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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로댕

 

 

 

<코가 일그러진 남자>

1863~64, 브론즈, 31.8×18.4×15.2cm.

 

1864년 살롱에 출춤되었으나 당시의 예술계를 풍미한 아카데미즘의 미의 기준에서 어긋나 거부되었다.

모델은 포부르 생 마르셀에 있는 로댕의 아뜰리에를 청소하기 위해 온 비비라는 노동자인데,

깊게 파인 주름과 일그러진 코가 빈곤의 산물로 드러난다.

 

 

 

 

 

<아름다웠던 투구 제조공의 아내>

1889~90 브론즈, 50.1×29.2×26cm.

 

프랑스 시인 프랑수아 비용의 『이미 늙어버린 아름다웠던 투구 제조공의 아내의 슬픔』이라는 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델은 아들을 만나기 위해 이태리에서 걸어서 파리에 왔다가 로댕의 눈에 띄어 모델을

서게 된 82세의 노파다.  로댕은 여성의 노쇠와 추함도 조각이 되기에 얼마나 훌륭한 주제인가를

 이 작품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로댕에게 조각이란 모델의 외형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진실과 생명과 힘을 전달하는 것이다.

 

 

 

 

 

<청동시대>

1876년, 부론즈, 175.3×67.5×52.9cm.

 

"이것은 로댕의 작품에서 표정의 탄생을 알려주는 것이다. 표정은 들어올린 두 팔 속에서 머뭇거리면서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팔이 아직 그렇게 무거운지 한 쪽 팔의 손은 다시 머리 위에서 쉬고 있다. 그렇지만 손은 잠든 것이 아니라

힘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오른발에는 첫 번째 걸음이 기다리고 있다." (릴케)

 

 

 

 

 

<칼레의 시민>

1889년, 부론즈, 231×245×203cm.

 

"로댕은 곧바로 이 이야기 속에 무언가 위대한 일이 일어난 순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과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독보적이고도 단순한 일이 그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는 시민들이 도시를 떠나는 순간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결단을 내렸고,

마지막 시간을 자기 방식으로 결단을 내렸고 이 마지막 시간을 자기 방식으로 살았으며, 자신의 영혼과

함께 이 시간을 축하했고 또 아직 삶에 매달려 잇는 자신의 육체로 이 시간을 괴로워했다." (릴케>

 

 

 

 

 

<칼레의 시민>

1885년, 석고 습작, 71.5×78×702cm.

 

 

 

 

<칼레의 시민> 세부.

 

 

 

 

<칼레의 시민> 세부.

 

 


 

 

<칼레의 시민> 세부

 

 

 

 

<발자크>

1897년, 브론즈, 270×120.5×128cm.

 

로댕은 발자크의 고향 쿠렌느의 자연 속에서 그의 소설과 서신을 읽고 초상화와 사진을 연구 하는 등,

많은 자료에 의거해 작품을 완성하였다. 애인 카미유 클로델과 함께 여름을 보내던 앙주에서 발자크를 닮은

우체부를 발견하고는 그를 스케치 한다든지, 발자크가 다니던 양복점에 들러 그의 치수를 확인하는 등,

해부학적 정확성에 만전을 기했다. 또한 여러번의 습작을 통해 형태의 윤곽을 결정한 것이다.

 

 

 

 

 

<뚱뚱한 배를 가진 발자크의 누드 습작>

1893~5, 석고, 134×75×81cm.

 

 

 

 

 

<지옥의 문>

1880~1917년, 브론즈, 635×40×85cm.

 

인간의 운명, 환희와 고통과 열정, 사랑의 번민과 한숨, 공포의 절규, 진실 등

인간의 본능적 감정과 보편적인 심리 상태를 총괄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마코타주 기법이 가장 다양하고도

광범위하게 적용된 조각이다. 인간 형상 다발은 예술가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끊임없이 새로운 그룹으로 분리하여 제조화시키고, 정확하게, 혹은 보다 작은 크기로

다양하게 복제하는 등, '이미 만들어진' 작품의 자유로운 사용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브>

1881년, 브론즈, 172.7×60.3×76.2cm.

