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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동학 천도의 세계

동학혁명 관련 자료
















해주지도









































돈헌유교

한말 의병장 이병찬(1851~1916)의 문집으로 돈헌은 그의 호이다. 대부분 임병찬의 항일운동에 관한 기록과

독립을 염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학혁명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요람要覽

장흥지역에서 활동한 농민군의 모습과 그들을 회유하기 위한 지방관의 노력을 알 수 있데 해주는 자료이다.

동학혁명 관련 내용은 '본읍 난중일기'와 '우문위통유사'에 실려있다. 특히 '본읍 난중일기'에는 1894년 7월에

장흥부사로 부임한 박헌양이 그 곳 유림들과 힘을 합쳐 동학혁명군에 맞서 싸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난파유교蘭坡遺稿

나주 출신인 난파 정석진(1851~1856)의 문집으로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 등이 이끌던 나주의 동학군과 나주목사

민종열, 영장 이원우, 토통장 정석진이 지휘하던 수성군 사이에 벌어졌던 나주성 공받전을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겸산유교謙山遺稿

겸산 이병수(1855~1941)의 문집으로 전남지역 동학군의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특히 '금성정의록'에는 나주목사 민종열의 향악실시와 나주관군의 성을 지키는 상황, 나주 지역의 동학접주 오권선과

최경선 등의 활동상, 장흥 지역의 동학군 활동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정돈 물침첩勿侵帖

나주시 남평면 어천면 야산에 사는 이정돈에게 1894년 12월 29일 남평 군수가 발급해 준 물침첩이다.

물침첩은 '동학혁명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일종의 신원 보증서 이다.













오통절목悟統節目

1894년 12월에 전라도 관찰사가 출판하여 각 지역에 나눠 준 오통절목이다. 다섯집을 1통으로 묶어 호구조사,

법죄자색출, 세금징수, 부역동원 등에 사용하고자 작성된 문서이다. 제목 옆에 '완산 초안국 활인'이라는 표현은

이 책이 전라감영이 있었던 와산에서 발행한 것을 의미한다.




고산방 풍헌 첩보牒報

1895년 4월 19일에 고산방 풍헌 김씨가 도호부사에게 올린 첩보이다. "효유문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라는 전령을

수령하였다"는 내용이다. 동학혁명 이후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화순 유생 조호영 등이 작성한 등장等狀

1894년 12월에 화순엣 ㅏ는 유생 조호영, 조병만, 진사 조병선, 유생 조병하, 조인환 등이 작성하여

수령에게 올린 등장이다. 당시 사회상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日靑戰爭實記

1894년 청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발간된 책이다. 일본의 주요 군인, 정치가 뿐만 아니라 조선, 청의 주요 인물,

전쟁 관련 상세지도, 일본과 청의 주요 군함들, 조선과 중국의 주요 도시 및 전투지등의 사진자료가 실려 있다.






회고80년사

일본 동경의 동양문화협회에서 발간한 책으로 막말(幕末), 명치(明治), 대정(大正) 시기를 회고하며 제작한 80년사 기념 사진첩이다.

일본의 근대모습을 살펴볼 수 있으며,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등 조선과 관련한 자료들도 확인할 수 있다.





군사관계 일건(一件)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으로 경성 주재 일본제국 영사인 우치다 사다츠지가 1894년 7월 11일에 보고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진위현 그리고 과천지방을 다니며 조사한 청군의 입경 일자, 청군의 주둔지 사정, 청군의 전투 준비상황 등을 보고 하였다.




1894년 10월 6일 HARPER´ S WEEKLY

하퍼스 위클리는 미국 뉴욕에서 발행한 잡지이다. 하퍼 앤 브라더스라는 잡지사가 1857년부터 1916년까지 발간하였다.

