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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산수화에 깃든 정신사 2

 

 

 

산수화(山水畵)에 깃든 정신사(精神史)

(2편)

 

 

 

 

- 17세기 후반~18세기의 산수화 -

 

 

<다카나와신케이즈>

오키 이시가, 일본, 1825년, 비단에 채색, 113.9×44.5cm, 도쿄국립박물관.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 일본 명소를 그린 회화를 '신케이(眞景)'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19세기 초에 지속적으로 유행한 일본 특정 지역을 그린 실경화나 판화를 살펴보면

그 제목을 '신케이'라 부른 것이 매우 많아 일종이 화목(畵目)용어로 정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학술 용어들이 일본으로 부터 역수입되었던 상황은

'眞景'이란 말이우리 회화사 용어의 하나로 정착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의 출처는 분명히 조선의 문헌에서 찾을 수 있고,

 또한 일본 회화사에서 산케이가 가지는 위상은 한국 회화사의 진경에 비할 때 매우 미약하기에

 '진경'이란 조선 회화사에서 특별히 중요한 명칭이며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망견부사산설도 / 후지산의 눈을 바라보며>

<사로승구도권>의 부분, 이성린, 1748년, 종이에 수묵담채, 35.2×70.3cm, 국립중앙박물관.

 

한편 일본 통신사행에 파견되었던 화원화가 이성린은 줄발지인 부산포로부터 일본의 대마도를 거쳐가며

경험한 산수 경관들을 화폭에 담았다. 30여 폭의 산수화가 두루마리로 꾸며져 오늘에 전한다.

 

 

참고로 '실경산수화'라는 명칭도 알아 두면 혼동을 피할 수 있다. 실경산수화란 실경을 그린 산수화를 폭넓게 칭하는 일반적 표현으로, 정선의 진경산수화 등장 이전에  우리 실경을 그린 산수화들은 편의적으로 실경산수화라 부른다.예컨데 우리 실경이 그려진 조선 초기의 산수화나 조선 중기의 계회도 등의 일부가 이에 포함될 것이다.우리 회화사의 명칭 통례상 이들을 진경산수화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진경산수화를 실경산수화라 부르는 것은 무방하다.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

이징, 1643년, 비단에 수묵담채, 89.3×56cm, 국립중앙박물관.

 

15세기 학자 정여창의 정자를 그린 그림이다.

정여창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정자는 이미 황폐해진 상태였지만,

스승을 기리고자 뜻을 모은 유생들이 화가 이징에게 이 정자를 그려달라고 의뢰하였다.

이징은 실제 직접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그림을 그렸고 유생들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스승에 대한 존경이 그림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도산도>

강세황, 1751, 종이에 수묵담채, 26.8×138.5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을 청한 문인들은 자시의 공간이 그림 속에 재현된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는 기유도 속에 유람 선비들의 모습이 담겼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도산서원도>

정선, 1771년, 종이에 수묵담채, 21.3×56.4cm, 간송미술관.

 

 

 

 

 

 

<청풍계도(淸風溪圖)>

정선,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96.5×36cm, 고려대학교박물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정선, 1751년, 종이에 수묵, 79.2×138.2cm, 삼성미술관 리움.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대표작으로 소개되고 있는 작품이다.

놀라운 생동감을 주는 명작으로 인왕산이 주제이지만 정작 그림의 핵심은 자신의 저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8세기 후반 이 그림을 입수한 심환지가 그림 뒤에 붙인 글이 전하고 있다.

 

.... 만 그루 소나무의 푸른빛이 그윽한 집을 두르고 있네.

주인옹은 바로 깊은 장막 아래 앉아 홀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완성하리라.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

정선, 1755년경, 종이에 수묵담채, 27.4×27.4cm, 간송미술관.

 

정선 자신의 공간을 스스로 그린 그림으로,

 집 뒤로 인왕산이 보이고 뜰에는 버드나무와 오동나무 그늘이 어렸다.

창 속에 보이는 인물은 단정히 독서 중인 선비의 모습이다.

 체험 공간과 실제 인물을 유람과 거주의 이상적 틀로 표현하는 것,

곧 정선이 평생토록 요구받았던 작업 방식이 그 자신을 표현하는 순간에 다시 적용된 듯하다.

 

 

 

 

 

 

 

<시중대(왼쪽)과 경포대(오른쪽)

《관동십경》병풍에 수록, 김상성 편, 18세기 필사본, 44×30.6cm, 서울대학교 규장각.

 

풍수를 그린 조선 후기 산수화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 병풍 그림은 화원화가가 그린 것으로,

18세기 문사들의 시가 함께 실려 있다. 시중대의 멋진 풍경 보다 주로 풍수적 길상을 표현하고 있다.

문인들의 제화시문에는 풍수 형국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다. 오히려 이 점이 흥미롭다.

 

 

 

 

 

<명릉도(왼쪽)와 덕안릉도(오른쪽)>

 

 

 

 

 

<양주 백서면 웅장리 상운산>

 

작자미상, 1715년,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묘소로 택하여진 산으로

24방위와 중심의 안정된 혈, 뒤로 두른 산, 앞으로 흐르는 물 등 풍수적 기본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이 산도의 아래 적힌 글을 보면, '기세가 웅장하고 기이하여, 혈을 만드는 것이 정묘하다'고 하였으며

'실로 얻기 어려운 길지(吉地)라 하였다.

 

 

 

 

 

<이안와수석시회도>정황, 1789년, 종이에 수묵담채, 25.3×57cm, 개인소장.
산수나 정원을 배경으로 정겹게 모여 앉아 詩를 짓는 모습이다.이러한 그림들을 따로 '아회도(雅會圖)' 혹은 '아집도(雅集圖)'라 부른다, '아취가 있는 모임'이란 뜻이다.혹은 문인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문회(文會)', 시 짓는 모임이란 뜻으로 '시회(詩會)'라고도 부른다.
이 그림에서 조선 중기의 계회도를 떠올릴 수 있겠다.하지만 '계회'와 '아회' 모두 모임을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그 성격은 사뭇 다르다.우선 그림을 비교하여 가장 눈에 띄는 차이라면, 계회도 속 문인들이 다소 경직된 자세로 질서 있게 앉아 있는 반면,아회도 속 문인들은 자유로운 자세와 위치를 점하여 느긋하게 예술 행위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면, 계회 속 문인들은 관복을 입고 있으며 대개 개별 반상으로 음식 대접을 받고 있다면,아회도 속 문인들은 사복을 입고 있으며 모임을 위한 자그마한 상 하나에 술병이 올려져 있는 등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배경 산수도 다르게 표현되었다. 계회도의 산수가 정형적 틀로 그려져 그 표현이 간략해진 반면,아회도의 산수는 수려한 산수 배경이나 잘 꾸며진 정원을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다.
계회도가 16세기에 크게 성행하였다면, 아회도는 17~18세기 회화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18세기 후반에 많이 그려졌으며 19세기까지 이어졌다.

 

 

 

 

<백사회야유도(白社會野遊圖)>정수영, 1784년, 종이에 수묵담채, 31.3×41.7cm, 개인소장.
백발이 된 관료 문인들이 꽃동산에서 시회를 열어 자연을 완상하는 모습으로아회도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는 수작이다.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김홍도, 1791년, 종이에 수묵담채, 25.8×31.8cm,  개인소장.

 

야경의 산수 속 모임 장면이 그려진 수작으로 이 모임은 양반사대부와 신분을 달리하는

중인(中人) 신분의 문인이었던 인왕산 자락 천수경(天壽慶)의 집에서의 모임을 그린 것이다.

 

아회산수화는 모임의 체험과 모임이 개최된 실제 공간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주제는 이상적 아취(雅趣)를 표현하는 데로 치우쳐갔다.

아회도의 주인공들이 중인층으로 옮겨지면서 이러한 양상은 두드러졌고

 이는 곧 19세기 산수화로 이어지게 된다.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심사정, 1747년, 비단에 수묵, 153.8×60.8cm, 국립중앙박물관.

 

실경이 아닌 산수화들 중에 조선 후기에 새롭게 부상한 것으로 '시의도(詩意圖)'를 들 수 있다.

 유명한 시구를 회화로 표현한 그림으로 대개 당시(唐詩)를 옮긴 것이 많으며,

 화면 위에 그 시구를  적어 넣는 경우가 많다. 시의도는 화조, 산수, 인물 등 다양한 장르에서 그려졌다.

 

시의도 산수화 중 많은 그림이 기존의 산수화면에서 서정적 시구를 어울리게 얹는 경우가 많고,

혹은 중국의 문인과 문학을 표현한 것이 많아 조선 중기 이래 지속된 산수인물도류의 그림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매우 다른 성격의 그림이다.

