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틀체 첸치의 초상>
엘리자베타 시라니, 캔버스 유화,64.5×49cm, 1662년경.
저 유명한 '스탕달의 신드롬'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예술품을 감상하다 극도의 흥분이나, 호흡 곤란, 우울, 현기증, 전신마비 등의 증세를 말 하는 것.
<모나리자>, <진주귀걸이 소녀>,와 함께 세계 3대 미녀 그림 중 하나로 통한다.
<도스토에프스키의 초상>
바실리 페로프, 1872, 프레티아코프 미술관.
고독과 상념에 잠긴 표정에서
심리 묘사와 의식 분석에 탁월했던 대 문호의 문학과 삶이 조명된다.
<소녀와 복숭아>
V.세로프, 캔버스 유화, 91×85, 1887.
당대 최고 예술 후원가였던 사바 마몬토프의 딸 베라 마몬토바의 모습이다.
당시 스룰 두 살의 세로프가 소녀의 모습을 참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곡가 무소르그스키의 초상>
일라 레핀, 1881,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알콜 중독과 잦은 발작 등, 헤체되어 가는 육신의 행색이 생생하게 읽혀진다.
러시아 국민음악파의 거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무소르그스키의 예술혼이 느껴지는 초상이다.
<가을 꽃다발>
L.레핀, 캔버스 유화, 111×65, 1892.
가을 들판을 배경으로 딸 베라를 그린 것으로,
아련한 가을 정취를 멀리 배치하여 베라의 초상을 한껏 강조한 애정 만점의 작품이다.
<안톤 루빈스타인의 초상>
릴라 레핀, 1887, 러시아 미술관.
보면대를 앞에 두고 냉철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휘봉을 휘두르는 모습.
군더더기 없는 음악가의 정신세게를 잘 드러낸 표현과 구성의 통찰력이 일품이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그의 유모의 초상>
레온 바크스트, 1906년, 러시아 미술관.
발레 연출가로 러시아 발레의 진가를 널리 알린 인물.
늙고 초라한 유모와의 극단적 대비에서 귀족층의 당시 사회상이 잘 드러난다.
<마슬레니차>
B.쿠스토디에프, 캔버스 유화, 71×98.1, 1919년.
러시아인들의 봄맞이 축제를 그린 것.
봄날 눈녹은 물이 범람한 강변의 고요함에서 조용함과 평온함이 느껴진다.
<경작지에서 봄>
A.베네치아노프, 65.5×51.2, 1820년대 초반.
말을 끄는 여인이 말보다 더 크게 묘사된 일종의 러시아 풍속화.
호밀밭을 거니는 사람 들. 들판 보다 더 큰 배경이 된 하늘의 구도.전체적으로 여름날의 정취가 가득 담긴 모습이다.
<황금빛 가을>
N,레비탄, 캔버스 오일, 87×126, 1895.
자작나무 잎새의 황금빛 컬러, 뭉개구름 피어 오른 하늘.
짧은 가을 컬러에서 풍요로움과 활력이 넘치는 가을의 모습을 본다.
공허한 시선과 애처로운 자세의 소녀.
그림 속 주인공은 문학 소재로 재 탄생하는 모양이다.
<나리의 권리>
V.폴레노프, 캔버스 유화, 120×174, 1874.
세 농노 처녀를 데리고 와서 나리에게 선보이는 장면이다.
당시 농노 처녀들의 초야권을 갖고 있던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농노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비극의 시절이었다.
<경작하는 사람>
L.레핀, 종이 유화, 27.8×40.3, 1887.
<차를 마시는 상인의 아내>
B.스토디예프, 캔버스 유화, 120×121,1918
풍만한 원색적 아름다움이 화폭에 가득하다.
작가는 자신이 그린 풍만한 부인들을 "미의 민중적 이상형"이라 생각했다고.
이 그림의 주인공은 G. 아델카스라는 인텔리 여성이었다고 한다.
<회오리>
F.말랴빈, 캔버스 유화, 223×410, 1906.
붉은빛으로 가득찬 대작인지라 그림의 주제를 혁명과 관련짓기도 했던 모양.
탄력이 붙은 춤사위에 몸을 밭겨버린 농부들에게서 강한 생명력과 삶의 환희가 느껴진다.
<어린 과부>
P.페도토프, 캔버스 유화, 62×47, 1851~1852.
러시아에선 임신한 상태를 '흥미로운 상태에 있다'라고 한다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청순함이 보는이의 마음을 애처롭게 한다.
나이든 소령과 상인 집안 처녀의 중매를 주선하는 내용이다.
고가의 그림들, 화려한 샹들이에, 값비싼 벽지, 은촛대에 타오르는 촛불들.
주인의 재력을 엿보게 하는데, 문 밖 신랑 후보는 별로 못마땅한 자세와 표정이다.
페도토프는 이 그림에서 상인 집안의 허영심과 소령의 탐욕을 빗대고 있는 것이다.
<지참금 목록>
V.푸카레프, 캔버스 유화, 67×73, 1873.