주로 정치와 외교의 뉴스를 다루었고, 수필과 유머 등을 삽화와 함께 실었다. 1894년 10월 6일에 발행된 잡지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 환영식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원평 집강소





부안 집강소




전라감영 선화당 집강소




오하기문

전라남도 광양 출신 매천 황현(1855~1910)이 저술한 야사이다. 1864년부터 1907년까지 우리 나라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월일별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관민상화로 집강소 활동이 합법화 된 사실과 집강소의 조직,

동학농민혁명군의 활동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갑오척사록

경북 예천지방의 선비였던 반재원(1854~1921)이 예천군 집강소의 설치에서부터 해체까지의 전 과정을 일기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1894년 3월 이후 예천농민혁명군의 동향, 보수적 성격의 집강소 설치와 그 조직, 8월 28일 동학혁명군과의

읍내공방전과 보복 등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경북 예천지역 동학군의 동향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1894년 도소 사통 都所 私通

1894년 7월 동학의 도소에서 각 지역의 집강에게 보낸 것이다. "집강은 포마를 걷는다는 명목으로 동학교도와

일반인의 집에 들어가 돈과 물건을 빼앗으며 행패를 부리는 행위를 엄중히 금지시켜라"는 내용이다.





집강 명단

전북 고부군 내 각 면(面)의 집강 명단이다. 도집강의 이름도 들어 있다. 문서의 제작 년대는 알 수 없으나

지질로 보아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위 명단에 나오는 자들이 전주화약 이후에

고부 지역 집강소의 집강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집강 김성택 차첩(差帖)

도호부사가 김성택을 집강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임명장이다.

당시 향촌사회 안정을 위한 정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집강 김영택 차첩(差帖)

도호부사가 김영택을 유향소의 별감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임명장이다.

발급 일자는 제2차 동학혁명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894년 10월 30일이었다. "별감으로서의 임무를

차질 없이 잘 수행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순교약력

동학혁명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그 직후 체포되어 처형된 남원 출신의 인물(41명)과 동학혁명 이후

교단내에서 활약하다가 사망한 남원출신 인물들(47명)의 기록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갑오년에 사망한

이들에 관한 기록인데 여기에는 김홍기, 박중래, 황내문 등 유명 접주들의 출생, 거주지, 동학입교 시기,

 연원, 지위, 활동내용,  체포과정 등이 정리되어 있다.



호남초토등록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장위영군과 강화영군 등 경군을 인솔하고 서울을 출발한 4鉞일부터 전주성을 수복한 직후인

5월 16일까지의 일들을 날짜별로 기록한 자료이다. 초토영 부대의 활동, 동학농민군의 동향, 전라도 지역의 정황,

관군과 동학군의 전투, 식량 동원 지시 등 동학군의 전개 과정과 동학군의 전투 모습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고종이 양호초토사 홍계훈에게 내린 유서

1894년 4월 2일 고종이 양호초토사에 임명된 홍계훈에게 내려 준 유서이다.

 초토사의 임무를 잘 처리해 달라는 점과 함께 밀부를 하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양호초토사는 동학군의 토벌을 위하여 파견하는 군인으 책임자였다.






이춘선 교지

1889년 이춘선을 선략장군 입암산성 별장에 임명하는 교지이다.

교지란 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시호, 자격, 토지 및 노비등을 하사하면서 그 증표로 내려주는 문서이다.

이춘선은 우금치전투 패배 이후 남쪽으로 도망가는 전봉준을 체포하지 않고 숨겨주었을뿐만 아니라,

 백양사 청류암에 머물던 전본준 일행에게 관군의 동향을 알려주는 등 동학군에게 도움을 주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도인 경과 내력 道人 經過 來歷

성(城)에 머무르고 있는 4,700여 명의 동학군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할 때 들었던 6,482량에 대한 세부 내역서이다.

고을 내 유지로 보이는 자들로부터 각출할 내역이 상세히 적혀 있다.





물침첩

1894년 12월에 작성한 물침첩이다. 동학군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의 인적사항이 담겨 있으며,

이들을 침해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발급 주체는 각 고을의 장(長)이었다.

팔도좌서부八都左書符

이 부적은 악귀나 잡신을 쫓기 위한 금위부의 일종이다.