 

로댕의 작품에는 정지된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인물의 특성을 외적인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감정의 재현이고, 감정이란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브>는 전형적인 그리스풍의 정적인 자세속에서 풍만한 가슴은 장차 어머니가 될 모습을 암시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후솢ㄴ에게 다가올 고통에 대한 생각으로 고통과 불안으로 긴장되어 있다.

 

 

 

 

 

 

<슬퍼하는 얼굴>

1882년, 부론즈.

 

이 작품은 보통 받침대 역할을 겸하는 흉상으로 제작되는 초상과 달리 목의 길이를 짧게 절단시켜

얼굴 자체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감상자는 이 인물의 슬퍼하는 표정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 얼굴의 표정을 만들어내는 각 면과 선들이 강렬한 표현성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우상>

1889년, 석고, 73.7×53.3×38.1cm.

 

"이 작품 속에는 어딘지 연옥과 같은 분위기가 살아있다.

천국은 가까우나 아직 도달하지는 못했으며, 지옥도 가까이 있어 아직 잊혀지지 않았다.

여기서도 접촉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두 육체가 접촉하고,

또 여인이 제 자신과 접촉하는데서 온갖 광휘가 발산된다." (릴케)

 

 

 

 

 

 

 

<덧없는 사랑>

1881~87년, 브론즈, 43.2×36.8×21.6cm.

 

정염 때문에 고통받는 연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입맞춤>

1888~1898년, 대리석, 183.6×110.5×118.3cm.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인물을 표현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제어도, 인내도 못하는 육체를 보여준다. 따라서 둘의 자세가 얼마나 밀착됐는지에

상관없이 그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또 영원히 중족되지 않을 육체의 욕망을 보여준다. 미르보의 표현대로

"서로 껴안고 있으나 결코 채워지지 않는 저주받은 연인들"이어서 지옥의 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입맞춤> 세부

 

 

 

 

 

<성당>

1908년, 돌, 64×34×32cm.

 

두 개의 오른 손이 서로 닿지 않은 채 볼록한 공간을 이루고 있는 형태이다.

손들의 형상은 이 손들의 주인공인 남녀가 서로 몸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서로 닿고 싶어하는 그들의 욕망과 그만큼의 주저함을 상상케 한다.

 

 

 

 

 

 

 

 

<아이리스 신의 메신저>

1891, 브론즈, 96.5×82.5×39.37cm.

 

 

 

 

 

<발자크의 누드 습작>

1896년, 석고, 94×44×34.8cm.

 

 

 

 

 

<모를라 비쿠나 부인>

1888년, 대리석, 56.5×49.5×36.8cm.

 

머리띠가 한층 여성적인 것을 나타내는 젊은 이 여인은 언뜻 보기에 순진한 외모 속에 잠재적인 관능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막 벌어지려는 듯한 입술, 옥망으로 떠는 듯한 눈꺼풀, 그리고 둥근 어깨,

풍만한 가슴은 벌거벗은 몸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이 해부학적인 정확함 위에 인간의 본성, 정신, 심리 등을 함께 담아낸 내면 세계의 보고(寶庫)이다.

 

 

 

 

 

 

<설교하는 세례 요한>

1880년, 부론즈, 200×72×110cm.

 

전신상으로서 이 상의 어느 한 부분이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형상과 결합하여 새로운 작품을 낳은 조각이다.

이 토르소의 모델이 세례 요한의 모델인 피나텔리라는 동일 인물이다. 그리고 이 토르소가

바로 세례 요한을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탄생되었다는 것이 뒤자르댕 보메츠와의 대화가 증명한다.

 

"어느날 아침 모델을 서기 위해 아브루치에서 한 농부가 왔다.

그를 보자 나는 그의 거동에서 나타나는 투박하고 덥수룩한 외모와 야성적인 근력, 그리고 그의 종적의

신비스러운 성격에 사로잡혔다. 선구자 요한이 생각난 것이다. 나는 소리쳤다.

'이건 정말 걷고 있는 사람이야!" 나는 내가 본 것을 즉시 만들기 시작했다.

 

 

 

 

 

 

 

<걷고있는 사람>의 세부.

 

 

 

 

 

<걷고있는 사람>

1877년, 브론즈, 213.5×71.7×156.5cm.