러시아의 결혼 풍속도를 보여주는 작품.
<결혼합의의 축하>
M.슈바노프, 캔버스 유화, 199.9×244, 1777.
신부 집에 신부를 선보러 온 신랑과 그를 맞이하는 신부 집안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농민의 삶을 이상화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이 농노였다는 사실에서
농민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못 들어보내요>
V.마콥스키, 캔버스 유화, 1982.
술집에 들어가려는 남편을 제지하는 모습으로, 술로 인해 망가진 가정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아이의 겁에 질린 표정 등, 감상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만남>
V.마콥스키, 캔버스 유화, 40×31.5, 1883.
러시아인에게 차지했던 빵의 비중을 느끼게 한다.
도제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들을 찾아와 빵 한쪽을 먹이며 바라보는 엄마의
애잔하고도 안쓰러운 모습이다.
<앉아 있는 악마>
미하일 부루셀, 1890년, 트레티아코스 미술관.
이 작품은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 페르몬토프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노을지는 하늘과 화사한 꽃이 핀 언덕배기에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감싼 악마의 모습이다.
사악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그저 외롭고 쓸쓸함만이 가득이다.
자신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또 후원해 주었던 S.라잔스키(수학자이자 생물학자)를 표현한 작품이다.
칠판의 수학 문제는 그런 이유이기도 하다. 러시아가 강국의 반열에 다시 올라선 것도
라친스키와 같은 후학 양성에 앞장섰던 스승들이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시골마을에 도착한 여교사>
V.마콥스키, 캔버스 유화, 67×90, 1896~1897.
시골 학교의 존경받는 젊은 여선생 안나.
늘상 지각하는 소년 사부슈킨에 의해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도된 안나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모스크바 근교 미티세의 티타임>
V.페로프, 캔버스 유화, 43.5×47.3, 1862.
자세히 보면 차를 잔에 따라 마시는 게 아니라 접시를 이용하고 있다.
접시엔 절대 물이나 차를 따르지 않는 우리네 문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차를 마시며>
C.코로빈, 마분지 유화, 60.5×48.5, 1888.
러시아의 화가, 극장 예술가, 교육자, 작가로써 화가 세르게이 코로빈과는 형제이다.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서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뒤에는 단편들을 집필하였다.
작가의 개인적 슬픔이 배인 작품이다. 어린 두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이력이 바탕으로
녹아든 그림인 것이다. 비극적 운명에 맞서는 강한 어머니의 내면을 보여 준다.
<친위병 사형날의 아침>
캔버스 유화, 218×379, 1881.
표트르 대제 시대 친위병 반란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들을 모델로 한 것으로 죽음 앞에서 남은 자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공포에 질린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아들의 묘에온 노부부>
V.페로프, 캔버스 유화, 42×37.5, 1874.
미루어 짐작할 뿐, 겪어 보지 않은이는 그 고통을 모를 것이다.
<모든 것은 과거에>
V.막시모프 캔버스 유화, 72×93, 1889.
19세기 말인데도 여전히 반상의 구별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련만, 봄 햇살을 즐기는 마님과 그 옆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뜨개질에 열중하는
하인의 모습은 귀족 사회의 마지막 끄트머리 풍경인 듯 싶다.
<기다리지 않았다>
L.레핀, 캔버스 유화, 160.5×167.5, 1884~1889.
레핀의 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들 중에서 수작으로 평가받는 그림이다.
갑작스레 고향집으로 귀환한 한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의 묘사이다.
"기다리지 않았다"는 반어적 표현이기에 잠시 후 그들이 연출해낼 모습은
관람객의 상상에 맏겼다고 볼 수 있지않을까?
<시골 마을의 설교>
V.페로프, 캔버스 유화, 71.5×63.3, 1861.
설교대 앞자리엔 마을 지주 내외가 앉았고 귀족들과 농노들이 양편을 나누어 자리했으며
농노들은 의자도 없이 서 있다. 17~18세기에 이미 유럽 봉건은 무너지고 농노해방이 이루어졌던 반면,
러시아는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농노해방이 이루어졌음을 감안해야 하는 시대적 배경이다.
<볼가강의 인부들>
L.레핀, 131.5×181, 1870~1873.
등장 인물 모두의 표정과 몸짓에서 각자의 이력이 읽여진다.
16~19세기 말까지 존재했던 볼가강 노동자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백조 공주>
미하일 브르벨, 1900년,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선과 색채, 구성 모든 것이 그리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내용은 림스키 고르사코프의 오페라 <황제 슐탄 이야기>에서의 영감을 녹여낸 것이다.
아름다운 운명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마법의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했을까?
분명한 것은 부루벨의 붓끝에서는 마법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닌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면모를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라일락>
미하일 부루셀, 1900년, 프레티아코프 미술관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중 제3막 '마르게리테의 정원' 테마를 토대로 제작한 작품.
<어디나 삶>
N.아로센코, 캔버스 유화, 212×106, 1888.
