있다.


판소리 사설의 구성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장면의 극대화 또는 부분의 독자성이다.

이것은 판소리 한바탕이 한꺼번에 불러지기 보다는 부분적으로 가창되는 기회가 많고

또한 장면화의 경향이 짙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판소리에서 중요한것은 전체적인 줄거리가 아니라,

이면, 즉 장면마다 정서적 공감을 줄 수 있는 사실적 표현이다. 긴장과 이완 또는 몰입과 해방이라는

정서적 체험의 마디를 반복하는 구조라 할 수 있다.


판소리의 언어에는 고아함과 비속함이 혼합되어 있다. 또한 한시 뒤에 번역을 붙이기도 한다.

양반과 민중이 공유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산문과 운문이 혼재되어 있다. 대체로 아니리 부분은 일상적 어조의 산문으로 되어 있고

창 부분은 운문으로 되어 있다.


판소리가 지닌 미적 정서 표현의 특징은 비장과 골계가 교체 되면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미적 정서를 비장 * 숭고 * 우아 * 골계 네가지로 구분할 때 비장과 숭고는 이상적인 것을 추구할 때

일어나는 정서이므로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있고, 골계와 우아는 현실적인 것을 추구할 때 일어나는 정서이므로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있다. 그러나 비장과 골계는 상반되는 정서이므로 자연스럽게 결합되기 어렵다.

그런데 판소리는 비장과 골계를 계속 충돌시킴면서 독특한 효과를 자아낸다.










                          로 사용함.

                      승하여 경기, 충청 간에서 대부분 유행한다.






- 유파의 성립과 변화 -


판소리에서는 '유파'라는 용어보다 '제'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판소리의 '제'는 유파, 더늠, 조, 바디와 같은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와 같이

유파의 개념이 어떻게 성립되고 변화되었는지를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유파의 개념이나 의미가 고정적이지

않으며, 시기에 따라 다른 상대적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래에 유파의 성립과 변화를 중심으로

판로리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판소리가 처음 생긴 것은 17세기 말, 18세기 초 정도로 본다.

판소리의 발생에 대해서는 이보형이 제기한 광대소리 기원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판소리 생성의 지역적 기반을 두고 호남지방이라는 주장과 경기지방이라는주장이 대립되고 있다.

하지만 초기 판소리가 판에서 공연되는 형태였으며 음악보다는 재담이 강한 민중의 애호 장르였을 것으로 보는 데에는

이의가 없는 듯하다. 그리고 이 시기의 판소리는 아직 유파가 나뉘어져 있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판소리가 큰 변화를 겪기 시작하는 시기를 19세기로 본다.

19세기의 가장 큰 변화는 양반들이 판소리의 향유층으로 부상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판소리를 듣고 즐기는 일이

 양반의 위신을 손상시킨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교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문화사적 변동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소리가 동편제였다. 감정을 절제하는 남성적인 동편 소리가 양반들의 미의식과 만나면서

새로운 시대의 판소리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조선창극사』에서는 동편제의 창시자를 송홍록이라 적고 있다.

그런데 송홍록의 개인적인 능력만으로 한 유파를 창시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문화의 생산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상황과 그것을 수용하고 향유하는 존재가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편제의 성립은 19세기 초의

시대적 ·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다. 홍롱록은 바로 이 전환기에 활동했으며, 턱월한 창조력으로

동편제라는 유파의 성립을 주도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송홍록은 <춘향가> 중에서 옥중가의 귀곡성을 잘했다고 한다.

이 대목의 선율은 계면조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전라도 무가 설율형인 시나위 가락과 민요 선율형인 육자배기 가락과

통하면서도 또한 다른 것이다. 판소리 계면조는 '패개성음', 또는 '패기성음' 이라 하여 무가의 '어정성음'이나 민요와 구성음,

선율, 기김새가 다르게 되어 있다. 송홍록은 무가나 민요의 계면조를 판소리형 계면조로 승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계면조뿐만 아니라 우조에서도 높은 예술성을 발휘했다. 우조는 동편제의 중요한 특성으로 언급되는데,

송홍록이 우조에 뛰어났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조선창극사』는 송홍록이 계면조뿐만 아니라

우조 역시 신역(神域)의 경지였다고 적고 있다.


