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Eugéne-Henri)Paul Gauguin
1848년 파리에서 태어나 1903년 타히티의 히바 오아 섬에서 생을 마감.
이기적인 문명을 거부하고 거짓없는 원시의 세계를 동경, 마침내 열대 여인들을 화폭에 담아
새로운 미의식에 대해 눈뜨게 해 주었다. 후기 인상파를 선두에서 이끈 그는 뛰어난 색채 구사와
굵은 윤곽선의 강인한 모델, 원시주의와 단순화된 양식을 통해 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에아 하에레 이아 오에(어디 가세요?)>
유채, 92.0×73.0cm, 1893년.
한 여인이 망고를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순
수한 타히티 여인과 망고는 고갱 그림에서 핵심을 이루는 소재이다.
<검은 돼지들>
유채, 91.0×72.0cm, 1891년.
한가롭고 평온한 타피티 전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고갱은 타락한 문명의 세계를 떠나 원시와 순수의 땅을 찾았지만, 고난은 그곳에도 있었다.
고흐, <노란 집>유채, 72.0×91.5cm, 1888년.고흐가 고갱과 함께 기거한 아를의 '노란 집'. 이곳에서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석 달이 채 못 되었다.두 사람은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배웠지만 사사건건 충돌하기 일쑤였다.
<아를의 카페에서>유채, 72.0×92.0cm, 1888년.아를에 와서 그린 이 그림을 고흐에게 헌정했다. 사실 고갱은 술집의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며자신의 작품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부인은 카페의 여주인 지누이다.
<언제 결혼하세요?>유채, 105.0×77.5cm, 1892년.1893년 뒤랑 뤼엘 화랑 전시회에 선보인 타히티 작품들 중 대표적인 것이다.그림 속에서 두 여인의 자세는 정情과 동動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르동, <바다위를 나는 목>목탄, 46.6×37.6cm, 1878년.르동은 '생명의 재생'이라는 작품 세계를 추구했다. 그래서 그림 속의 인물은 목이 잘리고도 지상으로부터 상승하여 살아 있는 모습이다.
르동에게
..... 당신이 나에게 유럽에 머물러야 할 이유를 말씀하셨지만, 나로서는 그저 덧없이 느껴질 뿐입니다.
내 결심은 확고합니다. 브르타뉴에서 지내던 시절부터 나는 유럽을 떠나기로 마음을 다졌습니다.....
<몽상>유채, 95.0×68.0cm, 1891년.고갱은 문명사회의 인공성보다 타히티의 순수함과 자연스러움을 더욱 사랑했다.그런데 그들의 모습에서 우울함을 느꼈던 것일까? 밝은 색상의 옷이 무겁게 늘어져 있고,몽상에 잠긴 여인의 표정이 우울하다. 1차 타히티 체류 초기에 그린 작품이다.
<해변에서>유채, 68.0×92.0cm, 1892년.거침 없는 선, 상상을 초월하는 색의 배열(보랏빛 모레, 나무 둥치 위에 놓인 붉은 꽃, 노란 풀잎).동적인 인물 등에서 고갱 그림의 음악성이 느껴진다. 해변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모습을 담았다.
<다시는 안 돼>유채, 59.5×117.0cm, 1897년.이 그림의 제목은 에드가 앨런 포의 시 <갈가마귀>의 '갈가마귀는 말한다. 다시는 안 돼라고'하는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모델의 포즈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떠올리게 한다.
<테하마나의 선조>
유채, 76.0×54.0cm, 1893년.
그림의 여인은 고갱이 꿈꾸던 야만의 이브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인은 고갱의 정부로 <그녀는 죽은자의 영혼을 생각한다> <망고를 든 여인> 등에도 등장한다.
<기쁨>유채, 75.0×94.0cm, 1892년.붉은 개! 1893년 뒤랑 화랑의 타히티 작품 전시회를 찾은 사람들은 붉은 개에게관심, 혹은 두려움을 가졌다. 뒷 배경의 여인들은 토속신 앞에서 전통 춤을 추고 있다.
<아베 마리아>113.7×87.7cm, 1891년.고갱은 타히티 섬에서 그린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 자신한 이 그림을 뤽상부르 박물관에 기증하려 했지만 거절 당하고 만다. 고갱은 성서의 한 대목을 시공간이 전혀 다른 세계에 이식하여 원주민의 신앙심을 그려내고 있다.