안과 밖의 세계를 바깥의 시선으로 어이 재단할 수 있으리오.
각각 처한 시점에서만이 토해낼 수 있는 언어들이 생각키워지는 것을...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
알렉산드로 이바노프, 1837~57,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유럽 미술사에서 예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 무엇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이바노프는 이 작품 하나르 완성하기 위해 무려 600점이 넘는 드로잉과 유화 스케치를 제작했다고.
'절대적 권능'이라는데야...!
19세기 러시아 역사가 혁명을 앞두고 엄청나게 고동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구세주 예수가 어떻게 미술에 녹아들었을지는 미루어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하겠다.
<발거벗은 아이>
알렉산드로 이바노프, 1840~50년대, 러시아 미술관
<가지>
알렉산드로 이바노프, 연대 미상,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꿈(언덕에서)>
바실리 플레노프, 1890~1900년대, 러시아 미술관.
언덕에 걸터앉아 먼곳을 바라보며 깊은 외로움을 달래는 인간적이 예수의 모습이다.
언뜻 전통적인 종교적 상징이나 도상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예수의 인간적 체취에 초점을 맞춘 듯.
<무엇이 진리인가?>
니콜라이 게, 1890년, 트레티야코스 미술관.
대위법적 화면 구성이 인상적이다.
빌라도는 자유로운 권력자의 제스처이고 예수는 손이 뒤로 결박된 상태이다.
빌라도는 다소 살진편이나 예수는 마른 몸이다. 빛의 각도 등, 여러 부분이 드라마틱한 구성이다.
위 내용을 일러 『요한복음』에 나오는 내용이라 한다던가...
<갈보리>
니콜라이 게, 1893년,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사형 언도를 받은 에수가 다른 두 명과 함께 처형장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그림 속 예수가 두 손으로 머릴 감싸안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 해야할까?
미술사가들은 떨고 있는 예수의 인간적 모습의 표현이라는데, 전지전능한 구세주께서 설마 떠시기야...
<부활 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알렉산드로 이바노프, 1835년, 러시아 미술관
막달라 마리아 주제는 중세 때부터 있어왔지만, 집중적으로 조명된 시기는 종교개혁과 궤를 같이 한다.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으로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전통이 크게 위협받자 고해성사를 비롯한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해자의 전형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형상화 한 그림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
<삼위일체>
안드레이 루불로프, 1420년대, 트레티아코스 미술관.
러시아가 동방정교를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교회와 예배의식이 매우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988년 블라디미르는 세례를 받고 동방정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아름다움이 종교 선택의 근거였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러시아인들의 미의식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들의 미의식이 잘 나타난 초기의 대표적 성취 중 하나가 바로 '이콘'이다. 종교 도상을 담은 그림으로
주로 기독교 중심 인물들을 그린 비잔틴 문명에서 발원한 성화를 말 하는 것. 이는 문자 해독이 어려운
민중들에게 중요한 선교 수단이자, 미의식을 지향하는 러시아인들의 구미에도 잘 어울렸을 터.
<삼위일체>는 중세 러시아 회화의 최고봉으로 꼽는 걸작이라는 평.
잘 짜여진 구성에다 세 천사의 감성적 정조를 깔아 서로 공감하는 주제를 식탁 위에 올렸다.
<구세주>
안드레이 루블로프, 15세기 초,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화가 특유의 깊은 명상의 결과로 성가를 드높인 작품이다.
이콘은 장르의 성격상 일종의 명상성을 띈다. 금식과 회개로 스스로를 정화하고 신성한 소명의식으로
그림을 그려 나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콘은 조형언어로 드리는 일종의 기도라 보면 되겠다.
<블라디미르의 성모>
콘스탄티노플 화파, 1100~1130,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1395년 티무르의 침입 때 이 그림을 모스크바로 옮긴것은 성모의 사랑 힘으로 적군을 물리쳐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적들을 물리친데는 이 이콘에 대한 존숭 의식을 더욱 강하게 부채질 했다.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의 이미지>
노브고로트 화파, 12세기 후반, 크레티아코프 미술관.
이콘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12세기 어떤 화가가 다시 그린 그림으로
사랑의 권능을 담은 그 기적에 대한 소망과 스토리르 절절하게 담아낸 성화이다.
<보리스와 글레프>
모스크바 화파, 14세기 중반, 러시아 미술관.
러시아 최초의 성인으로 기록된 보리스와 글레프는 블라디리르 공후의 아들들이다.
형제간의 대량 살육을 피하고 스스로 희생자가 되어 비폭력, 무저항의 길을 택한 두 사람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는 그리스 정교회와 구분되는 신앙의 기초르 다지게 된다.
그리스 정교회는 무엇보다 전능자로서의 신을 강조하는 반면,
러시아 정교회는 희생자로서의 어린양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대주교 알렉세이와 그의 일생>
디오니시, 1480년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가운데 알렉세이를 크게 그리고 주변으로 그의 일생과 관련한 일화를 배치한 작품이다.
알렉세이는 모스크바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키예프에 이어
모스크바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더욱 널리 존경받게 된 존재이다.