동학혁명 당시 전투에 참여한 동학군이 관군과 일본군으로부터 화살이나 돌에 맞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몸에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장기포 깃대꽃이

이 유물은 손화중, 전봉준장군 등이 무장에서 동학혁명군을 일으켰을 당시 깃발을 꽃아 두었던 돌받침이다.

이는 무장봉기 당시 동학농민혁명군으로 참여했던 백익수의 손자 백남득 증언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경인일기

경인년의 일기라는 뜻의 이 책에는 '갑오사기', '고창조생등정단자여흥덕성주합하', '초토영 단자',

'순무영 단자' 등 동학혁명에 관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동학군의 활동과 관군에 대한

대응 방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일용반다(日用飯茶)

조선후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동학혁명 관련 기록은

대원군이 동학혁명군에게 보낸 '효유문'과  '장성의 송사 기우만이 쓴 단자' 등이 있다.






전봉준 공초(供草)

전봉준에 대한 일본 측의 신문기록이다. 전봉준이 체포된 1894년 12월 2일로부터 1895년 2월 9일, 2월 11일,

2월 19일, 3월 10일 등 모두 5차(3차 일부와 4차부터는 일본영사가 직접 신문)에 걸친 신문 내용이 들어 있다.

274개의 문답을 통해 동학혁명의 전개 상황과 기병 목적, 동학군의 규모, 전봉준의 동학입도 의도와

동학혁명에서의 역할, 대원군과의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호남초토사 서목書目

1895년 4월 초토사가 전 현감 손응계, 현덕종 등의 민보군 조직에 대한 포상을 군부에 추천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군부에서는 두 사람의 행적을 정리해서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초토영군수조납건기招討營軍需助納件記

초토영이 각 지역의 유지들로부터 소 8마리 · 쌀 200석 · 돈 2,730년 등을 거둔 내역을 기록한 것이다.

초토영의 동학군 진압과정, 군수조달 방법과 규모 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영귀정 유생 상서 초안 上書

1895년 정월에 영귀정 유생들이 작성한 상서 초안이다.

당시 지방 유생들의 동학혁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초토사 첩정牒呈

1895년 2월 15일에 초토사가 군무아문에 보낸 첩정이다. 부안 진사 이병로가 동학군의 진압을 위해

군량미를 기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청봉유고晴峰遺稿

조선후기 유학자 김응수(1848~1900)의 문집으로 그의 호이다.

그는 동학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지닌 자였다. 동학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진압으로 평정된 후

'갑오사변'이라는 책을 짓기도 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동학은 사도이며, 최시형이 무리들을 끌어들여

양호지방에 둔거 하였다" 라고 서설한 바 있다.






외귀방 풍헌 첩정牒呈

1895년 2월 외귀방의 풍헌인 이아무개가 도호부사에게 올린 첩정이다, 외귀방은 평안북도 강계군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풍헌은 향촌사회에서 풍기를 바로 잡는 일을 담당하던 관리들 의미한다. 이 문서는 동학군이 전국에 걸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귀한 문서라고 판단된다.






경석집敬石集

임헌찭의 문집으로 경석은 그의 호이다. 이 문집은 1958년 아들 형제와 권순명 등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최병한과 주고 받은 편지에는 "모든 사류는 조선왕조를 받들고 공자의 가르침을 지키며 적을 만나도 끝까지

절개를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관문關問

1864년 1월 어느 고을의 현감이 다른 고을의 현감에게 보낸 관문이다. 관찰사가 근무하는 감영으로부터 내려온

감결(甘結)의 내용을 인용하여 "최근 동학이라고 불리는 사악한 이야기들이 백성들 사이에 퍼져 그들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백성들에게 성현의 가르침을 더욱 더 전파하는 일에 각 지역의 선비들의

많은 참여가 있게 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문서는 동학이 처음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후 동학의 전파를 막기

위하여 정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케 하는 문서이다.






송사문집松沙文集

송사 기우만(1846~1916)의 문집으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은 '나주평적비문'과 '장흥부사박공제단비문'이 있다.

