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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불멸의 춤꾼 최승희 2

배운성, 〈최승희의 장구춤〉, 목판화, 30×20cm, 연도 미상, 개인 소장       

 
<최승희의 장구춤>
배운성, 목판화, 30×20cm, 연도 미상, 개인소장.



대동강변의 최승희무용연구소.



무용연구소 연구생들의 연습 장면, 맨 앞이 김백봉, 1946.





아들 병건과 함께, 1948.




<풍랑을 헤가르고>, 1949.




중국의 외교관들과 함께, 앞줄 오른쪽부터 안성희, 김백봉, 장조혜(중국 여류소설가 정령의  딸로

1945-50년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공부했다.) 최승희, 1950.




중국의 외교관들과 함께, 1950.




중공군 여군들에 둘러싸인 최승희, 1951.




경극을 추고 있는 최승희(왼쪽)과 매란방. 1951.




최승희, 1951.




최승희(오른쪽)와 매란방, 1951.




최승희(왼쪽)와 매란방. 1951.




구소련 공연때 통역을 맡은 한 맑스(앞줄 왼쪽)와 무용단 일행, 1951.




최승희무용단 구소련 공연 환영식에서 통역을 하고 있는 한맑스(뒤로 최승희가 보인다).1951.








중국중앙희극학원 최승희무도연구반 학생들과  함께, 1951.




중국 중앙희극학원 최승희무도연구반의 교직원과 학생들, 1951.




중국중앙희극학원 최승희무도반을 지도하는 최승희, 1951.




중국 중앙희극학원 최승희무도연구반 학생들과  함께, 1951.


 


중국중앙희극학원 최승희무도연구반 학생들과  함께, 1951.




중국중앙희극학원 최승희무도연구반 학생들과 함께, 1951.


 


중국중앙희극학원 최승희무도연구반 학생들과  함께, 1951.




최승희 무용을 즐겨 관람했던 주은래(가운데 앉은 이), 1952.




중국중앙희극학원 최승희무도연구반 졸업기념 사진, 1952. 3. 31.




중국중앙희극학원 최승희무도연구반 학생들과  함께.




귀국 직전 중국중앙희극학원 학생들과  함께, 1952.


 


중국중앙희극학원 학생들과  함께, 1952년경.




북한의 국립최승희무용단 단원들과 함께, 1953.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1954.

신라시대 경주 사도성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창작한 무용극으로,

신라인의 애국심을 표현한 작품이다.




<밝은 하늘 아래> 1956.




- 안막安漠 -


본명은 필승(安弼承), 필명은 추백(萩白). 경성 제2고보를 중퇴하고 1930년 도쿄 와세다대학 노문과에서 공부하다가

계급사상에 심취되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KAPF) 동경지부를 중심으로 프로문학운동에 참가했다

.1929년 11월 카프 동경지부가 해체되고 고경흠 등의 지도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합류했다

.이북만·김두용·임화·김남천 등과 함께 공산당 재건운동의 준비기관인 무산자사(無産者社) 를 설립하고

 이전의 카프 기관지 〈예술운동〉 대신 〈무산자〉를 간행했다.


1920년대말에 귀국하여 당 재건운동의 일환으로서 계급문학운동에 가담했던 김남천·임화·권환 등과 함께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했다.그는 내면적으로 지하단체와의 연계를 확보하면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민족단일당을 자처하는 신간회를 해소하여당 재건을 주도하고 당의 사상적·이념적 정통성을 회복하는 일을 추진했다.

또한 표면적으로는 예술운동의 정치적 진출을 꾀하기 위해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내세워 카프 조직을

기술자 조직(예술가 위주)으로 개편했다. 이러한 목적 아래 카프 본부 조직에 적극 참가하여

 1930년 4월에 시행된 조직 개편 때 중앙위원과 연극부 책임자를 맡았다.


1930년에 발표한 첫 평론 〈프로예술의 형식문제-푸로레타리아 리아리즘-의 길로〉와 〈조선 프로 예술가의

 당면의 긴급한 임무〉에서는 김기진의 대중화론을 형식주의로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을 미학이론으로 한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내세웠다.