<수태고지>
노브고로트 화파, 1130~1140년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카잔의 성모>
모스크바 화파, 1638년 이전, 러시아 미술관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L.레핀, 캔버스 유화, 199×254, 1885.
이반 4세는 '이반 뇌제(雷帝)'라도도 불리운 공포정치로 신민을 다스린 차르였다.
숱한 고초를 겪은 까닭에 의심이 많고 성품이 잔인했던 인물로 그가 아들을 죽인 것은 권력 다툼이 아니었다.
의심과 분노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이반 뇌제는 저 세상으로 갔다.
자신이 무슨짓을 했는지 비로소 깨닫고 황망히 아들을 껴안고 있는 이반 뇌제.
그의 눈은 초점을 잃고 공포와 자기 저주의 지옥을 헤맨다.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의 초상>
요한 베데킨트, 1728년(1636년의 원작을 1728년에 모사), 프레티야코프 미술관.
이반 뇌제는 러시아의 첫 왕조인 류리크 왕조에 속한 차르다. '차르'는 옛 러시아 황제를 지칭하는 말로,
본디 라틴의의 '카이제르'에서 온 것이다. 차르의 전제권이 고도로 강화되고 러시아가 유럽 국가의 일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 왕조인 로마노프 왕조 때의 일이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더불어
근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전통 있는 이 왕조의 초대 군주는 미하일 로마노프(1596~1645)다.
미하일은 이반 뇌제의 첫 번째 황후의 조카, 그러니까 황후 오빠의 아들이다.
병약하고 강단이 없어 처음에는 어머니와 외척이, 나중에는 아버지가 실권을 행사했다.
초상화에도 그다지 똑똑함이 드러나니 못하는 이 차르의 성격이 얼추 짐작된다.
<표트로 대제의 초상>
안드레이 마트베예프, 1725년 이후(카렐 데 모르의 1717년 원작을 모사), 에르미타슈 박물관.
미하일 로마노프와 달리 그의 손자 표트르 대제는 키고 크고 건장했으며 매우 활동적인 인물이었다고.
그는 러시아를 근대화와 계몽의 길로 이끈,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부의 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다.
<알렉세이 황태자를 심문하는 표트르 대제>
니콜라이, 1871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표트로 대제 역시 혈육과의 갈등을 많이 겪었고 이반 뇌제처럼 아들을 죽였다.
표트로 대제는 아들을 죽이기 전에 이미 배다른 누이와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인 적이 있다.
그런 이력 때문인지 몰라도 무너져 내리는 아들의 운명 앞에 그토록 초연했던 것은 아닐지...
<알렉세예브나 황녀>
1879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분노와 증오심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눈빛의 소유자, 바로 표트로 대제의 누나 소피아 황녀다.
47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 유폐된 수녀원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고 하는데그림을 보면 창밖으로 주검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이곳에서 그녀의 측근과 친위대를 합쳐 물경 1,700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소피아의 험상궂은 표정에 짐작이 간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표트르 대제에 이어 러시아를 유럽의 강국 가운데 하나로 우뚝세운또 한 명의 위대한 대제다.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넓혔으며 궁궐과 귀족 사회를 서유럽 강국들 못지않은 화려함과 호사스러움으로 채웠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상>
표도르 로코트프, 1780년대, 에르미타슈 박물관.
백옥같이 흰 살결에 홍조 띈 볼, 등은 화려하고 풍성하게 피어난 모란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저 미소 뒤에는 하루 마흔여섯 벌의 파티 의상을 갈아입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공식적 정부(情夫)만 23명에다 환갑을 지난 나이에도 20대 애인을 두었던 "자유연애' 신봉자이기도 했다.
혹자는 그녀의 정부가 일백 명을 넘는다고 할 만큼 욕정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정의의 여신의 신전에 선 입법자>
드리트리 레비츠키, 1783년, 러시아 미술관.
집권 초기 계몽주의도 적극 소용하고 교육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원로원으로 부터 '대제', '러시아의 위신은 높인 위대하고 현명한 국모'라는 칭호를 선사받기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러시아를 환골탈태시킨 군주는 아니었다.
<타라카노바 공주의 죽음>
K.폴라비츠키, 캔버스 유화, 245×187.5, 1864.
프랑스 국적의 타라카노바는 자신이 결혼하지 않은 여제
엘리자베타의 숨겨진 딸이며 진정한 제위 계승자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카리나는 사람을 보내 그녀를 유인하여 1775년 러시아로 데려와 요새에 가두었고,
그해 홍수가 났을 때 침수된 요새에 같혀 수장되었다고. 쏟아져 들어오는 물을 보며 공포에 떠는 모습이다.
쥐들도 물을 피해 그녀를 타고 올라갔다고 하는데 권력의 차가운 살기가 소름이되어 다가오는 그림이다.
<니콜라이 2세의 초상>
일랴 레핀, 1896년, 러시아 미술관.
러시아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우유부단 했지만 성품이 선량한 데다 교양도 갖추었다고 한다.