 

"그는 걷는다. 그는 계속 걷는다.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오게 된다.

무거운 걸음을 시작하는 칼레의 시민들도 온다.

그리고 모든 걸음걸이는 발자크의 위대하고도 도발적인 걸음을 예비하는 듯하다." (릴케)

 

 

 

 

 

 

<걷고있는 사람>의 세부.

 

로댕은 마침내 1900년 <설교하는 세례 요한>에서 비롯된 다리와 토르소르 겹합시켜

<걷고 있는 사람>을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걷고있는 사람의 토루소>가

<설교하는 세례 요한>을 위한 예비 조각이라는 것과 <설교하는 세례 요한>이

<걷고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 했었다는 것이다.

 

 

 

 

 

 




 

 

 

<걷고있는 사람의 기념비적인 토르소>

1905년, 브론즈, 110.1×67.9×38.1cm.

 

로댕의 작품에서 완성과 미완성이라는 개념은 한층 신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조각에서 전통적인 개념의 완성이란 <입맞춤>에서와 같이 완벽한 마무리를 의미하고,

'미완성'은 돌이나 브론즈로 옮기지 저의 석고 캐스팅과 같은 재료의 문제, 세부 처리르 생략한 행위,

습작으로서의 작은 크기 등과 같이 무엇인가 부족한 것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로댕은 종종 한 인물에 대해서 머리 모양이나 얼굴 표정을 약간 수정하여 6개나 7개의 다른 모습을 띤 습작들을 만들었다 위 작품 속 인물들의 얼굴 모습이 비슷한 것이 그 예이다.


 

 

 

 

<신의 손>

1902년, 대리석, 94×83×55cm.

 

"그는 잊지 않았습니다. 신 오로지 신만을 의지하는 가진 것 없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자신도

가진 것 하나 없는 몸으로 동물들과 꽃들과 사귈 수 있게 해준 것이 가난이라는 사실을." (릴케)

 

 

 

 


 

<신의 손> 다른 면.

 

 

 

 

 

 

 

<무덤에서 나오는 손>  또는 <피아니스트의 손>

1910년, 브론즈, 12.7×8.9×3.4cm.

 

"이것(손)은 그 어느 육체에서 소속되지 않은 채 독립적이고 살아있는 자그마한 손들이다.

이 손들은 실제로 저마다의 문화와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 손들에게

고유한 발전을 가질 권리,고유한 소망과 감정, 기분과 취미를 가질 권리를 인정한다." (릴케)

 

 

 

 

 

 

<세 그림자>

1880년, 브론즈, 96.6×92×54.1cm.

 

동일한 조각상 세 점이 나란히 붙어있는 <세 그림자>는 <지옥의 문> 맨 꼭대기에 놓여있는 조각이다.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희망을 버려라'라는 단테의 구절대로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은!'이라고

페디먼트에 쓰여진 글을 세 인물 모두 왼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른손이 절단된 채 영원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기력을 잃고 피곤한 모습을 하고 있는<그림자>가 세 번 반복된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자>는 <아담>으로부터 온 것이다.

 

 

`

 

 

 

<아담>

1880~81년, 191.8×74.9×74.9cm.

 

 

 


 

<말라버린 샘>

1889년, 석고, 66.5×55×61cm.

 

이것은 <아름다웠던 투구 제조공의 아내>를 복제하여 서로 마주보게 한 것인데,

나르시스가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자기 도취에 빠져서 자신을 바라보았다면,

<말라버린 샘>에 노파는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습이 이제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

말라버린 샘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골리노와 그의 아이들>

1881~82년, 41×42.9×50.5cm.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탈리아 연대기 편자 빌라니가 끈 13세기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간의 전쟁에서 반역죄를 짖고

 자신의 두 아들과 두 손자와 함께 피사에 있는 아치아니 광장의 탑에 갇혀있던 우골리로 백작의 이야기이다.

야수적 본능과 그 본능에 험오감을 느끼는 고상한 정신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본능에 지고 마는 인간의 모습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골리노의 등에 매달린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아이의 얼굴이

이 작품 바로 아래에 위치한 불륜의 연인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에서

파올로의 얼굴로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1905년, 대리석, 81×108×65cm.