<작약과 만돌린이 있는 정물>유채, 64.0×53.0cm, 1885년.주식중개인을 그만 두고 화가로 들어선 고갱의 초기 작품 중 최고로 손꼽히는 이 그림은화가의 훗날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 제8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브르타뉴의 네 여인>유채, 72.0×90.0cm, 1886년.고갱의 천재성이 움트는 작품이다. 하얀 머릿수건은 세부 묘사의 차원을 넘어 순수한 장식적 특징을 갖는다. 비틀린 팔 동작과 시선에서 어떤 신비가 느껴진다.
<라발의 옆모습이 있는 정물>유채, 46.0×38.0cm, 1886년.사과를 망고처럼 그렸고, 안경 너머로 정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델이 라발이다.
<마르티니크 풍경> 혹은 <열대 식물>
유채, 116.0×89.0cm, 1887년.
고갱은 마르티니크 섬에서 1887년의 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이 풍경화는 마치 한 폭의 태피스트리처럼 아름답다.
인상파 화가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빛의 효과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색의 풍부함과 깊이가 느껴진다.
인상파 화가와의 단절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으로 반 고흐 형제와 비평가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글로아네크의 성명축일>유채, 38.0×53.0cm, 1888년.고갱이 퐁타방에서 묵었던 글로아네크 여관의 여주인 '글로아네크'의 성명축일(聖名祝日)을 맞아선물한 그림. 대담한 색상과 대상을 단순화시킨 것이 특징으로 당시는 새로운 스타일의 정물화였다.
<후광이 있는자화상>유채, 80.0×52.0cm, 1889년.이 작품은 '고갱의 회화적 자화상'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사과와 뱀, 그리고 후광으로 미루어 고갱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을 회화의 구세주로...?
<순결을 잃다>유채, 89.5×130,2cm, 1891년.
사랑하는 메테에게.....정말 아름다운 밤이오. 오늘 밤 수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밤을 즐기고 있소.취생몽사(醉生夢死) 그렇소, 그들은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소.그들의 자식들은 홀로 자랄 뿐이오.....
<시장>유채, 73.0×91.5cm, 1892년.고갱의 예술 세계를 그대로 보여 주는 여러 대표작 중의 하나다. 여인들의 의상은 이집트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인물의 배치, 딱딱한 몸가짐,강조된 손 동작 등에서 고대 이집트의 신전 부조를 연상 시킨다.
<그녀는 죽은자의 영혼을 생각하다.>유채, 73.0×92.0cm, 1892년.상단 부분에 원제가 보인다. 타히티 원주민의 신화를 바탕으로 그린 이 그림에 피사로를 비롯한인상파 화가들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가는 강렬한 색채와 이국적 화풍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그림 속의 모델은 고갱이 2년 동안 동거 했던 테후라이다.
<사색하는 여인>유채, 91.2×68.7cm, 1891년.열대지방 특유의 광채화 우울이 배어나는 이 작품은 주의 깊고 무게 있는 타히티인의 얼굴에 포커스를 두고 그린 것이 아닐까? 샤를 모리스는 이 작품의 여인을 두고, "잔뜩 골이 난 자신을 즐기는 것 같다."고 했다.
<예술가의 어머니>
유채, 41.0×33.0cm, 1890년.
고갱은 어머니가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을 토대로 이 초상화를 그렸다.
어머니가 페루 출신이었듯이 이국미를 강조했다.
고갱의 어머니는 페루 도자기를 수집했는데 이는 고갱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다.
<슈페네커 가족>유채, 73.0×92.0cm, 1889년.직장인으로 가망도 없는 그림에 빠진 남편, 착실한 아내, 그리고 두 딸.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슈페테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목욕하는 사람들(좌) 유채, 87.5×69.5cm, 1887년.<목욕하는 브르타뉴의 아이들>(우)유채, 92.0×73.0cm, 1888년.고갱은 브르타뉴의 자연 속에서 페루의 어린 시절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그의 누드화는 인상파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설교가 끝난 후의 환영> 혹은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하얀 머릿수건이 <브르타뉴의 네 여인>을 연상시킨다.고갱은 빈센트 반 고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인물들에서 나는 소박하면서도 미신적인 단순성을 찾았네.완벽한 순수함이 깃들어 있네." 라고 밝혔다. 기 그림은 관념을 형식을 통해 표현하는 상징주의의 본보기로,1891년 알베르 오리에가 '상징주의 미술'을 선언하면서 극찬한 작품이다.고갱은 빈센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풍경과 씨름은 기도하는 브르타뉴 여인들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세계임을 밝혔다. 이 그림의 구도는 일본 에도 시대의 목판화가 후쿠사익 가츠시카의 영향을 받은 고갱의 새로운 시도였다.