 

예컨데 조선 중기의 산수인물도들이 기려, 어부, 수면, 관폭 등 철리적 이상으로 완전무장된 은자의

고차원적 달관의 세계를 지향한다면, '시의도'에서는 시적(詩的)이고 서정적(抒情的)인 감상 혹은 세속에 얽힌

개인 정감도 표현하려 한다. 말하자면, 조선 중기의 산수인물도가 철리적 사유를 추구하였다면,

조선 후기의  시의도는 감상적 정감을 중요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철리적 사유가 보편적 당위성의 원리를 중요시 한다면,

감상적 정감의 표현은 개인적 경험을 기억시켜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큰 차이를 가진다.

 

심사정의 거작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는 남종문인화풍으로

산수 속의 시의(詩意)가 은근히 표현된 그림이다.

그림 위의 화제는 다음과 같다.

野徑 雲俱黑  / 들녘 길에 구름 검은데江船 火燭明 /강에 뜬 배 등불 밝구나.-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중에서.

 

 

 

 

 

 

 

 

<풍설야귀도(風雪野歸圖)>

최북,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66.3×42.9cm, 개인소장.

 

눈보라에 휜 나뭇가지 아래로 나그네가 동자를 데리고 걷고 있다.

상단으로, 당의 시인 유장경의逢雪宿芙蓉山(눈이 와 부용산에 머무노라)」중 마지막 시구가 적혀 있다.

 

一暮蒼山遠 / 해 저물고 푸른 산 저만치 먼데

天寒白屋貧 / 날 추워 머무는 초가는 가난하구나.

柴門聞犬吠 / 사립문 닫히고 개 짖는데

風雪夜歸人 / 눈보라 치는 밤을 돌아가는 나그네.

 

 

이 詩를 모른다면 그림 속에 그려진 개의 의미도 알기 어렵다.

그림 속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말이다. 그림과 시의 주제는 나그네에 대한 연민이다.

그림 속 나그네는 성현도 은자도 아니다. 인생의 외로움을 안고 지나가는 나그네,

즉 이것이 이 그림에 담긴 시의(詩意)인 것이다.

 

 

 

 

 

 

 

<동리채국(東籬採菊)>

정선,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2.7×59.7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이 그린 도연명(陶淵明)의 시의도로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꽃 꺾고, 무심결에 남산을 바라보노라'의 한 구절이 부채그림 위에 적혀 있다.

엄격히는 ‘동리채국하’라고 해야 시의도 자격이 부여되겠지만

도연명의 이 구절은 훨씬 이전부터 동리채국으로 코드화되어 있었다는 사실.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17.2×52cm, 간송미술관.

 

가던 길을 멈추고 새의 희작(戱作)을 바라보는 선비의 시선은 어떠한가.

화면 위의 시는 당나라 시인 빙의 시에 의거하여 이인문이 지어준 것으로

봄날 선비 마음에 이는 춘심(春心)이 시와 그림에 농농하게 흐른다.

 

千舌 / 아름다운 여인 꽃 아래서 끝없이 조잘대고

一雙 / 시인의 술 잔 앞에 황금 귤이 한 쌍이었지.

/ 베 짜는 금북이 버드나무 언덕을 누비며

/ 아지랑이 봄비 섞어 봄 강을 짜누나.

 

 

 


- 19세기 산수화 -


 

<삼부연도(三釜淵圖)>

《해악전신첩》에 수록, 정선, 1747년, 비단에 수묵담채, 24.2×31.4cm, 간송미술관.

 

18세기의 진경산수화 정서의 <삼부연>의 기이한 특성은 한 폭포에 3기의 못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3개의 솥 같다고 하여 삼부(三釜)이다. 이 3개의 못이 한 눈에 들어올리 없지만 그렇게 그린 것이다.

 

18세기 후반 강세황이 정선의 그림을 비평하고 김홍도의 사실적 표현을 칭송하면서 산수는 산수화로

그대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혹자는 진경산수화가 실제 경치보다 더 기이하게 그려졌다고

비아냥거렸지만 산수의 사실적 표현이란 분명히 미완성의 프로젝트였다.

 

18세기 후반 금강산 실경을 그렸던 최북도

"실제의 나무가 그림 속 나무를 닮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그림은 '변화하는 것'〔化〕이라 하였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있다. 18세기 이후로 진(眞)이란, 경험을 통한 실상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실학자 박지원과 박제가 등은 이러한 논의를 다음 단계로 진척시켰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고 외친 박지원의 말은 산수화가 산수를 비슷하게 그렸더라도 결코 산수가 아니라는

주장이며, 왜 굳이 산수와 닮게 그리려고 애쓰냐는 지적이었다. 산수가 진짜라면 산수화는 가짜일 수밖에 없다.

이는, 가와 진을 동일시하던 조선 초기의 언어 관습 속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발언이며, 진경산수화와 함께

진행된 오랜 담론들 속에서도 산수화를 산수에 대한 가짜로 까지 말한 경우는 없었다.

 

그렇다고 박지원이 산수화를 무시했던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는, '산수를 비슷하게 그린 산수화' 보다는

'함축적 회화 언어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산수화'가 더욱 훌룡하다고 생각했다.

박지원이 거듭 주장한 사의(寫意):뜻의 그림)의 산수화가 이것이다.

 

훗날 박제가는 산수와 산수화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거론한다.

실질적인 이득은 없지만 마음에 여유와 즐거움을 주기에 근본적으로는 삶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산수와 산수화는 공통적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산수란 감상 대상으로서의 산수경이다.

박제가의 이 말은 실제 산수경과 그려진 산수화의 차이가 공인된 다음에야 해볼 만한 말이 아닌가.

 

 

 

 

 

<소림모정(疏林茅亭)>

허련, 19세기, 종이에 수묵, 30×42.8cm, 개인소장.

 

19세기 산수화는 바로 위에 적시한 산수화 인식의 역사 위에서 시작되었다.

회화와 그 대상은 존재 양상 자체가 서로 다른 것임이 인지된 상태였다.

19세기 대표적 화가 중 한 사람인 우봉 조희룡의 시이다.

 

사람들 모두 실제 산(眞山)을 사랑하여도, 나는 홀로 그림 산(書山)에 들어가리라!

 

한 걸음 나아가 조희룡은 그림 안 물상 속에 오히려 내 마음이 있으니,

그림 속 물상이야말로 진(眞)이라는 역설적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정희를 수학했던 소치 허련의 산수화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거듭 찾아볼 수 있다.

 

경치〔境〕의 기괘함으로 논하자면 회화가 산수만 할 수 없지만,

필묵(筆墨)의 정묘함으로 논하자면 산수가 결코 회화만 할 수 없다.

.

 

이 글은, 사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동기창이 남긴 문구 그대로이다.

산수와 산수화는 각각 독립된 존재로 어깨를 겨루는 대등한 입장이며,

또한 '필묵의 정묘함'은 실제 산수에 없는 것이다 예술은 산수자연 보다 멋진 세계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필묵의 정묘함'이란, 말 그대로 붓과 먹으로 이루어진 조형세계의 매력이다.

 

 

 

 

 

 

 

<청변은거도(青卞隱居圖)>

왕몽, 원대, 14세기, 종이에 수묵, 140.6×42.2cm, 상해박물관.

<방왕몽청변산도> 右

동기창, 명대, 1617년, 종이에 수묵담채, 224.5×67.2cm, 미국 클리블랜드 뮤지엄.

 

 

 

'방'(倣)의 성행

'방'은 그 자체로 산수화 표현 기법의 오랜 역사를 탐구하는 작업이었다.

일부 화가들은 옛 그림ㅇ르 학습하며 충실한 모방에만 몰두하기도 하였지만,

창의적인 화가들은 전통을 이용한 창작으로 새로운 필묵의 미를 보여주는데 성공적이었다.

 

동기창의 방작 중에도 창의적 작품이 많았으며,

 원나라 문인화가 황몽(王蒙)을 방한 산수화는 그 자체로 놀랍도록 새로운 화면이었다.

이후 청나라 초기 화단을 주도했던 이른바 '개성파'로 분류되는 화가들도

남종문인화 방작의 오랜 훈련을 거쳐 자신의 개성을 찾아나간 경우이다.

 

조선 후기 방작의 성행에 공로가 큰 이들은 새로운 중국 서적을 먼저 접할 수 있었던 문인화가들이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반에 걸쳐 활동한  공재 윤두서는 뚜렷한 족적을 보인다.

새로 간행된 중국 판화집 화보를 습득하고 남종문인화풍의 산수화를 그려 선보인 것이다.

김정희가 공재를 일컬어 '학고(學古)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칭송한 것은 이와 연관된다.