이에 따르면 모든 예술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관점을 가져야 하고 당의 슬로건을 대중의 슬로건으로

하라는 등 당 재건운동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1931년 3월 카프 중앙위원회에서 조직 재개편안이 나왔는데,

이는 카프를 각기 독립된 동맹의 협의체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단체협의회로 개편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안막은 극장동맹 대표 겸 작가동맹 이론반·시반에 소속되었다.

그해 5월 프로예술운동을 하던 동료 최승일의 동생인 무용가 최승희와 결혼했다.


이후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의 일환으로 최승희의 공연 매니저 역할을 했다.

1931년 9월 카프 제1차 검거 때 다른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때 자술서 형식으로 제출한

〈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운동 약사〉(〈사상월보〉 1932. 1)가 프로문학운동의 조직전모를 밝혀주는 중요한 문건이 되고 있다.

불기소 처분으로 출옥한 후 볼셰비키 노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모색하던 중 〈창작방법문제의 재토의를 위하여〉

(1933)에서 새로운 창작방법론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소개했다.


이 글은 이후 창작방법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김남천은 〈창작방법에 있어서의 전환의 문제-추백의 제의를 중심으로〉에서, 창작방법의 전환이 소련에서는 조직 전환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과 '진실을 그리라'는 명제를 속류적으로 해석하여 조직적 당파성을 외면하는 탈정치주의적

경향을 낳고 있다는 2가지 측면에서 안막을 비판했다.이를 계기로 창작방법 논쟁이 본격화되었지만

그는 논쟁에 참가하지 않은 채 문학활동을 그만두었다.


해방 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한 후 1947년 4월 월북했다. 북한에서 문화선전성 고위 간부를 역임했다.

 1959년경 반당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작품집으로 임화·박세영·김창술·권환 등과 함께 〈카프시인집〉

(1931)을 출간했으며, 기타 평론으로 〈맑스주의 예술비평의 기준〉, 〈조직과 문학〉, 〈1932년 문학활동의 제과제〉 등이 있다.





최승희무용단의 구소련 공연(팜플렛 사진), 1957.




최승희무용단의 구소련 공연(팜플렛 사진), 1957.




최승희무용단의 구소련 공연(팜플렛 사진), 1957.




안성회의 <장검무> 1956.(사진 / 크리스 마커)





최승희가 모델로 출연한 광고들, 1930녀대.



















광고, 1930년대.




















































최승희 연보

1911 ~ ?







* 이념의 희생양이 전설의 무희, 최승희


광복의 짧은 환호 뒤에 찾아온 분단은 우리 민족을 이념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정치적 신념에 따라 남한으로 오는 이도 있었고 북한으로 가는 이도 있었다. 이른바 ‘월남’과 ‘월북’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남편이나 아내의 사상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념의 희생양도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전설의 무용가’ ‘전설의 무희’ ‘동양의 진주’ ‘조선이 낳은 세계적 무용가’라고 불렸던

 최승희(崔承喜, 1911~1969)도 그중 한 명이다. 그녀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조선춤으로 세계를 누볐다.

그녀의 조선춤은 절망에 빠져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일본 경시청은

그녀의 춤이 민족의식을 고양할 수 있다며 연주 목록의 3분의 1을 일본적인 소재로 바꾸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최승희는 광복 당시 중국에 있었는데, 아들 병건(훗날 ‘문철’로 개명)을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출산 후 미군정청에서 보낸 배를 타고 1946년 5월 29일 귀국했다. 그녀는 귀국과 함께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다.

1942년부터 2년 동안 100여 회 일본군 위문공연을 한 전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공연은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녀는 여론에 개의치 않고 무용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는 데만 집중했다.

〈동아일보〉는 1946년 6월 21일자 ‘무용가 최승희 씨 러치 장관과 회견’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최근에 중국에서 돌아온 무용가 최승희 씨는 앞으로 조선의 발레 무용을 창작하며 무용연구소를 설치하여 후진 양성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준비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군정청 러치(Archer L. Lerch) 장관과 만나

조선 무용에 대한 설명을 한 다음 군정청의 적극적인 원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그렇게 남한에서의 정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중국에서 북한으로 갔던 남편 안막(安漠, 1910~?, 본명은 안필승, 사회주의 문학평론가)이 가족과 함께 월북하라는

연락을 보내왔다. 그리고 얼마 후인 1946년 7월 20일 한밤중, 마포 한강변에 8톤짜리 발동선이 도착했다.