이 가운데 '나주평적비문'을 보면 "나주성이 함락되지 않은 것은 목사 민종열이 향악으로써 백성들을 이끌어 충효로

일치단결 시킴으로써 가능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면암집勉庵集

한말의 유학자 면암 최익현(1883~1906)의 문집으로 최익현은 대표적 위정척사파로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초토사 홍계훈의 선봉대장으로서 장성 황룡전투에서 전사한  '이학승의 비문' 등

동학농민혁명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우재집偶齋集

이관후(1869~1949)의 문집으로 동학혁명 관련 기록은 '갑오문답'에 있다.

주요한 내용은 "갑오년에 전라도 고부에서 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요설로서 민중을 꾀어 무리를 모으고

세력을 일으켜 개인적인 숙원을 풀고자 하였다. 삼남이 모두 이에 응하여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난와유고難窩遺稿

오계수(1843~1939)의 문집으로 그는 동학농민혁명이 평정된 후에는 우두머리만 처단하고

나머지 무리는 귀화시키도록 조언하였다.





율봉집栗峯集

신현중(1877~1942)이 지은 문집으로 동학혁명 관련 기록은 '토동비거의려'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흥덕현감 윤석진이 동학군에 맞서 싸운 사실이 기록되어 잇다.







경당유고警堂遺稿

노일상(1842~1911)의  문집으로 동학혁명에 관한 기록은 '마양록'이라는 글에 들어 있다.

"1894년 6월 동학ㄷ도 5~6명이 갑자기 마을에 들어와 말을 징발하려고 하자 사람들이 이를 거부했으며

또한 동학을 믿고 따르라는 종용도 받았지만 거부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방호집方壺集

고석진(1856~1924)의 문집으로 동학혁명에 관한 기록은 '대본현토동비소고답고문', '대본현토동비소격고열읍', 

 '토동비격' 등이 있다. 그는 "오늘날 사대부가 의리를 배우고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안다면 의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의거로 동맹하여 저들을 토평해야 한다"라고 하며 반농민군 결성을 촉구하고 있다.






혜산문집 惠山文集

이상규(1846~1921)의 문집으로 동학혁명에 관련된 기록은 '제권천우문'이라는 글에 들어 있다.

이상규는 동학농민혁명이 있기 전 산간벽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였는데, 권천우가 이곳에 이사를 오자 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때 동학군이 들어와 마을을 혼란스럽게 하였으나 권천우와 이상규는 매일 거문고를 끼고 술을 마시며 시를 즐겼다고 한다.

당시 유생들의 현실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가 아닐까 한다.





曉堂集

정인보, 이현규와 함께 3대 경학 문장가로 추앙 받는 김문옥의 문집으로

동학혁명 당시 반 동학군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묘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죽헌집竹軒集

정태현(1858~1919)의 문집으로 그는 동학혁명 당시 인심이 어수선하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의연금을 주는 등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간재선생문집 艮齋先生문집

한말의 유학자 전우(1841~1922)의 문집으로 성리학에 관한 글이 대부분이지만

동학혁명을 이해하는데 참고할 만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동국전란사 東國戰亂史

강효석(1869~1946)이 편찬한 역사책이다. 동학의 창도, 고부봉기, 황토현전투, 전주성 함락,

청일전쟁 등 동학혁명과 관련된 주요사건들을 연대기로 정리하고 있다. 동학혁명의 전개 과정 등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계재집溪齋集

정제용(1865~1907)의 문집으로, 동학혁명 당시 정제용이 동학군에게 선행을 베푼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야기문朝野記問

위정척사파의 거두였던 최익현의 상소문과 대운군이 전국에 반포한 효유문 등이 수록 되어 있는 야사이다.

이 책에는 조선 말기 여러 사건에 관한 지은이의 의견이 기록되어 있다.