 

18세기 많은 화가들이 남종문인화의 양식을 시도하였으나

 많은 경우 남종과 북종을 혼용하고 있었다.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강세황, 1761년경, 종이에 수묵담채, 27×26cm, 개인소장.
중국 회화에 관심이 깊었던 18세기 후반의 문인들은 남종화에 높은 가치를 두면서 방작에 박차를 가한다.박제가는 중국에서 숭앙되던 명대 오파 화가들이 조선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문제라 지적하였고,18세기 말에 활동한 강세황과 그 후의 자하 신위(申緯)는 중국 옛 대가에 대한 방작에 열성적이었다.
그 가운데 강세황이 그린 <미법산수도>는 방작에 대한 그들의 이해의 폭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미점(米點)이 거칠게 찍혀 있는 강세황의 산수화 한 편에 당시의 문인화가 허필(許佖)이 제발을 쓰길,"미씨네 부자〔米家夫子〕가 도망가다 넘어지느라 쉴 틈이 없겠구나"라 하였다. 여기서 '미씨네 부자'란북송의 미불과 그의 아들 남송의 미우인(米友仁)을 말한다. 두 부자는 '미점' 창안자로 유명하다.


 

 

 

 

<방대도(訪戴圖)>신위, 19세기, 17×27cm,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초, 신위가 많은 방작을 남긴 것은, 그가 강세황과 교분이 두터웠고 세기의 김정희에게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위는 강세황이 보여준 방작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발전시켜 19세기로 전달해준 인물이었다.신위는 또한 아들들에게 동기창의 산수화를 방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명, 청대 산수화의 방작에 열의를 보였다.그가 그린 <방대도>는 황공망과 미불〔黃 · 米〕에 대한 방작이었다.


 

 

 

<방예찬산수도(倣倪瓚山水圖)>

허련,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80.4×35cm, 개인소장.

 

요즘 사람들, 그림을 그리면 황공망(黃公望)으로 기틀을 삼고,

예찬(倪瓚)으로 쓸쓸한 운치를 참조하지요.

 

- 김정희, 「권돈인에게」『완당선생전집』권3 중에서

 

김정희 자신도 예찬의 '간결하고 예스러움' 〔간고(簡古〕과 황공망이 '깊고 윤택함' 〔침윤(沈潤〕을

높이 칭송하며 좋아하였다. 19세기 조선의 산수화에는 예찬과 황공망의 산수화풍이 유난히 선호 되었고

그들의 화풍을 대상으로 한 방작이 가장 많이 그려졌다. 예찬과 황공망은 오진, 왕몽과 함께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로 일컬어진다. 이들의 화풍은 '남종문인화풍'의 모범으로 간주되었다.

뜰 앞의 오동나무를 닦으라고 시킬 만큼 결벽증적 성품의 소유자였던 예찬은

그림예서도 티끌 없이 간결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용슬재도(容膝齋圖)>

원대, 1372년, 종이에 수묵, 74.7×35.5cm, 대북 고궁박물관.

 

용슬재는 '무릎〔膝〕만을 허용〔容〕할 만한 작은 집〔齋〕' 즉 세속의 물욕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인품의 공간이다. 그림 속 용슬재는 텅 비어 쓸쓸하고, 그 주변은 고요한 수면과 나무 몇 그루 뿐이다.

마른 측필(側筆)로 그은 칼칼한 필선은 절제와 담박이라는 미의식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용슬대도>의 산수경은 실제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찬의 마음 속에 떠오른 심상(心象)이었고,

이 그림이 보여주는 투명한 이미지는 탈속과 무욕의 상징으로 정착되었으며,

범접하기 힘든 정신적 경지로 추앙되었다.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전기,1849년, 종이에 수묵, 24.5×41.5cm, 국립중앙박물관.

 

고람 전기(

琦)의 <계산포무도> 역시 예찬을 방한 것이다.

속필(速筆)과 감필(減筆)로 독특한 분위기의 회화를 많이 그린 전기의 이 그림은

화가의 개성이 효과적으로 반영된 방작의 예에 들 것이다.

 

 

 

 

 

 

 

<방예운림죽수계정도(倣倪雲林瓚竹樹溪亭圖)>

허련,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1.2×26.3cm,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치는 김정희의 제자답게 예찬을 방한 작품을 무척 많이 그렸는데

이 작품 역시 예찬 화풍의 기본 요건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림 속 먼 산을 그린 사각형의 산석 표현은 절대준의 변형이다.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황공망, 원대, 1350년, 종이에 수묵, 33×636.9cm, 대북 고궁박물원.

 

황공망 또한 원말사대가로 명 청대에 높이 추승된 인물이다.

황공망 산수화의 양식적 특성은, 그의 저서 <천지석벽도(天地石壁圖)>에서 보이듯 색을 가하고 산을 쌓아가는 방식,

그리고 <부춘산거도>를 가득 채운 피마준, 그리고 산석에 아(丫)를 그려 넣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원래 입체적인 바위 표현을 강조하는 것으로 명청대 화가들은 바위 중앙에 '아'(丫)자를 그려 넣는 기이한 산석

형상의 공식으로 정착시켰다. 이것은 후대 화가들에 의하여 기하학적 형상의 참신한 묘미를 주는 선석 표현,

혹은 모방하기 좋은 단순한 표현으로 변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이미지황공망 천지석벽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천지석벽도(天池石壁圖)>

황공망, 원대, 1341년, 비단에 채색, 130.4×57.3cm, 북경고궁박물원.

 

 

예찬과 황공망 회화 양식은 문인화 양식으 대표격이었다.

김정희가 원나라 화가 〔元人〕를 방했다고 적어 넣은 산수도에는

피마준과 수척한 나무 등 가장 기본적이고 전형적인 예황의 필묵법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방작의 성행은 피할 수 없는 문제점을 수반하고 있었다.

방작이라는 작업은 그 자체로 옛 화풍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자칫 옛 그림을 베껴 그리는 작업으로 전락할 수 있는 취약점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방원인산수도>

김정희, 19세기, 종이에 수묵, 22.8×60cm, 개인소장.

 

동기창도 방작의 취약점을 몹시 우려하였던 것 같다.

그는 옛 대가에게서 배우되 자연을 관찰하고 창의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였으며,

옛 대가에게서 배우되 자연을 관찰하고 창의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였으며,

'옛 화가의 화풍을 방한다고 하며 간솔한 붓질을 하는 것이 혹 솜씨 없는 화가의 도피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19세기 초반의 김정희 역시 이 점을 논하며 적묵(寂默)과 채색(彩色)의 기법도 무시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러한 문제 발생은 당시 남종문인화의 산수화 양식 특히 예황의 화풍이 얼마나 인기를 누렸는지 반증한다.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부분)이인문,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43.8×856cm, 국립중앙박물관.
이인문은 남종 양식의 진경산수도 그렸지만 부벽준의 산수화를 유난히 즐겼던 화가였다.9미터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 그림 <강산무진도>에는 남종과 북종의 다양한 필묵법이 아울러 펼져진다.

 

 

 

 

 

 

 

<방이당촉잔도권>(부분)

심사정, 1768년, 종이에 수묵담채, 58×818cm, 간송미술관.

 

8미터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 그림인데 제발에서 남송의 화원화가 이당(李唐)을 방한 것이라 하였으며,

부벽준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남북종 혼용의 산수화 제작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남종문인화의 전초적 역할이라거나 남종문인화 양식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보는 것은 단편적 해석으로 그칠 수 있다.

심사정이나 이인문이 남겨준 열의 있는 실험들은 남북종론의 상남편북이 배타적으로 적용될 필요가 없었던

18세기 우리 산수화 문화 속에서 생산된 귀중한 수작들이었다.

 

 

 

 

 

<방심석전벽오청서도(倣沈石田 碧梧淸暑圖)>

강세황,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30.5×35.8cm, 개인소장.

 

명대 오파의 화가 심주의<벽오청사도>를 방작한 작품이다.

남종문인화풍이 시대 양식으로 부상하면서 동시에 요구된 것이

그림속의 '문인다운 기운(氣韻)', 이름하여 '사기(士期)' '서권기(書卷氣)'등이었다.

이는 청대와 우리나라 19세기에 공통적으로 제기되었던 회화적 담론이다.

 

'서권기(書卷氣)란 글과 책의 기운이니, 학식과 인격을 반영한 기운이며 사기(士氣)와도 통하는 개념이다.

굳이 구분 하자면 사기의 반대 개념이 화원화가의 '원기(院氣)였다면, 서권기의 반대 개념은

 세속적인 '시기(市氣)' 혹은 '속기(俗忌)'였기에 후자는 정신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사기와 서권기 등의 주장이 청대에 크게 부상한 것은

아마도 세속성이 횡행했던 당시의 문화 양상에 대한 저항 현상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렇다면 서권기라는 것을 그림에 어떻게 그려 넣었으며,

감상자는 어떻게 서권기를 확인할 수 있었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일은, 서권기를 주장하고 표현하려 한 19세기의 화가들이

어떠한 산수화를 그렸는지 살핌으로써 그들이 서권기를 어떻게 구체화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서권기와 대비되는 의미를 지닌 말이 '속기'였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19세기 회화에서 보여주려고 한

정신세계, 세속과 차원을 달리하는 탈속의 경지, 혹은 그러한 탈속의 정신을 화면으로 보여주려 한

19세기 산수화의 시도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세한도(歲寒圖)>

김정희, 1844년, 종이에 수묵, 23×69.2cm, 개인소장.