 

"가차없이 결정된 이 형상들과 함께 운명들이 감미롭고도 절망적인 이름들이 다가옵니다 - 그런데 갑자기

그것들은 사그라지는 광채처럼 떠나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아있는 바닥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봅니다. 다시 남자들과 여자들을, 계속해서 남자들과 여자들을 봅니다.

그리고 오래 바라보면 볼수록 그 내용도 점점 더 단순화되어서, 결국 우리 눈앞에 남는 것은 사물입니다." (릴케)

 

 

 

 

 

<오비디우스의 변신>

1885년, 브론즈

 

 

 

 

 

<탐욕과 욕망>

1881년, 석고, 높이 25cm.

 

 

 

 

 

<일루전, 이카루스의 동생(또는 딸)

1896년, 대리석, 62×96×51cm.

 

<지옥의 문> 주제 중 하나인 욕망, 즉 태양까지 날아보려다 밀납으로 된 날개가 녹는 바람에

땅으로 추락해 죽은 이카루스와 같이 좌절된 욕망의 인물로 여러 작품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부러진 백합>

1911년, 대리석, 으젠느 두르의 사진.

 

1911년에는 아미엥에 있는 성 아쉴의 묘지의 젊은 남자의 무덤에 <버러진 백합>이라는 제목으로

세워지기도 했다. 여기서는 매우 거칠게 다음은 돌덩어리에서 나와 서 있는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신이 지나가면서 나를 부른다"라는 알ㄹ프레드 드 뮤세의 글귀와 날짜가 새겨져 있다.

 

 

 

 

 

<탕아>

1889년, 부론즈, 138.2×99.8×69cm.

 

<탕아> 역시 다양한 배경 아래 놓인 작품이다. 이 작품도 <지옥의 문>에 등장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인물이다. 신에게 애원하듯 강렬한 정신적 고통 상태가 해부학적 윤곽으로 표현 되었다.

 

"로댕은 우선 인간 육체에 대한 틀림없는 지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탐구하면서 서서히 육체의 표면으로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이제는 마치 내부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이 표면을 다른 측면으로부터 정확하게 규정하고 한정짓는 손 하나가 외부에서  뻗쳐 다가왔다....

결국 그의 연구가 방향을 돌린 곳은 육체의 표면이었다.

이 표면은 사물과 빛의 무한히 많은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릴케)

 

 

 


 

<추락하는 사나이>

1882년, 브론즈, 58×37×25cm.

 

<추락하는 사나이>도 다른 조각과 결합된 작품이 있다.

<나느 아름다워>가 그것으로, 덩어리로 된 물질적 현존 속에서 도발적인 자세를 내보이며 앉아있는

<웅크린 여인>과 결합된 것이다. <지옥의 문> 오른쪽 상단에 놓여있으며, 이 작품의 구성 인물들 역시

각각 동일한 문안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웅크린 여인>

1880~82년, 브론즈, 95.3×63.5×53.7cm.

 

 

 

 

 

 

<나는 아름다워>

1886년 이전, 브론즈, 70.5×30.3×31.7cm.

 

<나는 아름다워>에서 웅크린 이 여인은 허리를 뒤로 젖힌 건장한 남자에게 안겨 연약하고 정염에 사로잡힌

육감적인 여인으로 변해있다. 이 작품은 보들레르의 시를 생각하며 만든 것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동작에 따른 해부학적 골격의 불일치로 인해 사나이가 여인을 들어올리려는지, 아니면 위에 있는

여인의 무게에 의해 내려앉는 자신을 힘들게 지탱하고 있는지 모호한 자세를 보인다.

 

 

 

 

 

 

 

 

<아쌍블라주 : 두 개의 이브 형상과 웅크린 여인>

1905~1907년경, 석고.

 

 

 

 

 

 

<꽉 쥔 커다란 손과 인물>

1906(또는 1907년), 브론즈, 44.5×29.2×26.4cm.

 

이 작품 역시 서로 연관성 없는 형상들이 조화를 이루어 새로움을 낳은 경우이다.