하지만 통찰력의 부족으로 그의 치세 아래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 싹트고 있음을 그다지 심각하게 보지 못한 것.
요승 라스푸틴에게 아들의 혈우병을 맏긴다거나 1905년의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에게 참패하여 비운의 말로를 걷는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되어 유폐되었던 그는 이듬해 시베리아 유형지로 이송되는 도중 한 농가에서
혁명 세력에 의해 가족과 함께 총살당한다. 로마노프 왕조와 차르의 존재가 영원히 소멸되고 만 것이다.
<1901년 5월 7일 1백 주년 기념 정례 국가평의회>
일랴 레핀, 1903년, 러시아 미술관.
차르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던 시절, 차르의 위세와 권위를 공식행사 장면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레핀은 작가 특유의 탁월한 구성력과 연출력을 동원하여 러시아 회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완성한다.
<알렉산드르 3세의 초상>
이반 크람스코이, 1886년, 러시아 미술관.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바실리 수리코프, 1887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러시아 회화는 문학적인 특성이 강하다.
역사화의 특성상 어느 나라나 뚜렷한 문학성을 보이지만 러시아는 유독 그 정도가 심하다.
러시아 역사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화가 바실리 수리코프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위해 어떤 핍박도 마다하지 않은 용감한 귀족 여성을 소재로 삼았다.
이 그림은 17세기 러시아 종교 대분열을 배경으로 한다.
그림의 여주인공 모로조바는 종교 대분열시 구교도의 편에 섰던 대귀족 프로코피 소코부닌의 딸이자
역시 특권 귀족인 모로조프의 부인이다. 여동생 우르소바와 더불어 옛 신앙을 수호하려고 개혁에 완강히 저항했으나
끝내 보로프스키 수도원 감옥에 유폐되어 삶을 마감했다. 모로조바는 구교도의 지도자 아바쿰과 왕래하며
그의 가족을 재정적으로 도와 차르의 분노를 샀다. 지독한 탄압 속에서도 구교도이 신앙이 농민과 상인, 장인 등
민중의 마음을 사고 그들의 연대의식과 저항 정신과 만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포착된 그림이다.
<쟈포로지예 카자흐>
일랴 레핀, 1880~91년, 러시아 미술관.
인물 묘사와 표정 묘사는 레핀이 얼마나 탁월한 사실주의자인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인간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이해가 돋보인다.
'자포로지예'는 우크라이나의 카자흐 자치 지역 이름이자 이들 카자흐의 군사. 정치 조직체를 이르는 말이다.
1675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무하마드 4세가 '무조건적이고 자발적인 항복과 모든 저항의 포기'를 요구하는
협박 편지를 보낸다. 이에 이들 카자흐는 술탄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편지를 써서 돌려보내면서
'땅과 물, 어디서든 맞서 싸울 것'을 단호하게 천명한다.
그림은 술탄에게 답장을 쓰며 희희낙낙하는 카자흐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폼페이 최후의 날>
카롤 브롤로프, 1833년, 러시아 미술관.
화산재로 가득찬 하늘은 검붉은 색으로 요동친다. 쏟아지는 화산재는 화면 왼편 건물의 상단 부분을
이미 어두운 잿빛으로 뒤덮고, 화면 오른쪽 건물과 그 위에 설치된 조각상은 어느새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혼란스러운 움직임으로 화면은 몹시 복잡한 구성을 보이는데 이같은 좌충우돌이 결코 화면의 안정감을
깨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브률로프의 거장다운 솜씨가 느껴진다.
<놋뱀>
피델리오 브루니, 1841년, 러시아 미술관.
커다란 화면에 역동적인 묘사와 연출은 장인의 빼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아카데미즘에 기울어 <폼베이 최후의 날>보다 경직되고 상투적 느낌을 받는다.
작품의 주제는 성경 『민수기』21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블라디미르와 로그네다>
안톤 레센코, 1770년, 트레티야코스 미술관.
매우 잔인하고 끔직한 내용의 그림이다.
블라디미르 대공(980~1015)은 동방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여 러시아를 기독교 세계에
편입시키는 행적으로 성자(聖者)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허나 원래 잔인한 성품에다 음모에 능했으며,
일곱 명의 아내와 800명의 첩을 둔 호색한이었다. 형과 권력을 다투던 블라디미르는 플로츠크의 로그네다가
형과 약혼한 사실을 알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딸을 달라고 했는데 거절 당하자 무력으로 플로츠크를 점령하고
부모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겁탈한다. 그리고는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아들을 죽였다.
블라디미르의 아내가 된 로그네다는 현자 아로슬라프 대공 등 네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이 그림에서 화가는 블라디미르의 잔인한 행위의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두 부자가 주도한 키예프 루시(러시아)의 '황금의 시대'가 없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3인의 보가트이리(용사)>
빅토르 바스테초프, 1898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명의 용사는 뱀과 꾀꼬리 강도, 외적 등을 물리친 용맹성으로
러시아 민중을 보호하는 보가트이리(용사)다.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문학을 '브릴리나'라고 하며,
브일라이는 민중 시인들에 의해 전승되어 온 민요풍의 영웅서사시를 일컫는다.