 

19세기 미학으로 대표되는 김정희의 선언 '문자향(文字香)', '문자기(文字氣)'가 이 작품에 구체화 된다.

김정히는 이인상 산수화의 산석 표현에 전서와 예서의 획이 사용된 것을 보고 이인상의 산수화에 '문자기'기가

있다고 칭송하였으며, 조희룡의 붓지리 그저 '그림'일 뿐일 때는 문자기가 부족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정희의 산수화들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의 산수화 대부분은 회화 작품이라 하기 어려울만큼

서예적 필선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본다. 그가 서예에 능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세한도>의 긴장미가 서예적 필선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겠다.

 

가옥의 형상은 뒤틀린 듯 비자연스럽고, 가옥 한 채와 나무 네 그루로 이루어진 내용은 너무 간솔하여 잘 그려진

산수화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무 윤곽선, 지붕과 창문 등을 그린 필선은 모두 고른 핌을 보여주는 서예적 필선이며

이들이 한결같이 갈필로 처리되어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걸작이 되었다. 살아 있는 한 가닥 솔가지 위로

완당(阮堂)의 글씨를 보면, 이 그림은 글씨를 쓰던 붓의 그 먹으로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김수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33.1×44cm, 간송미술관.
19세기 산수화에서 서예적 요소를 찾아보는 일은 곧 그들 산수화의 핵심을 이해하는 작업이 될 듯 하다.'이색화파(異色畵派)'라 불리는 일군의 화가들의 산수화도 이러한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대표적 화가로 꼽히는 김수철(金秀哲)의 경우, 묽은 먹선과 담담한 채색으로 창출한 맑은 수채화 분위기가 특징이다.이전의 수묵산수나 채색산수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이색'이라 부르고 있다.

 

 

 

 

 

<송하관수도(松下觀水圖)>

윤제홍,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82×42.5cm, 개인소장.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부분, 왼쪽 면)

조희룡,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06×45.6cm, 간송미술관.

 

19세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그림의 조형적 매력은 그림에 운용된 독특한 붓질이며

이는 그림의 매력에 결정적 공헌을 하고 있다. 힘을 넣었다 빼며 빠르게 휘두르는 초서(草書)의 붓질이다.

이러한 붓질은 그가 쓴 행초(行草)의 필체와 흡사하다.

 

조희룡 스스로 그림 그리던 붓으로 글을 썼고 글을 쓰던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하였다.

화면 속 필서의 율동을 통일감 있게 조절하였고, 문자 쓰는 그 방식으로 산수의 형상을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김정희의 핀잔이 조희룡 회화 전체에 대한 객관적 평가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희룡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

그는 스스로도 문자기의 중요성을 거듭 언급하였고 이를 회화로 표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

나름의 성공을 이루어내 화가였다. <매화서옥도>는 이를 증명하는 걸작이다.

 

 

 

 

 

 

<홍매대련(紅梅對聯)>

조희룡,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27.5×30.2cm, 개인소장.

 

<홍매대련> 역시 초서의 필치로 이루어진 회화 작품이다.

김정희의 작품이 서예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조희룡의 회화적 기량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김정희가 조희룡에 가했던 일종의 비판에서 우리가받아들일 것은, 19세기 초반 '문자기'의 발현이

회화 제작에서 공통적으로 추구된 덕목이자 평가의 잣대였다는 사실이다.

 

 

 

 

 

<불이선란(不二禪蘭)>

김정희, 19세기, 종이에 수묵, 30.6×55cm, 개인소장.

 

명대  말 동기창이 제시한 남종문인화의 "남종' 개념은 본디 불가(佛家)의 선종에서 이끌어낸 것이었다.

선종에서는 돈오(頓悟) 즉 깨어지듯 갑작스럽게 도달하는 깨달듬의 경지를 추구한다.

그 경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였고 교리에 실리지 않았다고 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한다. 동기창은 이를 회화 제작과 연관시킨 것이다.

오랜 필묵의 수련과 치밀한 채색의 공을 들여 완성하는 화원화가들의 창작에서는 선종적 경지가 불가능하고

인격과 학식이 충만한 문인들이 문득 그려낸 그림에 이러한 경지가 깃들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리하여 동기창은 불가에 교종과 선종이 있듯이 회화에 북종과 남종이 있다고 하였으며,

 잘 그린 남종문인화는 선종적 깨달음의 최고 경지와 통한다고 하였다.

선종적 깨달음에 대한 추구는 이미 명나라 문학론에서도 중시되던 내용이다.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선종적 추구가 이러한 중국의 취향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정확하게 서술하기란 어렵지만,

 19세기 중심 미학에서 선(禪)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신위나 김정희 그리고 선승(禪僧)이었던 초의(草衣)선사 등은 선과 예술의 지극한 경지를 주장하며

19세기의 문예를 이끌어간 인물들이다. 또한 김정희의 시문학을 연구한 여러 학자들이 한결같이

그의 예술관의 핵심이 '시(詩)와 선(禪)은 하나의 경지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임을 말하고 있다.

 

김정희의 걸작 <불이선란>은 유마거사가 말한 완전한 선의 경지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림 속의 난은 현실 공간에 피어난 난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 끝에 피어난 깨달음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서권기가 그렇듯이, 교리도도 표현할 수 없다는 선종적 깨달음을 산수화 화면으로 어떻게 그렸는지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거듭 밝히지만, 우리는 여기서 19세기 문인과 화가들이

어떠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스스로 선종적 경지를 표현했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김정희는 선(禪)이 불립문자라는 것을 반대하는 긴 글을 남겼는데,

그 취지는 문자로 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장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신의 난 그림 <불이선란>에서

'초서나 예서로 기이한 형상의 문자를 쓰는 방법'을 구체화하여 보여준데서  

'선'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고민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최북,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31×36.1cm, 개인소장.

 

최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당시 예술가들의 선종적 취향을 파악함으로써만 가능할 것 같다.

'아무도 없는 빈 산, 물 흐르고 꽃 피네'〔無人空山水流花開〕라는 소식의 글에서 취한 구절이다.

일찍이 동기창은 소식으로부터 선가(禪家)의 문학이 시작되었다고 하며 소식의 게송(偈頌)을 길게 소개한 바 있다.

 

최북은 무인공산의 지경을 미친 듯한 초서의 붓질 '광초희작(狂草戱作)으로 표현 하였다.

텅 빈 적막함과 순식간에 휘두른 듯한 붓질이 어울려 선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미지로 그려진 것이다.

호생관(毫生館)이 최북의 호라는 것은 익히 아는사실. 붓 호(毫) 날 생(生)으로 조합된 그의 호는

'붓으로 먹고 살다'로 풀이되면서 스스로 자신의 직업으식을 보여준 예로 평가되어왔다.

그러나 기실 '호생'이란 말은 원래 선가적 의미라는 사실.

 

 

중생(衆生)에는 배에서 자라 나오는 태생(胎生), 알에서 나오는 난생(卵生) 외에,

습생(濕生), 화생(化生) 등이 있다. 나는 보살의 도움으로 붓에서 나와 호생(毫生)이 되었으니,

대개 화가의 손끝에서 빛이 나고 붓을 잡을 때마다 보살이 하생하시리라.

 

- 동기창, 「제발」, 『용대집(容臺集)』권 6중에서

 

 

동기창의 이 글에서 '호생(生)이란 '붓에서 났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공간을 '화선실(畵禪室)이라 이름 지으며 선가적 명명으로 정신적 지향을 보여주려 했다.

동기창은 동시대 화가 정남우(丁南羽)에게 '호생관(毫生館)'이라고 새겨진 인장을 주었으며, 위 글은

정남우가 그린 <나한도(羅漢圖)>에 동기창이 적었던 글 중 일부이다.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이인상,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3.8×63.2cm, 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후반부터 유난스럽게 많이 그려졌던 송하산수도류(松下山水圖流).

이는 분명히 특별한 시대적 유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위는 이렇게 읊었다.

 

果否見松初終年 / 솔방울과 솔뿌리에 불성(佛性)은 없지만

松子松根無佛性 / 적막함이 한가지니, 곧 참선(參禪)이로다.

 

광정월송근게적도(光貞月松根憩寂圖)-신위(申緯)

 

이인상의 <송하관폭도>는 바위와 폭포를 배경으로 한 소나무의 초상화처럼 보인다.