승희는 시동생 안재승과 제자이자 안재승의 부인인 김백봉(金白峰, 1927~ , 훗날 남한으로 돌아왔다) 등

 13명과 함께 배에 올랐고, 배는 인천을 거쳐 북한으로 갔다.

출렁이는 바닷물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친일파라고 손가락질받은 일이 서운하기도 했겠지만, 그녀에게 춤을 추고 가르칠 수 있는 곳이라면

 남한이든 북한이든 상관없지 않았을까?

최승희는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나, 15세 되던 해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5월, 무용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를 찾아가 3년 동안 배운 후,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최승희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었다.

공연은 성황리에 마쳤으나, 일본인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그녀는 그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 조선춤의 일인자인 한성준을 찾아갔다.

 최승희는 그로부터 여러 종류의 조선춤을 배웠는데, 특히 장구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장구춤은 풍년을 기원하고 추수를 감사하는 각 지방의 민속놀이에 등장하는 전통춤인데

최승희가 현대무용으로 재창작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춤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최승희는 한성준으로부터 장구가락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장구를 메고 가락에 맞춰 춤사위를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장구춤을 출 때 오른손만 채를 사용하고, 전통 장구춤에서 사용하는 왼손의  과감히 생략한 채

 빈손으로 춤사위를 강조한다. 이런 창의성이 바로 춤꾼으로서의 천재성일 것이다.


한성준에게 배운 장구춤, 부채춤, 승무, 칼춤, 가면춤 등 전통 조선춤은 최승희의 춤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조선 고유의 춤사위에 바탕을 두면서 이시이 바쿠에게서 배운 현대무용을 접목시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예술적으로 발전시켰다. 최승희만의 독창적이고도 예술적인 춤세계가 창조된 것이다.

최승희는 1931년 5월 문학청년 안막과 결혼했다. 당시 유행하던 말로 ‘모던보이’와 결혼한 것이다.

경기도 안성 출생인 안막은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의 절친한 친구였다.

경성제2고보를 중퇴하고 와세다(早稻田) 대학 러시아어과에서 수학했다.

결혼 직후인 1931년 9월 사회주의 문학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지만,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났다.

 그는 그 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소개했는데,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 창작 방법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논쟁이 과격하게 흐르자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1933년 이후 최승희의 공연 매니저 역할에 충실했다.

결혼 후 최승희는 계속 공연을 했지만, 춤 공연 수입으로는 연구소를 유지해나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1933년 스승 이시이 바쿠에게 돌아갔다.

이듬해 9월 일본 청년회관에서 그녀의 첫 무용발표회가 열렸는데, 이때 발표한 〈거친 들판에 가다〉<칼춤〉

〈승무〉 등은 조선의 정취를 제대로 살렸다는 찬사와 함께 성황을 이뤘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최승희는 일약 스타덤에 올라, 순회공연을 하고 학용품과 화장품 광고에도 출연했다.

또 신흥영화사에서 만든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舞姬)〉 주연을 맡아 바야흐로 ‘최승희 시대’를 열면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춤 창작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정서 가득히 실코 최승희, 미국에 등장. 동경 주재 미대사관 소개로, 보수금은 15만 불.’

〈매일신보〉 1937년 1월 27일자 기사 제목이다. 15만 달러는 6개월 순회공연 사례와 공연팀 전체 경비를 포함한 액수다.

당시 화폐가치로 볼 때 15만 달러는 지금 300만 달러 이상의 가치다.

대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음은 최승희의 미국 공연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들이다.