<퐁타방의 두 브르타뉴 여인> 혹은 <이른 봄의 꽃들>유채, 70.0×92.0cm, 1888년.점묘적인 터치에서 피사로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그러나 진초록의 색이나 풀밭과 언뜻 구분이 되지 않는 나무들에서 고갱만의 강렬함과 독특한 평면 처리법을 찾을 수 있다.
<자화상 : 레 미제라블>
유채, 45.0×55.0cm, 1888년.
우측 하단에 '레 미제라블, 나의 벗 빈센트 반 고흐에게 88'이라고 적혀 있다.
두 사람의 친구였던 젊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의 옆 얼굴도 오른쪽 위에 보인다.
자화상에 전하는 상징적 의미들로 보아 인상파의 사실주의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파도 속의 여인> 혹은 <옹린>유채, 92.0×72.0cm, 1889년.1889년 봄에 그린 이 그림은 일본화의 영향으로 비원근법적 시각과 색의 농담을 절제하는 기법을 사용하면서 여인의 격정적인 동작을 통해 강한 순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아를 교외의 풍경>유채, 91.0×72.0cm, 1888년.1888년 12월 아를을 떠날 즈음, 고갱은 세잔의 눈을 통해 사물을 관찰하는 경향을 보여준다.이 그 림에서도 그런 경향이 뚜렷이 보인다. 수직선과 수평선의 입체적인 구조, 담과 집의 겹침,빛과 어우러진 회벽담, 오랜지밋의 경사진 지붕, 푸른 나무와 멀리 보이는 언덕.이런 모든 것에서 세잔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사과와 배, 그리고 도자기가 있는 정물>
유채, 28.0×36.0cm, 1889년.
그림 속의 도자기는 고갱 자신의 얼굴을 표현하고 있다.
<사랑하세요. 그럼 행복할 테니까요>목판<보리수 나무)에 부조, 착색, 119.0×96.5cm, 1889년.상단부에 프랑스어로 제목이 새겨져 있다.이 작품은 다음해에 조각한 <신비에 잠겨라>라는 목각 작품과 짝을 이루고 있다.
<황색 그리스도>유채, 92.0×73.0cm, 1889년.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 브르타뉴 여인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며'우울'을 대변하고 있다. 강렬한 색, 단순화된 형태, 관념이 응축된 상징성은 고갱이 추구하면 종합주의의 종점이이라 할 수 있다. 고갱이 말하는 종합주의는 인상주의의 색채 분할과 그 기법의 해체적, 분석적 경향에 대한 대항을 말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인상에 충실하려는 인상주의의 기법이 오히려 대상을 헤체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판단,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들을 강한 윤곽선을 두른 넓은 면으로 종합한다.
<짚더미>
유채, 73.0×92.0cm, 1890년.
이 그림은 모네의 '낟가리' 연작 이전에 그려진 그림이다.
모네의 인상주의와 비교하여 고갱이 추구한 종합주의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곡선과 직선, 공간의 깊이, 겹쳐지는 윤곽 등이 한결같이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다.
고갱이 챶던 원시의 순수성이 대지와 함께 살아가는 농민의 삶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팔레트를 든 자화상>유채, 92.0×73.0cm, 1894년.1893년 12월 베르생제토릭 거리에 화실을 마련한 고갱은 그 동안의 작품을 인정받기 위해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특이하게 보이기 위해 양털 벙거지에 감청색 외투를 입었다.
<브르타뉴의 풍경>
유채, 73.0×92.0cm, 1894년.
타히티에서 돌아온 고갱은 파리의 문명화된 삶에 견디지 못한다.
타히티를 대신해서 브르타뉴를 찾지만, 그곳은 타히티에 비길 곳은 못된다.
이 그림에서 붉은색 계열이 유난히 강조된 것은 타히티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망고의 여인>유채, 97.0×130.0cm, 1896년.초록의 땅에 여왕이 나체로 누워있다. 시녀는 과일을 딴다.두 노인이 중양의 굵은 나무 곁에서 지혜의 나무에 대해서 말을 주고 받는다.뒷 배경은 바다다. 개와 비둘기도 보인다.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바치는 자화상>유채, 39.0×35.0cm, 1897년.1897년 2월 14일, 다니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갱은 "이것을 자네에게 바치고 싶네.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보살펴준 것에 대한 보답일세"라고 말했다.
<꿈>
유채, 95.0×132.0cm, 1897년.
1890년 빈센트 반 고흐가 죽은 이듬해 유일한 거래 화상이던 테오마저 죽자
고갱은 다니엘 드 몽프레를 통해 그림을 판매하려 한다. 1897년 9월 프랑스로 출발하는군함이 출항을 잠시
연기하는 틈을 타 서둘러 그려 다니엘에게 보낸 그림으로 당시 조각으로 꾸민 고갱의 작업실 내부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유채, 139.0×375.0cm, 1897년.이 그림은 동양식 독법에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아기는 삶의 출발을, 쪼그리고 앉은 늙은 여자는 죽음을 상징한다. 고갱은 4미터에 이르는 굵은 삼베에다 자기 예술의 최종적 발언이라고 생각한 내용을 고스란히 담았다.