오랜 세월을 굽어본 듯 소나무의 등걸은 늙은 용의 등껍질 같고 그 가지는 여러 번 굽어졌다.

 

 


 

<송하소향도(松下燒香圖)>

윤제홍, 19세기, 종이에 수묵, 28.5×43.1cm, 개인소장.

 

윤제홍은 신위에 의해 당대 으뜸의 화가로 인정받았으며, 이인상은 김정희에 의하여 높은 칭송을 들었다.

이 외에 앞 장에서 묽은 중봉의 이색화풍 산수화의 예로 제시하였던 김수철과 윤제홍의 작품들 모두가 송하산수도이다.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전기,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9.4×33.2cm, 국립중앙박물관.

 

산 가득 피어난 매화 이미지는 일찍이 소식이 읊은 '나부산 아래 매화 마을'〔羅浮山下梅花村〕에 그 출처를 둔다.

'매화가 활짝 핀 산'의 의미는 깨달음이 피어난 <불이선란>의 난처럼 선종적 경지의 표현이었다.

조희룡이 일찍이 글을 남기기를, '참선(參禪)을 통하여 불법(佛法)에 깊이 심취한 바가 있어

<만매서옥도(萬梅書屋圖)>를 그려 유최진에게 주었노라'고 하였다. 김정희와 조희룡 모두 매화 가득 핀 곳을 상상하며

시에서 거듭 읊기를, 향기로운 눈꽃 바다 즉 '향설해(香雪海)'라 하였는데, 그림을 통해 그 내면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숨막힐 듯 고요한 아름다움. 조희룡은 전기가 그린 '매화서옥도'에 대해서도 '향설해'라고 칭송하였다.

선가(禪家)의 예술에서 꽃은 깨달음의 상징이었고 혹은 헌화의 매개체로 중시되는 주제였다.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이인문, 1816년, 종이에 수묵담채, 97.8×54.2cm,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에 시도된 특별한 필묵법으로 지두화(指頭畵)가 있다.

붓과 달라 손에 바른 먹물은 금세 마르기에 지두화의 선은 짧게 끊어진다.

지두화의 효과는 부드러운 붓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둔탁한 힘으로 화가의 기운을 직접 전달해주는 매력이 있다.

 

지두화의 역사를 따지자면 매우 오래지만, 중국의 경우 18세기 청나라의 고기패(高其佩)가 지두 기법으로 그리고

그 의의를 주창한 대표적인 지두화가였다. 김정희와 허련이 모두 고기패의 지두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글을 남겼다.

정선, 심사정 등도 지두화를 시도한 바 있고, 18세기 말~19세기에 걸쳐 활동한 이인문이

지두화 작품들을 남긴 바 있지만, 널리 그려진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옥순봉도(玉荀峯圖)>

《지두산수화첩》에 수록, 윤제홍, 19세기, 종이에 수묵, 67×45.5cm, 삼성미술관 리움.

 

윤제홍과 허련 등은 지두화를 가장 잘 그린 화가였다.

19세기 지두화가 애호된 이유는 독특한 수묵 효과와 함께 정신적으로 선오(禪梧)가 깃든 그림이라고

이해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허련, 19세기, 종이에 수묵, 99.2×48.5cm, 개인소장.

 

허련의 지두화를 보고 김정희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 시는 지두화가 당시 어떠한 내면의 표현으로 이해되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爪迹螺紋是別傳 / 손톱 자국 소용돌이 지문, 이는 선(禪)의 교외별전 같은 것.

離奇譎詭自天然 / 뒤틀리고 기이하고 괴상스로움이 절로 천연스럽네.

若從畫裏參三昧 / 만약 그림을 통해 선가의 깊은 깨달음에 든다면,

卽取天龍一指禪 / 손가락 끝 선(禪)에서 천룡(天龍)을 취하리라.

 

- 김정희, 「소치 허련의 지두화에 붙이노라」 (題小癡指畫)

 

 

 

 

 

<단원도>(檀園圖)>

김홍도, 1784년, 종이에 수묵담채, 135×78.5cm, 개인소장.

 

여기서 잠시 19세기 문인 생활상의 변모 밎 19세기 회화 문화를 이끈 이들의 신분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이는 19세기에 표방된 고도의 정신적 지향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긴요하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경부터 한양을 중심으로 호사스런 도시 문화가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종의 사치풍조는

18세기 후반에 정조가 우려할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신위와 김정희가 남긴 편지 글 및 족자는

대개 각종 문양이 가득한 중국 종이에 적혀 전한다. 신위는 청에서 들여온 온갖 물건으로 집을 장식하였고,

 김정희의 글에는 중국 향을 피우고 중국 글을 감상했던 멋이 가득하다.

 

조선 후기 청대의 문인들이 추구한 탈속과 선오(禪梧)의 경지는 지극한 정신적 경지였지만,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상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경화사족의 문화를 탐미적(耽美的)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선오와 탈속의 경지에는 분명 탐미적 유희가 감돌고 있었다.

 

이에 가세한 문화 집단은 당시 경제력과 학식을 갖추고 성장한 중인(中人)들이었다.

중인 문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시회(詩會) 혹은 시사(詩社)를 만들었고,

보란듯이 그 모임을 그림으로 기록하였다.

 

김홍도의 <단원도>는 중인들의 모임이 담긴 그림이다.

'단원'에는 오동이 높이 서고 담벼락 위로 비파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학이 노닐고 사각 연못이 반듯하며

괴석이 소철과 어울려 장식되어 있다. 이상적으로 장식된 정원은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상을 잊은 듯 음악을 감상하는 이들도 있다.

 

금을 타는 이는 김홍도요, 부채를 든 이는 강희언(姜熙彦), 박자라도 맞추듯 흥겹게 몸을 젖힌 이는

창해옹(蒼海翁)이다. 그림 속 세 인물은 사대부문인들이 아니라 중인 계급의 예술인들이다.

중인들의 아취 넘치는 모임이 이상적 이미지로 표현되는 현상은

19세기 산수화가 보여주는 특징적 양상 중 하나이다.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이인문, 1820년, 종이에 수묵담채, 86.5×58cm, 국립중앙박물관.

 

누각 위 네 명 모두 중인 출신의 화가와 문인으로 그림 속 화제를 보자.

 

 늙은 소나무 몇 그루 흐르는 물이 그 사이로 들어가면,

 푸르고 상쾌하여 온 골짝에 바람 일고

높다란 다락에 아지랑이 아물아물.

책상에 기대어 두루마리 펴는 이는 이인문(李寅文)이요

손으로 그림 종이 잡고 굽어 보는 이는 임희지(林熙之)요

 거문고 두고 난간에 기댄 이는 김영면(金永冕)이요

 의자에 앉아 시를 길게 읊는 이는 서영수(徐潁叟)라네

이 네 사람은 저 옛날 죽림칠현(竹林七賢)에 견줄 만하도다

 

 

이 글의 서술 방식은 다름 아닌 북송새 서원아집도 발문의 서술 방식을 본받고 있다.

이들의 의복은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현자들의 그것인 듯하고, 이들이 앉은 붉은색 의자는

청나라 그림에서 옮겨 그린  듯하다. 실제로 당시에는 청나라에서 수입된 가구가 사용되었다.

당시 유입되어 있던 중국 화보(畵譜)들 중 남종산수화의 인물상으로 예시된

문인 복식과 동자상을 옮겨 조합한 이상적 이미지였다.

 

 

 

 

 

 

<호산루상월도(皓山樓觴月圖)>

유숙, 1870년, 종이에 수묵담채, 52.5×184.5cm, 간송미술관.

 

중인 이상적(李尙迪)의 누각 호산루에서의 모임을 그린 것이다.

중국 복식과 중국 동자상의 고풍스러움에 피마준으로 곱게 처리된 언덕과 문인화풍으로 그려진

묵죽과 소나무로 호산루의 고상한 모임을 이상화 하였다.

 

 

 

 

 

<청설연금도(聽雪聯唫圖)>

이용림, 1869년, 종이에 수묵담채, 28.3×42.5cm, 개인소장.

 

이상적의 아들 이용림(李用霖)이 남긴 <청설연금도>에도 중국 복식과 중국식 의자가 약속처럼 등장한다.

산과 언덕의 미점과 피마준, 가옥 주위의 두어 그루 나무와 소나무, 대나무 및

원경의 잡목 표현 등은 모두전형적인 남종문인화 기법이다.

이러한 산수경은 그들에게 탈속의 문인정신이 완전하게 재현된 만족스런 산수 이지지였을 것이다.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김홍도, 1778년, 비단에 수묵담채, 122.7×287.4cm, 국립중앙박물관.