ㆍ최승희 씨 세계적 무대에, 내년 봄에 세계일주 - 1935. 10. 22
ㆍ인기의 최승희 여사 신작 무용 발표, 도쿄 日比谷(히비야)에서, 초만원 입장 5천 명 - 1935. 10. 23
ㆍ무용사절 최승희 여사 도미 공연 제1신, 세계 예술가의 메카 紐育(뉴육, 뉴욕) 메트로에서 공연, 동양인으로서

최초의 전속 계약, 격찬의 뇌성! 꽃다발 사태! - 1938. 2. 07
ㆍ최승희 여사의 무용을 절찬, 작가 기자 초대 공개 - 1938. 2. 23
ㆍ세계 무용계의 지보 최승희 여사 미국 각지서 공연, 간 곳마다 절찬 - 1938. 2. 25



최승희의 미국 공연을 소개한 〈매일신보〉 1937년 1월 27일자 기사

최승희의 미국 공연을 소개한 〈매일신보〉 1937년 1월 27일자 기사



이 제목들을 보면 최승희는 뉴욕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고, 미국 언론에서도 호평했음을 알 수 있다. 진짜였을까

1930년대에 미국의 지방도시가 아니라 뉴욕 한복판에서 한국의 무희가 정말 박수갈채를 받고 꽃다발세례를 받았을까?

그 답은 〈뉴욕타임스〉가 알려준다.


최승희 한국 전통예술 공연 소개 - 존 마틴


한국에서 온 최승희는 어제 오후에 길드극장 무대에서 공연을 했다. 그녀는 유럽 무용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고자

시도하는  최초의 무용가이며 선구자라 하겠다. (뉴욕의 무용계가) 공격적이며 경쟁이 심한 영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녀의 현재 공연은 지나치게 부드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점이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첫째, 그녀는 매력적인 예의범절에, 좋은 외모까지 지닌 젊은 여성이다. 둘째, 그녀에게는 동포 예술가인 김충완이

 디자인한 뤼 드 라 페(Rue de la Paix)의 영향을 받은 다양하고 화려한 무대의상이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승희 안무의 근원은 모국인 한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녀의 무용은 사실 정통 한국춤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녀의 무용은 모두 공연을 목적으로 새로이 창작되었으며,

그녀의 무대의상처럼 전적으로 파리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야기 형식의 춤은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면서도

별 특징이 없어 보이는 데 반해, 성격 춤은 자신의 적성을 충분히 살려 보여준다.

빼어나게 익살스러운 가면을 쓰고 공연한 〈한국의 방랑자〉는 공연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으며,

〈축제를 위한 춤〉과 〈한국의 젊은 신부〉는 생동감이 넘치는 공연으로 관중의 환영을 받았다.

공연을 위한 음악은, 일련의 타악기 반주를 제외하고는, 한국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자료로 한 이고순의 피아노 편곡으로

구성되었는데,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가 한국적인 것과는 생소하여 전혀 어우러지지 못한 점이 아쉽다.

안필승도 이고순과 함께 공연의 음악 부분을 담당했다.
- 〈뉴욕타임스〉 1938년 2월 21일




〈뉴욕타임스〉 1938년 2월 21일자의 최승희 관련 기사


〈뉴욕타임스〉 1938년 2월 21일자의 최승희 관련 기사



최승희의 이런 성공에 대해 안막은 그녀의 큰오빠 최승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承一(승일) 형
지난달 22일 桑港(상항,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공연을 대성공 속에 끝내고 24일 헐리우드에 와 있습니다.

여기서 제일 고급인 이벨극장에서 2월 2일에 공연이 있습니다. 매일 연습으로 바쁘게 지냅니다. 헐리우드에서

각 스타들과 같이 만나고 있습니다. 기회를 보아 영화入(입)의 찬스를 얻어볼까 합니다.

이곳을 마치고는 2월 3일에 뉴욕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컬 비유-로와 정식 調印(조인)하야 爲先(위선, 우선) 뉴욕을 최초로 12회 공연을 1주일에 3회씩

하기로 되었습니다. 承喜(승희)가 메트로폴리탄 프레젠트라는 레텔을 가지고 국제적 수준에 올라간 셈이지요.

우리는 몸 건강히 지내며 매일 휴식할 틈도 없이 신작에 열중합니다. 작품이 부족하여 만들었습니다.

뉴욕에 가면 집에서 온 편지가 도착하였을 듯, 반가이 읽겠습니다. 아무쪼록 자주 편지 주시고 서울 살림 이야기나

해주세요. 일전 편지에도 썼습니다마는 米國(미국) 저희들의 주소는 일본 총영사관 기부로 해도 좋고

 메트로폴리탄 기부도 좋으니 그리고 어디든지 하십시오.