<엘레우시니아의 포세이돈 축제의 프리네>
헨리크 지미라즈키, 1889년, 러시아 미술관.
축제의 흥취를 '리얼타임'으로 생생히 전하는 듯하다.
축제는 아프로디테, 즉 비너스의 등장으로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다.
비너스로 분장한 그림 속 여인은 '프리네'이다. 프리네는 '헤타이라'였다. 고급 창부다.
물론 단순히 몸을 파는 건 아니다. 주로 외국 출신인 헤타이라는 여성에게 억압적이던 고전기 그리스 사회에서
일반 여성과 달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심포지엄에 참석해 남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에로스로 꾸며지는 아이의 분장이 다 끝나면 프리네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 물로 뛰어들 것이다.
물에서 탄생했다는 아프로디테의 신화를 재현할 것이다.
<안드로마케와 이별하는 헥토르>
안톤 로센코, 1773년, 러시아 미술관.
헥토르의 탄식이 절절히 느껴지는 그림으로
남편을 사지로 떠나보내는 안드로마케의 슬픔 역시 대단한 것이겠으나, 화가는 헥토르의 고뇌에 좀더 초점을 맞췄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헥토르는 전쟁의 비극적 결말을 예상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닥쳐올 운명에 몸부림치고 있다.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온 우주를 향해 절규하는 영웅의 목소리가
연극 무대의 독백처럼 생생히 들려온다.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일랴 레핀, 1881~83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중앙 러시아 고지에 있는 쿠르스크는 성 테오도사우스의 탄생지로 알려진 고도(古都)로,
한때는 모스크바를 지키는 국경 요새 기능을 했다. 작가 레핀은 이 지역의 종교 행사를 직접 관찰하여
많은 자료를 모아 이 역작을 그렸는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인상적인 만인보(萬人譜)를
형성한 것으로 성가가 높은 작품이다.
<혼인 축하>
미하일 비바노프, 1777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초기 러시아 장르화의 주된 주제는 농촌 풍속이다.
이 작품의 크기로 보아 일반적인 장르화 사이즈를 훌쩍 넘어선다. 역사화의 화면 크기에 가깝다.
사실 농민들에게도 결혼은 중요한 '인륜지대사'다 신부가 화면 중앙에 성녀처럼 클로즈업된 시바노프의 그림은
당시 고단한 삶을 살던 농부들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결코 잊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소령의 구혼>
파벨 페도토프, 1848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철저한 계산과 이기심에 따라 거래로 타락한 모습을 고발한 작품으로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심드렁한 자세로 선 문 밖에 선 소령의 모습이 볼썽사납기 짝이 없다.
신분을 바탕으로 부유한 상인 집안의 처녀와 거래하고 있음을 한 눈에 알아 볼 수있겠다.
<어울리지 않는 혼인>
바실리 푸카레프, 1862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신부가 어려도 너무 어리다. 자신의 운명을 눈물로 받아들인 듯.
눈물바람의 이런 신부 모습이 마땅치 않은 표정의 신랑 목과 가슴엔 훈장이 주렁주렁이다.
러시아 제국에 공헌이 꽤나 많았던 듯.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도 꽤 쇼킹했었나 보다.
<수도원 식당>
바실리 페로프, 1865~76년, 러시아 미술관.
도덕의 근간이어야 할 종교가 소명 의식을 잃었을 때의 모습이다.
성직자들의 풍성한 만찬하며, 기름진 음식과 살진 풍채, 값비싼 포도주에서 탐욕과 교만, 이기심이 넘쳐난다.
구걸하는 노파 건너에는 십자가에 걸린 예수가 좌중을 내려다 보고 있다.
<트로이카>
바실리 페로프, 1866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페로프의 그림 소재가 분노에서 동정으로 바뀌었다.
세 아이가 고드름이 잔뜩 엉킨 물통을 앞에서 끌고 다른 한 아이는 뒤에서 받치고 있다.
트로이카는 원래 '3'을 뜻하는 러시아어로, 혁명 전에는 삼두마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음울한 색감마저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폐광에서 석탄을 줍는 빈민들>
니콜라이 카사트킨, 1894년, 러시아 미술관.
황량한 폐광지 풍경에 남루한 옷차림으로 석탄을 줍는 사람들.
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비판적 리얼리즘 미학은
혁명 이후 후배 예술가들에 의해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으로 변모하게 된다.
<세탁부>
아브람 아르히코프, 1898년경, 러시아 미술관.
세탁소이 일상이 마치 사진작가의 스냅에 담긴 느낌이다.
러시아 미술ㅅ에서 미술과 현실 그리고 역사가 가장 선명하게 밀착된 모습으로
표현된 장르가 바로 19세기 후반의 생활 밀착 그림이었을 거라고.