<백마>유채, 141.0×91.0cm, 1898년.이 시기에 고갱은 절망 속에서 자살을 결심하지만 그림은 오히려 청록색이 감도는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망고 꽃을 든 타히티 여인들>유채, 94.0×73.0cm, 1899년.<빨간 꽃과 유방>이란 제목으로 알려진 그림이다.고갱의 타히티 작품 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의 하나로 평가된다.신비로운 가면을 벗어던진 해맑은 여인의 모습이다.
<해변의 말 탄 사람들>유채, 73.0×92.0cm, 1902년.고갱은 드가를 존경했다. 드가도 고갱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말의 화가라고 하면 드가를 소꼽지만, 이 그림은 고갱의 말 그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여겨진다.화면의 구성에서 원화(圓環)운동을 엿볼 수 있으며 해변을 연분홍으로 처리한 것이 고갱만의 특색이다.
<안나 라 자바네즈>유채, 116.0×81.0cm, 1893~1894년.고갱이 타히티에서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화상 블라르의 소개로 만난 여인이다.그녀는 약 1년 동안 고갱의 애인으로 지냈는데, 풍타방에서 동거하다가 파리로 돌아와 고갱의 화실에서귀중품을 훔쳐 달아났다. 그림의 원숭이는 그녀가 항상 데리고 다니던 애완 동물이다.
<악마의 유혹>유채, 91.5×70.0cm, 1892년.악마가 뱀을 대신하여 낙원에서 이브를 유혹하고 있다.이 그림은 목판화로 제작되었다.
<모자를 쓴 자화상>유채, 46.0×38.0cm, 1893~1894년.이 자화상은 타히티에서 돌아와 그린 것으로, 그가 프랑스에서 그린 마지막 자화상이다.오른쪽 뒤에 걸린 그림은 그의 타히티 작품 <마나오 투파파우>이다.전반적으로 어두운 색조가 파리에서 겪어야 했던 서글픔을 상징하는 듯하다.
<즐거운 나날>유채, 72.0×92.0cm, 1896년.두번째 찾은 타히티는 변해 있었다. 전등이 들어오면서 문명의 빛을 띠고 있었다.그렇게 변화된 타히티의 모습에 대한 고갱 심경을 엿보게 한다.
<신의 아이>유채, 92.0×128.0cm, 1895~1896년.<탄생>이란 제목으로 알려진 그림이다. 고갱은 1896년 1월부터 파후라와 함께 살면서12월에 딸을 낳았지만,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지쳐 누워 있는 산모 옆으로, 후광이 드리워진아이를 안고 있는 <저승사자>는 고갱의 몇몇 그림에 등장하고 있다.
<세 명의 타히티인>
유채, 73.0×93.0cm, 1898년.
세 명의 타히티인은 V자 형태의 안정된 구도 속에, 고대 문명의 장식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인위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갱의 장식주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배경도 장식적인
기능을 살려 평면 처리했다. 이와 같은 배경 처리는 당시 고갱이 즐겨 쓰던 기법이다.
<야자수 잎으로 지붕을 씌운 오두막>수채화, 31.5×23.2cm, 1894~1897년.고갱은 《노아 노아》에 원주민들이 야자수 잎과 줄기로 지어준 자기 집을 그렸다.집과 작업실을 장식하는 거이 고갱에게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원시의 이야기>유채, 131.5×90.5cm, 1902년.만년의 고갱은 타히티의 전설에 관심을 기울인다. 불상처럼 가부좌를 한 남자(불교),그 옆에 가까이 붙어 앉은 여자(원시종교), 그리고 남자 뒤의 괴이하게 생긴 인물(기독교, 퐁타방 시절에사귀었던 화가 메이에르 드 한으로 항상 성경을 들고 다녔다)을 통해 모든 종교를 집약하면서,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그림에 담으려한 의도가 엿보인다.
<여인들과 백마>유채, 72.0×91.5cm, 1903년.기록상으로 가장 마지막 작품이다. 고갱의 만년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보인다.하얀색이다. 그리고 그림 중앙 상단에 하얀 십자가가 보인다. 타히티 초기와는 달리 여인들도 흰 치마를 두르고 있다.십자가와 흰색, 고갱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견했던 것이 아닐까?
참고도서 / 폴 고갱 著, 강주헌 譯, 『야만인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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