단운집丹雲集

민응식(1848~1903)의 문집으로 동학혁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은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사략朝鮮史畧

조선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동학군이 점령하지 못한 고을 수령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등 대체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우고선생유고 又顧先生遺稿

이태로(1848~1928)의 문집으로, 동학혁명과 관련된 기록은 '통전라도열읍향교문'과 '의거격' 등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의거격'은 보국안민을 내세운 동학군을 불순한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죄목을 10건으로

열거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고사통

최남선(1890~1957)이 우리나라의 상고부터 근세까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교통 등을

총망라하여 지은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뇌물과 매관매직, 부정부패로 민심이 반하여 마침내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을 수령으로 하여 난이 발생하였다"라고 하며 비교적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






동국사략東國史畧

현채(1856~1925)가 편찬한 책으로, 현채는 국민교육회와 광문회 등에서 우리문화의 계몽에 앞장 선 사람이었다.

그는 동학혁명의 배경에 대하여 "국정이 날로 혼란해지고, 탐관오리가 전횡하며, 외세가 침입해 오는 정세 속에서

전라도 고부의 전봉준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전주가 함락되자 청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일본군의 조선 진군

명분을 제공함으로써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라고 하여 동학혁명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갑오동학란과 전봉준

장도빈(1888~1963)이 1927년에 저술한 책이다. 전봉준을 동학교도로 묘사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장도빈을 이 책에서 전봉준이 주장한 "옛 것을 뜯어 고치고 새 것을 정립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궁색한 사람을 돕는다"라는 구절을 통해 동학혁명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고 기술하였다.






조선사천년비사

차상찬(1887~1946)이 편찬한 역사서이다. 그는 동학혁명을 "조선 역사 이래 제일 큰 민중운동이었으며

홍경래와 같ㄴ이 그 당시의 현실개혁을 위한 혁명이었다"라고 하며 그 의미를 아주 높게 평가하였다.





갑오군공록 甲午軍空麓

동학혁명군 토벌 과정에 공을 세웠던 자들의 이름 및 군공이 기록된 자료이다. 수록된 사람들을 보면

순무사 신정희, 중군 허진, 군부협판 권재형, 호남초토사 민종렬, 호서초토사 이승우, 충청감사 박제순, 전라감사 이도재,

지주병사 이장희 등 400여 명이다. 직책, 성명, 품계, 군공의 순으로 적혀 있어

동학혁명 당시 반 동학군에서 활동한 자들의 성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갑오실기 甲午實記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 3월부터 12월까지의 동학혁명의 전개과정, 청일전생, 갑오개혁에 관한 기록을

날짜별로 기록한 것이다. 특히 동학군의 활동상황과 진압대책에 관한 각 감영 및 순무영의 보고서 등을 수록하고 있다.






1895년 1월 19일 오사카 조일신문

이토 병참관이 자국의 가와카미 병참총감 앞으로 보낸 전보가 실린 신문으로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움직임ㅇ르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전보 내용을 살펴보면 "미나미 고시로 소좌로 부터 다음의 보고가 있었다. 각 분진대가 적을 서남쪽으로 추격 중 장흥 강진 해남의

잔적(殘賊) 토멸에 착수하여 김개남 전봉준 손사문 등의 거괴는 전부 포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학당 정토 인록 東學黨 征討 人錄

동학군의 진압 및 토벌 과정에 공을 순 사람들의 명단이다. 주책(4명), 장령(25명), 주모(17명), 공략(309명),

의려(347명), 정탐(64명) 등 6분야에 모두 766명의 이름이 수록 되어 있는데, 사람마다 이름과 직위,

그리고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지 등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1858년 천왕 홍수전이 답천예 설지원게게 유시한 조서



1860년 11월 천왕 홍수전이 소복성 및 소속 군현의 사민에게 유시하는 조서





1855년 4월 23일 흠차대신 전구성량 유 아무개가 양호에게

국세를 조속히 완납할 것을 효유하는 포고문




1862년 1월 7일 충왕 이수성이 소강 인민과 청나라 병졸 및 외국인에게 알리는 순유


1894년 9월 16일 기명제독 정정진 총병 서방도가 호부상서 옹동화에게 아뢰는 글









참고서적 :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특별도록》




Ponte Dei Sospiri - Rondo Veneziano