토르소는 <여성 켄타우로스>에서 사용되었던 것이고, 또 <절망에 빠진 청년>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극도로 표현주의적이고 상당히 거친 표면 처리, 토르소에 비해 지나치게 커다란 손은 <칼레의 시민>의

제작 경험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일그러진 손>

1885년, 브론즈, 46.4×26.4×19.3cm.

 

 

 

 

 

 

<여성 켄나우로스>

 

 

 


 

 

<추락하는 사나이 토르소>

1882~1889년, 브론즈, 102.9×69.9×47cm.

 

"그(로댕)의 조각에서 알 수 있는 표정들의 운동성은 사물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어서,

말하자면 내적 순환이기 때문에 조형구조의 고요와 안정성을 결코 훼방하지 않습니다.

로댕이 조각에 운동성을 도입한 것을 결코 혁신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새로움은 운동 방식에 있습니다.

표면들의 독특한 특성으로 인해서 빛이 운동하도록 강요되는 것 말입니다." (릴케)

 


 

 

 

 

 

<영원한 청춘>

1884년 높이 65cm.

 

신화에서 빌어온 <제피러스와 대디>가 나중에는 <영원한 청춘>이 되었는데, 이같은 제목은 관능적이고 범상치 않은 주제를 가장하여 속이는데 좋은 방법이었다.
<지옥의 문>을 구성하는 수많은 조각을 통해 조댕은 주제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따라서 기존의 재현 방식에 따른 이야기 없이 형태 그 자체의 창조에 만족할 수 있었다.

 

 

 

 

 

<생각하는 사람>

1880년, 1902~03년(확대), 블론즈, 201×130×140cm.

 

<생각하는 사람>도 <지옥의 문> 상인방 중앙에 신체의 1/2 정도의 크기로 제작되어 놓인 조각이다.

그 후 1900년 알마 전시장에 6피트의 크기로 만들어져 전시되기도 했다. 로댕은 이 작품을 처음에는

<시인>이라고 부르고자 했다. 이 경우에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쓴 <신곡>의 내용을 바라보는

단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옥의 문>이라는 인간의 영혼을 다룬 종교적 드라마 입장에서 보면

영혼의 판관인 미노스일수도 있고, 또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이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연민의 감정을 품고 있는 창조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지옥의 문>에서 떨어져 나오면 이 작품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문맥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파리 팡테옹에서는 <생각하는 사람>의 강한 근육질의 신체는 프랑스 노동자들을

상징하며, 그들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영웅적인 인물상으로 제시된다. 로댕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이념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상징'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로댕의 무덤에 놓였을 때는 고뇌하는 로댕 자신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으며,

 대학교에 세워졌을 때는 창조자로 해석되는 등, 놓여진 장소에 따라 새롭게 읽혀진다.

 

 

 

 

 

 

<칼레의 시민>

뫼동의 높은 단 위에 실험적으로 해본 설치, 사진가 미상.

 

"로댕은 그들이 거주할 집이 없는 신세가 되리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예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들을 숨막혀 죽게 하든지,

아니면 그들에게 산악을 감싸고 있는 하늘을 얻어다주든지 양자택일만 남았습니다." (릴케)

 

 

 

 

 


 

<빅토르 위고>

1909년 이후, 팔레 루와이알 정원, 카본 사진.

 

열린 조각적 공간에 대한 감각과 어느 각도에서나 감상이 가능한 전체적인 공간 상황을 만들어낸다.

작품의 요소인 바위 자체가 받침대가 되는 새로운 설치방법으로 기념비적 조각의 다른 예를 제시하였다.

 

 

 

 

 

 

<뮤즈에 둘러싸인 위고 상>

 

 

 


 

<빅 토르 위고의 기념비> 上

1900년, 브론즈, 184.8×310×162.6cm.

 

<비극적인 뮤즈> 下

1894~96년, 브론즈, 33×64.7×38.7cm.

 

 

 

 

 

 

<순교자>

1885년, 브론즈, 길이 156cm.

 

마치 어디론가 떨어져 나와 내동댕이쳐진 모습으로 위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제작괸 것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아무런 받침대 없이 바닥 위에 직접 놓여지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접시에 담긴 세례 요한의 머리>

1887~1907년, 대리석, 20.3×40×34.3cm.

 

살로메의 욕망에 의해 머리가 잘린 요한.