본래 우조(羽調)는 시조나 가곡 같은 저악의 음악적 용어이다. 그것이 판소리에 도입, 전용되어 쓰이게 된 것이다.

정악의 우조가 판소리에 도입되었다는 것은 판소리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판소리는

 변화된 상황에 따라 예술화가 필요했는데, 우조의 도입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동편제가 유파로서 성립하자 그 이전부터 있던 소리는 서편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하나만 있을 때는 이름이 필요 없지만

다른 것이 생기자 구분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즉 이전에는 이름이 문제되지 않다가 다른 성격의 비교 대상이 생겨나니까

각각을 구별하기 위해 유파적 명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서편제의 창시자는 박유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송홍록과 마찬가지로 박유전이 혼자서 서편제를 만들어냈다고는

 할 수 없다. 서편제라는 이름이 붙기 위해 많은 시대적 요구와 변화들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앞서 많은 명창들이 있었을

것이다. 박유전은 다만 그 시대에 있었던 판소리의 큰 변화과정 속에서 하나의 분기점으로 놓일 수 있는 위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박유전으로부터 제의 개념이 확고해졌으며, 서편제라는 개념도 그때 생성되어 사용되었을 것이다.

서편제의 논의도 여기서부터 확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중고제는 헌종 때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경기 · 충청 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의 판소리 유파이다.

중고제는 염계달과 김성옥의 법제를 표준으로 삼아 전승되었다. 흔히 중고제는 '비동비서(非東非西)이지만

동편에 가깝다고 한다. 이처럼 동편제, 서편제가 나란히 병존하게 되면서 판소리는 더 다양하고 풍부해지게 되었다.

판소리가 불려지는 지역도 전라도에 그치지 않고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등지로 확대 되었으며, 향유층도 일반 민중에서

양반, 왕족 등의 지배계층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다.  그래서 19세기는 흔히 판소리의 전성기라고 지칭된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양반 위주의 미의식이 확대되면서 건강하고 활기찬 민중의식이 약화된 측면도 있다.


이와 같이 판소리 동편제와 서편제의 유파적 흐름이 만들어진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동편제나 서편제와 같은 명칭이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송홍록을 테두로 하는 동편제의 흐름과

박유전을 주로하는 서편제의 흐름, 그리고 충청도와 경기남부를 중심으로 염계달을 중심으로 하는 중고제의 흐름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흐름에 각각 명칭을 부여하고 의미를 두게 된 것은 20세기 초반의 일이다.


20세기 들어 연극처럼 판소리를 부르는 창극이 생겨나고, 여성 창자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유성기를 비롯한 대중매체가

발달하고 극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공연문화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적 기반을 두고 활동하던 창우집단을

서울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많은 명인명창이 서울로 모여 조선성악연구회와 같은 집단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송홍록이 주도하던 동편제 명창들도, 박유전이 주도하던 서편제의 명창들도, 그리고 충청도와 경기도의

중고제 명창들도 모두 서울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지역적 기반과 그 미학을 바탕에 두고 만들어졌던 여러 제의 판소리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면서 서로의 다름을 구분하고

변별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바로 이 때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개념이 판소리의 제이다.

명창들의 지역적 기반을 기준으로, 그 미학적 차별성을 기준으로 하여 동편제와 서편제, 그리고 중고제와 같은 개념을 만들고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제에 대한 개념은  바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초반 자리 잡았던 판소리의 유파 개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명창들이 서울에 모이면서 소리 유파는 더 빠르게

섞이기 시작했다. 본래 유파가 명창들의 지역적인 기반(일종의 문화권)을 토대로 형성된 개념이었으므로, 활동 무대가

바뀌면서 그러한 개념도 흐려지는 것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또 창극의 도입 역시 명창들로 하여금 유파 개념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소리를 꿈꾸게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명창들이 동편과 서편의 구분없이 여러 스승에게 소리를 배웠고, 제를 뛰어넘는 소리를 해냈다.

덕분에 동편과 서편의 특성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섞이게 되었다. 동편과 서편의 섞임.

그리고 동편의 장점과 서편의 장점이 섞인 보다 나은 소리를 만들게 된 것이다.



- 참고도서 -

● 『판소리 명창론』 판소리학회.

『판소리』글 : 이명진, 김혜정  사진 :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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