<경찰의 찬송>
레오니드 솔로마트킨, 1882년, 러시아 미술관.
세태를 꼬집는 풍자성이강한 이 장르화는 경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상인의 집 응접실에 들어와 이콘을 보며 찬송을 부르는 경찰들.
이렇게 동네 잘 지켜주고 찬송까지 불러주니 성의 표시는 당연지사.
상이니 지갑에서 돈을 꺼내고 있는 사이에 그의 아내는 귀를 막고 돌아서 있다.
돈 꺼내는 모습을 곁눈질하는 왼편 경찰이 그의 본심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초상>
오레스트 키프렌스키, 1827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동경어린 눈빛은 푸슈킨 개인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화가의 낭만주의적 기질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고. 농노 출신의 화가는 러시아의 현실을
생생히 묘사하고 자유의 가치를 드높인 푸슈킨의 문학에 깊이 감동한 것이 분명하다.
<맨발의 톨스토이>
일랴 레핀, 1901년, 러시아 미술관.
대문호 톨스토이의 정신세계가 매우 잘 표현된 걸작으로 꼽는다.
레핀은 편지에서 톨스토이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한 눈썹을 가진 이 위대한 작가의 부드러운 두 눈은 주위를 환하게 밝힌다.
아무리 그가 자신을 낮추어도 그리고 아무리 초라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다 하더라도,
이 거장의 눈썹을 치켜 올리면 온 올림포스 산이 부르르 떠는 제우스 같다."
하얀 겉옷과 검은 바지는 단순 검박한 삶을 추구했던 그의 소신이 드러나고,
맨발은 자연과 하나 되어 순수한 삶을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톨스토이의 초상>
이반 크람스코이, 1873년, 트레티야코스 미술관.
레핀은 톨스토이이 외모가 지닌 강하고 굵은 선에 매료되었지만,
그의 정신이 드러내는 독특한 빛, 특히 도덕적 권위에 더욱 매료되었다.
이 작품은 그런 감화의 여운을 탁월한 붓질로 묘사한 것이다.
<떼까마귀가 돌아오다>
알렉세이 사브라소프, 1871년, 트레티먀코프 미술관.
그림 속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고 있다. 햇빛의 각도나 눈녹은 흔적에서 봄소식이 들려 온다.
교회의 종소리는 더욱 청명하게 들릴 터이고 농가의 일손은 더욱 바빠질 것이다.
강풍을 버텨낸 자작나무들은 곧 있으면 녹색 승리의 찬가를 부를 것이다.
<자작나무숲>
아르히프 쿠인지, 1879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 작품도 러시아 관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작품이라고 한다.
역광으로 비낀 햇살이 쏟아져 들어 온다. 숲과 초지의 신선한 초록과 햇빛을 받아 생긴 자작나무의 흰 점들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져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나들이 갔다 오고 싶어지는, 그런 풍경이다.
<자작나무숲 속의 개울>
이반 시쉬킨, 1883년, 러시아 미술관.
전형적인 러시아 자작나무 숲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
화면 윗부분까지 훌쩍 넘어선 자작나무들. 보통 20~30미터 정도 자라는데,
수천 수만 나무들이 커다란 군락을 이룬 모습은 정말이지 장관 중의 장관이다.
<우크라이나의 저녁>
아르히프 쿠인지, 1878~1901년, 러시아 미술관.
러시아의 유장한 빛을 표현한 풍경화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걸작이다.
화가의 빛을 다루는 능력은 실로 당대 최고라 할만하다.
노을과 땅거미가 교차하며 자아내는 미묘한 빛에 오금이 저려온다.
<호밀>
이반 시쉬킨, 1878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누렇게 익은 호밀 들판은 누가 봐도 배부른 풍경이다.
지평선을 낮게 배치해 창공을 그만큼 광활해 보이고, 떡갈나무의 높은 키도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겨울>
이반 시쉬킨, 1890년, 러시아 미술관.
북러시아의 겨울 숲을 사생한 그림으로, 수직으로 들어찬 나무와 그 나무들을 덮은 눈,
저 멀리 분홍빛이 스치는 하늘은 이 거대한 나무들의 보금자리에 고적한 기운을 더한다.
<마을 위에서>
마르크 샤갈, 1914~18년, 트레티야코프 신관.
2004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샤갈전에도 출품되어 무려 5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은 작품이다.
화가의 고향 마을 비테프스크가 내려다보이고 그 위로 샤갈과 그의 부인 벨라가 날고 있다.
샤갈의 현실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어스름>
바실리 칸딘스키, 1917년.
러시아 출신 화가들이 추상미술에 능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이들이 서유럽 사람에 비해
추상적인 관념과가치에 더 친숙했음을 나타내는 증표가 아닐까 싶다.
어쨌던 말레비치 도하 칸딘스키처럼 물리적이고 현상적인 세계보다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카운터 릴리프>
블라드미르 타틀린, 1914년.
성모 마리아나 꽃 누드 같은 구체적인 자연의 대상을 볼 수 없다.