눈부신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세례 요한의 섬뜩한 아름다움이다.

 

 

 

 

 

 

 

<다나이드>

1889년, 대리석, 36×71×53cm.

 

"엎드린 다나이드의 등으로 지나가는 빛을 보는 것도 기묘한 일 아닙니까?

빛은 몇 시간 동안이나 거의 진전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천천히 움직입니다.

이전에도 또 어떤 이가 이렇게 다양한 그늘의 모든 뉘앙스을 알고 있었을까요?" (릴케)

 

 

 

 

 

 

 

<다나이드>

 

"이 대리석상 주위를 서서히 둘러보는 것, 풍부하게 구부러진 둥근 등을 돌아서 고귀한 울음 같은 돌 속에

없어져버린 얼굴로, 영원의 얼믐 덩어리에 깊이 파묻힌 채 마지막 남은 한 송이 꽃처럼 다시 한 번 조용히

삶을 말하는 손으로 이르는 길고 긴 길을 걸어보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 (릴케)

 

 

 

 


 

<퓨비 드 샤반느 기념비>

1899년, 석고, 아리스토 사진(장 프랑수아 리메)

 

일반적으로 초상 조각들이 단순한 하나의 받침대 위에 놓이는 것과 달리 이 초상은 테이블 위에 놓인

고전적 형상을 연상시키는 단을 이루는 두 개의 낮은 받침대 위에 놓여져 있다.

이 조각은 이 받침대들과 함께 3개의 수직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

 

아래의 <영원한 휴식을 취하는 천재>와 함께 사선적 구성을 보이며 인간과 자연이라는 대조적인 이미지가

거의 유희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여기서 젊은이는 죽음을 슬퍼하는 듯 중심을 잃고 거의 쓰러질듯이 서 있다.

기념비와 같은 테이블 위에 간소하게 푸비드 샤반느의 초상이 놓여있는데, 죽은 자의 정신을 적절히 들어

내는 듯하다. 이로써 로댕은 조각을 관조하는 물체라는 전통적 조건으로부터 끌어내어 공간과 장소를

점유하게 하여 실제 삶의 경험이 되는 조각의 새로운 길을 예시하였다.

 

 

 

 


 

<영원한 휴식을 취하는 천재>

1898~99년, 브론즈, 193×116.8×121.9cm.

 

 

 

 


 

<사색>

1886년, 대리석, 74×44×46cm.

 

"고유한 빛을 가진 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 얼굴은 그늘이 들 정도로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지만 돌의 하얀 미광 위로 받쳐져 있어서,

그 빛의 영향을 받아 그늘은 해체되고 투명한 어슴푸레함으로 옮겨갑니다.

작은 군상들 중 하나, 두 육체가 억제되어 있는 빛과 조용히 만나기 위하여 여명을 창조하고 있는

이 작품을 생각할 때 황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구일까요?" (릴케)

 

 

 

 


 

<로즈 뵈레>

1898년경, 대리석, 51.7×42.6×44cm.

 

"밤이 늦어서 모델이 없으면, 

오랜 세월을 감동적인 조력과 헌신으로 그의 삶을 나누어온 아내가

초라한 방에서 그의 작업을 가능하게 해줄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조력자로서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몫이 된 수많은 하찮은 봉사 속에서 사라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릴케)

 

 

 

 

 

 

 

"그(세바스티앙 멜모스 : 더블린 태생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가명)에게

로댕과 둘이 있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때 그는 아마도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삶은 어땠습니까? 그러면 로댕은 대답했을 것입니다.

좋았지요.

적도 있었습니까?

내 일을 방해하지는 못했어요.

명성도 얻으셨는지요?

내가 일할 의무를 주었지요.

친구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내게 일하도록 요구했어요.

그러면 여성들은요?

일하면서 나는 여성들을 경탄하는 법을 배웠지요.

선생님도 젊은 시절이 있었을텐데요?

그때는 평범한 청년이었어요. 사람이 젊었을 때는 아무 것도 이해 못합니다.

그것은 천천히 나중에 되는 것이지요." (릴케)

 

 

 

 

 참고서적 / 박숙영 著  『로댕, 그의 모더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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