신문지상에 발표하시려면 메트로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일본 영사관보다 메트로 사람들은, 매일같이 지방에도 가고 공연을 나가게 되니까

아마도 메트로 주소로 보내시는 것이 편리할 것도 합니다. 헐리우드 호텔에서 安漠 拜(안막 배상).
- 《삼천리》 1938년 3월호   

최승희가 미국 공연에서 소개한 춤은 〈신라 궁녀〉 〈낙랑의 벽화〉 〈검무〉 〈조선의 표박자(漂泊者)〉

〈고구려의 전무(戰舞)〉 〈고려 대장〉 〈조선 무희〉 〈농가의 처녀〉 등 조선의 역사와 긍지를 알리는,

조선을 소재로 한 춤이었다. 그래서 훗날 일본 경시청에서 공연의 3분의 1은 일본 소재로 하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삼천리》는 1938년 10월호에 최승희의 편지를 실었다


聖林(성림, 할리우드)에서 崔承喜(최승희)
고국 계신 여러 형제께 문안드리나이다. 저는 여러분께서 도와주시고 사랑하여주시는 속에서 태평양을 건너

米國(미국)에 와서 이미 로샌젤스와 華盛頓(화성돈, 워싱턴)과 紐育(뉴육, 뉴욕)을 두루 거쳐

며칠 전 세계 영화의 서울인 헐리우드로 왔나이다.

米國(미국) 와본즉 영화 사업이 놀랍게 굉장한 데는 놀라기를 마지않았습니다.

자동차 사업이나 마천가지로 영화가 米國(미국)의 3대 산업의 하나라고 합니다.

 헐리우드의 영화 시설이 인력을 다한 극진 極美(극미,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한 데는 오직 경탄할 뿐이외다.

저는 오늘 여기에서 로-버트 테일너를 만났고 또 〈벤갈의 創騎兵(기마병)〉에서 낯이 익던 푸랜죹 톤을 만났습니다.

모다 쾌활하고 好男兒(호남아)들이더이다. 자세한 것은 別便(별편)으로 돌리기로 하고 爲先(위선, 우선) 여기에 그칩니다.

미국에서 최승희의 활약은 대단했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뉴스〉 〈로스앤젤레스 이브닝 헤럴드〉

〈시카고 트리뷴〉 〈시카고 데일리 뉴스〉 〈뉴욕 헤럴드 트리뷴〉 등의 일간지와 무용잡지 《아메리칸 댄서》

 2월호와 11월호에도 소개되었다. 〈뉴욕타임스〉도 계속해서 호평했다.


한국춤을 선보인 최승희 - 존 마틴


지난 시즌 뉴욕에서 첫선을 보인 한국인 무용가 최승희가 브로드웨이 길드극장에서 두 번째 공연을 가졌다.

지난 몇 달간, 그녀는 미국 관객들이 선호하는 공연 프로그램 준비에 관련한 많은 지식을 습득했으며,

 전반적인 현지 공연계 템포까지도 파악하였다. 한국 전통음악 반주의 피아노 편곡을 사용하지 않고

한국 전통악기 연주를 녹음한 음악으로 대체하기로 한 것은 상당한 개선이라 하겠다.

그녀의 춤은 한국의 전통춤을 모사한다기보다는 한국식 춤사위의 창작에 몰두한 춤이라 보인다.

 이러한 의도로 보자면, 그녀의 춤은 그 범위 내에서 큰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녀의 많은 춤동작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주 취약하며, 장점이 되는 그녀의 춤동작이 공연 전체에 고루 분포되지 못한 점이 몹시 아쉽다.