 

 

 

 

 

 

 

 

<화훼대련>

김수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27.9×29.1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이래 문예이론으로 천진하게 느끼는 것을 귀하게 여긴 천기론(天機論),

마음 속 영감과 같은 차원을 중시한 성령론(性靈論) 등이 있었는데, 학문적으로 성장한 중인들은

이러한 이론들을 개성을 중시하는 이론으로 재해석하여 개성이 신분보다 중요하다는 논리를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중인 문화에 대한 해석은 아직 분분하다.

연구자들은 중인들의 계급의식을 찾으려 했고, 혹은 중인들이 양반사대부의 문화를 모방하는데 급급하여

독자적 계급 문화르 형성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중인들이 모방한 문인 문화가

진정한 문인 문화였는가 의문을 넘어서 있는 듯 보인다. 19세기 중인의 문홪거 역할 변화와 성장은

당시 사회구조가 이미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방황자구법산수도(倣黃子久法山水圖)>

장승업, 19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51.2×31cm, 삼성미술관 리움.

 

19세기 후반, 조선 화원(畵院)의 마지막 시기에 활동한 주요 산수화가를 꼽으라면

장승업(張承業)과 안건영(安建榮) 등이다. 황공망을 방한 위 그림은 수면 위 가옥 속 문인들의 한적한 담소와,

금(琴)을 든 동자를 데리고 유유히 다리를 건너는 문인의 느린 걸음, 피마준으로 그려낸 원경의 산,

문인화풍으로 그린 중경의 나무,  널찍한 수면 등 남종문인화풍의 요소가 착실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빈 초가 정자와 소요 하는 문인들의 한적함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 말려 올라간 거대한 산세로 인해

괴기스런 미감을 느끼게 된다. 옛 남종문인화의 기법들이 과장되어 재해석된 경우다.

이렇듯 기이한 산수 형상이 옛 대가의 기법으로 인정되고

장승업은 이를 익혀 그의 개성과 역향을 화면에 발휘하였다.

 

 

 

 

 

<춘경산수도>

안건영, 19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33×30.5cm, 개인소장.

 

피마준과 미점 등 남종화풍의 기본 기법들이 착실하게 운용된 작은 화폭이다.

선종적 깨달음을 추구한 문인정신의 문인화풍, 하염없이 꼼꼼하고 성실한 화원화가의 솜씨,

그리고 필묵의 미를 끝없이 추구하는 시대의 미감이 만나면서 산수화의 화면은 매우 기이해졌다.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

장승업, 19세기, 비단에 채색, 143×69cm, 국립중앙박물관.

 

장승업은 남종화법을 착실히 익혔고 황공망, 미불, 왕몽 등 대표적 남종문인화가들에 대한 방작을

여러 번 그렸던 남종문인화가였다. 현존하는 많은 그림들 중에는 청대의 화보를 그대로 옮겨 그린 것도 적지 않지만

그는 기량이 넘치는 치밀한 붓질로 이 모두를 자신의 작품으로 마무리 했다.

장승업은 완성도 높은 거작들을 무수히 남긴 성실한 화가였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장승업의 그림 속에 남종산수화의'기법'만이 남고 '문기'는 빠졌다고 말한다.

 그의 붓질에 화원의 기량이 넘쳐 아마추어다운 서툰 붓질이나 화면의 여백 처리가 없다는 일까?

 

19세기에 정착된 남종문인화의 산수 양식과 이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하나의 관습이 되어 있었고,

그대로 20세기 전통산수화라는 제한된 영역으로 전달되었다.

 허련의 산수화를 계승한 20세기 호남 지역 산수화가들의 역할도 같은 경우이다. 20세기 전통이 단절되는 시기라고

말해지듯이 지필묵으로 그리는 회화는 회화사의 중심부에서 슬슬 밀려나는 운을 맞이하고 있었다.

 

'산수', 오랫동안 지고의 가치관으로 인정되어온 이 자연 대상은 그 자체로 배울 만하고 숭상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산수관은 18세기 이후로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 나아가 18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산수화는 자연 산수에서 훌쩍 벗어나 필묵의 기교로 표현되기 시작하였고, 이는 19세기 내내 더욱 성행하였다.

장승업의 산수화는 그러한 필묵 기교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남종문인화의 산수 이미지는

당시 문인들이 아취를 구하는 탐미적 고상함이 표현된 것이었고, 이러한 산수관의 근본적 변화는

산수화라는 예술 장르의 높은 자리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장승업이 그린 <삼인문년도>는 두 폭이 전하고 있는데 산수 표현의 세속화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신선들의 나이 자랑을 주제로 한 이 그림들은 모두 신선경을 표현하는 기이한 산수 표현으로 가득하다.

산수 이미지에 빌어 담은 세속적 기원의 산수화 및 산수관의 거대한 변화에 대해서는

이어 민화산수화를 감상하면서 다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 민화산수도-

 

 

<단발령망금강산>

이인문,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26.2×56cm, 삼성미술관 리움.

 

대개의 민화들이 그렇듯이 민화산수도 또한 인반 산수화와 근접하게 그려진 것이 있는가 하면

일반 산수화에서는 꿈조차 꾸기 어려운 민화 특유의 표현법으로 그려진 경우도 많다.

이 그림은 제목 뿐만이 아니라 화면의 구도가 모두 정선에서 비롯된 단발령도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산수그림>

19세기, 비단에 수묵, 61×37cm, 개인소장.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을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없고 또한 뛰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단발령도의 전통을 잘 포착하면서 나름의 표현법을 시도한 재치 있는 화가였음에 틀림 없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층층으로 줄지어 세우고 아득한 운무를 가로띠 모양으로 두룬 방식이

다소 조악해 보이지만 운무 가운데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들은 높은 바위산의 명성을 보여 주고 있다.

 

 

 

 

<금강산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126×56cm, 삼성미술관 리움.

 

금강산 봉우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열 맞추어 서 있는 이 그림은 분명 '금강전도'를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에는 갓을 쓴 구경꾼들이 산수에 취한 듯 흥겨운 몸짓으로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이동 중이다.

헤아려 보면 스무 남짓이나 된다. 봉우리의 특징은 강조되거나 과장되어 있고

봉우리 위에는 명소의 이름들이 적혀 있다.

 

 

 

 

 

 

<총석정도>

19세기, 비단에 채색, 개인소장.

 

물에는 동해수요,

돌에는 총석이라.

폭포에는 구룡폭이요,

돌에는 총석이라.

 

- 구강(具康) 「총석가」(1820년 작)중에서

 

총석정 바위는 18세기 정선이나 김홍도도 거듭 그렸던 명승지이다.

그런데 전하는 민화 총석정도들은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면 그 모습이 제각각이라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실경을 못 보고 그려서일까 아니면 특징을 표현하려는 의도적 변형이었을까?

그 정확한 의도는 알기 어렵다.

 

 

 

 

 

<통천 총석정>(왼쪽)

19세기, 종이에 채색, 74×32.5cm, 개인소장.

<통천 총석정(오른쪽)

19세기, 비단에 채색, 개인소장.

 

 

 

 

 

<관동팔경 중 경포대>

19세기, 종이에 채색, 61×41cm, 개인소장.

 

화면 중앙의 동그란 조각물이 경포대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삼십 리 경호물이 면경(面鏡)같이 둥그렇고"라는 「관동장유가」의 노랫말이 떠오른다.

아마도 이런 변형된 이미지들이 당시에는 즐겁게 기대되고 소통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금강산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72×42cm, 개인소장.

 

18세기 후반 제주 여성 한 명이 금강산에 올랐던 일은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김만덕(金萬德)이란 이 여성은 애써 모은 재산 오백석으로 굶주리던 제주 백성을 구했다.

이 사실을 들은 정조가 그를 불러 칭찬하고 소원을 물었더니, 쉰 살이 넘은 그녀는'금강산 구경'이라고 답하였다.

이 정도의 공덕과 배포, 그리고 특별한 은총이 아니라면 여성은 금강산에 오를 수 없었다.

 

 

 

 

 

<금강산도 중 여성 등반>(왼쪽)

<금강산도 중 남성 추락 부분>(오른쪽)

 

19세기 들어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김금원(金錦圓)이라는 강원도 처녀는 남성 의복으로 여성을 감추고서야 금강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녀는 금강산에 오른 감흥을 시로 남겼다.

'하늘과 산이 커도 내 한 가슴에 담을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구나.'

 

여기 소개하는 금강산 병풍 중 한 폭을 보면, 여성이 금강산에 오르고 있다.

치마 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고 머리를 올린 여인들이 동아줄을 붙들고 산의 정상에 거의 다다른 장면이다.

깎아지른 듯 높은 봉우리를 화면의 상단에 두어 그것이 아주 높은 정상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비로봉이 분명하다.

 

저 아래 남성이 굴러 떨어지고 있다.

이 고개는 단발령이거나 아니면 금강산의 바위산에 들기 이전의 공간이다.