누드 같은 구체적인 자연의 대상을 볼 수 없다. 금속류와 목재 등의 재료가 어우러져 구성된
추상적인 화면이 전부다. 아무것도 재현되어 있거나 모방하지 않은 것이다.
<붉은 말 목욕시키기>
페트로프 봇킨, 1912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신관에 걸린 이 미술관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에르미타슈 박물관 컬렉션
소장한 유물이 무려 270만여 점에 이른다는 에르미타슈 박물관.
그 가운데서도 유럽 회화오 스키타아 유물, 고대 공예품, 동양 문화재 컬렉션 등이 유명하다.
<꽃을 든 마돈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78년
<성모자(리타 마돈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90년~91년
<유디트>
조르조네, 1500년대 초.
조르조네는 티치아노와 함께 화려한 빛과 색으로 16세기 베네치아 파의 영광을 일군 대가다.
불과 32세 때 천연두로 요절하는 바람에 서양미술사는 두고두고 그의 이른 부재를 탄식해 왔다.
<류트 연주자>
카라바조, 1596년경.
에르미타슈가 소장한 카라바조의 유일한 작품이다.
그림 왼편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강하게 부각된 연주자와 주변의 꽃과 과일, 악보, 악기 등으로
구성된 작품은 마치 현실의 한 장면을 사진처럼 낚아 올린 깔끔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고.
<성 세바스티아누스>
페루지노, 1495년경
<비탄>
파올로 베로네세, 1576~1582년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 1668~69년경.
렘브란트 회화에 관한 한 에르미타슈가 세계에서 두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성경은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주는 교과서라고.
렘브란트 특유의 빛과 그림자로 기독교적 부성애를 아름답게 수놓은 작품이다.
<아브라함의 희생>
렘브란트. 1635년.
비운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으려는 순간,
천사가 이를 급히 말리는 장면을 묘사했다.
깜짝 놀라 천사를 바라보는 순간 아브라함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칼.
결과론이긴 하지만 아들은 살아났고 그의 믿음은 인정받았다는데...
<시몬과 페로>
페터 폴 루벤스, 1612년경.
효성스러운 딸과 딸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본능적 효심이긴 하지만 다 큰 딸이 자신의 젖을 아버지에게 물린다는 윤리적 갈등이 루벤스의 살아 있는
붓질로 인해 더욱 강렬하게 충돌한다.
역사학자 막시무스의 뜻을 좇아 아버지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임을 부각시킨 루벤스는
아버지에게 검은 옷을 둘러 그의 처지가 자아내는 비극을 나타냈고,
딸에게는 붉은 옷을 입혀 자식으로서의 뜨거운 사랑을 표현했다.
한 번 보면 결코 잊기 어려운 주제와 형식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다나에>
렘브란트, 1636~42년.
<성모를 그리는 누가>
로히르 반 데어, 1430년대
<강낭콩 왕>
이콥 요르단스, 1638년경
<자화상>
안토니 반다이크, 1620년대 말~1630년대 초
<디저트>
빌렌 칼프, 1653~54년
에르미타슈 프랑스 회화 컬렉션
<비너스와 판 푸티>
니콜라스 푸생, 1630년대
<노예 매매>
장 레옹 제롬, 1884년경.
<동굴의 막달라 마리아>
르페브르, 1876년.
<머리 빗는 여인>
에드가 드가, 1885~86년.
<아르콜레 다리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앙투안 장 바롱 드 그로, 1797년.
<예술을 상징하는 정물>
장 바티스트, 1766년.
<시장 가는 길>
콩스탕 투루아용, 1859년.
<사포와 파온>
자크 루이 다비드, 1809년.
<여배우 잔 사마리>
피에르 오귀스트, 1878년.
<봄 풍경과 여인들>
모리스 드니, 1897년.
<춤>
앙리 마티스, 1910년.
<나팔소리르 듣는 성 히메로니무스>
호세 데 리베라, 1626년.
<사도 베드로와 바울>
엘 그레코, 1587~1592년.
<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무리요, 1670년대
<항해하는 배 위에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8~20년.
<사과나무 아래의 성모자>
루카스 크라나흐,1528년
<여인을 놓고 싸우는 남자들>
폰 슈투크, 1905년.
<앵무새와 아이들>
로버트슨, 1850년.
<루른 옷의 여인>
토마스 게인즈버러, 1770년대 말~1780년대 초
<뱀을 목 졸라 죽이는 어린 헤라클레스>
조슈어 레이놀즈, 1786~88년.
국립 푸슈킨 미술관
<헤라클레스와 움팔레>
프랑수아 부세, 1731~34년(?)
<공 위의 소녀>
파블로 피카소, 1905년.
<세면대 위의 거울>
피에르 보나르, 1908년.
<금붕어>
앙리 마티스, 1912년.
<테 아리 바히네(왕의 부인)>
폴 고갱, 1896년.
<말을 공격하는 재규어>
앙리 루소, 1910년.
- 참고서적 -
김은희 著 『그림으로 읽는 아시아』. 이주헌 著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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