최승희는 우아한 자태를 지닌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며, 의상에 대한 안목도 대단하다. 공연의 상당부분이

그녀의 즐거움을 자아내게 하는 희극적 감각에 의존되고 있다. 탁월한 가면의 도움으로, 과장된 전사의 캐리커처,

나이 든 몽상가와 방랑자 순으로 변신하는데, 그 점이 이 공연의 백미라 하겠다. 공연의 많은 부분은 미국 현지의

 취향을 모방하려는 정도에 머무는 수준이라 하겠다. ‘부처님께 기원’이라는 제목의 춤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공연에는 관객도 많았고, 관객들은 열성적인 박수갈채를 보냈으며, 꽃다발과 앙코르 요청도 있었다.
- 〈뉴욕타임스〉 1938년 11월 17일


〈뉴욕타임스〉 1938년 11월 17일자의 최승희 관련 기사      

〈뉴욕타임스〉 1938년 11월 17일자의 최승희 관련 기사



미국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최승희와 안막을 비롯한 공연팀 일행은 유럽 공연을 위해 1938년 12월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서 2년 정도 머물 계획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급히 귀국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귀국하지 않고 다시 뉴욕으로 가서 중남미 순회공연을 했다.

3년여 동안 세계를 누비며 조선춤을 선보인 최승희는 1941년에 서울로 돌아왔다.

최승희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많은 사람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준 조선의 자랑이자 희망이었다.

최승희가 안막의 연락을 받고 월북하자 김일성은 대동강변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려줬다. 지금의 옥류관 자리다

. 최승희는 한국전쟁 전 북한에서 조선무용동맹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전쟁 직전 200여 명의 단원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공연을 떠났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김일성은 계속 공연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한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입성을 전후해 최승희 무용연구소는 폭격으로 사라졌다.

김일성은 모스크바 공연이 끝난 후 최승희를 베이징으로 가게 했다.

피난 겸 중국과의 친선 도모를 위해 중국 무용 발전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라는 뜻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북한으로 돌아왔고 무용연구소는 다시 문을 열었다.

 남편 안막은 문화부 부부장(차관급)이 되었다. 변월룡의 연필그림 〈숙제 검사하는 최승희〉와

유화 〈공훈무용가 최승희〉는 이때 그린 작품이다.




변월룡, 〈숙제 검사하는 최승희〉, 종이에 연필, 20×28.8cm, 1954년, 유족 소장


변월룡, 〈숙제 검사하는 최승희〉, 종이에 연필, 20×28.8cm, 1954년, 유족 소장

맨 왼쪽이 최승희다. 오른쪽 검은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딸 안성희로 추정된다.




변월룡, 〈공훈무용가 최승희〉, 캔버스에 유채, 118×84cm, 1954년, 유족 소장


변월룡, <공훈무용가 최승희>

캔버스에 유채, 118×84cm, 유족 소장.



최승희는 1955년 인민배우가 되었고,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1957년 소련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그녀는 소련의 울라노바, 중국의 재애련(載愛連)과

‘사회주의 3대 무용가’에 선출되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체코 등 동유럽의 32개 도시에서 83회 공연을 했고

제1급 국가훈장을 받았으며, 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1958년 남로당 숙청 때 남편 안막이 숙청당했고, 최승희 무용연구소는 국립예술대학 무용학부로 개편되었다.

그녀 역시 무용학교 평교사로 발령받았다. 1959년에는 남편 안막이 사망했다고 전한다.

최승희는 1966년까지는 창작무용도 발표하면서 조선무용동맹 위원장직을 유지했다.

최승희의 1967년 이후 1969년 8월 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삶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동안 알려진 북한 관리들의 증언은 최승희의 마지막 생을 이렇게 전한다.

 “그동안 그녀의 오만방자함이 많은 문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수령님이 문제 삼지 말라고 해서 가만있었는데,

도저히 더 이상 그냥 둘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지방으로 보냈다.”

북한에서 ‘지방으로 보낸다’는 말은 지금도 가장 무서운 말 중 하나다. 지방은 농촌을 의미하고,

농촌에 가면 계급이 농민이 되기 때문이다. 농민 계급은 도시에 나가 직장생활을 할 수 없다.

농민의 자녀도 당연히 농민이므로 도시로 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결혼을 해도 도시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이런 배우자를 ‘도시로 갈 조건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최승희의 자녀들에 대해 알려진 게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그녀는 말년의 몰락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북한으로 불러들인 남편 안막이 원망스러웠을까?

그보다는 식민지와 분단 시대에 태어난 자신의 운명이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참고도서 :  정수용 著 『최승희』.

백과사전 :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안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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