즉 산에 이르기도 전에 속절없이 굴러 떨어지는 이는 남성이다. 권위의 상징인 갓도 벗겨졌다.

누구의 요청에 의한 이런 그림이 그려졌는지 알 수 없지만, 남성을 낙하시키는 이 그림 앞에서

그 당시 여성들의 노랫소리가 쟁쟁하게 울린다.

 

 

가소롭다 가소롭다 인간만세 가소롭다.

호걸 남자 되었다면 경화시체 본을 받아 좋은 의복 차려입고

금수강산 구경하고 그래도 못하오면

꽃이라도 구경하고 구경하며 다니겠네.

 

 

- 「화전라가」(규방가사) 중에서.

 

 

 

 

 

 

<고산구곡도>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57×47.1cm, 선문대학교박물관.

 

구도가 몹시 괴이하지만, 금강산을 화면에 구현하던 수묵산수의 기본 틀이 

민화에서 단순화되고 과장된 양상을 살필 수 있다.

민화 실경산수화는 우리 실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바람을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다른 민화들에 비할 때 한국적 정감이 잘 드러난다.

 

 

 

 

 

<청화백자산수매죽문항아리>

18세기, 높이 37.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상팔경 가운데, 한쪽면에는 동정추월(왼쪽), 다른 한쪽 면에는 산시청람(오른쪽)이 묘사되어 있다.

여러 예로 볼 때, 조선 후기에는 소상팔경도가 문화적 소양을 보여주는 장식품 혹은 소도구로

 널리 사용되었거나 적어도 그러한 사용이 멋스런 일상으로 기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상아우>

《소상팔경》8폭 중 1폭, 19세기, 종이에 채색, 134×27.5cm,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상팔경'이란 시에서 그림으로 전환되는 상상의 공간이었다.

고려의 궁중고 조선의 왕실에서 시작되어 섬세한 한시와 수묵회화로 표현된 소상팔경의 상상은

사대부들에게로 번져나가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 중기의 문인 이후백(李後白)이 우리말로 읊은

소상팔경 시조를 통해 우리 문인의 정서 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소상팔경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아미산에 반달 뜬 가을 적벽강변 무한한 경치를

소동파와 이백 시인 못다 놀고 남은 뜻은

후세에 나같은 호걸이 다시 놀게 함이로다.

아이야, 술집이 어디뇨, 옷 저당 잡히고 술 사오리라.

(蛾眉山月半輪秋와 赤壁江上無限景을 蘇東坡李謫仙이 못다 놀고 남은 뜻은

後世에 나 같은 豪傑이 다시 놀게 함이로다 아이야 酒家何處오 典衣沽酒하오리다).

 

- 이후백 「소상팔경」중에서.

 

이후백은 이 시조에서 이백의 시와 소식의 「전적벽부」구절들을 끌어오는 현학적 면모도 보여주었지만,

술 사오라는 풍류로 너스레를 떨었다. 이러한 변화가 조선 후기로 전달되어 소상팔경을 우리말로 노해하는

일종의 희작(戱作)이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희작이라 하여도 소상팔경의 품격은 유지되었지만,

어느덧 소상팔경은 우리말 판소리 속 단가(短歌)나 가사에 걸핏하면 등장하는 산수 공간이 되어갔다.

 

 

산악(山岳)이 잠형(潛形)하고 음풍(陰風)이 노호(怒號)하야 수변(水邊)의 듯난 소래

천병만마(千兵萬馬) 셔로 마자 철기도창(鐵騎刀槍)이엇는 듯 첨하끝에 급한 형세

백척폭포(百尺瀑布) 쏘와잇고, 대숩풀 흐뿌릴 재 황영(皇英)의 깊은 한(恨)을

엽엽히 하소나니, '소상야우(瀟湘夜雨)라 하는데요.

 

- 잡가 「소상팔경」중에서.

 

소상팔경 중 '소상강의 밤비'(소상야우)를 노래한 19세기 잡가(雜歌) 중 일부이다.

여말선초 한시로 읊어지던 맑고 섬세한 분위기도 아니요, 이후백의 시조가 보여준 현학적 풍류도 아니다.

'음풍노호', '천병만마', '백척폭포' 등 웅장한 단어들이 열거되어 보통 산수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니, 시적 함축미가 전혀 없고 몹시 투박하다.

 

 

 

 

 

<민화 소상팔경도>

《소상팔경》8폭 병풍 중 1폭, 19세기, 종이에 채색, 72×44.5cm, 개인소장.

 

원래 소상팔경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거대한 언덕과 폭포수가 화면 좌측을 차지하고 있다.

이 폭포는 삼천척(三千尺)의 폭포를 그린 것이다. 화면 위에 적혀 있는 제발은 이백의 여산폭포(廬山瀑布)이다.

상사의 만족이 가사와 그림에 모두 끼어들었다. 산수 형태와 경물간의 비례가 모두 엉성하고 필선은 몹시 둔탁하여,

앞에서 일은 세련되지 못한 시어들의 투박함과 다를 바 없다.

화면 중가 외따로 멀리 있는 마을로 보아 '산시청람'(山市晴嵐)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민화 소상팔경도>

《소상팔경》8폭 병풍 중 1폭, 19세기, 종이에 채색, 72×44.5cm, 개인소장.

 

위와 같은 병풍에 그려진 그림으로 '원포귀범(源浦歸帆)을 그린 듯 하다.

멀리서 오는 배와 맞이하는 하람들, 크고 둥근 술 단지, 술상, 손을 들어 배를 맞는 인물들의 모습이

 더없이 정겹다. 소상팔경도에 휘영청 늘어진 소나무들이 가득한 것은 또한 얼마나 커다란 변형인가.

마치 소상팔경이 아니라, 관동팔경의 한 장면인 듯하다. 소상팔경은 저 먼 중국의 실제경이 아니라

조서 후기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내면의 이미지, 조선의 소상팔경이었다.

 

 

 

 

       

 

<산시청람>

《소상팔경》8폭 병풍 중 1폭, 19세기, 비단에 채색, 116×44.5cm, 개인소장.

 

소상팔경이라는 소재로 펼쳐진 상상과 소망의 산수 이미지는 끝이 없었다.

이 그림을 보면 커다란 동물이  성큼성큼 내딛고 들어온다. 이 동물은 청나라 (태평유상도>에 기원을 두고,

동시에 조선의 오래된 전설 속의 동물 '불가살이'의 이름을 얻은 실로 기이한 조선 후기 동물상이었다.

화면 아랫부분에는 매화나무가 있고 꽃이 활짝 피었다.

 매향과 영수의 영험함이 어우러진 산시청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상상의 낙원이다.

 

 

 

 

 

    

 

<평사낙안>

《소상팔경》8폭 병풍 중 1폭, 19세기, 종이에 채색, 134×27.5cm,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상팔경과 금강산도가 섞인 듯한 산수화도 있다.

평사낙안의 기러기가 줄지어 날고, '총석정'의 기이한 바위가 늘어서 있으며,

화면 중간의 괴석과 꽃송이 같은 장식은 괴석과 소철이라는 정원의 소품이 변형된 듯 하다.

소사팔경을 결정지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

 예컨데 평사낙안의 기러기, 동정추월의 달구경, 소상야우의 비바람,

전반적인 물 풍경 위주의 산수 모습은 더욱 정착되고 확대되었지만,

그 나머지 부분들은 다른 전통회화에 대한 기억,

 그리고 소상팔경에 대한 기대와 상상으로 새롭게 탄생되었다.

 

 

 

 

 

 

 

<소상팔경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56×36cm, 국립민속박물관.

 

 

 

 

 

<일월오봉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90.5×270.5cm, 삼성미술관 리움.

 

민화산수도에는 한국가 중국의 산수경 외에,

특별한 의미를 담은 기호(記號)들로 조합된 산수 이미지도 많았다.

그 내용은 한결같이 복된 삶을 살도록 인도해주는 덕목이었다. 잘 알려진 것이 <日月五峰圖>이다.

임금의 어좌 뒤에 둘러쳐졌던 그림으로 일월과 오봉이 주를 이루고, 폭포수와 출렁이는 동해 물결,

불고 굵은 가지를 뻗은 소나무가 그려진 화면이다.

 

그림의 물상(物像)들은 중국의 고전 『시경(詩經)』중 신하가 임금의 향연에 보답해 올린 시,

'천보(天保)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천보'는 군왕의 덕망이 높으시니

하늘로부터 다복(多福)을 받으시라는 축원 내용이다.

 

 

 

 

 

 

 

天保定爾 / 하늘이 그대를 편하도록 지키시고

以莫不興 / 고로써 흥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如山如阜 / 산 같고 언덕 같고

如岡如陵 / 등성이 같고 능 같고

如川之方至 / 내가 흘러 이르는 것과 같아,

以莫不增 / 이에 더할 것이 없습니다(중략).

如月之 / 달이 차오르는 것 같고

如日之升 / 해가 오르는 것 같고

如南山之壽  / 남산이 장수하는 것 같아

不騫不崩 / 이지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如松栢之茂  / 송백이 무성한 것 같아,

無不爾 / 그대를 받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 시에서 언급되는 하늘, 산, 언덕, 내, 그리고 해와 달, 산, 송백 등이 모두 <일월오봉도>에 등장한다.

여기에 땅의 존엄을 상징하는 오악(五岳)이 함께 조합되었다. 지고의 존귀함과 연원한 번영을 축원하는

이 그림은 원래 궁전의 왕과 왕비를 위한 그림이었지만,

19세기에는 한양의 광통교 아래에서도 널리 팔릴 만큼 시중에 유행하였다.

 

<일월오봉도>의 산수 이미지는 영험의 상징으로 인식된 자연물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

둥근 해와 둥근 달이 함께 떠 있는 화면은 분명 비현실적이지만, 정확한 구도와 완전한 기하학적 형태.

그리고 선명하고 대조적인 원색의 조화에서 느껴지는 견고함은 국왕과 국가에 대한 하늘의 축복이

확고하게 지속되리라는 굳은 믿음과 틀림없는 약속을 뜻하는 듯하다.

 

 

 

 

 

<십장생도>

19세기, 비단에 채색, 151×370.7cm, 삼성미술관 리움.

 

축복의 상징이 담긴 민화산수도로 또한 잘 알려진 것이 '십장생(十長生)'의 일부가

다양한 양상으로 그려진 산수화들이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그려진 것이 기록으로 전하지만

일반에 범람하듯 그려진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십장생이란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상징하는 해 · 산 · 물  · 돌  · 구름  · 소나무 ·  불로초 · 학  ·거북  ·

사슴 등 열 가지이며 여기에 복숭아나무나 대나무 등이 첨가되기도 한다.

 

 

 

 

 

 

 

 

 

 

<십장생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개인소장.

 

운무 자욱한 소나무 언덕에 사슴이 노닐고 있다.

사슴 중 수컷은 불로초를 입에 물었고, 그 곁의 거북은 정기를 내뿜고 있다.

사슴은 불행과 질병을 막아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슴 록(鹿) 자는 벼슬 록(祿)과 발음이 같았으니,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모두 충족시켜주었다. 거북은 물의 신(河神)으로 물살을 헤치고 나오며 입에서 정기(精氣)를

내뿜는다. 모두가 십장생에 포함된 것들이다. 곧 이 그림은 산수의 이미지를 내세운 불로장수의 기호들이다.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

《극락도》4폭 중 1폭, 19세기, 종이에 채색, 93.2×25.4cm, 국립민속박물관.

 

버드나무 늘어진 옆으로 모란이 탐스럽고 위로는 새가 날고 아래로는 바둑 두는 노인들이 앉았다.

'상산사호'라 적혀 있다. 산수는 둥근 선과 각진 선으로 배경의 빈 면을 메우는 형식이다.

상산사호 주변의 소나무 그늘에는 솔빛이 청정하고 바둑판 앞 술병은 신선의 술 감로주(甘露酒)인 듯하다.

버드나무는 도연명이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서 스승 오류의 문 앞에 심어져 있었다고 한 버드나무이다.

 

 

 

 

 

 

<어촌산수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102×37cm, 개인소장.

 

부적과 민화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볼 수 있는 민화산수도이다.

그림 왼편에 해산(海山)의 그림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되,

그가 그렸다는 민화가 많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특정한 한 명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푸른 가지가 분수처럼 뻗어내려 집을 감싸 덮고, 첩첩 산의 풍경이 뒤로 펼쳐진 데 노송 두그루가

춤을 추듯 우뚝 서서, 시 읊조리며 앉은 두 노인의 장수를 기원해주고 있다.

이들에게 방문하듯 다가가는 것은 귀를 쫑긋이 세운 마신(馬神)이다.

 

 

 

 

 

 

 

<악도(樂圖)>

19세기, 종이에 채색, 32×54cm, 개인소장.

 

이러한 말의 모습은 <약도(樂圖)>라는 민화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마신으로 등장하는 말들은 민화에서나 부적에서 귀가 당나귀처럼 길게 위로 솟은 것이 특징이다.

마신의 위력은 매우 크다. 자유자재하는 여의주(如意珠)를 담당하는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이 마신이 되어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마신이 인간살이를 풍족하게 해준다고 믿었다.

민화산수도 속의 마신은 부적 같은 위력이 담긴 존재였다.

 

 

 

<산수문자도 예>

《문자도》8폭 중 1폭, 19세기, 장지에 채색, 개인소장.

 

문자도(文字圖)란 문자를 회화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기서의 문자는 대개 한자(漢字)이다.

그중에서도 도덕적 덕목의 효제(孝悌)류, 기복의 내용인 수복(壽福)류 글자였다.

문자도는 도덕과 기복의 상징 물상을 엮어서 문자의 형태로 만들기도 하고,

 큼직하게 만든 문자 형상 위에 상징 물상들을 끼워 넣기도 한다.

 

문자 속에 들어가는 상징물들은 기러기 · 잉어 · 새우 · 소나무 등 모두 산수 속 경물이지만

일반적으로 산수로부터 분리해서 개별화하여 사용하기에, 문자도에서도 산수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문자도 속 산수는 다른 물상들에 비할 때 특별한 상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에도 산수 위에 문자를 얹어 그린 '산수문자도'가 있는가 하면 산수로만 채워진 문자도 있다.

 

 

무론 남녀노소하고 행실을 배웠으라

효제충신(孝悌忠信) 예의염치(禮義廉恥)

일신(一身)에 근본 삼고

각각 맡은 소업들을 부지런히 배울적에

사나이 자식들은 밖에서 그르치되

글할 놈 글 읽히고, 활 쏠 쏘이고

과업(科業)을 힘써 하면

입신양명(立身揚名) 하리로다(중략)

비록 빈천할지라도

오륜(五倫)을 밝히시면 자손이 대창하리라.

 

 

18세기 인물 곽시징(郭始徵)이 지은 가사이다.

'효제충신예의염치' 등의 도덕적 행실을 몸에 익힐 것을 권장하는 내용이다.

효제에 대한 강조는 19세기 향촌사회로 매우 강력하게 번져나갔다.

 

산수도가 삽입된 <예>(禮)자 문자도는 문자 속에 산수도가 들어 있는 경우이다.

<산수문자도> 한 폭을 보면, 화면의 아랫부분은 '孝'자이고 윗 부분은 산수이다.

조선 후기 사람들이라면 거의가 알고 있었을 효의 상징물들

 부채, 금(琴), 죽순, 잉어 등이 그림 속 '孝'자를 구성하고 있다.

 

'효'를 특히 강조하는 효제문자도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반도에서 유난스레 유행하였던 것은

조선 사회의 특이성을 말해준다. 이러한 문자도 속 기호들이 산수화 아래 부가되어, 문자산수도는

도덕적 덕목을 권장하고 나아가 평생과 후생의 번창을 축원하는 그림이 되었다.

 

 

 

 

 

 

<산수문자도>

18세기, 종이에 채색, 74.2×42.2cm, 삼성미술관 리움.

 

복을 구하는 기호들은 물상으로 표현되어 민화산수화를 다양하게 구성하였다.

일월오봉과 십장생, 극락과 천상, 부적으 기호와 그림, 문자가 조합된 산수 이미지들은

모두가 조선 후기에 새롭게 풍미한 산수 이미지였다.

 흥미로운 점은, 그림의 주제가 산수 유람이든 현세적 소망이든 상관없이

그것들이 산수 이미지로 그려졌을 때 기대되는 효과이다.

 

다른 민화에 비해 민화산수도가 좀 더 품위 있게 보였다면,

그래서 방을 장식하기에 좀 더 손색 없이 보였다면, 민화산수도는 이 기대를 만족시켜준 것이다.

그것은 오랜 전통 속에 지워지지 않는 '산수'의 지고한 가치, '산수'를 보임으로써

상해질 수 있다는 산수 이데올로기가 민화에도 작용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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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초, 마치 두더지 처럼 방에 틀어박혀 위 내용이 수록된 그림 감상과 함께,

 마치 내가 책의 저술자라도 되는 양 자판에 두드리는 수고를 자청해 보았다.

 

단순히 책 한 권 읽은 게 아니라,  내용에 관계된 이런 저런 자료 탐독에 이르기까지.

좌우당간, 옛 그림에 푹 빠져 호접몽 비수무리의 지경을  헤맸다는 야그.

 

오로지 '필묵의 정신사'에 개안의 큰 기쁨을 주신 저자께

이 고마움의 사은을 몽땅...

 

 

 

참고서적  /  고현희 著 《조선시대 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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